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과동기 두 명이 오월 축제의 그 달보드레한 분위기 속에서 정작 열광한 것은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였다. 무언가를 기다렸던 그 긴 줄 속에서 그 두 명이 남기고 간 호들갑스러운 헌사들을
들고 온 손 끝으로 나는 이미 그 영화의 비디오 테잎을 플레이어에 밀어넣고 있었다.
연년생 여동생은 지루하다,를 남발하며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다 조금 울기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면서
나를 들쑤셔 댔지만 그렇게라도 마치고 난 영화의 끝 자막이 올라가는 자리에서 우리 둘은
같이 숙연해졌다. 그런 영화였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영화의 몇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 한 곳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그 애상어린 감정들을 추스리기가 뭣하다.  
97년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가
남기는 잔상이 얼마나 깊고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마냥 내 깊은 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의 궤적을 따라 지도를 그리는 영화다. 그 지도는 사막에서도 이탈리아의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도 그려진다.
온몸을 사프란빛 화상으로 뒤덮은 영국인 환자 알마시(랄프 파인즈)와 그의 곁에 남아 간호하는 캐나다인 간호사 해나(줄리엣 비노쉬), 인도인 용병 킵, 그리고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한 카라바지오가 이탈리아에서 기이한 동거를 하며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가 사막 탐사를 하며 끼워넣게 되는 한 여인과의 비감어린 사랑얘기와 어우러진다. 

캐서린은 사막의 탐사팀에 뒤늦게 합류한 이의 아내였으니 진부한 불륜의 도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알마시와 그녀가
대저택의 후미진 곳에서 벌이는 은밀하고 암시가 가득한 정사장면. 인도인 용병 킵이 간호사 해나를 도르래에 태워 번쩍
날아오르게 하여 교회의 성스러운 벽화를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장면.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야외에 전신화상으로 옴쭉달싹할 수 없었던 달마시를 들것에 태워 나가 킵, 해나. 카라바지오가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만의 축제를 열며 열광하는 장면. 지금도 현현한 이 영상들은 나의 눈에 붙어서 나의 내밀하고 여린 부분에 붙어서 같이 숨쉬고 있다. 

영화의 구성은 아무리 치밀하다고 해도 영상안에 담아내려는 온전한 시도들을 위하여 허술한 공간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기도 하다. 그 틈에 관객들의 상상력이, 때로는 습관화된 경멸이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영화를 주변에 권해주기도 한다. 적어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원작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심증을 굳어지게 했다. 영화의 짜임새가 불친절하면서도 아주 예민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글로써 파고 들어간 부분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버렸다. 

마이클 온다치라는 이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성을 가진 작가가 뒤에 있었다. 부커상을 수상한 것은 차라리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다. 영상의 틀 안에서 굳어져 버린 인물의 이미지를 습관적으로 투영하게 되기 때문에 원작의 인물을 왜곡해서 해석할 우려가 있지만, 적어도 죽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그 수많은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묘사를 눈 앞에서 마술처럼 즉시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는 기막힌 특혜도 누릴 수 있다. 

일단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달마시는 완벽했다. 그 달마시를 알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원작 속의 달마시도 불가해하게만 여겨졌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다이어리처럼 들고 다니는 남자.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지도화하는 남자. 사막의 문맥 속에 항상 물기 속에 행복해했던 여인 캐서린을 끼워 넣으며 고심했던 남자. 그러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주장당하는 것도 주저했기 때문에 잔인하게 사랑의 마침표를 찍고 만 사람. 캐서린이 결국 남편의 질투로 인한 의도적인 비행사고로 거의 죽게 되자 동굴 속에 그녀를 안고 가 정성어리게 그녀의 몸에 마지막 책을 쓴 사내. 캐서린이 달마시보다 열여섯살이나 연하로 설정된 것은 영화에서 거의 같은 연배로 보였던 여배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틀어진 것이었지만.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해나는 세상에, 스무살이었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그런 원숙하면서도 들까부는 여인이 아니라 완전히 미성숙하면서도 묘한 체념의 무게를 가진 여자애였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인도인 공병도 이십대였고 그가 해나에게 해 주었던 그 벽화 감상 기행은 원작에서는 중세를 연구하는 노학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원작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지만 원작을 왜곡했다는 생각보다는 영상으로 가동했을 때의 그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의도적인 수정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책. 이 책. 진부하고 또 진부하지만 나는 이 책에 별 다섯 개가 아닌 온 지구상의 별을 아니 온 태양계의 별을 다 그러모아 붙여주고 싶다.(과장이 심한가?--;) 번역한 책의 행간을 연필로 그어 더럽혀 보기는 처음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비선형적 시간을 넘나들고 등장인물 사이를 마음대로 미끄러져 오고 가는 그 수많은 아름답고 명징한 단어들. 어구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는 시카고 트리뷴의 찬사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는 밤이면, 그는 다시 또다른 별자리가 된다. 그는 천 개의 적도로 이루어진 팔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 포옹하며 잠들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파도가 친다. -p.282 

사랑은 참으로 작아 바늘귀도 들어갈 수 있다.-p.380 

게다가 이러한 시인의 심장은 2차 세계대전이 떨치고 간 그 수많은 불합리와 그 비이성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더불어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감싸여 더 세차게 고동친다. 폭탄해체를 위해 투입된 인도인 용병 킵의 인생 그 자체가 작가가 전쟁이 남기고 가는 그 수많은 상흔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사회소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 대목도 이 곳이다. 

이제. 스리랑카 태생의 미국인. 영원한 이방인의 슬픔을 머금고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작가 마이클 온다치와 이 소설의 영화화 작업을 아주 매혹적이고 도전적이었다고 즐겁게 회상했던 고인이 된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작별인사와 더불어 그들의 그 이름들을, 달마시가 끝내 사막에서 잃어버리고 만 그 이름들을 내 손 안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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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23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는 저 영화이후론 별 신통치가 않아요,,,아쉽게도,,,쩝
저는 아직도 저 영화를 보면 무너집니다,,,그래서 책은 읽지 않고 있어요,,,,
멋진 페이퍼에요~.^^

blanca 2010-01-23 13:54   좋아요 0 | URL
우와! 나비님이당! 맞아요--;; 랄프 파인즈 이 영화보고 완전 빠졌었는데 도통 좋은 영화가 안나오네요. 열입곱 연상 여인네랑 살림 차렸다는 얘기까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저도 이 영화 보면 수시로 무너집니다. 원래 영화랑 원작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기울기 마련인데 책보면 더 무너집니다. 이 책은 일상에서 좀 떠나 한적한 곳으로 여행가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빠져 있다가 일상을 돌아보면 괜히 신경질이 나서-..-

순오기 2010-01-2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 더 리더의 그 남자였지요?


blanca 2010-01-23 14:2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더 리더를 안봐서^^;; 더리더에 나왔나 검색들어가 봅니당!

blanca 2010-01-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네요. 저 몰랐어용!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0-01-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만 봤지요. 생각만해도 두근거려지는 영화에요.
역시 원작의 저렇게나 아름다운 문장이 영상으로 표현되기엔 한계가 있겠어요.
원작을 읽고싶어집니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 칭송 받다니요.

blanca 2010-01-24 20:28   좋아요 0 | URL
솔직히 원작이 많이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상당부분이 이미지로 얘기되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아. 정말 대단한 작가더라구요.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 수많은 분위기와 이미지를 그렇게나 잘 표현해 놓다니.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만큼요.
 

싸이에 한창 열을 올리다 의식적으로 안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안하다 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결국 열중할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 불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 의외의 막막함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친구의 사생활을 안부를 궁금해하는 용도가 아닌 끈적끈적한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그 변질이 점점 역겨워졌다. 온라인으로 하는 소통이 그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감정의 정리 및 포장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어느새 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메아리가 되는 것 같은 한계에 부닥쳤을 때 나는 반문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열심히 칭찬의 댓글을 인사치례의 댓글을 주고 받았던 우리는, 과연 서로의 목소리와 서로의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닐까? 신기하게 싸이로 친밀감을 더해갔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정작 전화선 너머에서는 심지어 얼굴을 사이에 둔 탁자 너머에서는 그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자꾸 객관적인 척 중립적인 척 마치 온라인에서 우리의 관계는 재탄생한 듯 무덤덤하고 치기어린 조언을 남발해대고 있었다. 여기서 중지하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묘하게 꼬여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담배 끊듯 힘겹게 싸이를 끊어가고 있다.  

거의 10여 년을 활동하는 까페가 하나 있다. (여기서 활동은 가입후 글 열람 및 댓글 달기) 원래는 재테크 까페인데 하나의 작은 사회 같다. 익명에 기대어 물론 닉네임이 있지만 자신의 옆사람에도 털어놓지 못할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서로 의논하고 조언해 주고 울어준다. 실제 글을 읽다 너무 감정이입이 되 펑펑 운 적도 있고, 정말 힘든 순간 울먹이며 올린 글들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거리기도 했다. 나름대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들에 툭툭 달린 불친절한 댓글들이 되레 나의 결단을 만들기도 했다.  나의 취향에 맞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친구의 일상처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소통.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또다른 영역의 진일보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치부를, 나의 고민을, 지인들에게는 때로는 자존심때문에 때로는 망설임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것들을 나를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관계 속에 투영되는 각종 끈적끈적한 선입견과 암시,조종 등을 피해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은 눈도 마주치지지도 손도 잡을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 있다. 더 대담해질 수 있다. 그 이상의 관계의 진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실망도 없다. 때때로 악플이 달려도 그 사람은 나의 전체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의 몸체 속에 가두어 놓은 그 찰나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기 때문에 썩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는 친구가 내가 올린 사진에 묘한 늬앙스를 풍기를 댓글을 달아놓았을 때, 혹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달아놓은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서로가 아주 강도가 강한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런 익명의 소통은 사람의 직접 대면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맺기의 서투름때문에 더 조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현실의 친구들을 덜 만날수록 나는 이 까페에서 더 오래도록 머물고 더 많은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로웠다. 내가 던진 말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응답받을 수 있고 우리의 관계는 그 댓글의 주고받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성친구를 소개시키듯 자기의 글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손털고 나와 버린다.

눈동자를 마주친 사람들을 익명의 관계로 재설정하는 것. 정이현 작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친구가 여기에 갔었구나, 제를 만났구나를 그애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의 사진과 설명으로 알아야 할 때 느끼는 그 약간의 배신감과 서먹서먹함이 던져주는 아득함. 그건 소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닉네임으로 나에게 표식을 지우고 둥둥 떠다니는 그 관계에서도 결국 남고마는 이 아쉬움은 또 어떻게 추스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소통을 갈구하지만 결국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다 산화하고 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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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19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공감합니다.
요즘에 제 서재가 방문자 폭주라 인터넷의 위력과 더불어 공포를 실감하는 중이거든요.ㅜㅜ

blanca 2010-01-19 14:28   좋아요 0 | URL
아..진짜 순오기님 방문자 수 보니까 이제 천단위는 가뿐하게 넘기더라구요. 이 정도면 공인으로 대우받으셔도 될 듯. 그런데 저도 우연히 순오기님 서재에 방문했다 하도 재미있어서 며칠간 아주 옛날글부터 찬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만큼 인기도 많고 공감도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라로 2010-01-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배 공감,,,늘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blanca 2010-01-19 14:30   좋아요 0 | URL
nabee님 반가워용^^ 사진이 하도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봤답니다. 알라딘 서재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도 같이 되잖아요. nabee님의 귀여운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2010-01-19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1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곳에 거의 5년 정도를 있었던 듯 해요.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내 속마음의 패악을 이 곳에 털어놓고, 그러면서 책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들은 실제 얼굴을 보고 만나보기도 했지요. 처음 보는 이들인데, 낯설지가 않았어요. 요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책을 읽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 따라 설정되기 마련인데 이 곳에는 필터링을 하질 않으니까, 이들은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만나게 된 것이어서 그런 걸까, 혹은 책이라는 매개체가 중간에 중매쟁이처럼 끼어 있어서 그런 걸까, 생각을 했어요.

싸이는, 아, `나 이런 곳에 와봤소' `나 이런 것 먹었소' '나 이런 것 사들였소' 그런 느낌 탓에 오래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제 싸이는 저도 안가요) 공간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이 공간은 제겐 무척 각별하답니다.

blanca 2010-01-19 22:27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은 무언가 좀 다른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열차게 리뷰들을 올리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근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Jude님의 5년의 시간이 참 부럽네요. 오히려 알라딘에서 더 많은 나의 모습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요. 싸이 ㅋㅋㅋ 극렬하게 동의합니다. 제 싸이 제가 보고 막 긁습니다.

302moon 2010-01-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엔 알라딘에 둥지를 틀었던 기간이 짧았었는데, 올해는 힘차게 달리려 해요. 함께 해요. ^^ 제가 요사이 싸이를 멀리하는 이유이기도 해서, 공감하게 돼요. 가까운 친구들이 통 하지 않는 탓도 있고, 속내를 드러내기 뭣한 상황도 오고 그래요. 책으로 맺어지지 않은 일촌들도 수두룩해서 그럴까요. 그들은 그들만의 잣대로 저를 보려 함을 서서히 깨닫고,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에도, 간혹 싸이로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끊지는 않고, 가끔 ‘나 살아 있음’을 알리는 용도로 슬쩍 들르는 공간이 되었어요. 알라딘에는 멀리 사는 책 친구들이 많지만, 가까이 있는 듯 친근해요.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 진솔하고 더 차진 사이가 된! 주저리가 길어졌어요. 편안한 밤 시간을 보내고 계셨으면 해요. :)

blanca 2010-01-20 13:42   좋아요 0 | URL
아.302moon님, 정말 그래요. 또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걸로 연락을 전담하는 애들이 있어서. 아쉽고. 또 들어가면 어느새 집중하다 실망하고. 벌써 오후가 기울어 응답하네요. 빗소리가 넘 좋은데. 행복한 오후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0-01-20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문글이 공감되어요. 이 페이퍼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구요.
어느 정도의 선은 중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눈을 보면 그냥 좋은 분들이 있더군요.
글로 느껴지는 부분이 대개는 맞구요. ^^ (그것도 대상에게서 제가 바라는 이미지일까요?)

blanca 2010-01-20 13:46   좋아요 0 | URL
대문글.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저도 또 공감되네요^^;; 맞아요. 사람에도 느낌이라는 게 맞아들어가더라구요. 어느 정도의 선. 유념해야 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래 가려면 약간 아쉬운 듯 유지해야겠지요. 프레이야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절로 2010-01-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법질서, 이런 기본 프레임을 통한 소통밖에는 안 된다. 심오한 소통은 순전히 개인의 몫인데.....나는 회의적이다...김훈, 그의 말이다. 저도 그에게 한표 던집니다. 몰래 훔쳐만 보다가 그만 '세'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이유 '소통'이 칼날을 제대로 겨누며 말합니다. 너 외롭지..오늘은 간만에 비가 오네요..사람보다 비가 따뜻.

blanca 2010-01-20 13:50   좋아요 0 | URL
저도 소통이라는게 결국 나한테 던지는 독백을 좀더 크게 내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김훈 얘기가 참으로 와닿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빗소리가 진짜 좋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투기 토론방이란 데가 있는데 댓글이 육두문자가 섞이는 건 기본이고 진짜 대단하지요.그런 데도 저는 그런 거친 게 더 낫더라구요.알라딘에서는 댓글이 사실 굉장히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어쩌다 논쟁이 사실상 싸움으로 번질 때 보면 날이 서있어서 섬뜩할 때가 있어서 굉장히 조심하게 됩니다.

2010-01-2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문한지 이틀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상품 준비중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한자 실력은 늘어간다.
잘하면 교육용 한자(--;;) 1,800자를 몇 달 안에 습득하고 3급 시험을 치러 갈 수 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치기를 한 번 부려 1급을 시도해 볼까 싶기도. 명함의 한자를 못읽어 전전긍긍하며 웅크리고 열심히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들켰던 기억이 아프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하이드님 덕분에. 그 몽화적인 불륜(--;)의 잔영 만큼 표지도 너무 매혹적이다. 영화가 참 좋았지만
서사의 긴박감 대신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는 나른한 전개 때문에 은근히 지루한 맛(이상하게 이영화는 지루한게 제격으로 보인다.)이 있었는데 책도 약간 지루하다는 평이 올라와서 다소 겁난다. 이외수재미없는 책은 재수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재미도 주관적인 기준에 디룽디룽 매달리지만 그래도 사랑했지만 지루했던 영화는 영상미로 버텼다지만
책은, 음. 상당히 곤란하다. 재미없으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는 너무 소설만 읽어대는 것 같아서 균형 차원에서.특히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그의 논리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로쟈님의 서평을 재미있게 읽었다. 언니 아기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되레 사람들이 멀거니 구경했던 모습을 보고 난 후 측은지심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대체 윤리적 행위라는 게 본질적 경향성이라고 믿게 된 것은 교육 탓인가, 언론 탓인가. 의인은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것이겠지. <설득의 심리학>에서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강도한테 칼에 찔려 허우적대는 여인을 아무도 돕지 않고 구경하고 있는 잔인한 광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건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사례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가 해주겠지,라는 대중에의 함몰이라는 근거로 설명된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에 대한 기대로 붕붕 떠다니는 것도 안타까워 보이지만 불신과 악의적 단정 하에 침울한 사람의 
모습은 더 불쾌하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롤리타>는 영화 호평에 기대어 뒤늦게 그리고 어둠의 통로로 보려 했던 시도가 좌절로 끝난 오기 덕택에.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늦지 싶다. 뒤늦게 품절이라고 할 듯. 왠지 예감에. 

그리고 갑자기 읽고 싶어 온몸을 긁게 되는 책들. 배송이 밀리니 뛰쳐 나가 사야 하나. 

 

 

 

 

 

 

 

 

<벨아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여자들을 유린하는(적절한 표현인지) 스토리라고 한다. <면도날>은 재미를 보장하는 서머셋 몸이기에 주저없이 선택한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얼마나 재미있는지 읽으면서 깜짝 깜짝 놀란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은  단조로운 얘기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독성 있게 감쳐 보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 같다.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주인공이 하느적 하느적 걸어다니는 타입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그 허구의 공허함 속에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통찰이 파고들어가 움찔움찔하게 되는 재미를 알아 버렸다. 거짓말이 다가 아니라, 그 거짓말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인생관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석의 향연이 결국 작가의 자서전 내지 일기를 읽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교묘한 위장술 아래 자신을 숨겨놓는 작가들의 그 트릭을 발견하는 쾌감, 그게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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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1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벨아미...저는 이 책이 한동안 번역이 안 되길래 안타까웠어요.40년전 정음사 번역본을 읽었거든요.출세하려고 온갖 추한 짓은 다하는 젊은 놈이 등장하지요.게다가 직업이 기자! 여하튼 소설가들은 기자를 싫어하나 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일단 읽어보세요.모파상 특유의 인간묘사가 적나라합니다.

blanca 2010-01-18 13:51   좋아요 0 | URL
40년 전에 읽으셨다는 얘긴 아니시죠?ㅋㅋㅋ 직업이 기자군요. 더 흥미가 갑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18 16:19   좋아요 0 | URL
'40년전의 정음사 번역본'으로 써야 하는데...추잡한 기자를 모델로 한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있죠.

2010-01-1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곳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전쟁과 평화, 논쟁과 타협, 이성과 감성, 위선과 위악.
들어가는 문은 좁았다. 그러나 나오는 문은 턱없이 휘했다. 허전하고 슬펐다.
나는 오른쪽 발을 그 출구의 문지방에 걸친채 그대로 있어도 될 구실을 찾아 더듬거렸다.
톨스토이의 분신 같은 레빈이 고개를 들었다.
안나는 갔어요. 나도 가게 됩니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순간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당신도 결국 한 줌의 먼지로 스러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 경계 너머에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진리가 스며 있습니다.
불합리한 사랑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이 힘이 오는 그 시원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먼저 본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함정과 약간의 생생함을 떨구었다.
소피마르소의 그 에메랄드 빛이 살짝 휘감긴 회색 눈동자는 안나의 그것과 거의 흡사했지만
안나의 특질인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는 생기로 묘사되는 그 과잉된 뭔가
되레 온순해 뵈는 그녀의 인상에서 도저히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억눌린 생기를 마침내
발산하고 마는 안나를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건 분명 실책이었다. 소피 마르소의 안나를 알아 버린 것은.
내내 안나 카레니나를 소피 마르소로 치환하여 떠올리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들과 인용된 각종 원전들에 대한 친절한 각주들은 그 자체로 돋보였다.
모지락스러운, 숙부드러운 부인(사랑에 빠지기 전의 안나에 대한 세간의 평^^), 잇바디(치열),너나들이(격의없는 사이)
같은 우리말들을 활용하여 정성스럽게 한 번역은 간혹 만연체로 늘어지는 그 지루함에 대한
아쉬움 정도만이 남을만치 훌륭했다.
 

결국 불륜의 로맨스이자 실패한 일탈로 귀결지어질 수도 있는 안나의 사랑만이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는 아니다.
그녀의 오빠 스티바의 불륜으로 문을 열고, 스티바의 처제 키티와 결혼한 친구 레빈의 철학적 성찰로 작품의 문을 닫은 것은
톨스토이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맞춤한 양단 같다.
온갖 불합리와 감정의 과잉이 판치는 세상사를 가족의 안에서 형상화하고 그 자잘한 불합리와 비극들의 소재들을,
결국 어떤 절대적 존재의 절대선으로 다림질하여 아퀴를 짓는 것.
물론 이런 이상주의적 결론에 아쉬움이 조금 남기도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틀 안에서 완성되는 모습이 그 자체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 같다. 
소설은 철학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면 이 아쉬움이 그대로 미결인 채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허구 안에서 진실의 사금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경험이다. 

세 권의 두툼한 분량이 아쉬울만큼 재미있다. 뒤로 갈수록 더 속도가 나고, 안나의 내면에서, 또 레빈의 내면에서
들고나는 그 수많은 사고의 편린들이 긴박감 있게 묘사되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톨스토이는 꼭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한번 휘휘 저어보고 나온 이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마음 속을 지나가는 그 수많은 상념들을 집어낸다.
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나 감정의 조각들도 그의 펜 끝에서는 하나의 서사가 되어 나오니 놀라울 따름이다. 

 

표지의 라일락빛도 안나에게 사돈처녀 키티가 상상으로 입혀보고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라일락빛에 대한 암시인 것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물론 안나는 그 파티에 키티의 기대를 저버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와버리지만. 아주 자상한 북커버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뭐든지 필연으로 감치는 것도 재미있는 습관이라고 합리화하련다. 

다 읽고 나서는 1권의 중반까지 걸치고 오만하게 내렸던 결론을 뒤집고도 한참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고전이란 이런 것이구나. 소설적 성취가 여기까지도 올 수 있구나.
답답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를 마구 끄집어 내어 풀리는 데까지 막 흔들면서 풀어내고 마무리를 넘겨준 사람을 만난 느낌.
삶에 던지고 싶은 수많은 질문들을 들키고 그 해답을 차근차근 함께 연구하다 갑자기 내처진 느낌.
안나의 그 무모한 사랑과 그 사랑에 던진 과잉된 무언가의 그 극적인 마력에 이끌리다가도
심심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항상 질문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레빈에게 결국 끌려가고 마는 아이러니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그가 농부들과 더불어 풀베기를 하는 그 노동의 무아의 지경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충동과 순간을 뚫고 나가는 과잉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랑의 피곤함보다는 사물에 대한 우직한 투신과 연마가 남기는
담백한 만족감을 원한다면 자기기만일까, 아님 늙어버렸다는 방증일까.
이렇게 또 질문들은 또 숱하게 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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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1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안나 카레니나를 독파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명이나 있을까요?

blanca 2010-01-16 22:03   좋아요 0 | URL
아...침울했는데 노자님 칭찬에 기분이 급좋아지는 이 단순함이라니. 책 다 읽었다고 칭찬받기는 또 처음이네요^^ 좀전에 우리나라에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다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답니다.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4:53   좋아요 0 | URL
율리시즈...유명하긴 하지만 실제로 읽기는 힘든 책들에 관심이 많으시군요.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도라면 몰라도 율리시즈는 좀...

다락방 2010-01-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과 blanca님의 이 댓글들을 보니, 반드시 율리시스를 완독해야겠다는 의욕이 불타올라요. 2010년에는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어요. 불끈!

blanca 2010-01-19 14:36   좋아요 0 | URL
아. 저 다락방님이 이거 산거 페이퍼 검색하다 보고 저도 사고 싶지만 읽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정말 다 읽고 리뷰 올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당!

프레이야 2010-01-2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에요.
소피 마르소는 착해보이는 약간 처진 눈꼬리가 어떤 경우엔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나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더 분위기가 풍성해지는 배우 같아요.
저도 라일락색 참 좋아하는데요, 북커버에도 필연이^^

blanca 2010-01-24 20: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피마르소는 언제나 착해보이잖아요.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구요. 라일락색 참 묘하게 이뻐요^^
 

요새는 인간 관계의 위선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인간 간에 모든 허위와 위선을 다 솎아내고도 남는 아름다운 부스러기들이 있기는 한 걸까?
친구, 우정, 연인, 사랑. 이게 정말 실재하는 것들일까?
아니 다만 살아나가기 위해 견디기 위해 그냥 모래 위에 쌓아놓은 하나의 허상의 탑이 아닐까,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영롱하고 빛나는 감정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완전 착각하며 행복해하던 어리석은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와보니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좀더 솔직한 관계가 추악하지만 담백하다면
좀더 위선적인 연극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덜 위선적이려고 한다.
이제 더이상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나만은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의 삶의 유인을 던져버리려고 한다. 

인간은 다 고만고만한 존재다.
다만 더 솔직해지느냐(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싸가지가 없다고 폄하하지만), 더 위선적이냐의 차이뿐.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중략)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 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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