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일송세계명작선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순진 옮김 / 일송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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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단편선은 사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서 인용된 <대학생>의 한 대목이 너무 훌륭했고, 현대의 잘 나가는 단편작가들이 사실은 다 그의 아류들이 되고자 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들에 혹해서 읽게 되었다. 

기대이상이었다. 재미없을 줄 알았다. 일단 번역의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지점은 흥미유무의 판단의 경계가 되버리는 문제가 생기므로. 즉 허술한 번역은 반드시 흥미를 감하게 되어 있다. 어느 리뷰어가 번역자 김순진이 역시 체호프가 다닌 모스끄바 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로서 그 번역이 정말 탁월하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그 리뷰어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았다. <티푸스>에서 티푸스에 걸린 젊은 중위를 치료하러 온 의사의 말투에 대한 그녀의 표현은 비극적인 소설의 희화화가 어떻게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거럼! 거럼! 거럼!", "거렇지,거렇지......좋아요,총각. 기운을 놓으면 안돼!" <<중략>> "화내면 안 되죠...... 거럼! 거럼! 거럼!"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농부들>과 <골짜기>와 <약혼녀>는 분량과 스케일이 중편이다. 특히나 <농부들>과 <골짜기>는 근 현대의 러시아의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리얼리티와 서사의 다이나믹함이 대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나 배경 묘사에 치중하는 정적인 어휘 놀음이라기 보다는, 문장 하나 하나가 주인공을 여러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삶을 앞으로 흐르게 하는 서사 중심이어서 지루할 새가 없다. 단 <굽은 거울>이나 <자고싶다> 같은 작품은 이런 서사에의 치중이 개연성없는 결론과 합쳐져 작위성이 조금 도드라진 무리수는 있다. 그는 감정의 표현을 섬세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하는 대신에 주인공을 한 번 더 움직이게 하거나 배경을 변화시켜 부지런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방법을 쓴다.  

기억하고 싶은 작품은 삼류 작가 이반이 가족들에게 위세 떠는 글쓰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묘사가 돋보였던 <쉿>과 열세 살 어린 유모가 주인집 아기를 돌보면서 졸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는 <자고싶다>, 대학생들의 집을 떠돌며 그들을 수발하며 존재감 없이 슬프게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의 얘기인 <아뉴타>, 한 사내가 모스크바에서 병을 얻어 귀향해 가난한 대가족 농가의 삶에 합류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부들>이다.  

뇌수 속에 콕콕 박아 넣고 싶은 대목들은. 

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의 시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슬픔> 

그는 네 시까지 더 쓴다. 쓸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여섯시까지라도 썼을 것이다. 혹독하고 비판적인 눈으루보터 벗어나 혼자서,생명이 없는 사물들 앞에서 부리는 아양과 거드름이, 자신의 힘에 운명이 달린 작은 개밋둑 앞에서 부리는 전횡과 교만이 그의 존재에 소금과 꿀이 된다.<쉿>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들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학생>  

이 표현이 바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 인용된 표현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파르르 떨리는 사슬의 끝이 보이는 듯한 이 표현. 추상적인 개념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시각화될 수 있다니. 

졸다가 깜빡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건드리거나 볼에 대고 숨을 내쉬기라도 하면 금세 잠이 달아났다. 몸이 마비라도 된 듯이 늘어지자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온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가난과 사료와 값이 오른 곡물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우울하고 지겨운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인생은 이미 지나갔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농부들>  

아, 잠들려고 전전반측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 누울 때 사람들은 거대한 인생의 숙명을 생각했다 손에 집히는 자잘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하며 세상 제일가는 철학자에서 좀스러운 생활인으로 진자처럼 왕복한다. 이런 통찰력이라니! 

다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그러나 가족들 모두 언제나 잠을 잘 못 잤다. 성가신 일이 집요하게 모두의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노인은 등이 아파서, 할미는 근심과 악의 때문에, 마리아는 무서워서, 아이들은 가렵고 배가 고파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농부들>  

나도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이 상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노파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어쩐지 어렴풋했다. 머릿속 모든 생각들이 뒤죽박죽이어서, 죄악과 죽음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일상의 근심거리들과 가난에 마음을 빼앗겨 방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리고는 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공포심이 들 때에만 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농부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농부들>

이 여인과 2층 방에서 함께 살게 되자 온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새 유리를 끼워 넣은 듯이 환하게 밝아졌다. <골짜기>  

아, 이런 표현은 체호프만 할 수 있겠지. 

태양은 어느덧 빨간 금란으로 침구에 싸인 채 깊고 평화스러운 잠에 빠져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빨강과 보랏빛으로 물든 가늘고 긴 구름이 그 고요하고 편안한 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짜기>  

한 편의 시 같은 대목.  지금까지 노을을 묘사한 표현중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런지.  

고전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한 번에 깨버린 이 책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진부한 근거를 머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그 질긴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그저 넘기는 책장의 속도로 대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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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좋은데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더없이 우울해진다.  

수많은 비문들, 잘못된 맞춤법, 논리의 비약(우격다짐), 어디서 생으로 들고 온 멋내기용 문장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무엇인지.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는 이 답답한 느낌들.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다 보니 내가 끄적인 모든 글들이 역겹기까지 하다.  

전공을 한 번 바꾸고 또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서 5년을 헤매고, 이제는 그것마저 때려치고 

앞으로 적어도 50년을 대체 무엇으로 일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갈지.  그저 벽이 턱하니 걸어 들어온 이 느낌. 

독서만 해도 그렇다. 활자를 읽고 있는 것이지, 잡식성으로 읽어댄 수많은 책들이 대체 내 몸 속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지 

알길이 없다.  눈만 피로해져 가고 지갑만 가벼워져 가는 것이 아닌지. 

한 숨 푹 자고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기 말고 중학교 1학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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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하릴없이 인터넷을 쏘다니다, 사실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평론에 인용된 체호프의 단편집을 어느 출판사 것으로 구입하냐 열심히 고민하다,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을 읽다가 정말 재미있는 얘기와 마주쳤다. 

바로 유명한 책들에 등장한 또다른 책들과, 잘나가는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동원해 추천한 책은 대체로 재미없다는. 

솔직히 여기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한다. 또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재미있는게 하루키의 책에 나온 '위대한 개츠비'가 참으로 지겨웠다는 데에 동의하는 글들. 나는 '위대한 개츠비'에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같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시절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 죽순이였던, 그러나 글을 올리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리플만 달아대던 내가 영문학과 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하여 올린 글을 읽고 리플에 '생각보다 지루하다던데요'라고 올린 글에 내 기준으로는 악플이 턱하니 붙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쳇, '위대한 개츠비'가 지루하면 세상 지루하지 않은 책이 없겠네." 이런 내용이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늬앙스로 나의 리플을 비난하는 글이었는데 솔직히 그 어느 리플보다 기분 나빠짐을 느껴, 다시는 그 게시판에 리플도 달지 않았다는 소심한 기억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도 그것이 소설인 바에야 재미 없어 책장 넘기는게 고역이라면, 그 책은 나에게 별로인 것이다. 그게 나의 지적 소양이 부족해 흩어진 지적 단편들을 체계적을 모아 체화하는 기술이 부족해서라거나, 인내심이 부족해 진정한 문학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재미없는 책은 싫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페터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너무 힘들게 읽은 책이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마농레스꼬' 같은 책은 겉표지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지루함의 결정체인 '마농레스꼬'를 그리도 고통스럽게 읽느라 방바닥을 굴러다녔을까 후회할 따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철저히 개인적 취향이라는게 또 재미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품이 책장 넘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다는 데에 전율해서 주위에 강추하고 다녔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으니, 나에게 재미있는 책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책은 영원히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소위 잘나가는 엣지 있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는 데에서 오는 지적 교만에만 기대어 재미없는 책 추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멀리하련다. 왜냐, 나는 단순하고 흥미를 추구하는 말초신경이 발달한 인간형이라 짧은 인생 재미있는 책들만 읽기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요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들. 읽지도 않고 검색만 줄창 해대다 언젠가 읽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나 재미없다는 평에 거북 목처럼 갑자기 목을 쑥 넣어버리고 마는. 체호프와 폴오스터와 레이먼드 카버. 잘난척하려고 읽어야 하는지 심히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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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9-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정말 재미있구요.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실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 민음사 정도가 무난하지 싶어요.

폴 오스터는 번역이 어려워요. 신경 집중해서 읽어야 하죠. 영어만 된다면, 원서는 정말 쉬이 읽히거든요. 재밌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원서를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각각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행위이죠. 어릴적 읽었던 책과 지금 읽는 책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blanca 2009-09-20 21:36   좋아요 0 | URL
아이구^^ 하이드님 댓글이라니 넘 영광입니다.^^ 체호프 이미 질렀답니다.잘한 거 맞죠? 아,레이먼드 카버는 별로군요. 근데 폴 오스터는 꼭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달의 궁전'부터냐, '빵굽는 타자기'부터냐가 좀 고민인데.번역 문제가 외서 읽을 때 제일 걸리는 문제인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경우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던 터라 더. 그래도 참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하고 상대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같은 경우 괜히 좋기는 하더라구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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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기대 이상이었다고 과장하고 싶지는 않고 총평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는 전제 아래, 기대의 지평선 아래 약간 가라앉아 있는 느낌으로 출발했다 역시 그가 밀어올리는  바람에 지평선 위로 와버렸다는 얘기.

그 느낌은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작가 혼자 외쳐대는 것 같은 작품이 한 두개 있었고, 저자를 숨겨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김연수의 것이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우주 공간 얘기를 조금 남발한 느낌이 들고(내가 요즘 코스모스를 어렵게 읽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일수도) 사회적 맥락 속으로 개인의 삶을 가져다 대려고 한 무리수가 조금 노출되었다는 점 등을 주제넘게 지적하고 싶다. 요새 문학 작품들을 놓고 사회와 유리되어 개인의 삶 속에 침잠하여 문제의식이라고는 없다고 비판들 하지만 이 명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문학 작품 본연의 낭만성이 부옇게 흐려지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 되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단점부터 들이밀고 시작하는 후기이지만 김연수라는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작가이고, 도식과 틀 속에 침잠하는 고루한 소설가가 아니라 내일로 열려 있는 문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임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아주 훌륭한 작가이다. 암.^^ 

다 거론하면서 내 취향을 주장하기는 지겹고, 좋았던 단편 두 개와 어느 리뷰어의 말씀처럼 빛났던 평론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가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참 좋았다. 무엇보다 아내의 친구로 피아노를 조율하러 불쑥 찾아온 인도인 친구의 형상화의 리얼리티가 빛났고,그와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 속에 아내의 소망을 세련되게 깔아낸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이는 해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김연수가 직접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오마주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언급된 그것의 줄거리가 더 매혹적이었다. 맥락의 독서가 시작되는 지점. 나는 아마도 카버의 '대성당'을 읽게 되리라. 대학시절 자원봉사를 하다 간단한 영어로 되지도 않는 소통 속에 실패한 감정의 교류만을 남긴 인도인 친구가 떠올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언어가 넘을 수 없는 저 영역의 소통의 영역이 또 있겠지만, 나의 생각들과 감정을 집약할 언어가 마구 엉켜 눈 앞에 둔 상대와 엉뚱한 얘기 끝에 돌연 아름다운 지점에 안착할 때의 기분은 또 색다른 것이었다. 작가도 '고독'이라는 단어에서 이 지점을 발견하고 보여준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김연수만이 김연수밖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마치 여러 색깔의 물감이 물에 풀어져 아름답게 섞이는 듯한 환영을 그려낸다. 자칫 돌연 이별을 선고받은 소설가의 평범한 연애담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자의 아버지의 직업과 그 아버지의 시력을 잃어가는 여정을 통하여 또 그것과 얽힌 권투선수의 링 위에서의 죽음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특히나 맹인 도서관장과 함께 여자친구가 녹음한 그 아버지의 흔적을 들으며 그 소리가 끊긴 지점. 거대한 만월을 보고 마는 마무리는 소설이 어떻게 사람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자 같아 가슴이 마구 떨려왔다.  그리고 글이 그림으로 변해 갑자기 시야를 덮는 그 기막힌 경험 해보지 않은 분은 꼭 이 소설을 읽도록.

또한 해설에서는 수많은 추천도서목록을 발견하는 멋진 우연에 가닿게 된다.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평론가의 평론은 차갑지 않아 좋다. 소위 무조건 까대는 평론은 이미 그 작가에 호감이 있어 책을 펴든 독자들을 진심으로 거북살스럽게 하는 것이다. 평론가가 철저히 중립적 위치에서 작품을 차갑게 쪼아대는 것도 물론 평론의 미덕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작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가 낳은 작품마저 예뻐해 주는 모습은 괜히 인간적으로 보여 또 한 명의 독자 친구와 소통하는 듯한 유쾌한 착각을 주기에 또 그 의미가 깊다. 특히나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론가의 얘기는 김연수를 그대로 집약해 놓은 듯해 가지고 싶은 문장이다. 그가 택한 김연수의 문장은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는 문장. 사실 내가 제일 지루하게 읽어야 했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나온 이 문장은 작품은 밀어내고 표현만 쏘옥 빼오고 싶은 욕심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런 문장을 낳을 수 있는 김연수의 그 저력은 대체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보다 백만배는 더 깊숙한 가슴께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들보다 백만배는 더 무거워 의자에 지긋이 내려누르며 공부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이 해설에서 나는 정말 빛나는 문장들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를테면, 

오래된 문구가 있죠. 이런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소설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또 우리에게 공간을 보여줍니다. 곧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수전 손택,'문학은 자유다') 

이렇게나 소설을 잘 정의하는 또다른 표현이 있을까? 삶이 이야기가 되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편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슬픈 시도와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슬픈 시도를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힘겹게 밀어올리듯 해내고 있는 김연수에게 결국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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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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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정말. 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으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허구의 그 허술한 바람 구멍에 인생의 암팡진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현대작가. 언제나 머리가 혹은 발이 차가워 역시 소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책을 덮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작가. 그를 위화라고 부르고 싶다. 

한 때 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했었다. 그 어떻게든지 비어져 나오는 보기싫은 뱃살처럼 나에게는 결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그 허술함이 거북했다. 베스트셀러작가이든, 심지어 유수의 고전 작가이든, 작위적인 반전, 입체적이지 못한 인간 군상들이 나는 지금 사실이 아닌 허구를 읽고 있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진저리가 났었다. 

여러 사람이 권하고 무엇보다 피를 팔아 삶을 꾸려 간다는 남자의 얘기, 학창시절 펄벅의 '대지'를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결국 허삼관을 만나게 했다. 이 책 일단 너무 재미있다. 근래들어 시계를 보며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소설을 잡았던 기억은 없었는데 조금만 읽다 잔다는 것이 결국 자정을 넘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또한 그 결말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수미상관처럼 억지로 처음과 맞물리게 하는 결말도 지겨웠고, 쓰다 지친 작가들의 필력이 마구 드러나는 듯한 느낌도 싫었었는데 그 둘다 여기에서는 저리 가란다. 그냥 눈물이 또르르, 웃음이 또르르 굴러나온다. 그 만큼 결말이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훌륭하다. 

허삼관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리얼리티를 획득한 지점은 바로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전적으로 나쁘지도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딱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있는 주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사실 허삼관의 장자 일락이가 그의 아내 허옥란이 결혼전 마음주고 몸 준 하소용의 아들이라고 마을사람들과 허삼관 본인, 또 허옥란까지 다 인정해 버린 다음에 허삼관이 일락이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비열하기도 하고 모질다. 나는 말미정도 가서 일락이가 허삼관 친아들이라는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데 세련되게도 작가는 그런 단순한 반전을 사양한다. 여하튼 허삼관이 지독한 가뭄 기간에 옥수수죽에 질려 피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국수를 사먹기 위해 일락이만 남겨두고 나머지 두 아들과 허옥란을 데리고 가는 대목은 희극적이면서도 슬프다. 남은 일락이는 고구마를 사먹으며 울먹이며 거리를 헤멘다. 그러나 이 부자의 관계는 이런 일락이를 찾아 헤메다 결국 발견하고 국수를 파는 승리반점 앞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국수를 사먹이기 위해 승리반점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처지가 되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며칠상간으로 계속 피를 팔며 상하이로 가는 모습은 피로 맺어지지 않았다고 단정지은 그 관계가 피보다 더 처절하고 진한 관계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허옥란에 대한 그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겉으로는 허옥란은 혼전 관계를 가지고 자식까지 낳아 뻐꾸기 둥지에 몰래 알을 숨겨 높는 철면피에 부정한 여자라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를 자라대가리로 전락시킨 장본인임에 틀림없다는 점에 그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비자발적인 동의 속에 숨어있는 그녀에 대한 진한 애정과 신뢰는 문화대혁명당시 대자보에 '화냥년'으로 비난받아 사람들에게 삭발까지 당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아내에게 꼬박꼬박 밥 속에 반찬을 숨겨 가져다 주는 모습에서 비어져 나온다. 또한 가족끼리 그녀를 비판하는 형식(여기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이 희화화되어 있다.)에서 자신이 유부녀 임분방과 관계를 가진 것을 고백함으로써 아내의 부정을 덮어주려는  오버스러운 용기까지 발휘한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이상적으로 소설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삶 속에서 지루하고도 생생하게 아내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더 추상적으로 박제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문학적 이상화의 틀을 위화는 박력있게 부숴 버리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랑을 쓴다.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지지고 볶고 예쁘지 않은 사랑, 그러나 숨쉬는 사랑, 쉬이 스러지지 않는 사랑. 

그의 매혈은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희극적인 요소가 섞여 희비극의 절묘한 직조물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인생처럼. 그가 피를 파는 명분은 여러가지이다. 아들 친구의 병원비를 물어주기 위해, 맛있는 것을 가족에게 먹여야 겠기에, 아들들의 상관을 잘 대접하게 위하여, 아들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통의 목적은 바로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이다. 핏줄인  아들들에게 그 피를 팔아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기 위하여 몸이 다 망가져 가더라도 오직 피를 팔기 위해 헤메는 허삼관의 모습은 부성의 상징이다. 멋있지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사회의 뒤켠에서 이리저리 치여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늙어가는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대단히 도덕적으로 훌륭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자식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도 않고 그저 누구는 피를 팔고 누구는 때로 상관에게 영혼을 팔고 자존심을 포기하며 오늘도 발 디딜 곳 없이 이리저리 흐느적대며 헤메고 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질곡 있는 서사는 실종되고 단지 방대한 독서량을 전시하고 언어유희에 도착하여 독자를 어렵게 하는 작품을 내놓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게 내공이 부족하다고 폄하한다면, 그들에게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로 대응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말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는 ㅋㅋㅋ 너무 과해서 숨겨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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