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에게 인간이란 그저 탈것, 통로에 불과할 뿐이에요. 말이 지쳐 쓰러지면 바꿔 타듯이, 세대에서 세대로 우리를 타고 계속 가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유전자는 그저 무엇이 자기에게 효율적이냐만 생각할 뿐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의사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저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의 도입부에 인용된 하루키는 그가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문제를 유전자와 유전체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이 경이로운 책의 서막을 울린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을 가로질러 세대로 전해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그것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얼음을 가르는 충격을 주는 경험이다. 무케르지는 후기에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의 미래에 유치권을 행사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시는 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다시피 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방대한 역사는 다시 그것의 제대로 된 모습을 고찰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실이 이 책이다. 그가 얘기했듯이 이 책은 오히려 암 이야기의 전편에 놓였어야 마땅하다. 


















방대한 생물학, 유전학의 역사는 1865년 브르노의 온화하고 성실했던 수도사 멘델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생전에 거의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완두 잡종 실험을 기반으로 한 논문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유전체 계획까지의 여정 자체를 가능케 한 업적이다. 그가 사랑한 완두 교배 실험은 원래 독립적인 유전 단위를 발견하려는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지독한 성실성이 빚어낸 우연이 장대한 유전학의 역사의 견인 역할을 한 것이다. 무케르지는 다윈과 멘델에게서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구현되었다고 봤다. 둘다 성직자이자 정원사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각 거시적이자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 질문을 탐구했다. 멘델의 논문은 사후에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유전학의 역사의 토대로 깨어나게 되고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명성을 은근히 질시했던 사촌 골턴에 의해 비틀어진 형태의 우생학으로 스며든다. 


무케르지는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이자 서술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힘의 헤게모니에서 물러난 유전학의 역사의 기여자들을 사려깊게 불러와 그들의 잊혀진 이름을 명명한다. 왓슨과 크릭의 DNA의 이중나선 발견으로 인한 노벨상 수상의 뒤안길에는 그들에게 영감과 발견의 도화선을 제공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그녀의 성과에 맞는 적절한 대우도 기여도에 맞는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남성들이 쓰는 유전자의 역사에 프랭클린의 자리는 없었다. 이것은 왓슨과 크릭이 후에 보여준 행보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머가 넘쳤던 천재 과학자 둘은 신우생학을 지지하고 심지어 노년에는 인종편견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아 인생의 전반기에 달성한 업적과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유전자에서 유전체 계획으로까지의 발견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의 방편이자 결과인 돌연변이에 대한 시선과 유전자를 복제하고 변형하는 그 가능의 영역에서의 '자기강화'의 허약하고 위험한 지점의 개입의 문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결국 우리는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나치가 행사했던 그 끔찍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폭력의 역사와 오버랩되는 기시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더 우수하고 더 건강하고 완벽한 세대를 꿈꾸며 그렇지 않거나 부족한 유전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처단하는 기로에 유전학의 역사는 당도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등판한다. 그 자신의 내밀한 역사의 솔직한 고백을 덧붙이며 무케르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그의 가계를 가로지르는 정신질환의 역사다. 삼촌들과 사촌은 조현병을 비롯한 각종의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유전자의 힘을 감안한다면 그 자신도 그러한 유전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딜레마가 어쩌면 이 장대한 유전자의 서사시를 추동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돌연변이의 가운데에 자아를 놓는다. 모든 것을 매끈하게 획일화하려는 욕망은 우리 자신을 죽인다. 


역사를 추진하는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 유전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런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을 지닌 유전체를 선택해왔다. 이 자족적인 논리 회로는 우리 종의 가장 장엄하고 상징적인 자질 중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가장 괘씸한 특징 중의 일부도 빚어낸다. 이 논리의 궤도를 탈출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요구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순환적임을 인식하고, 지나칠 때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강자의 의지로부터 약자를, "정상인"의 박멸 행위로부터 "돌연변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와 나와 나의 삶을 흔들어 대는 외부의 힘에 지쳤다면 유전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권한다. 그 불가사의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완고하게 감추고 있는 왕국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우리와 우리가 죽고도 이어질 그 유전자들의 역사는 인간이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근원적인 힘에 대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태어나 살고 죽는 과정이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무의미함이 아니라 어떤 아름답고 복합적인 메시지의 일환으로서 자리매김한다는 앎은 함부로 폄하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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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이 마비됐다. 아이들의 입학식, 졸업식은 나란히 취소되었다. 어쩌면 시기에 맞게 해야 할 통과의례까지, 사람들 간의 만남조차도 이젠 사치처럼 되어버렸다. 라디오 뉴스를 듣다 코로나로 죽은 마흔 살 직장인의 얘기에 마음이 시렸다. 죽기 전날까지 야근해야 했던 사람, 홀로 맞아야 했던 죽음에 나까지 덩달아 서러워졌다. 대남병원 폐쇄병동 안 침대도 아닌 매트에 촘촘히 무기력하게 수십 년 동안 누워 있는 정신질환 환자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러한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더 가혹하게 공격한다. 차마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다. 


















책의 색감, 만듦새가 너무 예뻐 한참 어루만지게 되는 책. 하필 그 안의 '너머'라는 단편을 제일 먼저 읽게 된 것이 다행이다. 병가를 낸 교사를 대신해 기간제 계약직 교사로 부임하게 된 N의 이야기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다층적인 시선과 차별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과 N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요양병원은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차별과 또 그들이 제2의 가해자가 되는 구조적 모순과 생존을 둘러싼 인간의 이기심을 핍진성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조리종사원들, 수시로 바뀌는 요양병원의 간병인들이 때로 더 취약한 처지의 타인에게 저도 모르게 행사하게 되는 또다른 종류의 수동적 폭력에 대한 묘사는 그것에 어떤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처한 취약한 입지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N의 딜레마를 생생하게 형상화해내 읽는 이들 모두가 그 무기력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을 가지게 할 정도다. 생존을 딛고 쉽게 과감해질 수도 용감해질 수도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그 패배감의 잔영이 짙다. 무기력하게 말라가고 간병인에게 무언의 학대와 방임을 당하게 되는 N의 어머니는 N의 절망적 미래와 겹쳐진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고 결국 무기력해져 죽는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명제가 눈 앞 풍경으로 펼쳐질 때 우리는 담담해질 수 없다. 


N은 툭 뱉어내듯, 순식간이야, 하고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튀어나온 말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다만 그 말이 마음에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모든 게 순식간이야, 순식간에 끝난다고, 순식간에, 하고 N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가슴 한쪽에선 잔혹한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선 두려운 마음이 돌처럼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끝나......



그녀의 절망이 허구가 아니라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는 진짜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에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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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7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28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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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마드모아젤> 잡지를 펴들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특집 기사에는 웨일스 시인 딜런 토머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읽으며 '이런 걸 하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1954년 겨울,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임스 설터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역했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행동이었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p.27


이 말은 결국 이 책으로 체현되었다.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아내는 그가 "쌓아두면 안 돼."라고 했던 충고의 반증을 찾아내고야 만다. "상자가 자꾸 나왔다." 제임스 설터가 쟁여두었던 글들은 글쓰기로 보존된 그의 삶의 잔재들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가 어떻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스위스 제네바의 박물관 같은 호텔에서 14년을 지낸 나보코프의 공간은 어떻게 넘쳐나는 꿈으로 채워졌는지, 호색한 단눈치오가 어떻게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를 유혹하고 조국을 전쟁으로 끌여들였는지가 그의 피뢰침 같은 언어로 묘사된다. 문학, 그의 친구들, 1920년대 프랑스에 대한 동경, 암벽 등반, 스키 도시, 아이의 탄생 등 언뜻 보면 삶의 파편 같은 삽화들이 그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리면 생생한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읽는 이를 한없이 말려들게 한다. 


사람들에 대해 쓴다는 건 그들을 철두철미하게 파괴하고 이용해먹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험에 대해서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 세계를 묘사하는 동안 그 세계는 절멸되고 수많은 기억이 폐허로 돌아간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포획된 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가 다시는 반짝이거나 빛을 되돌려 받지 못한다. 

-p.322


그래서 그럴까? 그가 이야기하는 유명 산악인들의 삶과 작가, 영화인, 휴양 도시 아스펜, 파리의 '진짜' 레스토랑 '라 쿠폴'은 마치 눈 앞에서 빛나는 듯 찬란하다. 그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의 묘사의 촘촘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모든 화석화된 기억들이 제임스 설터를 뚫고 지나가면 잃어버린 숨결을 부여받는다. "글쓰기란 감옥"에 그가 유폐된 것은 남은 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를 읽는 일은 내가 떠나온 잃어버린 미처 살지 못한 그 세계에 잠시 불시착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이라던 보몽과 플레처가 쓴 시구를 마음으로 암송하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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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hyun 2020-02-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셜터의 ‘사냥꾼들‘도 좋았답니다.

blanca 2020-02-20 16:06   좋아요 0 | URL
오, 안 그래도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Jeanne_Hebuterne 2020-02-23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의 단어들, 아스펜, 파리, 라 쿠폴, 이런 대목을 읽으니 이 작가가 정말 궁금해져요. 작년 즈음 제임스 설터가 마치 유행가처럼 판매고가 오르는 것을 보고 약간 경계하고 있었거든요!

blanca 2020-02-23 20:25   좋아요 0 | URL
저는 설터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에세이집의 문장들을 읽으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아주 짧은 글 하나도 마치 영상 이미지처럼 직조하는 데에 진짜 일가견이 있는 작가더라고요.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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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스트레스가 많거나 우울한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십오 년 동안이나 종이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한 서사의 진폭을 보이지 않더라도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길다. 언뜻 단조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작가 미우리 시온의 발견이 기대밖의 수확이다.


겐부쇼부 사전 편집부에서 퇴직을 앞둔 아라키는 새로운 사전을 만들려는 기획의 일환으로 영업부에서 엉뚱하고 외골수인 마지메를 스카우트해 오면서 '대도해 사전'을 출항시킨다. <대도해>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배를 엮다>는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언뜻 허술하고 요령부득으로 보이던 마지메는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우직하게 <대도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사전 편집자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출판사 측면에서도 크게 명성이나 이윤을 안겨다 줄 것 같지 않은 일에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지금의 세태와 대비되어 오히려 더 형형하게 빛난다. 소용이 닿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순간에 전념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바쁘게 달려가느라 끝내 놓치고 마는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멈추어 고민해 볼 시간을 준다. 작가 미우라 시온의 문장은 정갈하고 쉽고 느린 듯하면서도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삶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래서 어느덧 십오 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대도해>가 완성되었을 때 수많은 문장들이 엮어낸 그들의 노정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말의 배는 아쉽게도 죽음 앞에서 사전의 완성을 끝내 보지는 못했지만 죽음 직전까지 사전의 완성을 향해 자신의 여생을 바쳤던 고문 마쓰모토 선생의 영정 앞에 가 닿았다. 그 항해는 비록 종이 사전의 죽음을 품고 있는 것일지라도 언어의 기본, 그 핵을 향해 가닿으려는 장인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사유하는 한 그 말의 정의를 채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아진 이들의 열정과 정성은 깊은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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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2-1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러고 보니 영화 제가 언급한 영화 <행복한 사전>의 원작인가 보네요.
이책 보긴했는데 원작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영화 혹시 안 보셨으면 함 보세요. 영화 되게 볼만해요.^^

blanca 2020-02-17 10:54   좋아요 1 | URL
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영화 보려다가 말았는데... 원작이라는 강한 심증이^^ 네, 꼭 찾아볼게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졸업식 행사가 다 취소되었다. 대학생들 입학식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까지 취소된 마당에 이 정도는 불만거리도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Contagion, 2011)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십 대 딸은 신종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거의 집에서만 갇혀 지낸다.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기회도 남자 친구와 만날 시간도 신종 전염병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만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집에서 졸업식 파티를 열어 준다. 아이들도 이 시간 동안 많은 기회를 추억을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으로 충족되어도 내가 어린 시절 열린 공간에서 겪은 많은 체험과 그로 인해 남은 추억의 공간을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들은 이따금씩 미소짓게 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니. 그런데 한편 이 제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 마르셀의 동생은 말기암도 아니었고 희귀병에 걸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이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까지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루였다.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 마치 이 순간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듯,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써버렸다. 시간은 나쁜 놈이다. 또 다른 하루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동생 마르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여러번의 금주 및 재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했다. 가족들도 지쳤다. 이미 합법적으로 안락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의 죽음의 욕망을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삶을 스스로 도움을 받아 끝내고 싶어하는 동생의 소망을 가족들은 끝내 이해하고 그 날들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책은 마르크의 형인 마르셀이 그러한 동생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풀어낸 이야기다. 


마르크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애썼어도 질병을 극복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르크를 꼭 끌어안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크에게는 우울증 등 중복된 정신장애가 있었다.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일상 생활을 파괴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러 번 시도했던 치료는 모두 불발로 끝났다. 노부모와 형의 일상생활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제 그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합법적인 장치가 그의 이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기는데 일조를 담당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어렵고 민감한 이야기라 한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와 고통의 시간을 차마 짐작하고 단언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러한 그의 선택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지 섣불리 단정하고 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삶의 매 순간은 축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분일초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죽음에 앞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인생은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하기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이야기다.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은 쉬운 얘기지만 어렵다. 2002년부터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안락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법적인 종결을 인간이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 그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다. 심리 상담가, 의사, 화장터 직원 등이 개입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그 일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살면 살수록 어렵다. 삶을 넘어서는 고통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당면하기 싫은 문제들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부모님이 했던 고민을 이윽고 내가 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서사 또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이야기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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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중독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은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떤 이는 숨쉬기조차 되지 않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저는 가장 큰 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만 끝내고 싶은데 죽을 자유조차 없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요.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2-13 11:11   좋아요 0 | URL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 육체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짐작이 가요. 행복하게 무병 장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나이듦, 죽음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 두려워져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축복과 즐거움 뒤에 있는 어두움, 고통의 측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참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