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대단히 논쟁적인 작가다. 생전에 천황의 복권과 자위대의 독립국 군대에 걸맞은 지위를 부여하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으며 이 명분을 외치며 공개적으로 할복 자살했다. 노벨 문학상에도 회자되었던 천재적인 작가의 입지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일본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촉발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이 작가에게 가지는 불편한 감정과 불온한 인상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평에는 언제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의견이 따라온다. 전쟁을 미화하고 그 전장에서 전사하는 젊은이들의 충절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것이라 불편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가지는 그 정묘한 세계의 깊이와 넓이는 경이롭다. 절로 감탄하게 되는 치열한 묘사들의 문장, 그 문장에 설복하지 않는 서사의 강력한 힘,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이야기의 힘과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저력이 놀랍다. 



















아름다우면서 깊이가 있으면서 편협하지 않으며  더불어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의지와 숙명의 대결, 정념과 이성의 대립, 역사와 개인의 긴장, 로맨스와 철학, 죽음과 삶의 의미, 이 모든 것이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되어 있는 이야기다. 메이지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된 1912년대를 배경으로  마쓰가에 후작가의 후계자 기요아키가 황실의 정혼자 사토코와 사랑에 빠지며 격랑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다. 당시의 최상류층의 습속을 엿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기요아키의 청춘이 지나는 자기 본위의 시선과 그것의 배경을 균형감 있게 비중을 조절하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감각적인 묘사의 문장들은 더없이 농염하고 농밀하다. 기요아키의 절친한 친구 혼다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친구와는 달리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친구가 뛰어드는 정사의 관찰자이자 조력자가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혼다는 주인공의 주변인이 아니라 주인공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할 정도로 시종일관 <봄눈>의 사고의 주류적 흐름을 담당한다. 특히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천착은 깊은 복선이 된다. 실제 미시마 유키오가 죽기 전 탈고하여 완결한 '풍요의 바다' 연작 중 <봄눈>은 1권에 해당한다. 죽음과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따르게 된다고 해서 기대가 크다. 


그는 바다의 조수와 기나긴 시간의 이행, 그리고 자신도 머지않아 늙으리라는 생각에 돌연 숨이 막혔다. 노년의 지혜 따위는 이제껏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직 젊을 때 죽을 수 있을까, 그것도 되도록 괴롭지 않게, 탁자 위해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둔 화려한 비단 기모노가 어느 틈에 어두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그처럼 우아한 죽음.

-미시마 유키오 <봄눈>


마치 미시마 유키오 본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투영된 듯한 문장이다. 그는 사십대에 자살했다. '우아한 죽음'이라는 대목에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지극한 탐미주의가 스며든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기요아키와 사토코의 사랑이 해피엔딩일 리가 없다. 그 처연한 결말의 증인으로서 혼다는 홀로 남는다. 혼다는 그 자신은 상처받지 않으며 친구 기요아키를 통해 청춘의 그 무모한 찰나적 열정의 간접 체험자가 된다. 살아남아 시대에 참여하는 그의 이후가 궁금하다. 유한한 인간이 찰나 같은 삶을 통해 억겁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마력에 절로 빨려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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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09-26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에 목격자가 된 혼다 라는 인물에 더 집중하면서 읽었네요.
작가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느낀 모든것을 다 담았다는 말 거짓이 아니라는건
해외에서 소세키 보다 더 대단한 작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이책이 말해주는것 같아요.
올해 안에 2부 출간 안될것 같죠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같이 한꺼번에 4부작을 출간해주지 ㅜ.ㅜ

blanca 2020-09-27 09:33   좋아요 1 | URL
스캇님 덕분에 동네 서점 갔다 냉큼 집어 구입하게 된 거예요. 정말 경이로운 작품이었어요. 그냥 한꺼번에 4권 주욱 출시하면 안 되나요? 저 같은 기억력으로는 흑 2권 나올 때쯤 1권 내용 기억 못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래요. 민음사 번역으로 읽고 있는데 뭐 이건, 기다리다 목 빠지겠어요. 관계자분 좀 읽어주시기를. 전권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유년기의 끝 -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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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은 단순히 제목에 이끌렸다. 상상력에 의거하여 작가가 세운 가상의 제국에 제대로 동화되지 않으면 SF는 몰입하기가 어렵다. <유년기의 끝>에는 묘한 이야기의 견인력과 흡인력이 있다. SF에 별로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쉽게 빠져들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유명세가 이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의 끝>은 '오버로드'라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내려와 인간들을 연구하고 지배하다 결국 개별성이 제거된 거대한 집단정신 에너지 군체가 되어 심우주로 뻗어나가는 인간들의 진화 작업을 마무리한 후 떠나는 이야기다. 결국 이것은 인류의 멸망이기도 하고 지구라는 행성의 절멸의 이야기이자 인간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는 스토리다.


오버로드 입장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서로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종족이다. 그들은 인간을 구원함과 동시에 자신들 또한 '오버마인드'의 지배를 받는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 모든 시도와 질문의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클라크는 거대하고 심오한 질문들만 남겨둔 채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한계는 보이지만 이 지구라는 행성과 지금이라는 시간의 차원을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망하는 식견을 제공해준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지평을 넓힌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집착하고 추구하고 경쟁하는 것들이 과연 우주적 차원에서 가지는 가치나 의미는 무엇일까. 위에서 내려다 본 인간사는 볼품없고 미시적인 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서 C. 클라크의 질문은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지점까지 천착해서 내려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여기와 저기, 모든 시공간의 경계는 어그러지고 그러고 나도 남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탐사가 가지는 심오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나 단순히 외계 생명체와 인간과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또 그 위에 '오버마인드'의 존재를 가정한 것 등은 이분법적인 식민지배관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을 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버로드'가 지구라는 행성에 돌아와 행했던 지배 행위가 가지는 의미도 모호하다. 두 개의 대전과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 등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모든 걸 은유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은 이 이야기를 지나치게 평면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계한 우주의 배경과 시공간에 대한 촘촘하고 아름다운 묘사는 수많은 우주 공상 영화와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토양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대단히 시각적이라 눈앞에 거대한 우주 정거장의 환시를 보여주는 차원의 것이다. 


"별들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이 메시지는 <유년기의 끝>의 핵심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 이야기에 흠뻑 몰입하는 우주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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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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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겪고 어떤 느낌을 가질 때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다. 혹시 나만 이런 느낌을 갖는 건 아닐까? 나는 비정상일까? 아웃사이더인가? 그러다 어느 순간 지극히 정상적이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잠시의 환각이 지나가는 시기가 있긴 하다. 사람들을 만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공감하고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역할을 무난히 수행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받고 그러면서 시간이 간다. 그러나 다시 이러한 고독과 고립의 순간은 반드시 돌아온다. 침잠과 우울의 시간이 온다. 해결되지 못했던 질문들 또한 다시 회귀한다. 그런 상태를 오고가며 삶이 간다.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는 탁월하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이 명확한 그녀의 언어로 제대로 기술된다. 내가 미처 표현 못했던 어두운 심연을 해체하고 너무 찰나로 지나가 차마 포착하기 힘들었던 단상들을 단정하게 채집하여 다시 돌려준다. 누구나 그녀의 글을 읽고 이 한때 엄청난 알콜 중독자였던 거식증이 있었던 명민한 작가의 얘기에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챕터를 만나게 된다.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p.48


수줍음을 잘 타고 상류증 가정에서 자라 높은 기대치를 받고 자란 우등생 소녀는 삼십 대의 반려견을 키우며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곱씹는 작가로 자라난다. 부모를 연달아 잃게 된 상실의 체험 또한 절절하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그 중독에서 헤어나온 자의 성찰은 용기 있고 심오하다. 어떤 종류의 중독이든 그것은 결국 고통을 정면으로 맞는 그 감각을 마비시켜 그것을 유예시킴으로써 결국 적절한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통찰은 놀랍다. 술이든 담배든 약물이든 결국 그것은 당면한 고통을 회피하는 몸짓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특히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챕터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들킨 듯 호소력이 있었다. 요 근래 나는 약해진 부모님을 느끼며 적잖은 걱정과 안타까움과 어떤 부담을 느끼며 남몰래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캐럴라인 냅은 바로 이 시기가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지점이라고 명쾌하게 진단한다.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p.119

그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당신은 겁난다"고 그녀는 겁을 준다. 맞다. "당신은 기분이 나빠진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라는 얘기는 왜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삶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들이민다. 우리는 반대의 신화를 믿으며 성장해서 그것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푸념한다. 왜 갈수록 더 힘들지? 그렇다면 갈수록 더 쉬워져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하는 얘기다. 왜 삶은 갈수록 더 쉬워져야 하는가? 어려워지는 것,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지도교수와의 일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농밀하다. 암암리에 권력을 통해 그녀에게 성추행을 저지르는 교수를 그 현장에서 거부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단죄했던 수많은 비슷한 상황에서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웅변한다. 바로 거부하고 왜 뛰어나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어떤 힘의 역학 구도 안에서 쉽게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거부하지 못하고 그 교수의 역겨운 행동들을 지나갔던 과거를 통해 이 미묘한 성폭력의 복잡다단한 대응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문제의 그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실체에 다가선다.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p.250


<명랑한 은둔자>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글들이 많지만 이것을 읽는다고 절대 우울해지지는 않을 책이다. 캐럴라인 냅에게는 어떤 결기, 용기, 진실성이 가지는 역동성이 절로 전염되는 마력이 글 전체에 포진하고 있으니까. 지금 아픈 사람도 특히나 중독에 빠져 자신 앞에 높인 고통을 차마 직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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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9-1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블랑까님의 별 다섯이라니_ 갈등하고 있었는데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다음주에 지르려구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르고 싶지만_ 인용구도 가슴 깊이 닿아요.

blanca 2020-09-17 13:41   좋아요 0 | URL
수연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이 작가는 <드링킹>이 최고라고 하던데 저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단명이슬퍼요.

잘잘라 2020-09-17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 서재만 오면 주문할 일이 생겨요. (주문하고 싶어서 재빨리 달려왔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주문 중독자로서 이 책은 반드시 꼭 강력하게! 빨리 주문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lanca 2020-09-17 13:41   좋아요 0 | URL
잘잘라님 ㅋㅋ 저는 여기서 선포합니다. 시월달 책 주문은 없다고. 이렇게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2020-09-17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17 17: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전에 드링킹 앞에 조금 읽고 포기했거든요. 저는 읽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캐럴라인 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으로 시작해야겠어요. 저 역시 부모님과 저 사이의 은혜로운 시기는 끝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부분이 제일 와닿네요, 블랑카님.

blanca 2020-09-17 18:0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솔직히 알코올 중독 내용이 주인 <드링킹> 읽을 자신은 없어요. 분량도 그렇고요. 두 권 사이에서 갈등하다 신간을 택한 거예요. 아, ‘부모님 은혜의 시기‘는 진짜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읽다 일어났다니까요. 요즘 드는 많은 생각들을 이미 냅이 다 먼저 겪고 훨씬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해놓았더라고요.

단발머리 2020-09-22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님 은혜의 시기‘ 너무 공감되네요. 저의 생각과 불안을 글로 만나기가 두려울 정도에요. 아까 오후에도 친구랑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그래도, 용기내서 함 읽어볼까요? @@

blanca 2020-09-23 08:54   좋아요 0 | URL
에세이라는 게 흔히 작가가 좀 비대화되는 경향이 있잖아요. 자기의 특수성을 표현하려다 보면 갇히는 한계인 것 같은데 이 작가는 아주 독특하게 자기를 표현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공감을 얻어내는 힘이 있어요. 이건 내 생각인데! 이런 순간이 너무 많았어요.
 

산문과 소설을 둘 다 잘 쓰는 경우는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츠바이크는 이러한 개인적인 믿음을 완전히 박살 낸 작가다. 그가 역사적 인물을 테마로 구축한 이야기들의 생생함은 물론 탄복할 정도였다. 심지어 마리 앙투네와트가 단두대에서 사라져 갈 때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니까. 대책없는 발자크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이런 무모한 인물들도 그의 문장으로는 설득력을 친밀감을 매력을 얻는다. 그런데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은 훨씬 후에야 읽게 되었다. 별 기대 없이. 솔직히 조금 지루할 거라는 예상과 함께.

















심리 소설이라는 평가와 함께 다소 나름의 장광설을 늘어놓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이 한 청년의 선의에서 출발한 나약한 연민의 파국의 이야기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작품성은 차치하고 재미만으로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문장이 휘몰아치는데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지역의 군사 주둔지다. 가난한 청년 호프밀러 소위가 지역의 유지의 딸 에디트를 만나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며 이야기는 펼쳐진다.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 대한 연민과 청년의 공명심과 무모함이 섞여 빚어내는 갈등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내면의 심리 묘사의 날카로움이 대단하다. 우리가 흔히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열외시키는 타인에 대한 사소한 연민, 나약함, 허영심에 대한 분석의 설득력에 저마다 자신의 어리석고 못난 허식을 들킨 기분이 들 정도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허점과 나약함을 드라마틱하고 우연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는 솜씨가 경이롭다. 나중에는 호프밀러 소위를 끊임없이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에디트가 너무 미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자신의 약점을 상대의 연민과 죄책감의 멍에로 이용하는 일종의 역학이 독자에게는 그대로 노출되며 거미줄의 사슬에 얽혀 옴쭉달싹 못하는 호프밀러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호프밀러가 결국 도망친 곳에 타협한 지점에 우리 모두는 낯익은 풍경을 발견하다. 하지만 끝내 속일 수 없는 그 눈은 우리 내면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p.246


츠바이크의 미덕은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의 다층구조를 탐사한다는 점이다. 전적으로 사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는 통찰은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모든 사악하거나 나약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또한 츠바이크 특유의 도덕적 염결성의 표현이다. 


결국 그가 전쟁 앞에서 택한 죽음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의 절망의 마침표 같아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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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6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 어떤 깨우침과 반성을 유발하기 위해서인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blanca 2020-09-17 08:24   좋아요 1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지나가고나서야 아, 이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여기에서 난 이걸 배워야 해, 뭐 이런 비슷한 느낌이요.
 

존슨 할아버지의 통나무집에 소녀는 잡지책 낱장을 벽에 이어 붙였다. 단 순서대로가 아니어서 할아버지가 스토리를 이어 이해하려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거나 다음 날에 발견한 그 다음 장을 이어붙여 수정해서 받아들여야 했다. 루시아 벌린의 의도였다. 그녀의 첫 문학 수업은 이토록 창의적이고 사랑스러웠다. 이 대목이 너무 좋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아버지와 함께 방문하고곤 했던 숲 속 외딴 오두막의 고독한 노인을 위한 소녀의 재기 어린 시도가 너무 귀엽고 참신했다. 





분홍색 슬립을 입고 침대에 드러누워 추리소설을 읽는 엄마를 뒀던 루시아 벌린은 그 후로 다사다난한 삶을 살게 된다. 여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아들 넷을 둔 싱글맘이 되어 먹고 살기 위하여 온갖 일을 전전해야 했다. <웰컴 홈>은 이러한 삶을 스스로 기록한 부분과 그녀를 찍은 사진들, 그리고 그녀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 자신이 주로 끊임없이 이동했던 장소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회고하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는 문장들, 사건들의 얼개가 마치 미완성된 아름다운 소설처럼 흥미롭다. 하지만 그녀의 때이른 죽음으로 그녀의 복기된 삶은 마침표를 잃는다. 갑자기 뚝 끊기는 마지막이 그래서 참 아쉽다. 남편의 친구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하고 멕시코에서 원주민들과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등 삶의 서사의 폭이 크다.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녀의 미모는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성추행과 성희롱으로 얼룩진 소위 출판계 인사들의 행태에 그녀는 역겨움을 느낀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조차 딸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인들, 생활고가 끼어들어 글쓰기는 간헐적으로만 지속된다. 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네 아들들은 엄마의 곁에 남아 엄마의 글의 독자가 된다. 이 책도 그런 아들의 손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글을 읽고 어머니의 글을 정리하고 그녀의 임종을 지켰던 아들. 이것이 그녀의 비극적 삶의 위안이다. 


그녀가 편지에 인용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나온 문구.


"집은 내가 달리 갈 곳이 없을때 나를 받아줘야 하는 곳이다."


이 책의 테마가 되었다. 떠돌아다녔던 그녀가 결국 가장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곳은 바로 '집'이다. 때로 자신을 자학하고 자신의 글을 폄하했던 시간은 그녀의 사후 남긴 작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쓸려나간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영광이 아이러니하다. 그녀가 그 틈새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읽을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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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4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쾅 쾅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와 비슷한 문장을 어느 책에서 읽은 게 생각나네요.

blanca 2020-09-15 08:19   좋아요 1 | URL
아, 그렇네요. ˝쾅 쾅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집˝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scott 2020-09-17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회롱과 성추행이 자행되었던 출판계라니,,,
루시아벌린 작품들은 막연히 카슨 매컬러스와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죽기전 마지막 까지 글쓰기를 포기 하지 않았다는건 독자들에게 결국 살아간다는것이 어떤의미 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것 같네요.

blanca 2020-09-18 08:14   좋아요 1 | URL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대기적으로 묘사한 글이 마치 성장소설 같아요.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회상이 딱 끊겨 아쉬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