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공인인증서 갱신을 제대로 못 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때 작은 충격을 느꼈다. 점점 부모의 그늘에서 나는 밀려나고 오히려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크고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던 부모님과의 시간은 가끔 정말이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내가 아이였을 때"가 진짜 있었을까? 끊임없이 다시 고쳐쓰는 기억들. 그 일은 정말로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고 만들어 나가는 나의 삶의 총체적 서사의 기반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들의 집은 어느 허술한 곳을 툭 치면 그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나는 모두 자신의 과거 추억들을 회상하고 그 이야기들을 현재에 통합하며 살아 나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지어 과거를 거의 회상하지 않고 미래에도 기대지 않으며 오직 '지금'만을 응시하는 삶도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서사를 숙고하지 않고도 가치있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심화할 수 있다. 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비서사적인 프로젝트다.

-갈렌 스트로슨 <불면의 이유>
















철학자 저자인 스트로슨은 '자유의지'와 '삶의 서사성'을 부정한다. 신의 이야기나 우주의 섭리까지 접근하여 결정론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커다란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차원에서의 내려다보는 인간 개개의 삶의 파편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도 많았지만 그가 인용하는 카뮈, 아이리스 머독은 그가 부정하는 삶의 서사성보다 왠지 더 문학적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느끼는 괴로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읽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고 어떤 빈약한 인과관계를 찾아 헤매려는 그 무용한 시도를 그칠 수 있었다고 할까. 죽음도 인간의 기억도 자유의지도 자아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집착해야 할 실체를 지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

















정희진의 책은 처음이다. 게다가 <정희진의 글쓰기2>로 순서도 지키지 못했다. 여성학 연구자의 읽기는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여러 현상들을 멈추어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시간을 주었다. 여성주의 독법은 부가적인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차가 어떤 위계의 시선과 영원히 결별하지 않는한 근본적인 인식의 여과체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놀라운 것이었다. 호흡이 짧은 글들임에도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치열한 글쓰기는 필력이 아니라 사유에서 나온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보여준 책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알기 위해 쓴 글들은 때로 읽는 자들의 지축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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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 문지클래식 2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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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소설 읽기는 완벽한 안전 거리 너머 그 세계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였다면, 성인 이후의 읽기는 그 세계에 잡념 없이 몰입하는 건 쉽지 않지만 오히려 인물들에 너무 이입이 되어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게 고통스럽거나 힘든 삶을 사는 주인공들의 삶이 소설적이라기보다 이제 인생사 자체가 누구에게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깨달음의 연속이다 보니 주인공이 아프면 그 진통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 힘들다.


<마당 깊은 집>을 읽는 내내 1954년 열네 살의 소년 길남이의 간난스런 하루하루가 너무 생생해서 담담해지기 힘들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장자라는 이유로 일찍이 돈벌이로 신문배달일에 나서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리를 헤매어 다니는 모습이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 그 시대를 통과한 많은 소년소녀들의 삶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실제 대구시 장관동의 '마당 깊은 집'에 사글세를 살았던 작가 김원일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이야기다. 이념의 골을 둘러싼 엄혹한 시대의 잔재들과 휴전 이후가족과 생이별하고 정든 옛집을 떠나야 했던 많은 이웃들의 삶이 오롯이 '마당 깊은 집'을 채우고 있다. 하루하루 생존 자체가 투쟁이어야 했던 그 처절한 풍경은 소년이 그 나이에 맞는 성장의 단계를 겪는 대신 어른들의 절망, 학습된 무력감을 이미 습득해버리고 마는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삯바느질로 네남매를 홀로 건사해야 했던 길남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자못 냉담하고 때로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소년이 어머니에 대하여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실제 작가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아는 어머니는 소년이 강인해지고 자립심을 키우기를 독려한다. 장난을 치거나 응석을 부리거나 포기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소년의 성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대한 압력으로 뒤틀린다. 잃어버린 부성의 자리는 뒤틀리고 짓이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소년은 결국 어머니가 그렇게도 소원했던 어엿한 독립적인 하나의 어른이 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아기자기한 사람 사는 재미는 사방에 마치 그 이웃들이 생동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낼 정도다. 남의 집 일에 주제넘게 나서기 좋아하는 경기댁,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주인집 아들, 넉살 좋게 집안 일 거들며 인심을 얻는 일꾼, 어린 나이에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려야 함에도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친구 한주. 모두 허룩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이다. 삼십 년 뒤에 그 시절을 회고하는 화자는 이들이 자신에게 주었던 사라지지 않을 흔적들을 찬란하게 복기한다. 어머니가 툭하면 '더러운 세월'이라 폄하했던 시간들이 더럽게만 추억되지 않는 이유다. 다 같이 배고팠지만 그래서 때로 서로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주고받았던 세월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던 시간들. 은결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와 연결된다는 것에 묘한 먹먹함이 밀려온다.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시간들, 주인집의 화려한 파티를 엿보며 패배감으로 울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소년은 성장하고 어머니는 늙고 화로처럼 껴안고 자곤 했던 어리숙한 동생은 약 한번 못 먹어보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섯 딸과 막내 아들을 낳고 삼 년이 채 되지 않아 홀로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대구의 할머니가 생각나서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던 이야기의 뒤끝이 유난히 아픈 이야기. 얼마나 막막하고 두렵고 힘들었을까 차마 물어볼 수도 물어보지도 못했던 그래서 포원이 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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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의 사랑과 삼십 대, 사십 대의 사랑은 다르다. 이십 대는 상대를 흔히 자신이 만든 그림이나, 틀 안에서 상상하기가 쉽다. 저도 모르게 자꾸 상대의 행동과 감정을 예측하게 되고 그게 빗나갈 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만들어 낸 사랑과 상대는 이런 건데 그것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면 상대와 그러한 상대를 선택한 나를 동시에 비판했던 것 같다. 그러니 혼자 멜로드라마를 많이도 찍었다.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행동에 온갖 해석과 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해 과대 망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또 이러한 열정은 성장통과 맞물린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첫사랑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한다면 그게 과연 첫사랑다울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은 그녀의 여느 다른 작품들처럼 미스터리와 스릴러적 긴장을 갖춘 작품이다. 아직 이십 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상속자 '나'에게 어느 날 나타난 이미 고인이 된 사촌형의 피앙세 레이첼, 처음에는 그녀를 고아인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사촌형의 애정을 놓고 경쟁하는 연적으로, 다음에는 점차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으로 사랑하게 되는 '나'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 우리 모두가 통과해 온 그 어리숙하고 무모한 시간들. 내가 상상한 대로 내가 이끌리는 대로 상대를 멋대로 그려가며 애닯아하는 그 기억하면 아찔한 시간들을 대프니 듀 모리에 특유의 섬세하고 아릿한 언어들로 그려낸다. 그러니 독자들이 그 이십 대의 청년 필립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란 너무 쉬운 노릇이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레이첼의 모습은 매력적이지만 의아하고 상냥하지만 미심쩍다. 어떤 커다란 음모가, 은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역설적으로 레이첼을 더욱 레이첼답게 보이게 한다. 


달리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나로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p.425


레이첼이 필립의 사랑을 받아주었을 때의 이 말이 너무 절절하게 들어와 박혔다. 그리고 그 반전 앞에서의 필립의 행동은 너무나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진실이라고 여기는 조각들은 현실의 일부일 뿐이다. 필립이 상상했던 기대했던 그리고 예측했던 레이첼의 모습 또한 레이첼의 전부도 레이첼의 실재도 아니다. 필립이 사촌형의 미망인으로 대저택과 영지와 각종 유산들을 탐내었다고 여긴 그녀의 비도덕성도 필립 안에서 탄생한 것이지 레이첼 그 자체는 아니다. 


작가가 교수형이 집행된 장소에 선 사촌형과 나의 모습으로 첫장면을 연출한 것은 마지막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사촌형의 가르침은 "우린 누구나 결국엔 저 꼴이 된단다."였다. 사랑 이야기를 죽음에서 시작한 작가의 기민한 연출이 빛나는 대목이다. 오해와 억측과 열정이 빚어낸 참사라는 것도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나의 사촌 레이첼>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말을 가질 열린 구조다. 레이첼은 악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의 사랑은 실패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우리의 사랑을 다시 복기할 때 우리가 내릴 판단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진실이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사건에서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다시 돌아가도 사랑은 다시 다르게 쓰이고 새롭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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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7-03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전에 읽고, 최근에 다시 읽고 있어요. <레베카>를 아직 읽지 않은 상태라 제겐 이 책이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 중에 최고구요. 저도 수많은 장면에서 필립이었기에 레이첼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어느 순간 필립이 아닌 레이첼이 되어서는 필립의 무지를 비판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중생활을 하고 있어요.
블랑카님 리뷰 읽으니까 이 소설이 더 좋아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7-04 10:23   좋아요 0 | URL
헉, 단발머리님, <레베카> 아직 읽지 않으셨다니 부러워요. 저는 너무 좋아서 아직 안 읽은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였어요. 물론 이 책도 너무 좋았지만요, 레베카는 뭐랄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정점에 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가가 대단한게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 시점을 전혀 무리없이 소화해 낸다는 점이에요. 남성도 여성도 그 경계가 없이 넘나드는데 절로 다 이해되고 이입되고. 어떤 세계를 진짜 환상적으로 창조해내는 작가인 것 같아요.

 
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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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진창에 빠졌을 때, 고단한 버티기에 지쳤을 때, 인간과의 소통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마들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을 온갖 야생화와 동물과 곤충에게서 받을 위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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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일기
올레 토르스텐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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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목수가 의뢰받은 한 가족의 130년 된 다락을 개축하는 과정에 대한 투박하고 가감없는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왜 이리 뭉클한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이 시대에 사라져가는 육체를 동원한 고전적인 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자아내는 향수가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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