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소 새우를 매워하는 아기를 위해 물컵에 새우를 씻어 주는데
멀찍히 서서 우리를 감시라도 했던지 득달같이 달려와 컵을 나꿔채며
물컵을 이렇게 쓰면 안된다,고 호통치는 중국집주인. 

너는 요즘 뭐햐냐,고 물었을 때 딱히 할 말이 없어 글...써. 라고 얘기하면
그럴 줄 알았다,
나한테 보여주라고 하는 친구들.   

오랜만에 통화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위와 삶의 신산함으로 마구
구겨져 버석거릴 때, 

고작 세상에 나온 지 2년 좀 넘은 아이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기껏 했던 선택들이
교묘하게 비틀어져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시국을 볼 때,

나는 슬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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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1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슬프다~~

blanca 2010-06-12 23:50   좋아요 0 | URL
앗! 지금 마기님 서재로 고고! 글구 마기님 슬프면 안되요^^;;

마녀고양이 2010-06-1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왜 새우 씻어주는데 주인이 난리래여?
나두 예전에 항상 그리 했는데,,, 그 주인 이상하네?
블랑카님,, 그럴 때는 참지말고 항의하세요, 큰 소리로. 너무 참으면 병 되염,, 아셨죠?

보고 싶었어요.... 쪼옥~

blanca 2010-06-13 19:13   좋아요 0 | URL
아기 아빠도 있었는데 저희 부부 성격이 그렇답니다.-..- 저는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마녀 고양이님 기다리느라 병 나는 줄 알았습니다.^^;;

후애(厚愛) 2010-06-14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에 담아두시면 병 납니다. 저처럼..
힘 내세요. 화이팅~!!! 행복한 한주 되세요^^

blanca 2010-06-14 22:39   좋아요 0 | URL
후애님, 덕분에 행복한 한주 출발이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 언제쯤 오시나요?

후애(厚愛) 2010-06-15 06:16   좋아요 0 | URL
8월1일부터 한국에 있을겁니다.^^

기억의집 2010-06-1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운 것 물병에다 많이 헹궈서 주었는데..그 짜장면집 주인이 더위 먹었나봐요. 대체로 손님한테 안 그런데...

저는 애들한테는 성질 잘 안내는데 이젠 그려러니하고 살아요. 하지만 요즘 공처럼 뒹구는 아이가 미운 것은 사실이에요. 공부 진짜 안해요. 어휴~~~~

블랑카님, 홧팅입니다. 오늘부터 장마래요. 아까 길상사 글 봤는데 언제 길상사 가시는 길에 불러주세요.^^

blanca 2010-06-14 20:20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단골이라는 게 더 서운합니다. 저는 고작 세 살한테 이러고 있으니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집니다. 제 책상 위에 <화내는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는 책도 있는데 말이에요 ㅋㅋㅋ

길상사! 안그래도 후애님 귀국하시면 다 같이 함 뭉쳐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공양시간 맞추어서요^^;;

비로그인 2010-06-2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 슈낙의 책을 잠시 펴 보았습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글을 계속 읽다보니, 드러낼 수 없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것이 쌓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내가 주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분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blanca님 안녕하세요 :D

blanca 2010-06-30 10:4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과거 글에 이렇게 댓글 달아주시니 참 기분이 좋네요. 괜히 대우받는 느낌이랄까요?^^;; 안톤 슈낙의 글 전문을 읽어 본다는 게 이렇게 항상 미루게 되네요. 슬픔이 쌓이면 분노가 된다,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기쁨이 쌓여 행복이 되기를 바라 봅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땀을 흘리며 시인의 맑고 빛나고 하찮고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읽었다. 너무 좋아서 빌려 읽은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줄을 그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고 흔쾌히 다시 살 수도 없는 이 딜레마라니.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불빛들은 갓 핀 다알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p.120

바다, 고기떼, 어부, 방조제, 해녀들, 아이들, 그리고 등대. 나는 이런 것들을 마음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들에 대한 얘기는 나를 매혹한다. 특히 그 틈새에 스며 있는 삶의 곤곤한 맛을 짭조롬하게 버무려 소랑고둥 곁에서 시를 쓰는 시인과 동행하는 여로는 고향을 더듬어 마침내 어머니의 자궁으로 가닿는 듯한 안온함을 선물받는 일이기도 했다. 

멸치잡이배들에서 멸치를 털어내다 길밖으로 나오는 멸치에 환호하며 주워담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 소리하는 아내의 윗입술을 돌멩이로 짓찧어 놓은 남편, 그 상처가 살점으로 도드라져 아물어 가며 육자배기 가락까지 절절한 삶의 비애로 축인 할머니의 얘기, 온몸이 흠뻑 빠질 만한 진흙뻘에 널을 밀며 조개를 캐서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들의 사연. 

그저 풍경을 멀거니 관조하는 여행기가 아니라 그 속에 함뿍 빠져 하늘 한켠 버려진 낮달을 쓰다듬는 것 같은 얘기들. 

이 얘기들의 잔상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채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이 책을 펴들었다. 

 

유대인 저자 에릭 캔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다달팽이를 이용한 세포내 기억과정을 발견한 공로 등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자서전과 이 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과정 및 성과가 혼재되어 있는 책이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와 비슷한 전철을 밟은 대목이 있지만 에릭 캔델의 삶은 그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가 이것이 인간인가! 라고 절규해야 했던 레비에 비하자면 비교적 쉽게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문적 지원과 후원의 세례를 받고 마침내 노벨상까지 수상한 캔델의 삶은 부르주아적으로까지 다가온다. 

그러니 저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기대했던 나는 그 대목에서부터 조금씩 김이 빠졌고 인간의 정신영역을 생물학적으로 해부하고 신경회로로 해체하는 과정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인간의 정신기능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산적인 실험의 영역이라 천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적이 건조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찾아 가는 여정은 중간까지 왔는데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기엔 너무 덥다고 중얼거려 본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을 능력도 없고 계속 오독하는 것같아 멈추고 만다. 저자와 번역자의 노고가 우매한 독자 앞에서 스러질 것만 같다. 

시인과 과학자가 나란히 걸어가다 소실점 부근에서는 만날 수 있을까? 멀미가 난다.  

아,오늘에서야 북해도가 훗카이도와 같은 곳임을 알았다. 북해도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 살 딸내미의 비키니를 주문했다. 가고 싶다,가 아니라 갔다 왔다, 고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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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것만 읽으셨구나!
블랑카님은 어케 이리도 알흠다운 글만 쓰셔요?

blanca 2010-06-11 20:46   좋아요 0 | URL
마기님!알흠답다,는 말 너무 이쁘네요^^ 대문사진이 마치 모델 같습니다. 3535됐는지 지금 빨랑 가보려구요.

비로그인 2010-06-1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구.

마르셀 푸르스트..

기억. 그리고 몇 가지 생각을 머금고 다녀 갑니다.

blanca 2010-06-11 20:4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도 곽재구처럼 포구기행을 직접 떠나고 싶어요. 어리버리해서 미아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아낙네들이랑 어부 아저씨들이 목소리 걸걸하게 사진 왜 찍냐고 막 화내면 울고 ㅋㅋㅋ 역시 사람의 인생은 사람의 성격을 뛰어넘을 수 없나 봐요.

기억의집 2010-06-1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일본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요맘때 피는 수국이 보고 싶기도 하고. 적금 깨서 남은 돈이 있는데 그걸로 갔다올까..그런 생각을 했어요.
북해도는 겨울에 가고 싶어요.^^
에릭 캔델 처음 들어보는데..흥미롭네요.

blanca 2010-06-14 20:21   좋아요 0 | URL
저는 잘하면 칠월 초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잘될지는 모르겟지만요. 이 책은 기억의 집님이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생물 시간에 졸아서 그런지 기억이 너무 안나서요. 과학 관련 쪽은 기억의 집님 전문이잖아요.^^
 

나는 노을을 보면 마음이 참 이상하다. 참 좋기도 하고. 

아버지는 운전하다 석양을 보면 으레 서툴게나마 그것을 찬미하고 싶어했다. 신경숙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삶의 바깥을 흐르기 마련이라 아버지가 못다한 수많은 얘기들이 그 속에 있음을 짐작했다.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절절하기도 하고 뭐 그런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뒷날들이 오버랩 되는 그 지점에서 장녀에게 해주고 싶은 수많은 얘기들을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도 함께였을 것 같다.

법정 스님 스페셜에서 상좌스님이 동자승들을 곁에 두고 노을을 보며 배경처럼 나지막하게 한 얘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바로 어제 너희들 같았었는데 저렇게 저물거라고. 지금 나는 정오쯤 온 것 같다고.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남은 날이라도 내 자신답게 살면서,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
-<허의 여유> 중 

저녁 노을을 보며 법정 스님을 추억할 뒷사람들을 마치 예감이라도 한듯하다. 어젯밤 이 대목을 읽고 왜 노을을 보면 마음이 애잔해 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삶의 일몰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모습은 언제나 얼마쯤은 슬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삶의 성실성을 유추해 낸 그의 혜안과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던 그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이 가슴께를 뻐근하게 했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충만하게 존재하기 위해 살라는 그의 얘기가 허공에 흩날리는 수사로만 들리지 않았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새로운 물건이 진열된 선반으로 끊임없이 이끌린다.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중

 

소유의 가치가 존재의 무게감과 직결되는 듯한 환상을 주입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이고 지고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수 없다. 억만장자라도 그건 별 수 없다. 다 버리고 가야 한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순간의 있음으로 엮인 삶의 정수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 슬픈 도식은 정형화된 삶의 패턴 같다. 알베르 카뮈도 얘기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라고. 공교롭게도 그 날 본 티비 단막극에서는 여주인공이 사랑은 원레 헤픈 거라고 누가 그렇게 움켜쥐며 싸가지 없게 사랑하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랑은 원래 헤픈 거라고. 

적게 가지고 많이 사랑하라고. 저녁 노을을 볼 때마다 삶의 황혼에 이르렀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연상해 내고 역설적으로 현실에 더 충만하게 존재하라고. 

노을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질 것도 같다. 종교를 떠나 절절하게 순간순간 삶을 꼬옥 꼬옥 눌러 밟았던 스님의 얘기를 들으니 지저분한 내면이 조금 정갈해 지는 것 같아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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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을을 보면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든달까요...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것이 나이드는건가 봅니다.

blanca 2010-06-08 16:51   좋아요 0 | URL
제가 올해부터 하게 된 생각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점점 더 초연해질까요?

2010-06-08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8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09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저녁에도 그러했지만, 아침에도 읽기 좋네요 ^^

요즘 또 뭔가를 마구 버리면서 "소유" 한다는 것에 여러 생각이 닿습니다.

시간, 사랑, 소유 오늘 아침은 이런 생각들과 함께 시작을 하게 되네요!

blanca 2010-06-09 14:0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그래서 요즘은 가계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답니다.^^ 버리는 연습을 슬슬 해야 되는데 이게 주기적으로 또 좌절당한답니다.

여름이 너무 빨리 와버려서 이제는 가을을 또 기다리게 되네요.^^

기억의집 2010-06-0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갑자기 노을 이야기 하시니깐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시, 신대철의 처형이 떠오르네요.
저, 산 노을이 비치고
온 몸에 금이 가요.
사방에서 노을이 떠요.
살고 싶어요.
사람이 죽으면 노을에 묻히나요?
블랑카님 말씀대로 노을은 사람의 감정을, 삶을 슬프게 하는 것 같아요.예전에 이 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는데 블랑카님의 이 페이퍼 읽으니 얼핏 알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운전면허 딴다고 정신 없이 살고 있어요. ^^

blanca 2010-06-10 12:50   좋아요 0 | URL
온 몸에서 금이 가요. 살고 싶어요...역시 시인들의 감성은 다르네요. 막연한 생각들이 그들의 입만 빌리면 바로 그거야, 싶어지니까요.

기억의집님, 운전면허 따시면 꼭 바로 차 몰고 나가세요. 저 장롱면허 만들었다 연수 한 번 받고 또 안 몰았다 지금에 왔는데 운전 전혀 못한답니다. 아마 또 연수 받아야 할 것 같아요. 한 번에 붙기를 기원하구요. 빨랑 컴백하셔야 합니당!

후애(厚愛) 2010-06-10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이 책 구매했는데 아껴가면서 읽으려고요.^^
법정 스님 책들은 다 좋아요. 마음에 와 닿는 글들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요.^^

blanca 2010-06-10 12:51   좋아요 0 | URL
후애님, 저는 최근들어 법정스님 책을 별로 안 읽었는데 다시 접하게 되니 정말 아껴 가며 읽을 책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읽는 동안은 정말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더라구요. 더 오래 건강하게 사셨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습니다.
 

# 책꽂이 위에 왜 책을 눕히나 싶었는데, 이제는 알게 됐다. 책을 더이상 세워 꽂을 공간이 확보가 안되자 미친듯이 칸마다 위로 남는 공간에 책을 눕히고 있다. 심지어 왜 방바닥에 책탑을 쌓나(곧 떠날 이처럼)  싶었는데 나도 탑하나 쌓고 있다. 아이는 매일 그 탑을 해체한다. 그러니 무용한 그 일을 반복하며 골병이 들고 만다.

보기 안좋다. 쟤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싶은 그 껄쩍지근한 심정. 넓은 집에 살고자 하는 로망은 순전히 얘들 때문이다. 옆지기의 대학때 전공서적을 좀 치워주었으면 하는 이 이기적인 마음은 차마 내보이지도 못하고 있다. 내 책만 중하고 내 추억만 무게감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요러고 있다. 

누가 나에게 빈 공간과 아무 책도 안꽂힌 책장을 대여섯 개 내려 줬으면 싶다. 빈 서가는 언제나 나를 자극한다. 책이 좌르르 꽂혀 있는 그 모습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 공백이 좋다. 

# 대학가 근처에(대학이 두 개나 있다.) 사는데 벌써 그 애들이랑 섞이기가 괜히 민망하다. 오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전창으로 비친 풍경은 왠지 서글펐다. 젊은 아이들이 깔깔대며 오고 가는 그 길목에 나이 든 과일 행상 아주머니가 팔리지 않는 과일들을 분주하게 어루만지는 풍경과 한쪽 모퉁이에서 무언가 불만과 결핍이 가득해 보이는  나이든 아저씨가 혼잣말을 하는 광경이 오버랩됐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가는 것이겠지만, 또한 시야가 넒어져 얇고 말랑말랑한 것들 틈새에서 두껍고 투박한 무언가가 끼어 있음을 보고 마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예전에 <샘터>에서 아홉 살 아들내미가 걸핏하면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눈시울을 적신다는 사연을 읽었었는데 그 심정을 알겠다. 그냥 요즘은 왠지 다 뭉클하다. 어버이날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가 고운 빛깔 한복을 입고 조금 덜 늙었을 뿐인 또다른 노인인 아들과 중국집에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도 눈물나고, 사탕빨고 콧물 흘리며 좋다고 뛰어다니는 아이를 봐도 괜히 짠하고, 뭐 이런 식이다. 

정작 책 읽으며 줄 긋고 단어 정리하는 내 자신이 가장 불쌍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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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6-0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misshide/3796580#C1870717
보이세요? 옆으로 빽빽 들어찬 책들 ㅎㅎ 이 칸은 그나마 큰 책이라 한 줄이구요,
다른 칸은 저렇게 두 줄, 세줄까지 쌓여 있어요. 그래도 책탑은 여전합니다만

전 넓은 집에 커다란 책장도 좋지만, 좁은 집에 빽빽한 책장도 좋아요. 온 벽이 책인 뭐 그런거요.
너무 넓으면 책으로 도배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헤헤

blanca 2010-06-07 14:42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서재는 옆으로 빽빽이 통일성이라도 있잖아요. 저는 일단 세워서 꽂은 다음 윗틈새에 눕히는 거라 좀 지저분해 보인답니다.-..- 책으로 도배! 히히, 맞아요. 그런데 차라리 다 옆으로 눕히는 게 더 많이 수납할 수도 있겠다, 싶어 오호!합니다.ㅋㅋㅋ

2010-06-07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7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6-0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그냥 이렇게만 불러 드리고 갑니다. 흐흑~

blanca 2010-06-07 14:4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그 뒤에 말줄임표 속을 짐작해야 하는 건데. 그냥 불러만 주셔도 고맙네요 ㅋㅋ

L.SHIN 2010-06-0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책을 바닥에 혹은 박스에 넣는 한이 있더라도...왠지 책 위에 껴 넣고 싶지 않더라구요.
뭐랄까, 쓸데없는 '정리벽'이죠. -_- 그래서인지, 요즘은 책들의 사이즈가 다 틀리잖아요?
일렬로 줄 맞춰 잘 정리되다가 같은 장르의 책 중 하나가 삐죽 위로 올라와 있으면 그게 너무 싫은 겁니다.(긁적)

blanca 2010-06-07 21:01   좋아요 0 | URL
흑흑, 제가 그래요.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 얼마나 신경질이 나겠습니까 ㅋㅋㅋ 저도 특히나 책등이 고루지 못한 모습 보면 화납니다.^^;;

2010-06-1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주위에서 저를 좌파라고 합디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니까요.  

요즘은 그런 표현은 안씁니다. 옛날 얘기죠.

2차선 도로를 인도를 넓히면서 갑자기 1차선으로 만들어 버려 온갖 교통혼잡을 야기한 것을 불평하다 지방선거 얘기, 북풍몰이에 대한 비난 등 처음 만난 기사와 승객은 서로를 알아보고 신나게 시국토론을 하다 갑자기 그 대목에서 불일치를 봤다. 기사 아저씨의 나이는 대략 육십 대 어름으로 보였다. 빨갱이. 좌파. 더 많은 얘기들은 하필 그때 목적지에 당도함으로써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빨갱이. 우리는 언제쯤 이 용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적색 경계 경보를 울리면 우리는 언제나 얼마쯤 주춤한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각을 세우는 부분도, 그리고 언제나 돌아오고 마는 원점도 이 지대에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한반도 내에 그 이념을 체화하겠다고 진군했었던, 하지만 결국 파시즘적 공통 분모를 결과론적으로 가지게 된 저들과 완전히 통합하거나 치지도외하거나 하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들어붙을 수 밖에 없는 망령이다. 

70년대 말에 태어난 나도 결국 유년시절부터 반공이념을 주입받은 세대다.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갖다주며 으쓱했고,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반공 표어와 포스터로 모범적인 어린이로 인정받고자 했던 기억이 뿌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그런 인위적인 적대감의 주입은 하나의 에피소드 이상으로 남아 있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의아했던 것같다. 대체 왜. 왜 이다지도 그런걸까, 싶은.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사람의 체취를 불러오고 왜 그다지도 그들이 그 사상에 도취되어 투신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한참 후에야 소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빨치산들의 그 몽상가적이고 이상주의자적 면면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과 해방기의 토지개혁과 맞물려 있음을 서사를 통해 체현한 대목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북한정권으로부터 거꾸로 출발할 것이 아니라,일제치하 중국으로 추방, 혹은 도피한 독립운동세력들이 그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이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차용측면에서의 이해, 중국의 항일투쟁과 연합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인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해방기 농지재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친일파들의 처단 들과 조우했던 지점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 미군정하에서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통치 체제에 친일파들을 등용함으로써 그들의 콤플렉스가 반공주의의 불꽃을 점화하는데 은밀한 역할을 했음도 마찬가지다. 

때마침 우연찮게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있었다.  

 

 

내 전생애는 실패했지만, 단 하나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고 자평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가 중국 공산 혁명에 뛰어들어 항일투쟁을 하는 와중에 처음에는 리리산주의자, 심지어는 우파, 마지막으로 조선인이라는 딱지로 어떻게 폐기처분되는 지를 어떻게든 납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한 오늘날도 그렇게 한 인간에 각종 이념적 꼬리표를 막무가내로 붙이는 그 염증스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슬픈 체념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 교외에서 가난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조선독립군 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은 테러리즘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잔혹성 속에 진실을 건져 올리는 일과 다름아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기도 했지만, 삶과 역사가 박애와 그 인연이 없음을 절절하게 응시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영화 부활을 보면서 엉엉 울었던 김산은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하나의 정적인 관성의 체현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꿈틀대는 용틀임이었고, 하나의 생명이었기에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체제를 종식시키고 금덩어리같이 귀하게 여겨졌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오는 일은 투쟁과 직결되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p.60~61 

우리가 전통민요 정도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이런 피압제민들의 응어리진 애환과 한, 체념서린 수런거림이 퇴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마지막으로 벽에 손톱으로 아리랑 가사를 긁어 놓은 것에서는 비감어린 뭉클함이 전해져 왔다. 저항하고 투쟁하다 결국은 넘고야 마는 죽음의 고개. 그러나 그 고개를 넘어간 이들은 김산이 얘기했던 것처럼 눈앞의 승리를 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역사 자체로 녹아들어가 결국 승리하고야 말았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 분파주의, 파벌주의에 이용되고 희생되어 결국 고국의 해방도 미처 못 본 채 눈감아 버린 수많은 저들의 피어린 삶들은 그 자체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호흡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자잘한 편린 들 속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던지는 시선들, 우리가 하는 행동들, 우리가 내뱉는 말들 속에 그들의 유지는 체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산은 옳고 그름의 분계선이 유동적이라고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올바른 평가에 도달하는 과정이며 또한 그러한 진동 자체가 변화를 낳는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간직하고 싶은 얘기다. 

누군가를 비판하면서 그들이 개념없이 사용하는 감정서린 뒤틀린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억울함을 토로한 나의 모순을 반성한다. 그 기사분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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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0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7 0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뭔가 체계를 만들어가기도 전에 6.25라는 전쟁을 겪고, 통일을 겪지도 못하고 미군정의 영향탓으로 애매하게 나라의 뼈대가 만들어진 것.

그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꿰매지지 못한 상처들 속의 고름은 과연 언제즘 없어지게 될까요..?

시간이 더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blanca 2010-06-06 22:1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누구나 자기 자신은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우리 민족은 특히나 아주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흔이 다 아물기 전에 진정한 화해나 통합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