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동안 과분한 영예를 얻었지만 그 어떤 영광보다 나를 흡족하게 해 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립도서관의 관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항상 천국을 도서관과 같은 종류로 상상했습니다.
                                                                                - Jorge Luis Boreges <정혜윤의 침대와 책중 재인용>

 가문의 내력대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 마침내 실명하고 도서관장이 된 그가 상상한 천국에서 단지 책의 겉표지의
 굵은 표제만을 어렴풋이 해독할 수 있었던 그의 이 얘기는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어느 개그맨의 안타까운 근황과 더불어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닥치는 대로 읽고 보는 나의 활자중독에
 제동을 건다. 왜냐하면, 나는 늙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노안이 와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은
 정말 너무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혹은 라식 부작용으로-..-. 

 무언가를 읽을 수 없고 누군가를 합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없고, 결코 우연이라도 조우할 턱이 없는 이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그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더이상 들여다 볼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일 터이다.
 보르헤스처럼 나에게도 천국이란 도서관이다.  읽고 쓰고 또 누군가는 읽어주고 책을 추천해 주고 빌려주고 사주기도 하고,
 그런 세계가 나에게는 전부이고 지향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도 일어나고 나와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이가 발을 내려 놓고 앞으로 또는
 뒤로 허우적대며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위안이다. 삶과 독서는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더로 다른 차원에서
 일으켜 주고 밀어주는 그 맛이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결론은 눈을 쉬어야 한다는 것. 더 오래 더 많이 읽으려면. 태백산맥 한 권이 남았다. 그냥 너무 서운해서 그 마지막
 한 권은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옆지기가 입이 댓발 나왔다. 자기도 다 이해한다고. 무협지 보던 시절 그 중독성을
 경험해 봤다고, 이러니 그 앞에서 정신무장 교육좀 시키려고 어설픈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코를 골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천상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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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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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의 인용보니, 이 책 생각나요. 보르헤스에 대한 정말 멋진 책이에요 ^^
리뷰의 링크 두개 있는거도 다 멋진 글. 시간날때 함 보러오세요~

blanca 2009-11-27 11:5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보르헤스 책 정말 읽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누군가 추천해 주기를 기다렸죠. 꾸벅~
 

태백산맥 3부 분단과 전쟁 6,7권을 읽었다. 1949년 10월부터 다음에 11월까지 1년을 다루고 있다. 6.25발발 전후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최근까지도 회자되고 있고 그 후속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 '보도연맹' 사건의 묘사는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다.
정부주도로(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반공교화단체를 만들어 좌익색출에 혈안이 되어 심지어 할당량까지 내려
마구잡이로 가입하게 한다음 초기후퇴시에 가입한 이들을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집단학살해 버린 사건. 최소 이십만이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니 경악스럽다. 그러니까 쌀주니까 지장찍으라고 하여 엄지에 인주 묻힌 옆집 삼돌이가
갑자기 뒷산에 끌려가더니 다음날 구덩이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아니, 내 아들이, 남편이,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예고도 없이 짓밟히고 매장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이 아닌가.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 

이런 식으로 조정래는 그 학살의 현장에 유독 시간이 잇새로 새어나가지 않게 천천히 다가간다. 독자도 이 대목은
같은 말들이 열 번씩 반복됨에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 하나의 문자를 잉끄려뜨리듯 눈 속에 박아넣게 된다. 그 만큼
충격적이고 살갗이 아프다. 가장 아픈 지점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았던 그저 그대로 하루하루를
꿰어나갔던 평범한 양민이 역시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옆사람과 묶여 총성에 사라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덜 가지고 덜 배우고 그래서 주어진 체제 속에서 비판이나 반항없이 일상을 꾸려나갔다는 이유로. 

동란 초반 북이 우세했을 때 사회주의 해방촌이 몇 달간 건설되어 염상진 일행이 벌교로 귀향하는 대목.
그 혁명이라는 것에. 그 비현실적인 지향에 생명의 줄까지 매달고 어린애 마냥 좋아 날뛰는 그들에게
애달픈 연민이 든다. 결국 그 귀착점이 부패에 의한 자멸이고 돌아 돌아 결국은 다시 자본주의라는 결말이
예고되어 있어 더더욱. 

이런 긴 작품 속에서도 문장 하나 하나에 형형한 불빛을 점화한 작가에게 경탄을 보낸다. 다음 같은 문장. 

묽은 가을안개가 슬픔처럼 들녘 가득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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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그 가문의 내력이 인상 깊었다. 일단 대대로
아주 대단한 권세를 가진 가문이었고,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군수 재직 당시 경술 국치를 비관하여 자결하였고,  
그 자신 독립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월북하여 부수상까지 지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손자 홍석중은 그 유명한 <황진이>의 작가로 남한에서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고 하니 글발도 분명 피를
타고 흐르는 것인가 보다. 월북 관련한 사연이야 민감한 사안이라 가치 판단을 할 대목이 못되고  
그 이전 대단한 가문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자결한 그의 아버지와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그의 전력이,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던지고 명분 그것도 다수, 대중을 위한 명분에  
투신할 수 있었던 용기가 놀라웠다. 명분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이득에 부합될 때야 가장 절묘한 지점이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경우이고 그 지점에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걸음이 아니기에. 

경주 최부자는 그 막대한 자금을 끊임없이 독립자금에 부었다고 한다. 또 실지로 12대손 형제 최윤, 최준은 한 명은 친일행각,
다른 한 명은 독립운동을 하는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최윤의 친일행각이 형의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진부한 용어가 그들 주위에 그대로 얹혀도 괜찮을 것 같다.  

가진 자들이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그것을 나눠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그 어떤 이기심에서
발현되는 욕심임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자기가 가진 돈으로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고 외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하는 것이야 그 여건이 되었을 때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바에야 입아프게 욕할 소재로는
힘빠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절대다수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의식하고 때로는 배려하면서
조금 뒤로 물러나 주거나 때로는 앞으로 나와 주는 것이 감정적인 결핍에 후달리는 다수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무 빈약한
요구일까. 솔직히 말하면 덜 화나게 덜 힘빠지게 해달라는 것. 그게 참견쟁이에 욕심쟁이에 열등쟁이의 튀어나온 보기 싫은
입술일지라도.

언론이 가하는 박해는 희생자가 된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략>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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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부(4,5권) 민중의 불꽃을 마쳤다. 여순사건 이후의 10개월 동안을 그린 것으로
6.25 직전까지 주로 농지개혁 관련된 소작인들의 애환과 분노를 그리고 있다. 춘궁기의 그 처절한 기아와 허덕임,
남의 논을 붙여 먹고 사는 이들의 그 어쩔 수 없는 비굴함, 끊임없이 가진 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그 숙명 같은 나날들.
그 추상성을 구체화 하는 날실과 씨실에 매달려 있는 작가의 눈물이 나의 눈자위를 축이는 것 같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농지개혁 문제였다. 그 농지를 어떻게 몰수하고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결론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으나 기존의 지주계층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귀결되었으며, 이에도 지주계층들이 불법의 명의 이전을 통한 빼돌리기 등으로 가엾은 소작농들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항시 박탈당해 온 그네들의 절망감은 집단 반발로 가시화된다.  

태백산맥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군데군데 민족주의자, 주로 극좌나 극우가 아닌 중도 노선을 걷는 인물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역사의 개관은 조정래 자신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분단의 전후 배경인 듯하다. 물론 작가의 주관이 투영되어 있는 한계는 짚고 넘어가야겠으나, 단순히 북한의 일요일 새벽 삼팔선 남침으로 정의되어 온 6.25 전쟁(나는 이렇게 배웠다)이 얼마나 많은 요인을 품고 있는 지를, 그리고 우리가 왜 아직도 극좌나 극우니 하는 구획 안에
편의대로 사람들을 몰아 넣기를 즐기는 지를 적어도 우리 민족의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요는 친일파의 청산에 관련된
오늘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에서 출발한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미군정의 편의하에 그들은 다시 각종 관직에 등용되었고, 그들의 콤플렉스는 이념 문제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처단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조정래는 이념 그 자체에 대한 회의의 가운데에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애정, 민중에 대한 경외를 두고 있다. 공산주의도 또 그것의 반대개념으로 차용되어 이용되어 온 민주주의도 그 이념만으로 인간 세계를 재편하고 행복이라는 지향을 실현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과 사랑, 신뢰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간과가 결국 치달은 곳은 반대파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처단이 아닐런지.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갈렸다. 마을 주민의 대를 잇게 해주려고 해방구에 여자를 들여보내는 것을 용인한 죄목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부분. 지주들의 악독함에 대한 희화화는 아주 익살스럽다. 소작인들이 머슴방에서 냄새 피워올리며 옛날 야그하는 장면은 백미이다. 나도 그 따땃한 방에서 발냄새 피우며 두부 김치 먹으며 옛날 야그를 듣고 싶다. 

대하소설은 섣불리 잡으면 안될 것 같다. 완전 폐인되는 분위기. 매일 졸립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살림이고 모고
다 집어치고 산 속에 들어가 <아리랑>, <한강>, <토지>까지 다 읽고 나오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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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부 '한의 모닥불'을 다 읽었다. 전 3권,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흡입력이 대단해서  일상 생활 지장을 받을 지경이다.  
현실과 맞물리는 지점이 많고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형상화가 눈부시다. 다 살아서 내 주변을 막 걸어다닌다.
조정래라는 작가는 정말 그 어떤 극찬을 붙여도 문자가 가진 저 바깥 경계의 한계 때문에 부족 또 부족하다. 

미군정 시대 일제의 지주 계층과 관,경찰 등 지배계층이 그 어떤 처벌이나 심판 없이 그대로 등용되어 초기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그러니 친일 논쟁만 나오면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도.
역사의 청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왜냐하면 어제의 축척이 오늘이니까. 그리고 내일의 예고이니까.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깊은 염원으로 갖고 있는 작가의 고뇌가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지주의 자식이면서 사회주의에 투신한 정하섭과 직책을 뛰어넘는 관용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매력적이다. 심재모 같은 인간형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만 작가의 소망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런지. 수많은 민중들의 전라도 사투리가 걸찍한 입담과 어우러져 정말 눈에 쫙쫙 들어붙는다.
외서댁의 봉숭아물 들이는 부분에 대한 회상은 투명하다.  

사회주의의 그 이상적 틀 속에 우리 민중의 처절한 배고픔과 생존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국 그 틀이
왜곡 변형되어 이지러지는 데 필연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2부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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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은 처음 광주와서 살때 읽으려고 도전했다 전라도 말이 입에 안 붙어서 못읽고
두번째도 역시~ 2007년 세번째 도전에 3권까지 읽고 배경지를 샅샅이 훑고 왔지요.
하지만 아직도 그 이후는 못 읽었어요~ 한강, 아리랑은 두번씩 읽었는데 태백산맥은 내겐 너무 어려워요.ㅜㅜ

blanca 2009-11-26 13:32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그게 신기한게 저도 사투리 잘 모르는데 한 오권 넘어가니까 갑자기 휘리릭 붙기 시작하더라구요. 글구 갑자기 제 딸한데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담 아리랑이 태백산맥보다 더 재미있다는 얘기인가요? 아...또 아리랑이 읽고 싶어지네요. 이제 그만 읽고 올해는 마감할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