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의 그 쨍한 각성효과가 좋아, 쓰린 속을 달래가며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 그 후는 더부룩해지면서 우울해진다.
업되려고 마신 커피가 나를 끌어내리는 오후.
나는 왜 우울한 것인가를 고민해 보니, 대체로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우울의 이유는. 

책장에 꽂혀 있는 두서없이 섞여 허우적대는 후회되는 책 목록과 함께,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닌,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면,
덜 쓸쓸할 텐데,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 자못 슬픈 것이다. 
살면서 재수시절 응큼하게 생긴 국어강사의 권유로 읽게 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에서(이거 읽으면 논술 잘 쓸 수 있다길래), 
건진 단 하나의 문장. 볼테르의 그것.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추이다, 라는 얘기
그건 왜 순간 순간 고개를 내미는지.
껄쩍지근한 일이 새벽에 등골을 스칠 때의 그 소름이 싫어 회사 뒷담화에 집중했던 시절에는
주로 신경질이, 
팀장님이 솥뚜껑 운전이라 명명해 주신 작금의 상황에서는,
극도의 단조로움이 권태를 끌고 온다. 

행복하다면 약간 농치는 거고
불행하다고 한다면 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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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다.
요즘 소위 잘 나가는 남성 작가들의 아내는 대부분 예쁜가 보다.
김영하의 아내도 아주 예쁘다고 한다. 
사진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주워들은 얘기들을 확정할 수는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박민규가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인터뷰에서 아내를 되게 좋아해서 나와서 글을 쓴다는 그
얘기 하나 만으로 얼굴이 대단히 이쁠 것이고 신혼일 거라고 괜히 단정짓고 합리화했다. 

질투하나 보다. 웃긴 것은 그들의 아내가 부러운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아내들을 두고 글을 마음껏 쓰는
그들이 괜히 부러웠다. 왜냐하면 나도 퇴근할 때 아내가 있었음 했기 때문이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흐물거리며
퇴근해서 산적한 집안일들이 반갑게 나를 마중나온 문지방은 넘기 싫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지라  
내가 하기 싫은 아내의 역할을 나는 받았으면 하는 판타지를 갖고 있었다는 고백은 참으로 불쾌한 것이다. 

각설하고,
대체로 잘 나가는 남자 작가들은 담배 연기로 그득찬 방문 앞에서 아내를 막 밀어낼 것 같은데,
예외없이 반대로 아내에 대한 찬탄으로 침방울을 튀긴다.  

특히 박민규의 아내에 대한 찬탄은 참으로 간지러운 것이면서도
그지없이 부럽기도 하고. 게다가 둘째까지 보고 남았을 결혼연차라니 신혼도 아니니 이건 모 공격할
건수도 없고.  많이많이 좋아해 주고 싶단다. 주름살 하나도 행복한 각도로 잡히게 하고 싶단다. 

그런 아내...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위해,
"어머니를 둘째라 생각하자"며 딸을 너무너무 낳고 싶어하던 그를 달랬다던 대목은,
사랑은...결혼 이후 지속되는 사랑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짐을 덜어  
내 어깨에 이고 괜히 씩씩한 척 하며 앞질러 갈 수도 있는, 그런 아픈 배려를 담보로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사랑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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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 2009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거의 한 해 걸러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사서 읽었더랬다.
이유는 단 하나, 재미가 담보되어 있었고, 그 재미가 가볍지 않아 뿌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도...상받은, 혹은 받으려다 살짝 미끄러진 작품들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때로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도 살포시 끼어 보기도 했다. 별반 차이없이 작품성과 재미가 어우러져 있었다.
김훈의 '화장''언니의 폐경'을 만났던 것도 같다. 단편도 장편처럼 둔중한 울림을 실어 나를 수 있다는 데에
약간 전율하기도 했었다. 

이 작품집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박민규의 '근처'를 수상작으로, '위험한 독서'의 김경욱, 은희경, 김애란, 배수아 등의 최종후보작을 싣고 있다. 전반적인 작품들에 대한 느낌은, 음, 긴장감이 대체로 떨어지고, 결론이 무언가 쓰다 만 느낌이랄까? 내가 감수성이 무뎌져서 그런가, 아님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에 닳아 있어 그런지, 왜 예전 이런 수상집을 읽을 때의 그 간질간질한 재미와 명치 끝에서 전해 오는 울림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박민규의 작품이 가장 올돌했음을 인정하고, 의외로 김숨의 '간과 쓸개'가 가장 인상깊었음을 고백해야 겠다. 나머지 기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은 현을 팽팽히 당기는 그 맛이 쑤욱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단편에서는 긴장감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함)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이 단편이 처음이기에 감상 및 평가를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이 낫겠지만, 대단히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전개방식과 문체를 사용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대화체를 부호 생략하고(요즘에는 이런 방식이 당연하게 간주되지만), 글자 크기를 확 줄여 버리는 것. 오히려 이런 시도가 역설적으로 대화를, 사람 간의 호흡을 더 돋보이게 한다. 죽음을 앞둔 마흔 살의 미혼 직장인이 타임캡슐을 통해 초등학교 추억들과 맞닥뜨리는 얘기를, 심사위원들은 작위적이라고 조심스런 비판을 날렸지만, 그 세부 전개는 굉장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풀어 나가고 있다. 주인공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어찌나 절제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는지 꼭 인용해 두고 싶다. 

   
 

온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몸부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중략>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박민규의 '근처'>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은 초반을 풀어나가던 강력한 에너지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이러한 한계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무언가 아주 대단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매듭짓는 마무리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느낌. 그런 면에서 김숨의 '간과 쓸개'는 빛나는 작품이었다. 역시 죽음을 앞둔 노인이 구십의 누나와 한데 누워 (나란히 간과 쓸개가 고장나) 유년의 왜곡된 추억을 교정하며 같이 흐느끼는  마무리는 결론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로 열려 있을 수 있는 예증 같아 보여 좋았다.   

여간해서는 인터뷰를 사양한다는 박민규의 수상 인터뷰가 아주 좋아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 그것만으로도 아깝지 않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고 치매에 걸린 노모 때문에 둘째를 미루고 goole earth에서 현재 상태의 밤하늘을 보여주는 천문 프로그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의 얘기는 그것 하나만으로 내러티브가 흐르는 느낌이다. 정말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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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난 후 약간 울었더니,
갑자기 오른쪽 눈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라식 수술한지 어언 8년이 되어가는데
순간 순간 검증안된 수술이라는 악담이 떠올라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기어나왔다. 

눈이 아주 나쁘지 않다면,
안맞는 콘텍트렌즈 끼느라 눈에 온갖 허당 실핏줄 키우는 경우 아니라면,
비추다.  

무엇보다 갑자기 눈 주위에 예기치 않은 충격이 가해지거나,
눈물을 조금 흘린 후 시야가 뿌얀 경험 그 1분도 안되는 시간이 갑자기
두렵게 다가오는 경험은 상당히 불쾌하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서 계속 뿌옇게 흐려지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다,
눈을 위해서라도 행복해져야 겠다는 어쭙잖은 결론 다음으로,
주제할아버지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주문해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맥락의 독서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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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거기 앉아 있는 동안 난 거의 사람을 미치게 만들 만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누군가가 벽에다가 <이런 씹할>이라고 낙서를 해놓은 것이다. 피비나 다른 아이들이 이런 걸 보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정말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이 말의 뜻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나쁜 놈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뜻을 가르쳐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중략> 그런 곳에다가 이런 말을 써놓은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  
   

놀이터에 두돌 딸아이를 데리고 갈 때마다 놀이터에는 지렁이처럼 꼬부라지는 글씨로 온갖 욕설과
"철수는 어젯밤 열두시에 야동을 봤다.'" 같은 웃기지도 않은 문장들이 저마다 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 대목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진다. 읽을 때는 웃고 말았는데
정작 그런 상황을 일상적으로 목도하게 되니 나도 콜필드처럼 그걸 쓴 아이를 찾아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강박적으로 다 지우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어느 날 내 딸이 분명 물을 것이기에.
"엄마, 야동이 모에요?" 이건 차라리 낫다. "엄마, XX(상상에 맡김)가 모에요?"
아무 의미도 없는 욕설의 정의를 궁금해 하는 네돌 정도의 딸아이에게 적절한 설명을 찾아주지 못해, 혹은 정말
콜필드의 우려처럼 어떤 나쁜 사람이 아주 잘못된 뜻을 가르쳐 주어(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라거나)
다음날 부터 그 욕설을 하고 다닌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실 저 정도까지 연장된 심각한 우려를 매일 하는 것은 아니고,
콜필드가 여동생 피비를 위해 저 저속한 낙서들을 강박적으로 지우고 다녔던 풍경이 때때로 떠올라
낙서를 더욱더 유념해 보게 된다는 정도.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저 낙서를 언젠가는 읽게 될 딸아이보담은,
저런 낙서를 숨어서 하고 있었을 녀석들 생각에 대체 무신 의도에서 무신 욕구로 저런 낙서를 하게 된 것인지
궁금도 하고, 벌써 그런 숨어서 하는 약간의 불량스런 행동에 대한 공명심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놓쳐버린,
나의 단단해진 감수성이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렇단 얘기. 

그래도 밤12시에 야동본 얘기를 놀이터 미끄럼틀에 신고하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안웃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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