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불쌍한 인간 두 종류가 있다. 무언가에 절대 취할 수 없는 사람,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후자다. 커피와 책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가 없다.  

일단 커피 얘기. 커피는 늦게 배웠다. 재수시절 등원 후 아침 문제풀이 비디오 끝에 머라이어 캐리의  Hero 뮤직비디오의
가사와 함께 사탕처럼 머금은 자판기 커피의 달콤함은 그 생활을 나름 견딜만할 것으로 때로는 즐길 수도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 잔. 그것도 아침의 자판기 커피. 그걸로 하루를 유쾌하게 열고 기분좋은 노곤함으로 닫을 수 있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커피를 마실 필요가 없을 만큼 삶을 때로는 즐길 수 있었다.
카페인에 취하지 않고 명료하게 응시하는 세상은 헛된 기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말 힘들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닐 거라는 취업 담당자의 입사 축하 메일의 냉정한 고언은
직장 생활이 딱 그 만큼의 기대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사람과 돈을 상대하면서 나는 아주 자주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페인을 들이켰다. 명료해지는 듯하지만 기실 메가리가 없어지는
그 환각에 기대어 마시고 또 마셨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고 그 옆에서 나는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이제는 비대한 기대 대신 과도한 체념이 버거워 커피를 마신다. 두 잔, 세 잔. 속이 쓰리고 뾰루지가
올라오고 사소한 지출이 쌓여 제법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리고 또 그것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치사한 착취구조에 대한
찝찝한 느낌까지 더해졌을 때 나는 이제 카페인에 끌려가지 않고 그것을 절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읽고 싶은 글들이 있다. 커피 끊기 성공 수기 같은. 그러나 과정이나 의욕을 기록한 글은 많지만 성공했다는 훌륭한
글은 없고 그것을 찾아 헤매다 보니 더 비참한 기분이 들고. 마침내 내가 발견한 것은 '생로병사의 비밀'!
커피야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저 자신의 몸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강조하는 그 분위기가 왠지 상큼하다.
어제는 그 효과로 두 잔만 마셨을 뿐이고 ^^;; 브로컬리도 열심히 먹고 그래서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다고 괜히 합리화도 하고.
커피로 시간의 구획을 짓지 않으면 한없이 엿가락처럼 배배 꼬여 늘어질 것만 같은
그 묘한 두려움을 조금은 희석시켜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방금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들어왔다는 사실.
발자크는 하루에 백잔을 마셨다니 좀 위안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책 중독은 관대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니 오히려 권장되기도. 하지만 이것도 분명 시간과
돈과 그리고 실재를 양보, 또는 소비해야 된다. 우리는 아니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많은 것들을 방치, 회피한다.
 

나의 실제 삶을 살아가는 대신, 수많은 타인의 삶을 관찰, 엿보고 그들의 삶에 경도되거나 염증을 느끼거나 하며 그것에
취해있는 것도 일종의 회피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니 조금씩 쉬어갈 필요가 있다. 나를, 나의 삶을 돌아볼.
 

요즈음 심하게 책의 구입에 취해 있다. 나름대로 한 달에 오만원을 넘지 않고 다 읽지 않고는 추가 구입하지 않는다는
속이 빤한 원칙을 세웠지만 이미 무너지고 있다.  고작 20일인데. 아직 말일도 아닌데. 책이 주욱 밀려 있다.
중고서점도 원망스럽다. 꼭 지금 주문하지 않으면 누군가 휙 낚아 채 갈 것 같다.  <의사소통장애>는 반값에 나와 있어
충동 구매했는데 읽을 것 같지 않다.-..- 왜 이런 책을 주문한 거지?

 

 

 

 

 

 

 

 

 

지금 읽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엄청 까대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란 대목에서 포복절도했다. 몸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여러 작가의 사생활, 그리고 대표작들을 신랄하게 칭찬할 것 해주고 욕하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읽고 싶지 않아졌다.
치프킨이 도스토에프스키의 바덴바덴 도박기행을 소설화한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상당 부분 그에 대한 이해와 체념적 미화가 있는데 대비된다. 참 인상깊고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강추 강추!

 

 

 

 

 

  그리고 완전 낚였다. 보통 군한테. 대머리 보통 군이 얄미워졌다.  

 

커피 마시러 나가 영풍문고에서 스테디셀러 세일 30%에 광분하여 또 잊고 있었던 적립금 천원까지 써가며 모처럼 알찬 소비를 했다고 자부하며 게다가 이런 나중에 반전의 피박을 뒤집어쓸 고언까지 옆지기한테까지 해주며 

"그게 말이얌. 사람들이 무조건 인터넷이 싸다고 생각하는데 아닌 경우가 많아. 오프가 더 쌀 때도 많다니까. 뿌듯하다. 뿌듯해!" 

집에 와서 알라딘에 확인해 보니 반값행사하고 있다. 완전 떡실신했다. 

 

그러니까 책과 커피에 취해서는 어떻게든 고것들의 비어져 나온 살을 코르셋으로 감추고 합리화해 보려고 참 무던히도 애를 쓰다 또 고것들한테 농락당하고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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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2-2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지금 막 반값행사라고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이미 아셨군요. ㅎ
교보에서 스테디셀러 반값행사 하고 있는데 쏠쏠해요. 이레는 보통을 반값에 팔아먹는다는 쳇

제가 사려고 사려고 며칠을 며칠을 고민했던 닻무늬가 있는 예쁜 신발이 있거든요. 진짜 고민하다 어제 속상한 일 있어서 냅다 질렀는데 (그러면 안 되지만요) 책값 5-6만원은 별 고민도 안 하고 (그러니깐, 5만원 넘겨서 2천마일리지 넘길 고민과 6만원 넘겨서 알사탕 천개 받을 고민 정도나 하고) 별로 비싸게 여겨지지도 않는데,

그 비슷한 가격의 신발은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요.

7천원짜리 '아이 깨끗해' 레몬 거품 핸드워시를 왜 몇주째 못 사고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걸까요! 철푸덕-

오늘만 해도, 알라딘에서 제가 좋아하는 맨소래담 브랜드의 폼워시 1+1 행사 하는거 보고 아싸, 하고 지르며 가볍게 책 두 권을 아무 생각 없이 끼워넣고 말이죠.

커피는...
커피 끊을 생각 하지 마세요. 커피 많이 마셔야 이태리 남자들처럼 멋있어져요. ...응? 하하 ^^

저에게 가끔 '영혼을 팔아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절실한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커피'에요. 온니 커피에요. 이건 과장없이 정말.

오늘 10년 다이어리도 도착했겠다. 다이어리에 쓰는 것들은 다 이루어지게 할 꺼에요. 그러니깐, 전 정말 책을 덜 살지도.. 하지만 전 감히 커피를 줄이거나 끊을 생각 같은건 하지 않아요.

blanca 2010-02-20 22:01   좋아요 0 | URL
이런 긴 댓글이라니. 너무 고맙군요^^ 커피 많이 마시면 이태리 여자가 아니라 남자처럼 되는 건가요?ㅋㅋㅋ 그죠. 진짜 영혼을 팔린 기분이라니까요. 맨소래담 폼워시도 나와요? 또 솔깃^^;; 10년 다이어리는 꼭 페이퍼에 올려주세요. 이런 거 무자게 관심많고 호기심도 많아서요.

그런데 책은 한꺼번에 주문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찔금찔금 삼만원너치씩 주문하고 마일리지 혜택도 못받고 바보 같다니까요. 커피는 흑 저도 줄이고 싶지 않은데 속이 쓰려서요-..-

노이에자이트 2010-02-2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몸의 저 책 뭔가 했더니 예전의 <세계 10대 소설과 작가>를 새로 냈군요.상당히 재밌죠? 필딩의 <톰 존스>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어요.그런데 몸의 사생활도 결코 도스토예프스키를 욕할 처지가 아니죠.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노자님 몸의 사생활이라니 완전 솔깃한데요. 저는 도스토예스프스키가 강간까지 했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읽지 않을 거라고 결심까지 했다는^^;;

근데 이 책 완전 재미나네요. 진짜 완소입니다. 그런데 모옴이 어쨌는데요? 네? 궁금해서 잠 못자겠다.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2-21 15:57   좋아요 0 | URL
몸의 번역본에는 해설 쪽에 다 나올 걸요.제가 작가의 생애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런 글을 정독하는 편이죠.블랑카 님도 몸의 책 읽어보면 작가소개란 따위에 나올 거에요.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형제>에 부자지간에 여자 두고 싸우잖아요.문학에서 콩가루 집안 안 다루면 이야기가 안 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막장이지요.하지만 소설가더러 건전한 새마을 드라마 만들어라 할 수도 없고...유명한 고전작품 중에 막장스런 장면이 의외로 많잖아요.모파상의 <벨아미>도 그렇고...

302moon 2010-02-2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무언가에 취해 있곤 하는데(주위에서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 아이템이 여러 가지랍니다. 책과 커피는 물론이고, 음악(듣기와 부르기), 미술(드로잉과 디자인 등)에 흠뻑 빠져있지요. 어릴 적부터 줄곧.(커피는 고등학생 때부터 마시기 시작했어요.) 요즈음은, 꽹과리를 쳐볼까 하고 구입 계획에 있습니다. 그렇죠, 책은 사도 또 사고 싶어지는 거 같아요. 신간 나오면 괜히 흘깃거리고 들춰보고. (웃음)
오랜만이에요. ^^

blanca 2010-02-21 13:42   좋아요 0 | URL
302moon님 진짜 오랜만이에요.^^ 책중독이야 알라딘 이웃분들이란 가장 큰 공감대니까요. 그리고 님은 어떻게 노래 솜씨와 그림 솜씨까지 겸비하셨나요? 저는 예체능이라면 흑흑 유명했답니다. 못하기로 ㅋㅋㅋ 괭과리! 좋죠. 저는 해금이랑 가야금에 관심있어서 올해 말에 기회가 되면 좀 배워보려고 생각중이랍니다. 언제 한 번 협연을...^^;;

순오기 2010-02-2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침밥을 꼭, 반드시 먹는 아줌마였는데~ 작년에 혈압도 높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아서 과감히 끊었어요. 하지만 독서모임이나 외출하면 간혹 마시긴 하지요. 그것도 절제한다면 못 살지도 모르니까.ㅋㅋ
화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꼭,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요. 제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주세요, 녜~ !!^^

2010-02-2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2-21 08:55   좋아요 0 | URL
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민음사 세권짜리 과감하게 사놓고, 아직도 못 읽었어요.. 순오기님의 댓글을 보고 지금 반성 중 입니다. ㅠㅠ

blanca 2010-02-21 13:4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 어렵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읽으셨어요? 저는 다 읽었다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필독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이 너무 거하게 욕해 놓아서 좀 망설여지기도^^;; 언젠가는 읽어야겠죠? 그리고 저의 문제는 빈 속에 커피를 마신다는 겁니다.흑흑.

순오기 2010-02-22 21:45   좋아요 0 | URL
아웅~ 빈속에 커피는 정말 안 좋아요. 위 때문에 고생을 안해보셨군요.
저는 스무살때 좀 고생을 해서, 빈 속에는 콜라도 안 마십니다. 물론 커피나 술도 안 먹고요.
어쩌면 그런 기본적인 건강관리가 자칭 에너지 여사로 살게 하는지도 몰라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2002년 8월 초등독서회 토론도서라서 열린책들 것으로 봤어요.
상권은 2002. 8.13~18일까지, 하권 8.19~22일 읽은날짜가 적혀 있네요.
우리도 쉽지 않았지만, 그걸 읽었다는 뿌듯함은 하늘을 찔렀다지요.^^

마녀고양이 2010-02-2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커피와 책에 미쳐 있습니다. 둘 다 중독이 너무 강해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원두알 갈아서 커피를 한주전자 내립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마시지요.. 회사 다닐 때는 아침에 큰거 한잔 사들고 출근했었습니다. 책은... 아... 읽기가 아니라 사는데 미쳐있는게 문제랍니다. ㅋ

blanca 2010-02-21 13:46   좋아요 0 | URL
그런데 결국 책은 사는데 미치는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안 그럴줄 알았는데 지금 안 읽은 책 쌓아 놓으니 탑이네요.^^;; 목표는 우야든동 3월까지는 책구입을 안하고 있는 책 다 정독하기입니다. 참, 그리고 원두 내려서 마시는 거는 건강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믹스를 많이 마셔서 고민이랍니다. 건강에 진짜 안좋다고 해서요.

프레이야 2010-02-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와 책, 저도 밀쳐낼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구요.
님의 중독은 지독한 사랑 같아요.
전 하나 더 영화요^^
인생의 베일, 참 좋았어요. 원작으로 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못 보고 지나갔는데
문득, 다시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blanca 2010-02-21 13:47   좋아요 0 | URL
영화~ 프레이야님 저도 영화를 너무 사랑했답니다. 빨리 육아에서 해방되어 신작 다 챙겨보고 싶어요. 인생의 베일이 좋다니 너무 기대되요. 안그래도 지금 옆에 있거든요. 아껴서 읽을까봐요.^^

마녀고양이 2010-02-22 15:02   좋아요 0 | URL
페인티드 베일 너무 좋아요.. 전 영화 때문에 거꾸로 인생의 베일을 샀어요. 영화의 풍광 사진이 얼마나 근사하고 잔잔하던지. 그리고 주인공인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가 표현을 아름답게 해서 참 좋았어요. 엔딩 음악의 애절한 음조는.. 아.. 다시 보고 싶다..

저절로 2010-02-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싶은건 먹어줘야 한다.
보고싶은건 봐줘야 한다.
사고치고 싶을땐 사고도 쳐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지.(헤~)

blanca 2010-02-24 14:25   좋아요 0 | URL
저의 문제는 너무 그런다는 겁니다.-..- 사고를 못 쳐서 그런 걸까요?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ㅋㅋㅋ
 

M의류몰. 길쯤한 팔다리에 마론인형처럼 요요하고 무심한 얼굴의 모델이 베이지색 가디건에 심하게 타이트한 스키니진을 입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고 있다.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설명은 하나의 첨언 같다. blanca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펑키하고 빈티지한 스키니진을 입고 만날 사람과 갈 장소가 있는지를. 단조로운 일상에서 사이다캔의 뚜껑을 따면 뿜어져 나올
탄산의 그 톡 쏘는 상큼한 첫맛을 그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스키니진은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이윽고 기다린다. 

무 엇 을. 택배 아저씨를.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특별한 설레임으로 채워진다. 그 스키니진은 blanca의 그 날이 그 날 같은
빈곤한 서사의 삶에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인터넷 쇼핑에서 얻은 주된 기쁨은 서사의 환각이다. 그 스키니진을 입는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통째로 개조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이야기로의
전진에 대한 기대로 그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생활들에 대한 선망을 포착해 낸 의류몰의 사진작가에게 포섭되고 만다. 
 

다음에는 어쩌면 그녀는 드레시한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 마론 인형 같은 모델에 또 굴복해 장바구니를 두둑하게 채울지도
모를 일이다. T.P.O에 맞는 의복을 입으라는 그 주문은 어쩌면 선후가 전복된 음모일 수도 있다. 먼저 옷을 소비하고
그 옷을 입고 갈 적소를 만들어 내라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젊은 여자들의 적소를 찾아내지
못한 그 옷들에는 언젠가는 그 거죽만으로 주인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그 헛된 망상 속에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리며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꿉꿉양은 매일 퇴근후 친구들 미니홈피들을 순례하며 그녀들이 업데이트한 사진들 밑에 의례적인 경탄을 두서없이 주워섬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데 로그아웃후 느끼는 그녀의 비애감과 새로운 욕망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남편이 사준 물품들을 하루 걸러 전시하는 것이 낙인 친구 나공주가 자랑했던 아이폰은 원래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난 김에 내일 점심시간에 질러야 겠다고 결심하고 나공주의 그닥 이쁘지 않은 사내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는 것을 보니 결혼 얘기를 무슨 금기어의 주변부에 있는 것 마냥 부담스러워하는 뚝뚝군에게 하루바삐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여기에 오니 갑자기 신경질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나공주는 나보다 얼굴도 못나고 공부도 뒤졌는데 치기로 지원한 과가 하필 미달이었던 바람에 쉽게 합격하고 난 그 다음에는 인생이 무슨 반전 드라마를 보여주려고 작심한 마냥 착착 풀려댄다. 분명 친구인 것은 맞는데 잘 되면 한마디로 심하게 배가 아프다. 어찌 됐든 꿉꿉양은 내일 아이폰을 사고 저녁에 뚝뚝군을
만나 신경을 긁어대는 것으로 지금의 불쾌감을 좀 희석시켜야 겠다고 결심하고 이런저런 상념의 아퀴를 짓는다.  

자, 이 모든 욕망들. 시기들. 이건 온전히 꿉꿉양의 것일까?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이 각자의 욕망의 기준을 따라 혹은 그것에 휩쓸려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어떻게 뒤틀려 가는지를 아버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기실 욕망의 스펙트럼은 아버지의 그것에 의해서도 뒤틀려 굴절된다.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으로 덧씌어진 미완의 동화를 아버지는 딸들을 통하여 완성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맞이하는 충격적인 결말이 남기는 그 지독한 공허를 채워주는 것은 뜻밖에도 해설이다. 말줄임표의 소설에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어주는 그 명쾌한 해설 안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구원처럼 날아와 앉는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인간 욕망은 많은 경우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는 우리의 욕망이 이처럼 모방된 가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욕망에 의해 구축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휘청거리는 오후> 정호웅의 해설 중  

철저하게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매달렸던 욕망마저 나만의 것이 아니라니.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서 복제해 온 가짜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시달리고 좌절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소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소통의 장과 내러티브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그 욕망의 발로에 이르기까지 그 허술한 착각과 환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나만의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찾아내었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도리질까지 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슬픈 마리오네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자명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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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2-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랑 상관없이, 요즘 TV나 잡지, 지하철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나랑 인종이 다른가 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다리는 그리 길고, 머리는 조그마할 수가 있는거죠? 공중 화장실 거울 너머로 내 머리 위에 조그마한 얼굴이 하나 쏙 보이면, 진짜 승질납니다... ㅎㅎ

blanca 2010-02-17 22: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보니까요. 요즘 태어나는 아기들부터가 두상이 작더라구요. 제 딸은 해당사항없지만-..-

마녀고양이 2010-02-17 22:29   좋아요 0 | URL
제 딸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요즘은 저보다 얼굴이 더 커염.. ㅠㅠ (울 딸이 이 댓글 볼라.. 그럼 저 한대 맞아여!)

blanca 2010-02-18 13:24   좋아요 0 | URL
ㅋㅋ 마녀 고양이님 따님은 몇 살이에요? 이 댓글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귀여워요^^ 저는 커가면서 작아지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0-02-18 14:33   좋아요 0 | URL
저희딸 11살이여,, 알거 다 아는 무서운 딸네미져! ^^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청거리는 오후>를 영화화했을 때 아버지 역의 최불암은 당시 마흔도 안 되었어요.정말 노인역 전문배우.드라마 전원일기도 사십대 초반에 시작했는데...

blanca 2010-02-17 18:17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어떻게 그런 영화랑 드라마를 다 기억하세요? 우와. 그러고 보니 박완서 작품은 대부분 영상화되었군요. 최불암 ㅋㅋㅋ 할아버지로 태어나신 분 같아요. 그래서 장수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2   좋아요 0 | URL
제가 직접 볼 수는 없겠죠.연령상...저는 팝송이나 가요,영화 뒷이야기 같은 걸 좋아해서 그런 걸 관심있게 기억하는 편이죠.그리고 인터넷에서 신기한 정보를 많이 구하지요.또 70년대 80년대 시사잡지나 주간지도 집에 있구요.

아시마 2010-02-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페이퍼 진짜 최고예요.

blanca 2010-02-18 13:23   좋아요 0 | URL
이런 칭찬에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시마님, 저 박완서의 책 찔끔찔끔 사모으다 보니 결국 세계사에서 할인받아 전집 살걸,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드네요. 뒤늦게 완전 중독되서 읽었던 것도 또 읽고. 이제 여든이 되셨다니 새로운 장편은 기대할 수 없는 건지. 박완서샘 직접 꼭 뵙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18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보는 페이퍼, 휘청거리는 오후는 신문에 연재되는 걸 봤었죠.
드라마는 두어번 보고 안 봤던가 못 봤던가 그랬고요.
박완서샘은 평사리에 토지의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토지문학상 시상식에 박경리샘과 같이 오셔서 뵜어요.
정답게 사진도 찍었고요~ 자랑할 거 없으니 이거라도 자랑해야지.ㅋㅋ

2010-02-18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2-18 23:0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박완서샘이랑 사진까지 찍으셨다니요. 흑흑. 부럽습니다. 그리고 자랑할 거 많으시잖아요~ 삼남매, 그리고 문학적 조예, 구순한 이웃들, 게다가 아이들까지 가르치고 계시고. 쓰다 보니 한층 더 부러워집니다.
 

제기랄, 그 후에도 그가 사후에 누리는 고가의 그림값과 정당한 예술적 평가와 존경에 접할 때마다 그 소리가 나왔다. 
                                                                                                         -『우리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중 

박수근이다. 박완서가 『나목』이 여성월간지 소설 모집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 것도 결국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가난한 화가 박수근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수룩하게 덩치만 큰 화가는 미군들이나 그들의 연인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단돈 4달러를 받아 생활했다. 그의 <빨래터>가 최근 사십오억 이천만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감탄과 더불어 비감어린 씁쓸함을 꼬리처럼 달게 된다. 그가 생전 반도호텔 화랑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그림 팔렸어요?"를 외쳐댔던 것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호텔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구실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얘기를 고등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고 대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 순간 박수근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예술가의 신산한 삶 전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참 먹먹했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애잔한 슬픔을 느낀다. 죽고 나서 수많은 위작 논란에 시달릴 만큼 또 미술품 경매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는 뉴스의 중심에 설 만큼 경외받고 있는 그의 현재가 과연 그의 소외당한 삶 전체를 위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나도 박완서의 '제기랄'에 동조할 수밖에.  

 박수근 <빨래터>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전혀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중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언제나 그것을 완전하게 화폭에 담아내기를 소망했던 사내. 결국 그 별로 직접 가 닿고 싶었던 그. 삶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죽음까지 내맡겼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바로 이 대목.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테오는 시대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필요없다고 오기어린 대거리를 내던지듯 답장한다. 반 고흐는 미술계에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자리잡은 화가다. 우리는 반 고흐를 모르거나 그의 그림을 부정하는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에게 반 고흐는 예술에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불편한 강박마저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생전에는 경제적 고충에 너무 치여 물감과 종이마저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비참한 나날들을 보냈음은 주지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생계까지 해결해 주었던 테오마저 그의 사후의 명성과 보상을 누리지 못하고 형을 따라 몇 개월 안 되어 죽어버린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그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그를 탄핵한 글과 재판기록만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을 우려한 대목은 다산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이 가지는 미래적 의미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생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자찬묘지명 중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반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들의 예술적 학문적 성과의 탑은 드디어 우리를 굽어 내려다볼만치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탑을 삶의 고충들과 악전고투하여 만들어 낸 당사자들은 비참하게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이제서야 환호작약하는 우리들. 화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건넨다는 고흐의 자기암시적인 얘기도 언제나 한 발 늦는 우리의 심미안의 그 허술함을 감싸주지는 못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붓을 잡을 수 있게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온 몸으로 지지해 주고 온 맘으로 후원해 줄 수 있을 터인데.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오고 후회는 언제나 절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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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타까운 일이죠. 시대가 이해해주지 않았던 이들이 어찌 고흐와 다산 뿐이겠습니까마는...
40세의 박완서를 등단시킨 '나목'을 읽는 내내 박수근 화백이 가슴 아팠지요.

blanca 2010-02-08 22:31   좋아요 0 | URL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순오기님 말씀처럼 사후에야 겨우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현재진행형일거구요. 그런데 유독 저 세 사람은 더 짠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일 것 같아요^^;;

잘잘라 2010-02-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얘긴지는 몰라도..
제가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서 늘 하는 말,
"와우~ 정말 대단하다. 그 시대에 어떻게 저런 노래를!!!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흠.. 그런데먈야. 난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에,
김추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김추자는 그냥 가수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
님의 글을 읽으니 또 김추자 노래를 듣고싶네요.

blanca 2010-02-09 13:59   좋아요 0 | URL
바닷가식당님 안녕하세요. 배경의 꽃과 예쁜 소녀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맞아요. 어쩌면 다 그 시대에 태어나 그런 노래를 부르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쓴게 나름대로 운명이고 또 결핍들이 그것들에 녹아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추자는 그 멋진 춤솜씨만 기억하고 노래는 안들어봐서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들어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보다 정약용은 더 행복한 남자였죠.정조 집권기 때는 젊은 관리로서 위세도 꽤나 부렸지 않습니까?

blanca 2010-02-10 23:01   좋아요 0 | URL
예.그건 그런 것 같아요. 고흐는 단 한 번도 전성기라는 걸 가져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18년 간의 유배 생활,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더 많았던 것. 정약용도 말년이 참 비참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라...(이렇게 얘기하면 꼭 친밀한 지인처럼 들리지만^^;;) 좀 편향됐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너 어떻게 이런 말을 일기에 쓰니? 동생보고 이런 용어를 쓰고. 너 정말 혼나야 되겠다!" 

초등학교 2학년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일기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 집중되는
관심에서 소외되는 것이 서운해 과격한 용어를(사실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주목을 받고 싶은 욕심에) 동원해
동생을 저주하는 일기였던 것 같다. 중년의 넉넉한 체구의 담임선생님은 그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되바라진 나를 한껏 성토했다. 한참을 야단맞고 돌아선 나는 이미 너무 상처받아서 그 순간을 기억 속에 영원히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울었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원했던 반응 대신 돌아온 호된 질책은
여덟살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생채기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동생을 정말 미워했던 것이 아니고 나도 좀 봐달라고 나도 좀
쓰다듬어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하는 서툰 표현을 내뱉은 것 뿐이었다. 그 일로 나는 아주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몹쓴 아이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책에 아주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다만 그녀의 담임선생은 나의 담임선생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초등학교 오학년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저자는 일기에 온갖 과격한 욕설은 다 동원하여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토로했다. 신규발령을 받아 부임한 담임선생님은 되레 그 일기장에 꼬박꼬박 상을 주었다고 한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내가 적었던 그 모든 욕이 실은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분노'여서,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그 욕들은 "제발 나를 좀 사랑하고 보살펴줘요"라는 외침이었다.  

만약 그 때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에 대해, 일기 쓰는 방식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야단을 치셨다면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 후 단 한 줄도 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쏟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반항된 행동이나 폭력으로 그 억압들을 분출했을지도 모른다. 험악한 욕으로 점철된 일기장을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선생님의 용인과 격려 속에서 나는 아마도 생각과 감정을 저어함 없이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을 훈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때 그 선생님이 가슴 저리도록 고맙게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김형경 <천 개의 공감> 중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참으로 슬펐다. 물론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어떤 악의적 감정을 가지고 나에게 야단을 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처지에 있었다고 가정해도 담임선생님 만큼은 아닐지라도 김형경의 담임선생님 같은 묵묵한 관용을 베풀 수 있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누군가가 특히나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분출할 때 우리는 과도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감정 속에는 우리 자신의 거부하고 싶은 감정들의 찌꺼기와 아이다움에 대한 기대가 붕괴하는 충격적인 순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그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고 그 감정 자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라고 강요하기 쉽다. 그러나 감정은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정해야 하는 당위의 대상으로 건져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며 ,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마음속의 행위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에 대해 판결을 내리거나 , 상상을 검열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로와 정신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 하임 G. 기너트 <부모와 아이 사이> 중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는 자녀 교육서라기 보다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의 심리치료서 같은 느낌이다. 어떤 형태로든 부모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일보전진을 독려하는 책이다. 알콜중독자, 성적/정서적/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극단적인 부모유형들의 제시가 가슴깊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부모에 대하여 느끼는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정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깊다.누구나 부모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심리적인 억압기제를 발동시키는데 이게 후일 성장하여 대인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솔직한 것이 미덕이 아닌 사회 속에서 은연중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의 표현을 미리부터 억압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 감내하고 자신을 속이는 기술을 미리부터 연마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인지. 
 

그 때 그 선생님이 " 그래. 지금 당장은 동생이 태어나 너한테 관심이 오지 않아 슬프고 화가 나지? 당연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런 화나는 감정을 그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니까 그런 표현은 쓰지 말자. 알았지?" 이렇게만 얘기해 주셨어도 나는 마치 얼음땡 놀이에서 누구도 땡을 해주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추운 데에 그렇게 오래 서있는 듯한 그 무서운 소외감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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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5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2-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동 관련 서적을 보면 꼭 저를 뒤돌아보게 되요. 지금의 나도 다시 보이고. 그래서 더욱더 탐독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보면, 어른은 하찮게 스쳐지나가는 그 감정들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그나저나 독이 되는 부모'표지, 정말 무섭습니다. 저 저렇게 무서운 표지는 처음 봐요. 그래서 더더욱 보관함으로.

blanca 2010-02-05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은 저를 바로잡기 위해서^^;; 읽다 보면 저의 어린 시절을 많이 되돌아 보게 되고 뒤로 짚어 나가면서 저를 치유하는 느낌이랄까. 그렇죠. 표지가 조금--;; 자꾸 들여다 보게 되고 야단치는 엄마보다 방관하는 아빠의 차가운 눈빛이 더 가슴아픈 느낌이 드네요. 이 책 표지를 자꾸 딸아이가 유심히 보고 모라고 중얼대는데. 치워놓아야 될 것 같아요.

저절로 2010-02-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어기요~땡!!!!

blanca 2010-02-05 20:52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의 땡! 고마워요! 지금 생각해도 사실 참 서운해서요. 어지간히 제가 상처를 받긴 받았나 봅니다.

라로 2010-02-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거 읽으면 뭐해요? 실천이 안되는 一人 여깄습니다.ㅠㅠ

blanca 2010-02-05 20:54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런 책 열심히 읽고 오늘 하루만도 딸아이한테 몇 번이나 소리지르고. 참.... 매일 반성하는 일기라도 적어서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2-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열심히 읽으려고는 하는데 실천을 잘 못해요.ㅠ.ㅠ

blanca 2010-02-06 15:00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은 그래도 두 번 화낼거 한번 화내고 그렇게 되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육아서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씨가 팬싸인회에서 "자녀들을 옭아매지 말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그냥 상투적인 효도 타령보다 신선해서 눈에 들어왔어요.

blanca 2010-02-06 15:01   좋아요 0 | URL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녀들을 옭아매게 되는 것 같아요. 장성해서도. 그러지 않으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데 참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한된 공간 안에 넘쳐 나는 책들.
마음 같아서야 나도 신경숙 처럼 드넓은 서재 안에 나름대로의 분류철칙까지 세워 가며 책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실상은 다 옆으로 구겨넣고 심지어 바닥에 층층탑을 만들고. 

그러니 처분을 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에 구입한 책들은 친정에 모셔놓고(그러나 아버지가 자의적으로 처분하셨다. 대체 처분의 기준이 뭔지.)
이사 오기 전에는 한 박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한 박스 팔고
한동안은 도서관을 이용하다 다시 책꽂이 칸막이 위 틈에 불쌍하게 누워서 앙앙거리는 책들 신세도 처량하고
내가 박대하는 책이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될 수도 있기에 직접 거래에 나서게 됐다.(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최대한 좋은 상태의 책들만 올려 놓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집에 있던 허접한 상자들로
성의없는 포장을 한 후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한편 나도 중고책들을 사보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 몇 가지 감동받은 사례들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2주이상 지연되어 책을 발송하는 판매자도 있었고,
받아 보니 책전체에서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긴 경우도 있었고(대체 정체가 뭔지 지금도 의문)
표지가 헌책이라고 온몸으로 호소하는 책, 책 속에 온갖 메모가 즐비한 책 등 기분좋지 않은 사례도 있었지만
총알배송에 꽤 된 책인데도 도저히 헌 책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책(감사)도 많았다. 

이왕 받고 나서 기분좋은 거래가 되었으면 했고
골드셀러분들은 무언가 달라도 항상 달랐다는 데에서 나는 투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총알배송. ㅋㅋㅋ 그리고 포장재까지 구입했다.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면서 입구를 다리미로 눌러주어
정말 알라딘에서 배송하는 것처럼 봉해서 띠지까지 넣어 보냈다.(웬 정성?) 그러고 괜히 좋아서 괜히 상쾌해서 막 웃었다.
이러면 한 몇 십권 팔아치운 고수처럼 보일 테지만 열 권도 등록 안하고 한 여덟권 팔았나? 

중고거래라는게 생각보다 사람 간의 기본 예의가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
처음 중고거래를 한 것은 반값에 나온 아이의 자연관찰 전집이었다.
판매자의 그 예의바른 목소리, 꼼꼼한 포장, 깨끗한 책의 상태로 두고두고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그 분은 나에게 하나의 선례를 남겼다. 사실 상태가 좋지 못한 각종 육아 물품을 염가로 중고시장에 내어 놓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건 예의도 아니고 경우도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나의 첫 중고거래 덕택이었다.
만약 상태도 좋지 않고 배송도 느린 경험을 했더라면 그리 중고거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 작고 섬세한 배려가 더 많은 배려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성의없이 포장한 책 받으신 몇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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