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휴가가 아니었다. 마음을 비우고 서울 시내를 다니기로 했다. 아직 돌쟁이 아기를 안고 집근처에서 간송미술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족 전부가 함께 갔다. 사실 한달 전에 이 책을 읽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청년이 그 돈으로 일제강점기에 흩어져 있던 각종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은 처음 한 두 건은 일종의 호기, 과시욕으로 곡해될 수도 있겠지만 일생을, 자신이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바친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미술책에서나 보던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정선의 그림들,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전형필의 사비를 털어 일본인 수집가, 몰락한 양반 등에게서 되찾아 지킨 것이라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산이 거저 사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을 지키려고 되찾아 오려고 사투를 벌였던 그 행위 자체에 깃듯 열정, 노력이 우리가 일본에게서 독립을 되찾고 오늘날까지 우리 고유의 것들을 지켜오는 데에 일조를 담당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독립이 거저 주어진 것으로 곡해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힘과 얼을 폄하하는 발언들을 일삼는 몇몇 사회 지도자층의 발언은 간송 앞에서 어쩐지 코미디 같이 느껴진다. 이 책은 전형필의 이러한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를 찾는 과정에서의 힘겨루기, 금전적 대가 등이 이야기의 얼개를 구성해 전형필 개인의 삶, 열정, 소망(사실 이런 것들을 복기하기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겠지만)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감이 든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고 나니 전형필이 사적으로 만든 박물관이 1년에 두 번 정도만 개방하여 그의 보물들을 보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소장 문화재들을 관람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평일인데도 출입구는 붐벼 기다려서 입장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둡고 붐벼서 찬찬히 집중해서 감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력으로는 문화재 하나 하나마다 그것을 구득하는 데에 얽힌 에피소드를 분명 읽었는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기염을 토해 어느 하나 제대로 감상해 낼 여력이 없었다. 여덟 살인 큰 애는 다소 지루해하는 표정이었고 둘째는 끙끙대다 잠을 자주어 출구 앞에서 다시 거꾸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출구 근처에는 그가 그렇게나 필생을 통해 구하려 애썼던 '훈민정음해례본' 앞에서 사투리 섞인 해설을 하는 아름다운 큐레이터 주변에 어린이들이 몰려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던 김태준의 중개로 그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마침내 구한 것이었다. 이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됨으로써 그 구하는 과정에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간송은 꿈에도 그리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박물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것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1446년에 만든 귀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글을 우리의 손으로 만든 과정과 원리를 밝힌 책자는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 그 자체였다. 우리의 글, 우리의 이름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던 시대에 우리의 품에 안긴 그것을 유리벽 앞에 두고 고사리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큐레이터의 열정적인 설명을 받아적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다가갈 수 없는 그곳을 까치발을 하고 응시하며 오백 년도 더 전에 우리의 글과 소리를 만든 그 감격과 자부심에 가슴떨려하며 학자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것을 만든 과정을 정리하고 용례를 수집, 적어나가는 광경과 그것이 스러지고 남은 흔적에 다가갔다. 그 앞의 나는 나의 순간, 삶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박물관을 가는 것은 내가 여기 지금 끄달리는 문제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깨닫고 온전히 향유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존재가 가지는 그 얄팍한 무게,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남는 것들의 존귀함에 대한 체감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저에 산재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앞에서 헤매는 존재들, 고여 있는 삶들. 아기가 깨버리고 나는 아마 평생이 가도 소유할 수 없을 <미인도> 엽서를 샀다. 내가 마치 그것을 소유하는 것 같은 환각 앞에서 신윤복이 사랑했다는 여인네의 외꺼풀 눈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큰 아이는 박물관 팜플렛에도 있는 그 그림을 왜 돈을 주고 구태여 사야 하냐고 반문한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어느 쪽도 나는 온전히 제대로 그 때 그 마음을 전해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맞출 수 없다고 갈 수 없다고 별을 보지 않는 것도 섭섭한 일. 그냥 그렇게 안 되어도 자꾸 올려다 보고 만지려 하고 그런 게 사는 맛이 아닐런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4-08-1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가까운 곳에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건 축복이네요~ ^^
저는 언제 여길 가볼까~~~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답니다.
간송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이 책 읽을 때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2014-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2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4-08-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미술관, 해마다 봄가을이면 가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 치이는 게 싫어서 발길을 끊은지 꽤 됐어요.
미술관 근처 '수연산방'인가 하는 찻집으로 꾸며진 이태준 고택을 들르거나
최순우 옛집을 들러서 돌아오곤 했어요.
블랑카님 글을 읽으니 그 장소, 그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ddp 간송미술전에 다녀올까, 궁리하게 되네요. ^^

blanca 2014-08-14 11:37   좋아요 0 | URL
아, 섬사이님도 그 긴 줄의 한 분이셨군요. 저도 수연산방 가서 차 마신 기억이 나요. 최순우 옛집은 가보지 못했어요. ddp는 시간만 잘 맞추면 좀 한가로이 여유롭게 감상하는 게 가능할 듯 합니다. 그런데 또 원래 있었던 곳에서 보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저는 박물관을 자주 안 다녀 그러한 건지 전체적인 조명이 어두워서 오히려 좀 아쉽더라고요. 이게 빛 때문에 작품 손상이 될까 그런 건지 아니면 감상 자체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조금 더 공부도 하고 여러 군데 다니면서 안목도 더 키워야 제대로 감상할 여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나'는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좋아했다 외면했다 정리한 첫사랑 질베르트에서 떠나 할머니와 발베크 해변으로 가게 된다. 유년시절 곁에 있어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해치운 것은 이제 화자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탈피하듯 진정한 의미의 성장의 관문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차 주변에서 카페오레를 팔던 소녀에게서 느낀 호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이제 이 청년이 해변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질 소녀들에 대한 전주곡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소 장황하고 묘사의 결이 너무 촘촘하고 섬세해 가끔씩 의도치 않게 발걸음이 멈추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정묘한 묘사의 결마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던 수많은 깨달음과 회한을 언어의 망에 포획해 다시 눈앞에 놓아주는 그 기가 막히는 순간들 때문인 것같다. 화자는 이미 아마도 나이가 꽤 들어버린, 그래서 생과 삶이 가지는 비의와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복기하는 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바닷가의 눈부신 젊은이도 그때의 바로 그 어리석고 무모하기만 한 시선은 아니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지를 이미 아는 늙어버린 지혜의 시선은 젊음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이러한 망각과 체념들을 죽음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떨어나간 자리에 끊임없이 증식하는 새로운 자아가 삶을 견디게 한다. 그때의 꿈, 소녀들, 소년들, 사랑들은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이 작품 전반에는 귀족 세계와 화자가 속해 있는 부르조아 세계와의 그 심연에 대한 고찰이 지속된다. 발베크 해변에서 할머니의 지인 빌파리지 부인을 만나 나누게 되는 교분은 그의 추억으로 남는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식과 표현 들은 그녀의 조카의 아들 생루와 친구가 됨으로써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그러한 귀족사회에 대한 관찰, 회의, 감상이 아니다. 마침내 화자가 만나게 되는 소녀들. 그 찰나의 은유들에 대한 경탄이다. '괴물과 신들에 둘러싸인 이 나이는 평온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시절에 저질렀던 행동 중 나중에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자의 고백은 그만의 것이 아닐 테다. 이 소녀들의 모습은 지금의 십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들 앞에서 튀어 오르고 반항하고 순간의 욕구들에 압도당하는 에너제틱한 모습은 모든 청춘은 화자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잘 구별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의 일반화된 군집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아직 두드러지지 않고 아직 고정되지 않은 그 유연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어리석은 시간들에 대한 묘사와 찬탄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니 화자의 사랑이 사랑하는 이 그 자체보다 자기 자신이 사랑에 더 많이 기여한다,고 표현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첫사랑은 그 대상보다 그 첫사랑에 빠져 있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아련하다. 화가 엘스티르가 젊은 시절에 대하여 그 시절이 가지는 불가피한 약점과 고충들을 지혜로 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묘사한 대목은 화자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주석 같다.

 

얼마전까지 질베르트에게서 오지 않는 편지로 전전긍긍했던 '나'는 이 해변가에서 만난 소녀들 중 하나인 알베르틴에 또 환상을 품게 된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었다 생각하고 키스를 시도하는 찰나에 대해 죽음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고 삶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청춘의 환희에 가졌던 감상을 그대로 채집한 듯 생생하다.  그러나 역시 이 서투르고 자의적인 사랑의 끝도 여기에서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나'의 늙은 하녀 프랑수아즈가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을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로 비유하듯 그의 청춘에 대한 이 절절하고 아름다운 환기는 그것들이 단지 죽은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이제는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나의 젊은 나날들도 함께 막을 내리는 듯한 아쉬움을 남기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나의 삶을 다시 사는 일이 아니다. 나의 아쉬움을 좌절을, 못 다이룬 소망을 이루는 매개체가 아니다. 아이라는 존재는. 생은 단 한번 뿐인 삶을 가지고 비록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낳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선물 받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아이의 결핍은, 못남은 나의 어린 시절 상처를 들쑤시고 아이가 거부받거나 좌절하는 일은 나의 그것들을 다른 형태와 색채로 그러나 비슷한 때로는 더한 강도로 돌아오게 한다. '극성엄마'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아이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오해하고 아이의 성장을 자신의 성과로 곡해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뒤에는 동양적인 극성 엄마의 아우라가 있다. 심지어 로맹가리도 과목마다 과외 교사가 있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하면서 이 책의 제목이 싫었다. 그냥 초극성 엄마의 자화자찬, 교조적인 조언남발일 줄 알았다. 저자 에이미 추아 자신조차 소위 엄친아다. 부부가 나란히 미국 명문대의 교수이자 유명한 책의 저자다. 중국인 이민자 2세대, 유대인 학자와의 만남. 딸 둘. 강아지 두 마리. 흔들리기 쉬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약한 엄마들을 깃발 하나 들고 현혹시키는 내용이 아닐까, 했다.

 

그런데 이 책은 타이거맘(저자의 띠에서 비롯된 호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돌적이고 극성인 엄마가 떠오르기는 하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뼈아픈 자기 반성의 고백이다. 학자인 부모 밑에서 큰 성공한 이민 2세대의 여인의 여행지에서조차 딸의 피아노 연습장을 찾아 헤맨 그녀의 열성의 정당화나 달콤한 결말을 전제한 책이 아니었다. 그녀의 성공한 딸 소피아가 이 책의 주인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국식 교육관에 반항하는 둘째 딸 룰루에 관한 눈물어린 역사이자 함께 그려나가는 하나의 비정형화된 자녀 양육의 지도다. 카네기홀에서 피아노 독주를 훌륭히 해 낸 언니와 더불어 바이올린을 시작한 룰루는 때로는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엄마의 양육에 온순하게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고 튀어오르고 거부하며 엄마를 밀어내고 엄마의 허영심과 자만을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함께 간 가족여행의 식당에서 컵을 깨뜨리고 엄마를 저주하는 말을 내뱉는 딸아이의 반항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장면은 이것이 논픽션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나도 이런 딸의 사춘기를 맞이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저자는 너무나 위험할 정도로 솔직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쓴 책은 잘 못 본 것 같다. 이끄는 대로 교과서적으로 잘 따라와주고 목표점을 상회해서 저 높은 곳으로 뛰어가는 큰딸에 도취된 부분도 그녀의 솔직한 자만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왜냐하면 그녀는 둘째 딸이 끝내 자신이 그려놓은 청사진 바깥으로 튀어 나갔던 그 순간까지도 가감없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패배와 자신의 실망감과 상실감을 펼쳐 놓았으므로. 그녀는 기대치가 높고 절제와 억압이 묘하게 어우러진 우리와는 공통점이 많은 그 자식을 틀 안에 가두어 조련하는 교육관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고 지나친 방종과 자유와 반항이 난무하는 미국식 교육관을 비판, 비난하며 자신만만해하던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부분도 사실 지극히 현실적이다. 둘째 딸이 뜻대로 안 풀렸다고 해서 그녀가 타이거맘을 포기하지 않는 대목, 바이올린 대신 테니스를 택한 딸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좋은 코치와 훈련 과정을 알아보는 모습의 고백은 사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가치관 자체가 흔들린다고 해서 그 가치관 전체를 송두리째 폐기 처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좀 더 솔직해 지기로 한다, 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솔직한 아주 영특하고 열성적인 한 여인의 자식교육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중국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노력하여 상류층에 진입하고 자식들에게도 그 성공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둘러쳐 주고 싶어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느 정도는 속물적인 욕망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그리고 그 욕망의 지도에서 삶의 더 큰 지도는 어떻게 휘어지는지, 어긋나는 지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파헤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첫장은 마지막을 이해하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절대적인 단서이자 복선이다.

 

이것은 한 어머니와 두 딸, 그리고 두 마리 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관한 이야기이자 우리의 카네기홀 입성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국인 부모의  교육 방식이 서양인 부모에 비해 더 나은 면이 부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문화 충돌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지, 승리의 달콤함은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그리고 열세살짜리 아이 앞에서 어떻게 겸허히 고개를 숙였는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타이거 마더 중 인용>

 

그러니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왜 나의 엄마가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서 그렇게 나에게 피아노 가르치기를 고집했는지. 그것은 에이미 추아가 둘째 딸에게 들려주었던 바이올린에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장유유서의 가르침, 절제, 통제, 문화 향유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은유를 보았듯이 아름다움, 여유, 꿈을 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맥없이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 강압적으로 그것을 저지하지 않았던 그곳에는 그러한 것들이 흩어지고 스러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권위와 자율은 양립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하지만 부모라면, 아이 앞에서라면 그것의 균형추를 찾으려는 그 기약없는 노력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움과 가치를 얻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극성인 엄마와 자식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커다란 여유와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엄마가 만날 여지는 언제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온다.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소유하고 재단하는 것과는 멀다. 항상 유념해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7-3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책에 대해 블랑카님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읽을 생각조차 하질 않았는데 이젠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부모와 아이에 대한 책을 읽고 쓰는 블랑카님의 글은 언제나 고민과 갈등이 보여요. 그래서 무게가 느껴지고, 그 무게가 전 좋습니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싶어져요.

blanca 2014-08-01 07:5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책이 사람과도 같은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이 경우가 그랬어요. 첫인상이 억세고 별로 안 좋아 가까이 안 하고 싶은 사람이 정작 친해지면 진국인 경우가 있는데 비슷하더라고요. 사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 내면의 아이를 치료하는 일도 결국 이 과정인 것 같아서 저는 부모 교육 관련 책에 관심이 가요.

프레이야 2014-07-3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고민 그다지 하지않고 소위 극성엄마도 못되고 쉽게 아이를 키운 것 같아요. 투철한 교육관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제가 편안하기 위해서였던 거죠. 미국 내 중국인들의 열성과 능력이 자녀교육 면에서도 드러나나 봅니다. 아이를 키우며 고민하고 사랑을 모색하는 블랑카님의 리뷰 역시 잘 읽었어요.

blanca 2014-08-01 07:5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아이 키우는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와 많은 계획과 의도를 가지는 것, 저도 에너지가 부족하고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은 이미 따님들을 잘 키우셨잖아요. 저는 항상 의문이 들어요. 내가 제대로 애들을 키우고는 있는건가, 하는. 이 고민은 아마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아요.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하필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올려 놓으니 마치 하지 않은 숙제처럼 꺼림칙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정말 재미있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책이 아닌 것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면 이 책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아주 묘한 마력과 무게를 지닌 책이다.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긴 힘든데도 불구하고 3권을 또 찾게 된 것을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의 첫사랑에 대한 오직 내면에서 일어나는(실제가 아니다) 밀고 당기기의 향연은 초반에 아버지가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부러 초대한 귀한 손님 노르푸아 씨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저지당하기 일수였다. 도저히 중간까지 독파하기가 힘들어 관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노르푸아 씨가 가고 나니 사랑하는 소녀 질베르트를 만나기 위하여 드나드는 스완 씨 댁에 이야기로부터 누구나 경험하는 첫사랑의 그 처절한 실패에 대한 그 섬세한 묘사와 해부에 중독되고 만다.

 

이를테면. 상대는 나한테 크게 관심이 없는데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를 만날 기회를 박탈하여 고고하게 나의 애면글면한 마음을 다스리는 그 무용한 노력의 지도에 대한 탐사.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제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너를 일부러 보지 않을 거라는, 너를 향하지만 결국 나에게서 발화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거짓말들, 에서 자유로웠던 첫사랑은 드물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심리의 결마다 펜을 들이밀어 하나 하나 언어로 길어올린다. 놀랍다. 하지만 어렵다. 만연체의 문장은 수시로 출발점을 이탈한다.

 

그의 첫사랑은 그의 집안에서 더이상 교류를 거부하게 된 귀족 스완이 화류계 여자 오데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 그의 사랑과 그의 시선은 질베르트에게 가 닿은 듯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어머니 오데트에 대한 밀착된 경의, 경멸이 혼재된 애정어린 관찰과 묘파로 이어진다. 그러니 정작 이 소년이 첫사랑의 추억을 바친 자는 그녀의 딸이 아니라 딸의 어머니인 그녀인 듯하다,는 느낌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야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파고드는 속살, 내면에 천착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누구나 통과한 한 시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지난 날에 대한 정밀한 탐사다.

 

결국 다 읽긴 했지만, 제대로 읽어낸 것같지 않다. 프루스트는 살면서 읽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같다. 내가 나의 사춘기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4-07-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사랑은 실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겠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청소년 만화로 읽은 기억만 가물가물...

blanca 2014-07-22 14:47   좋아요 0 | URL
아, 만화로 나와 있군요! 성공해도 실패해도 결국 성장의 하나의 과장인 것 같아요. 저는 얼마 전에 읽었어도 줄거리가 연결이 안 된답니다.--;;

transient-guest 2014-07-2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으로 3000페이지가 넘는다는, 읽은 이들의 반은 끝까지, 나머지 반은 중간에 내려놓는다는, 프루스트가 쓴 유일의 완성본 소설이라는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ㅎㅎ 저도 영문으로 셋트 갖다놓고 딱 한 페이지 이후로는 못 보고 있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 못 읽을까봐요. 그런데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맘은 늘 한결같구요.ㅎㅎ 책이란게 재미있는게, 그렇게 쌓아두면서, 나중에 은퇴하면 다 읽어야지 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요.ㅎㅎ

blanca 2014-07-23 17:44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가 쓴 유일한 완성본의 소설인지 몰랐어요. 저도 사실 3권은 애저녁에 사 놓고 최근에 읽을 책이 없는 상태에서 읽게 된 거예요. 4권도 읽으려고요. 촐판사에서 알아서 천천히 출간해 주니 그 속도에 맞추면 될 듯 합니다.^^;;
 

에밀 졸라는 글을 쓰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고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용기있게 반응했던 사람이다. 그런 면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재미있다. '고전'의 반열에서 그 만큼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을까. 발자크의 '인간극'처럼 그도 '루공마카르'총서를 기획해 한 가문과 그 배경이 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 했다. 하나 하나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야기의 조각으로도 자리매김한다.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자 부부의 말 안듣던 딸 나나는 그의 <나나>에서 성장한 팜므파탈로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파멸의 매개체로 독립하여 등장한다.

 

 

 

 

에밀졸라는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쓰는 그 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애저녁에 결별하였다. 대신 그는 환경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의지, 희망, 노력 등을 유린당하며 함돌되어가는 지극히 약하고 평범한 인간군상에 밀착하였다.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혹은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할 지 그의 노련한 내러티브 실력 앞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기력도 가창력도 없이 그저 육감적인 외적 매력으로 어필하며 무대에 서는 여배우 나나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 애정, 물질 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방탕하고 난잡하게 살다 시간과 육체적 쇠락 앞에서 파멸하는 모습에 대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는 통속적이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고 허무하기도 하다.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남자는 나나 앞에서 타락한다. 그녀 앞에서 세상은 유치하고 쉽고 더럽다. 에밀졸라는 모든 겉치레의 휘장을 벗겨 버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욕망, 내밀한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짐승'을 그린다. '나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졸라는 '나나'를 밟고 건너가며 이야기한다. 세탁부로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열심히 먹고 살아가려 했지만 결국 술에, 돈에 삶을 저당잡히고 말았던 제르베즈의 딸은 자신의 몸을 팔아 물질적 결핍은 해소했을 지 모르지만 또다른 방식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픈 결론을 맞고 만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사회의 하류층의 삶의 파멸은 영원히 돌고 도는 그 궤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그러한 그들의 결핍과 물질적 욕망을 유린하고 이용하는 상류층의 위선도 덧붙여 있다.

 

'나나'는 에밀졸라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고발'의 한 방편이 된 감이 있다. 그래서 나나가 그렇게 되어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웠다. 그래도 이 더운 여름, 에밀 졸라의 '나나'를 만나는 것은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운 일면이 '나나'의 시대와 얼마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