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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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마드모아젤> 잡지를 펴들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특집 기사에는 웨일스 시인 딜런 토머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읽으며 '이런 걸 하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1954년 겨울,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임스 설터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역했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행동이었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p.27


이 말은 결국 이 책으로 체현되었다.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아내는 그가 "쌓아두면 안 돼."라고 했던 충고의 반증을 찾아내고야 만다. "상자가 자꾸 나왔다." 제임스 설터가 쟁여두었던 글들은 글쓰기로 보존된 그의 삶의 잔재들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가 어떻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스위스 제네바의 박물관 같은 호텔에서 14년을 지낸 나보코프의 공간은 어떻게 넘쳐나는 꿈으로 채워졌는지, 호색한 단눈치오가 어떻게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를 유혹하고 조국을 전쟁으로 끌여들였는지가 그의 피뢰침 같은 언어로 묘사된다. 문학, 그의 친구들, 1920년대 프랑스에 대한 동경, 암벽 등반, 스키 도시, 아이의 탄생 등 언뜻 보면 삶의 파편 같은 삽화들이 그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리면 생생한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읽는 이를 한없이 말려들게 한다. 


사람들에 대해 쓴다는 건 그들을 철두철미하게 파괴하고 이용해먹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험에 대해서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 세계를 묘사하는 동안 그 세계는 절멸되고 수많은 기억이 폐허로 돌아간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포획된 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가 다시는 반짝이거나 빛을 되돌려 받지 못한다. 

-p.322


그래서 그럴까? 그가 이야기하는 유명 산악인들의 삶과 작가, 영화인, 휴양 도시 아스펜, 파리의 '진짜' 레스토랑 '라 쿠폴'은 마치 눈 앞에서 빛나는 듯 찬란하다. 그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의 묘사의 촘촘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모든 화석화된 기억들이 제임스 설터를 뚫고 지나가면 잃어버린 숨결을 부여받는다. "글쓰기란 감옥"에 그가 유폐된 것은 남은 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를 읽는 일은 내가 떠나온 잃어버린 미처 살지 못한 그 세계에 잠시 불시착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이라던 보몽과 플레처가 쓴 시구를 마음으로 암송하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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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hyun 2020-02-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셜터의 ‘사냥꾼들‘도 좋았답니다.

blanca 2020-02-20 16:06   좋아요 0 | URL
오, 안 그래도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Jeanne_Hebuterne 2020-02-23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의 단어들, 아스펜, 파리, 라 쿠폴, 이런 대목을 읽으니 이 작가가 정말 궁금해져요. 작년 즈음 제임스 설터가 마치 유행가처럼 판매고가 오르는 것을 보고 약간 경계하고 있었거든요!

blanca 2020-02-23 20:25   좋아요 0 | URL
저는 설터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에세이집의 문장들을 읽으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아주 짧은 글 하나도 마치 영상 이미지처럼 직조하는 데에 진짜 일가견이 있는 작가더라고요.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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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스트레스가 많거나 우울한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십오 년 동안이나 종이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한 서사의 진폭을 보이지 않더라도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길다. 언뜻 단조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작가 미우리 시온의 발견이 기대밖의 수확이다.


겐부쇼부 사전 편집부에서 퇴직을 앞둔 아라키는 새로운 사전을 만들려는 기획의 일환으로 영업부에서 엉뚱하고 외골수인 마지메를 스카우트해 오면서 '대도해 사전'을 출항시킨다. <대도해>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배를 엮다>는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언뜻 허술하고 요령부득으로 보이던 마지메는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우직하게 <대도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사전 편집자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출판사 측면에서도 크게 명성이나 이윤을 안겨다 줄 것 같지 않은 일에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지금의 세태와 대비되어 오히려 더 형형하게 빛난다. 소용이 닿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순간에 전념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바쁘게 달려가느라 끝내 놓치고 마는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멈추어 고민해 볼 시간을 준다. 작가 미우라 시온의 문장은 정갈하고 쉽고 느린 듯하면서도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삶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래서 어느덧 십오 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대도해>가 완성되었을 때 수많은 문장들이 엮어낸 그들의 노정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말의 배는 아쉽게도 죽음 앞에서 사전의 완성을 끝내 보지는 못했지만 죽음 직전까지 사전의 완성을 향해 자신의 여생을 바쳤던 고문 마쓰모토 선생의 영정 앞에 가 닿았다. 그 항해는 비록 종이 사전의 죽음을 품고 있는 것일지라도 언어의 기본, 그 핵을 향해 가닿으려는 장인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사유하는 한 그 말의 정의를 채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아진 이들의 열정과 정성은 깊은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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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2-1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러고 보니 영화 제가 언급한 영화 <행복한 사전>의 원작인가 보네요.
이책 보긴했는데 원작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영화 혹시 안 보셨으면 함 보세요. 영화 되게 볼만해요.^^

blanca 2020-02-17 10:54   좋아요 1 | URL
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영화 보려다가 말았는데... 원작이라는 강한 심증이^^ 네, 꼭 찾아볼게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졸업식 행사가 다 취소되었다. 대학생들 입학식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까지 취소된 마당에 이 정도는 불만거리도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Contagion, 2011)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십 대 딸은 신종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거의 집에서만 갇혀 지낸다.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기회도 남자 친구와 만날 시간도 신종 전염병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만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집에서 졸업식 파티를 열어 준다. 아이들도 이 시간 동안 많은 기회를 추억을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으로 충족되어도 내가 어린 시절 열린 공간에서 겪은 많은 체험과 그로 인해 남은 추억의 공간을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들은 이따금씩 미소짓게 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니. 그런데 한편 이 제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 마르셀의 동생은 말기암도 아니었고 희귀병에 걸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이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까지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루였다.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 마치 이 순간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듯,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써버렸다. 시간은 나쁜 놈이다. 또 다른 하루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동생 마르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여러번의 금주 및 재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했다. 가족들도 지쳤다. 이미 합법적으로 안락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의 죽음의 욕망을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삶을 스스로 도움을 받아 끝내고 싶어하는 동생의 소망을 가족들은 끝내 이해하고 그 날들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책은 마르크의 형인 마르셀이 그러한 동생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풀어낸 이야기다. 


마르크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애썼어도 질병을 극복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르크를 꼭 끌어안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크에게는 우울증 등 중복된 정신장애가 있었다.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일상 생활을 파괴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러 번 시도했던 치료는 모두 불발로 끝났다. 노부모와 형의 일상생활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제 그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합법적인 장치가 그의 이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기는데 일조를 담당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어렵고 민감한 이야기라 한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와 고통의 시간을 차마 짐작하고 단언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러한 그의 선택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지 섣불리 단정하고 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삶의 매 순간은 축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분일초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죽음에 앞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인생은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하기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이야기다.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은 쉬운 얘기지만 어렵다. 2002년부터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안락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법적인 종결을 인간이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 그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다. 심리 상담가, 의사, 화장터 직원 등이 개입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그 일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살면 살수록 어렵다. 삶을 넘어서는 고통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당면하기 싫은 문제들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부모님이 했던 고민을 이윽고 내가 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서사 또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이야기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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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중독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은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떤 이는 숨쉬기조차 되지 않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저는 가장 큰 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만 끝내고 싶은데 죽을 자유조차 없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요.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2-13 11:11   좋아요 0 | URL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 육체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짐작이 가요. 행복하게 무병 장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나이듦, 죽음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 두려워져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축복과 즐거움 뒤에 있는 어두움, 고통의 측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참 어렵습니다.
 
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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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루마니아의 한 소년이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가 오 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향하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 이야기가 아닌, 온 가족이 야밤에 나치군에게 끌려가는 이야기가 아닌, 루마니아의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두고 소년 홀로 끌려가 그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죽거나 다치거나 절망하거나 때로 해방되는 그 쉬운 결말 대신 귀향해서도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아닌 왠지 모르는 서먹함, 부적응을 여생 동안 걸머지고 다녀야 하는 소년의 마음을 택한 것은 기민한 핍진성이다.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그곳에서의 시간이라면 치를 떠는 증언들을 충분히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의 삶에 주목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초점이 거기로 옮겨가는 순간 이야기의 절실함에서 얻는 주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까, 포로 수용수에서 돌아온 많은 이들이 이후의 삶에 대하여 떠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해방 이후의 그 자유가 주었을 당혹감 대신 살아남은 자의 그 처절한 사투와 의지에 주목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그러한 기대 의식을 배반한다. 아주 다른 이야기다. 색다르고 아름답고 처절하고 반역적인 이야기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삶의 속살에 가닿는 그 직접성은 직접적 체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고백 같았다. 


소년은 현재에도 있고 육십 년 이후에도 있다. 회고의 시점과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무의미한 반복적인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어 같은  단어들로 자신의 체험을 철저하게 재구조화하는 소년의 현재는 끊임없이 중첩된다. 그 정도로 수용소에서의 기아는 끈질겼음을 짐작케 한다. 소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아 상태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중노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할머니,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p.81

그가 수용소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사물과 형상을 찾는다. 기아는 '배고픈 천사'가 된다. 그것은 실질적인 대상이다. 여러 장에 걸쳐 여러 에피소드에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 느끼는 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배고픔에 대한 감정은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고픈 천사'는 수용소에서의 소년의 머리까지 기어오르고 소년이 하는 도적질, 존엄성의 포기, 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 등 모든 행동과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정서이자 시발점이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하는 것일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p.265


수용소 이후의 삶에서 소년이 그가 집을 떠나 없는 동안 마치 그를 대체하듯 동생을 낳아버린 가족에 대하여 느끼는 서운함과 거리는 심지어 소년이 수용소에서의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박탈, 곤궁, 단순 노동에 대한 이끌림으로까지 나아간다. 러시아인이 아니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며 포로들을 괴롭혔던 수용소 지도부원 투어 프리쿨리치는 소년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말이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속성을 규정한다. 삶에 대한 무게의 중심추가 된다. 이 아이러니는 소년이 돌아오고 나서도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만큼은 해방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p.307

억압자는 피억압자의 그 억압적 체험이 삶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폭력적으로 암시한다. "나 거기 있었다"가 보물이 되는 순간 그의 삶은 평생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없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실제 소년 레오의 모델이자 목소리가 있었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함께 쓰자는 약속을 못 지키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헤르타 뮐러는 그와 함께 한 약속을 홀로 지킨다. 그가 얘기했던 '실존의 절대영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그래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마력을 가진다. 그녀의 어휘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이고 중의적이다. 오스카의 '숨그네'가 그녀를 통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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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위험 가득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최신 개정증보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김현구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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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직원의 권유로 가입한 상품은 공격형 투자에 적합한 파생투자상품 위탁 판매를 통한 것이었다. 소액이라면 소액이라지만 최근 독일 국채 관련 파생 상품이 급격한 원금 손실을 보면서 은퇴자금 전부를 그 관련 상품에 넣은 노년층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으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 손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찬찬히 상품 설명서를 들여다 보면 원금 손실이 나기 쉬운 설계였다. 다섯 장도 넘는 상품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전문가의 설명에 건성으로 응수하며 힘들게 번 돈을 공격적인 투자 상품에 넣은 것이다. 헛똑똑이는 '블랙 스완'에 먹혔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는 결단코 그 상품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월가의 파생상품 투자 전문가로 일한 경력이 있다. 1987년 '블랙 먼데이'는 그가 '블랙 스완'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비예측성을 얘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백조라면 응당 흰색일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까만 백조는 이 세계에 대한 이론의 틀, 플라톤적 관념 체계 자체를 전복시키는 혁명이었다. 나심은 이 '예측 불가능성'과 '우리가 모르는 것'에 집중한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


나심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럴듯한 스토리에 쉽게 현혹된다. 낱개의 사실들은 연결 고리로 뭉클한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 행간에는 거짓과 과장, 온갖 곡해가 개입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럼에도 환원주의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우리는 모두 두서없는 날것의 진실보다 매끈한 거짓 이야기를 더 믿으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적 세계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된다.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p,233

상당히 도발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선정적인 뒷이야기, 감동적인 스토리로 왜곡된 진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봐 온 점을 감안한다면 나심의 도발은 타당하다. 건조한 진실의 입에 기꺼이 손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화, 지구화에 대한 우려


세계화가 취약성이 서로 얽혀 오히려 파괴적인 검은 백조를 양산한다는 나심의 의견은 예리하다. 금융 전문가 및 경제학자 등을 대놓고 저격하고 그들의 통계 수치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킨 이 책은  수많은 논쟁에 불을 지피고 적을 양산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뒤이어 일어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하나의 예언서로 격상되는 이변을 맞는다. 그는 이미 금융기관들이 합병되어 비대화되고 현실과 맞지 않는 확률에 기댄 예측치로 복합 상품을 설계하여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엄청난 파국을 맞을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작금의 현실을 예감한 듯 나라 간 이동이 용이해지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될 위험이 크다는 우려도 있다. 이 세계의 복잡성은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 예측 자체가 무의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바논인인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낙관적 희망을 가졌던 것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목도하게 되며 회의주의적 경험론자로 거듭난다.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는 낙관에서도 비관에서도 여지없이 노출된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비정형성, 비선형성을 이제는 감내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래서 그렇다면 어떻게


나심은 자신의 책이 경제서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실제 확률에 관련된 장은 일반 독자들은 건너 뛰어도 좋다고 덧붙인다. 몽테뉴와 세네카에 대한 경의는 시종일관 그의 아름다운 문장과 만난다. 이 책은 그의 주장처럼 경제서가 아닌 것도 아아니고 그가 어쩌면 기대했을 철학서라고 보기에도 그 모든 요소를 건너지르고 아우르는 방대함이 있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이 흔히 주목했던 전문가 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뒤에 그는 쉽게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은 세네카에 대한 얘기다. 철학자 세네카의 서한집에 나오는 아이들과 부인을 잃은 스틸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스틸보의 대답은 '니힐 페르디티, 옴니아 메아 메쿰 숨트' 였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나의 재산은 모두 내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회의주의는 삶 자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진지한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하고 누군가 지나치게 그럴 듯한 논리를 펼 때 의심의 촉수를 뻗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졌다고 자만할 때 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그럼에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인사는 세네카의 'vale'라는 인사로 갈음했다. '강인하기를'  우리 모두가 극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거대한 검은 백조라는 그의 시어 같은 이야기에 맞춤한 작별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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