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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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여섯 살 딸아이의 콧물 감기는 좀처럼 낫지 않고 열과 기침까지 동반하게 되었다. 열이 잘 나지 않는 편이었는데 해열제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바로 39도와 40도를 넘나들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단순 감기로 보이지 않아 평소 다니던 대학 병원에 가서 다시 딸아이의 증상을 얘기하자 폐사진을 찍어보자 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전문가가 보지 않아도 사진에 하얗게 전면을 뒤덮은 무언가가 좋은 것이 아님을 예견하게 했다. 당장 입원하라는 권고가 떨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걸어다니며 떼도 부릴 수 있었던 터라 아이는 입원하지 않겠다고 울었다. 사실 유치원 친구들도 폐렴으로 종종 입원하는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딸아이의 입원을 크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이틀, 사흘이 되어도 호전되지 않고 아이는 밥도 먹지 않고 놀지도 않고 육인실 병상에 누워 기침만 했다. 어린이 병동의 육인실은 대부분 아주 심각한 질환을 가진 아이가 장기로 입원하는 곳은 아니었기에 유독 딸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휠체어를 타고 어린이 방송을 보고 복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형제와 놀기도 했는데 나의 아이만 불덩이 같은 몸으로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재차 아이의 폐사진을 찍어보고 의료진은 더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항생제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 더 독한 항생제 투여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폐렴은 점점 악화되었다. 아이는 일반 병동에서 더 이상 안전하게 치료받는 상태가 아니라 점점 경과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연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 하나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각종 상황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코감기에 걸렸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고 외출하고 평상시 생활을 계속 했던 것,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아이를 무리하게 한 것, 빨리 입원시키지 않은 것 등 온갖 죄책감의 요소들은 난무했다. 그리고 든 생각, 하필 왜 우리 아이가 이런 위중한 폐렴에 걸렸는가, 왜 내가 아니고 내 아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반문하게 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을 믿었지만 이런 각종 의구심과 반문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 사실 기도도 잘 되지 않았다. 엄마로서 결국 내 아이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 불운은 나를 비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정면으로 나를 가격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앞으로의 삶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이었다.

 

필립 로스가 절필을 선언한 지 몰랐다. 찾아 보니 2010년 그가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 <네메시스>는 자신의 선언 아닌 선언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첫 폴리오는..."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현재의 상황과도 겹친다. 1944년 위퀘이크 유대인 구역에서의 폴리오 대유행으로 촉발되는 이 비극은 철저하게 정제된 경제적인 문장으로 농밀하게 전달된다. 치료 약도 백신도 없던 당시에 소아마비로도 알려져 있는 폴리오의 창궐은 아이들을 속수무책으로 쓰러뜨렸다. 이야기의 핵심에는 이 지역의 놀이터 감독이라는 조금은 낯선 일을 맡았던 스물세 살의 버키 캔터라는 다감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조부모의 손에서 가난한 지역에서 성장한 그였지만 강인하고 생활력 강한 조부의 가르침과 다정하고 섬세한 할머니의 배려로 버키는 여러 좋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여 소년들의 친밀한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만 나쁜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한 터라 그는 자연스럽게 놀이터 감독의 일을 맡게 된다. 폴리오의 창궐로 놀이터에 나와 놀던 소년들도 하나씩 감염되어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무고한 어린 아이들의 죽음이 그들이 꾸던 꿈과 그들의 미래를 한꺼번에 탈취해가는 잔인한 그 무엇으로 생각되어 신에 대한 분노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랬다. 내가 그때 아이의 폐렴이 악화일로로 치달았을 때 느낀 감정도 어쩌면 버키가 자신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의 필연적인 설명이나 정당성을 어딘가에서 얻고 싶었던 그 무력한 느낌과도 닿아 있어 낯설지 않았다. 그의 연인 마사가 폴리오 창궐 구역에서 70마일이나 떨어진 지역의 인디언 힐 유대인 소년 소녀 캠프의 물놀이 감독직을 제안했을 때 망설임 끝에 그가 거기에 간 것은 결국 그의 양심을 괴롭히는 도피이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것은 이 선량한 청년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리고 삼십칠 년이 흐른 뒤. 이야기의 서술자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해 여름, 폴리오로 친구들이 죽어 나갔던 그  지역에서 버키의 감독으로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던 소년들 중의 하나. 그 자신도 폴리오에 감염되어 다리가 마비되었지만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비극을 개인적 비극으로까지 심화하지는 않아도 되었던 비교적 운좋은 무리에 속해 직업도 갖고 어엿한 가정도 꾸릴 수 있었던, 그래서 이제는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쉰이 된 소년 시절의 놀이터 영웅 버키를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된 것이었다. 버키가 놀이터를 뒤로 하고 떠난 곳에서 당면하게 된 더 큰 비극은 버키에게는 하나의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운명의 가혹한 힘이자 잔인한 신의 횡포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훑고 간 자리에서 버키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굴복한다.

 

1944년, 미국 뉴어크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과 그리고 내게도 일어났던 일과 닮았다. 누구도 왜, 무엇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해명하기 어려워 원인과 죄과는 여러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를 둔 엄마들은 모든 것들에서 아이들에게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두려움에 전염되어 놀이터에 마음껏 아이를 내보낼 수 없고 학교나 기관 같이 여러 아이들이 한데 모이는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 숨이 막힌다. 1944년의 보건국과 2015년의 질병관리본부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한낱 놀이터 감독인 어린 청년에게 아이의 엄마들은 대체 누가 책임자냐고 책임자가 어디 있느냐고 절규하며 물어본다. 대답할 수 없는 버키는 그 질문의 화살들을 신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책임론은 결국 그에게 죄의식으로 또 실제적인 비극으로 수렴된다.

 

필립 로스는 절필을 선언하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이제 쓰는 것과 관련된 사투는 끝이 났다.",는 포스트잇을 붙였다고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했다. 그는 더 이상 쓰는 것과 관련된 좌절을 견뎌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쓰는 것을 좌절과 연결한다. 그러니 그것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는 그의 겸손한 고백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말하는 삶과 그것을 포박하는 거대한 운명의 힘, 우연의 힘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은 공교롭게도 절망이 아니다. 이 비극적 서사시의 엔딩은 필립 로스의 마침표가 웅변한다. 다시 소년 시절로 돌아온 서술자인 '나'는 쇠락하고 무너진 버키가 아니라 한없이 아름다웠고 찬란했던 버키가 아이들 앞에서 창던지기 시범을 보이던 그 날을 묘사한다. 그 찰나 안에 가두어진 그 아름다움, 그 생생함, 생명력은 눈물겹다. 소년들의 영웅. 미래의 꿈을 간직했던 미래가 창창했던 젊은이.

 

있었으나 사라진 것도 결국 있었던 거다. 필립 로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기자와의 인터뷰의 말미에 어두워진 실내를 밝히기 위해 그가 불을 켰던 것처럼. 그는 단순히 운명에 굴복하는 무력한 인간의 패배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아름다운 공명음을 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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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6-0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아픈 모습을 지켜보기도 힘들지만,
어버이가 아플 적에 아이가 지켜보는 눈길을 받는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더군요.
아이도 어버이도 우리 누구도 아프지 않으면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삶을 노래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하고 비는 마음입니다..

blanca 2015-06-09 08:47   좋아요 0 | URL
병세가 호전된다,는 확신만 있으면 시간과만 싸우면 되니 견디기가 쉽지만 그런 전망이 불투명하면 여러 모로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고 참 힘들더라고요. 네, 다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로 2015-06-0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는 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네메시스는 아직 못 읽었어요. 근데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선뜻 손이 인 가네요. ^^;;
근데 분홍 공주가 그런 일이 있었군요!! 블랑카님 많이 힘드셨겠어요. 저도 해든이 가와사키 병에 갈려서 열이 40도가 넘는데 원인을 모르고 물에 애를 담기놓고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엔 병명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입원시키고,,,, 암튼 그때 일이 어제 생긴 일처럼 생생하네요~~~ㅠㅠ 엄마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블랑카님의 표현처럼 저도 제 탓만 하게되고,,,, 그런 게 시험 일까요???

blanca 2015-06-09 11:21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해든이가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가와사키도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병인데 아주 잘 이겨내서 다행이에요. 자식을 키운다는 게 나날이 더한 도전에 당면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더 성장하는 거겠지만 참 쉽지가 않네요. 그 이후로 트라우마가 남아서 아이들이 조금만 아프면 최악의 상황이 자꾸 상상이 되서 힘들어요.

세실 2015-06-0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그저 아이 아프지않고 씩씩하게 커주는 기쁨이 제일인데 클수록 욕심이 생깁니다.
좀 더 겸손해야겠어요.

blanca 2015-06-09 11:22   좋아요 0 | URL
세실님, 당시는 자꾸 극단적인 상황이 자꾸 가정이 되서 너무 괴롭더라고요. 참, 건강이라는 게 잃으면 전부 같은데 유지되면 금세 잊어버리게 되니 또 다른 것들에 끄달리고 아이를 혼내게 되고 저도 그렇더라고요.

Nussbaum 2015-06-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긋는 한 줄. 멋진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blanca 2015-06-10 13:40   좋아요 0 | URL
읽고 댓글 주시니 감사하지요...

2015-06-14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4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5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5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에는 줄긋지 않은 문장, 지금은 내게 가장 긴요한 문장이 되어 있었다.

제게는 미래라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당장 바로 앞의 시간이 미래인 거죠. 지금부터 30년까지, 이런 식으로 집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집합적인 미래를 대비하자면, 지금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얼마나 벌어야만 하는지 계산이 나와요. 그래서 당장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 일단 돈을 버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집합적인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장 눈앞의 순간, 지금뿐이에요.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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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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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선입견도 없이, 특정한 관심이나 지나친 기대 없이 이 자전적 에세이를 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더불어 작가로서의 그의 색채, 그가 만들어 낸 인물이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하니 그가 토로하는 작가로서의 애환과 보람, 작가적 정체성으로의 더글라스 케네디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내는 그의 삶은 그의 이야기의 진폭을 상상하게 한다. 마흔다섯의 사내가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 아들, 출간 거절을 당한 자신의 소설, 아내와의 불화를 뒤로 하고 폭설을 뚫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며 느낀 희열과 거기에서 받은 위무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대담하고 솔직하고 절절하다. 그리고 그는 글을 읽고 쓰는 작가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려는 듯 군데 군데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위로를 주었던 문학작품들과의 만남, 재해석을 덧붙인다. 그것은 그가 통과하는 그의 삶의 정경들에 너무 잘 녹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 절망에 빠져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읽고 아내와의 불화를 겪으며 예이츠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이해하고 오지 여행을 갔다 우연히 손에 잡히는 죽음을 목도하게 된 충격을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완화하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혹은 울고 싶을 때 잡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들의 예증 같았다.

 

특히 그가 끝내 화해할 수 없었던 완고한 아버지와 냉정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들은 언어들 사이를 건너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부정도 모정과도 무관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기본적인 애착 관계는 물론, 부모로부터 기대되는 지지나 격려도 전혀 받지 못했다. 대신 아들 앞에서 끊임없이 불화하고 요구하고 아들을 거부하는 부모를 용서하는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자신도 아내와의 관계가 끝나고 가족이 해체되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유달리 굴곡이 많은 인생과 중요한 위기 대목마다 그를 응원해 주기는 커녕 돈을 요구하고 아들의 행동들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부모, 장애를 가진 아들은 그가 인간의 삶 자체를 다분히 비극적인 것으로, 절망과 위기를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거나 해체되기 직전에 다시 일어선다. 그것은 조물주에 대한 믿음도 삶 자체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반문하고 거창한 것을 덧대기 이전에 그는 그저 현존 자체의 경이로움에 설득되는 것같다. 다시금 일어나고 부활하는 생의 의지는 그의 두 아이가 그에게 가지는 의미 덕분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기울이는 그의 노력은 탄복할 만한 수준이다. 자신은 받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사랑과 헌신이 그에게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갈되지 않는다. 최악의 순간마다 그는 그 상황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 상황에서부터 물러나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진다. 내일을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더글라스 케네디가 "어디, 다시 한번 때려 봐!"라는 듯 다시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그의 정체성 그 자체다.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그가 아들에게 자주 읽어 주었던 책이다. 간질 발작으로 언어를 잃어버린 아들에게 그는 마지막에 이야기 속의 괴물들이 맥스라는 아이를 붙잡는 장면에서 실제 이름이 똑같이 맥스인 아들이 "싫어!"라고 외치던 기억을 포기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읽어 준다. 맥스는 반응이 없다. 그러다가 마침내 "싫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절대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던 맥스는 이제 미대를 다니는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결말을 마침내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결혼생활과 부부관계를 회의했던 그는 다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가 인용했던 새뮤얼 버틀러의 말 "인생은 사람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말로 다시 돌아오는 결론, 그는 내일을 결코 낙관하지 않지만 삶의 그 미묘한 행로를 여전히 배우며 걸어갈 것을 이야기한다. 초로의 사내가 작가로서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까지 전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그가 살아내며 깨달은 것들이다. 때로는 편견이나 아집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 솔직함 아래 쌓아올린 그 성실한 삶의 편린들이 빛나는 이유다. 힘들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 섣불리 조언을 남발하지 않는 책, 그래서 곁에 두고 싶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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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5-21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아이 가슴에는 늘 사랑이 있기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으면
얼마든지 새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만 보아도
사랑을 받아서 태어났구나 하고 느껴요.

저 스스로 어버이로 지내면서 느끼는 대목입니다..

blanca 2015-05-21 09:10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이 자녀분들한테 주시는 사랑도 참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저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요.

2015-05-2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1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타크사카 2018-03-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빙 더 월드‘라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그의 현신이 아닐까 합니다. 무척 실존적인 삶을 사는 작가인 것 같아요. 멋진 리뷰 잘 봤습니다!

blanca 2018-04-02 06:01   좋아요 0 | URL
예전 글에 달린 댓글을 보는 기분이 참 묘하면서도 좋네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타그사카님이 얘기해 주신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마음의 눈 - 빗소리가 어떻게 풍경을 보여주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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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가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같다. 칠판에 판서한 글씨를 알아보기 힘겨워졌다. 시력 검사를 통해 0.3정도 된다는 얘기에 안경을 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주 기뻐했던 철없는 기억 이후로 근시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3디옵터까지 떨어졌다. 대학 합격 소식에 제일 먼저 렌즈를 시도했고 결막염과 각막염이 번갈아 오는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좀 더 예뻐 보이고자 두꺼운 안경을 감추어 두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영 렌즈착용이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심지어 낀 채로 잠이 들기도 해서 토끼눈으로 기상하기도 하며 눈건강은 더욱더 나빠졌다. 그러다 드디어 라식수술이 해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이 걱정되어 여러 번 망설이다 결국 수술을 받았고 거기에 따른 경미한 부작용도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지금도 수술을 받고 안경 없이 핸드폰의 문자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던 그 첫 느낌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눈을 뜨는 기분 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 근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근사한 느낌이었다.

 

'읽기'에 중독된 나로서는 사실 눈이 나빠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노안도 그렇고 고도 근시가 있었기에 거기에 따른 각종 합병증도 두렵다. 보르헤스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죽기 전에 올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나의 바람은 늙어서도 죽음을 앞두고서도 제발 보고 읽는 능력 만큼은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과 계통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의 문장은 나를 거의 항상 압도한다. 수와 언어에 대한 능력은 같이 가기 힘들다는 생각에 그 둘이 한데 모인 지점에서 빚어내는 그의 이야기들의 진지함과 섬세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최근에 안구 흑색종의 전이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슬프다.

 

이 책의 헌사가 바쳐진 이는 그의 안구 흑색종을 진단하고 수술한 한때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올리버 색스는 '뇌의 가소성'을 이야기한다. 삶을 살다 갑자기 맞닦뜨린 불운, 그것이 하필 우리의 지각 체계를 망가뜨리거나 교란시켜 보고 듣고 말하는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과연 우리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대답들은 하나 하나의 아름다운 영화 같은 사례다. 어느 날 갑자기 악보를 보지 못하게 된 피아니스트, 항상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던 여인이 언어를 상실 했을 때, 읽고 쓰는 게 주업인 작가가 갑자기 읽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 앞에는 절망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가 인용한 찰스 디킨스의 표현인 '부활'의 세례가 그들에게도 내려진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족들의 혹은 지인들의 지지와 격려, 삶에 대한 사랑과 애착 등이 뇌의 지형도를 변화시켜 다른 지각 기능의 강화와 보조로 잃어버린 것들을 대체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말을 할 수 없어도 그러한 이들을 위해 저자가 본인의 장애를 딛고 만들어 낸 어휘집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친구들과 대화하고 세상과 교류하고, 이제는 눈으로 언어를 읽어내는 대신 오디오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새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은 상실이 아니라 기존까지 가져왔던 온갖 선입견, 허위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리버 색스 자신이 암 선고를 받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에 대한 솔직한 일기도 나온다. 이제 환자의 입장에 서게 된 그는 그렇게나 세상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보며 즐거워하고 읽는 기쁨이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었던 나날들을 포기해야 하는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제 그는 세상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사각지대가 생기고 눈으로 보며 즐거워했던 공간은 그에게 변형되고 왜곡되어 다가온다. 넘어지고 실수하고 착각하는 나날들 앞에서도 그의 위트는 이제 세상을 정물화처럼 인식하게 된 새로운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가 서신을 교환했던, 제대로 교정되지 않은 사시 때문에 세상을 평면적으로 인식하다 드디어 내리는 눈 가운데에서 3차원의 세상을 경험하며 전율했던 한 여인과는 정반대의 경로에 선 그의 솔직한 투병기는 서글프기도 하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서 그 체험들을 온전히 껴안고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언어화하려는 그의 노력 덕택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한 걸음씩 뚜벅 뚜벅 걸어나가고 마침내 슬픈 종지부 앞에 섰음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그의 담대함이 존경스럽고 뭉클했다.

 

그의 트위터 계정에는 자신의 자서전 표지를 장식했던 근육질의 청년이 오토바이 위에 위용도 당당하게 타고 있는 근사한 사진이 떠 있다. 이제 그 용감하고 건장했던 청년은 시력을 잃고 생을 사랑과 신뢰로 채웠음에 감사하며 퇴장하려는 길목에 서 있는 노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은 행운이었다는 고백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기고 가는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메시지가 될 것같다. 지뢰밭 같은 삶을 겁쟁이처럼 미리 땡겨 걱정하고 초조해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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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1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몇 십 년 후에 노안이 찾아오면 책을 못 읽을까봐 걱정이에요. 제가 대학생 때 렌즈를 잘못 착용해서 시력이 심하게 나빠진 적이 있었어요. 안과에 검사를 받았는데 만약에 렌즈를 장시간 착용했으면 각막이 손상했을 거예요. 안경을 껴도 책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니까 정말 아찔했어요. 하필 그때가 시험 시간이라서 공부가 잘 되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시력이 회복되지 못할까봐 걱정만 했어요. 그 이후로 시력 건강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blanca 2015-05-17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렌즈로 각막이 손상된 적이 있어요. 사실 눈건강에는 안경만한 것이 없지만 아무래도 불편하기도 하도 잘 안 어울리는 경우도 있어서 렌즈나 수술을 고려하게 되는 것 같아요. 건강한 눈, 좋은 시력은 당연시되면서도 조금이라도 손상이 오면 생활 자체를 흔드니 정말 중요하지요.

프레이야 2015-05-1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시력이 좋지않군요. 읽기중독인 사람으로선 몹시 불편하시겠지만 수술로 나아지신 듯하니 다행이에요. 저는 이제 노안이 오는 나이라 할 수 있지만 시력자체는 좋거든요. 시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는, 그래서 난 행복하단 생각이 들 때는 낭독녹음하고 나올 때에요^^ 눈은 좀 침침해져도‥

blanca 2015-05-17 10: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부럽습니다. 지금은 좋은 시력으로 교정되긴 했는데 눈 자체가 고도근시 상황인 것은 같다고 해서 문득문득 걱정이 돼요. 원래 좋은 사람과는 다른 상황이니까요. 제발 할머니가 되어도 책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물고기자리 2015-05-1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님이 투병 중이신 걸 몰랐네요. 아내를.. 이랑 색맹의 섬을 읽고 존경하게 되었었는데 안타깝기도, 더더욱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안그래도 요즘 새삼 눈의 고마움을 느끼며 다른 모든 것들처럼 언젠가는 시력도 상실될 거란 생각에 겁이 덜컥 났었는데 이래저래 마음을 더 키우며 살아야 겠습니다.. 책도 읽어봐야 겠어요.

blanca 2015-05-17 10:35   좋아요 0 | URL
아, 물고기자리님도 그러셨군요!! 올리버 색스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했는데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해서 마음이 무거워요.

라로 2015-05-17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스틸 앨리스를 보며 적으신 부분을 생각했더랬어요. 지성적인 그녀가 치매라니,,,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리던 것을 하나씩 잃어가며 분투하는 모습,,, 더구나 책을 읽어도 계속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시력만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니더군요,, 저는 막내를 낳고 급속도로 노안이 와서 이제는 안경이 없으면 책을 못 읽어요. 그래서 책을 더 안 읽게 되는 것 같은데,,,,저도 올리버 섹스처럼 비록 노안경을 쓰더라도 죽을 때까지 읽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래요. 오늘도 좋은 글,,고마와요. ^^

blanca 2015-05-17 10:36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저도 스틸 앨리스 보고 싶은데 아직은 아이가 어려 여건이 안 되어서 아쉬워요. 다들 많이 얘기하더라고요.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무너질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일상을 수습하고 재건할 수 있을지... 순간에 집중하며 항상 충만함을 누려야겠어요.

세실 2015-05-1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거나, 글을 쓸수 없다거나, 암에 걸린다면 청천벽력 같겠지만, 누구에게나 올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겨내는 긍정 마인드가 참으로 중요한듯요^^

가끔, 노안이 와서 책을 읽지 못할때 가장 서글프겠다는 생각해요. 저도 고도 근시인데 무서워서 수술도 못하고 지금까지 렌즈로 살고 있어요. 더 나이 들어 빙글거리는 안경 끼는것도 으악?

blanca 2015-05-17 10:39   좋아요 0 | URL
친구들이 이제 렌즈 대신 슬슬 안경을 다시 끼는데 그 모습도 이지적으로 보이던 걸요. 세실님도 잘 어울리실듯 해요. 그렇죠. 저도 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죽을 때까지 그런 일들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요즘 절감합니다.

stella.K 2015-05-1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없던 시절 안경이 로망이었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내 나이 정도면 노안들이 와서 안경을 낄 때
아직은 버티고 있는 게 감사할 뿐이죠.

어딘가 아프면 우울하기도 하지만 새삼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되요.
그렇지 않아도 올리버 색스가 시안부 인생을 산다고 했을 때 지금 그의 마음은 어떨까
문득문득 생각해 보게 되곤 했죠. 역시 색스도 괴로워 했군요.ㅠ

눈 나빠질 것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오늘 책을 읽을 수 있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구요.
그때 되면 또 살아갈 놀라운 방법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도 눈이 버틸만 하다고는 했지만 예전 같지 않아 인터넷 폰트가 작은 글은 잘 안 읽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블랑카님 글을 제가 못 읽게 되더라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주세요.
가끔은 이렇게 읽는 답니다.ㅋㅋ

blanca 2015-05-17 15:02   좋아요 1 | URL
노안도 개인차가 있어서 삼십대 후반에 오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스텔라님 눈 좋으시군요. 부러워요. 저는 벌써 자간이 좁거나 글자가 작은 책은 피로해서 못 읽겠어요. 스마트폰을 너무 해서 그런지 걱정입니다.
맞아요. 제가 좀 걱정이 많은 유형이라 고치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고마워요^^

2015-05-1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19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5-20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의 건강이 가장 염려됩니다. 하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쓰고 자료찾아 읽는게 직업이라서 라식은 꿈도 못꾸고 있구요.ㅎㅎ 대학교 1학년 때 100명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시작해서 4학년 때 맨 앞자리에서 졸업했네요.ㅎㅎ 무서워요.ㅎㅎ

blanca 2015-05-20 13:23   좋아요 1 | URL
제가 한 십사 년 정도 전에 수술을 할 때도 의사 선생님이 조언하시더라고요. 정말 정밀한 작업을 많이 하거나 눈을 많이 쓸 예정이거나 밤운전 많이 할 거면 권하지 않는다,고 신중하라고. 다 감수하고 했고 역시 시력의 질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게 미세하게 떨어지는 걸 느껴요. 그런데 성인 될 때까지 좋은 시력 유지하셨다가 떨어뜨리신 것은 정말 안타깝네요.

Nussbaum 2015-06-02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저히 렌즈는 불편해 쓸 수 없어서 그냥 안경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괜찮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죠~ 문득 페이퍼를 읽으면서 어느날 아침 뭔가를 볼 수 없다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상상하기 어렵고, 또 상상하기도 싫으네요. 전 시력이 -7디옵타 정도 되는데 가끔 안경만 벗어도 암흑 같습니다. ㅠㅠ


blanca 2015-06-03 13:09   좋아요 1 | URL
제가 -3디옵터일 때에도 거울 앞의 제 얼굴이 명확히 안 보였는데 Nussbaum님의 암흑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옵니다. 눈이니 가장 가치 있는 소비가 아닐런지요.

아, 이것저것 정말 흉흉한 뉴스가 너무 많네요. 그냥 편안하고 아무런 일이 없는 일상이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요즈음입니다.

[그장소] 2015-09-0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학생들이 안경을일찍쓰는걸보면 정말 속상하죠. 남일아닌까닭에.

blanca 2015-09-03 23:20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근시여서 더욱 예사롭게 보이지 않네요. 참 불편한 점이 많았거든요. 더운 여름 안경에 눌리는 콧잔등, 귀도 아팠고, 온도차에 따라 뿌옇게 김이 서리는 모습도 부끄러웠고요. 시력은 단순히 보이는 풍경의 선명함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9-0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아직 얼굴형태도 다 안잡힌 어린애들이 두꺼운 안경을쓰고. 맨얼굴의자유를 모른다 하니 속상해요. 저는 난시가심한데 안경 쓰기 싫어라해서 . 그냥 밖에 나가면 죄일그러져 뵈는데 도. 바람이 닿는게 좋아서 걍다니고 그래요. 시력은 정말 그 사람 인상을 죄지우지하잖아요. 안경이 어릴때야 관심의대상인지 몰라도 커가며 얼마나 불편한지 , 단지 패션 이기만한
사람들 은 절대 모르죠. 그것까지 인상이 된다는걸~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 이벤트 준비는 소비로 시작된다. 휴가를 가도 기념일을 맞아도 심지어 내 자신이 너무 우울하고 지칠 때에도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게 된다. 거창하고 값비싼 것이 아닌 한 자루의 연필일지라도 사물은 신기한 착각, 잠시 위로를 준다.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갈 곳도 없고 꼭 구태여 가운뎃 손가락에 포인트 반지를 끼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손가락에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백화점 행사장에 목을 들이민다. 명품관은 '언젠가'는 이다. '사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사물'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도 다 '속물성' 지근거리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욕망하고 꿈꾸고 과절하는 과정에서 '사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지, '지금', '여기'에서 단 하나의 흔들림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한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거의 모든 것의 소비에서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또다른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아무 사물도 남지 않은 거의 소비가 없었던 시간들은 돌이켜 볼 때 더 큰 슬픔을 남긴다. 그때는 '일'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시간. 그 시간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 회사에 가지고 다녔던 다 낡아빠진 가방을 보면 지금도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어쩐지 가슴 한켠이 시큰하다.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이야기'를 꿈꾼다. 그것은 명백히 환각이자 착각이지만 그럼에도 일상이 조금은 덜 단조롭고 덜 무기력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소비를 지양하는 책을 사대는 또 다른 모순 속에서 잠시 사물에서 멀어져 보고자 하지만 그 사물들은 구심력으로 다시 여심을 당긴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아주 얇은 책이다. 하늘색 마카롱 빛깔 표지가 손안에 쏘옥 들어온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경이로운 이야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소설에 빠져 있는 사람도 누구나 잠시 이 책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굉장히 건조한 척 담담한 척 이야기하는 실비와 제롬의 그 사물들에 허덕이는 탐닉, 좌절의 여정이 너무나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누구나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있어도 너무 없어도 그것에 끄달리게 된다. '돈' 이야기 앞에서 초연하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도의 자립이 가능한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의 조건에서 더 나아가 행복의 조건까지 모두 돈의 가치로 교묘하게 환원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해서 사는 물건보다 정말 가능해서 꿈꾸는 미래상보다 항상 잉여의 것들이 욕망의 언저리를 부유하고 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집착은 대개 사소한 물건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행위로 드러났다.

-p.27

 

실비와 제롬은 파리의 사회심리 조사원이다. 프티 브루주아 출신의 젊은 남녀는 파리의 상점가, 벼룩시장이 열린 곳들을 기웃거리며 각종 사소한 것들을 사모은다. 물론 그들의 지향과 꿈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여기'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 유예된 곳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물론 더 많이 욕망했다. 조르주 페렉이 쫓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소진해 버린 청춘들과도 닮아 있다. 찰나적인 즐거움이 난무하는 이십 대, 그만큼의 불안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시간들의 묘사. 시간은 흐르고 친구들은 '안정'을 찾아 떠나간다. 실비와 제롬은 용단을 내린다. 튀니지의 교사 자리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곳은 파리 만큼 사물들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곳은 아니었다. 실비와 제롬은 마침내 욕망을 잊기 시작하고 그 지루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에 함몰되며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안정, 안온함, 자족과는 다르다. 그것은 권태였다. '돈'에서 탈출하여 '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곳'은 그들이 바라보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에필로그는 엄정한 가정법을 동원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파리로의 귀환, 다시 '사물'과 '욕망'이 조우하는 지점으로의 끊임없는 내달림. 그리고 또 다른 '그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여기 지금 우리와 얼마쯤 닮아 있어 섬뜩하다. 에필로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카를 마르크스 p.139

 

에필로그 뒤의 첨언. 이야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솔직히 납득이 잘 안 가면서도 삶의 모든 추구의 과정 자체에 대한 무게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작금의 어지러운 상황들에 가하는 엄중한 경고 같아 더 와닿았다. 조르주 페렉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들켜버리고 만다. 예리한 문장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대 앞에서 읽는 이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다시 한번 멈추고 심호흡 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나의 삶을 모두 좌지우지 해버리고 말것이라는 깨달음. 그가 기획한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우리 삶의 흐름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정법들. 그러니 "~ㄹ수도 있었다"의 무게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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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4-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언제나 부자일 수 있는데
막상 `부자`는 저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만 있다고 여겨...
그만 오늘 이곳에서 내가 어떠한 부자인가를 미처 못 보고
그냥 달리고 또 달리는구나 싶기도 해요...

blanca 2015-04-16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끔씩 멈추어 서면 보이는데 또 달리다 보면 그런 헛된 끄달림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 `나`인 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cyrus 2015-04-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돈이 없는데도 돈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죠.

blanca 2015-04-16 13:14   좋아요 0 | URL
죽기 직전에도 다 해탈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니까. 평생을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해요.
어떤 강렬한 감정의 기저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이 어떤 욕망, 결핍이 있더라고요.
그럼 아직 멀었구나,하며 또 한숨쉬고. 그래도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많은 것들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이 참 부럽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5-04-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굴데굴 굴러서 구렁텅이 안에 쏙 빠지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하고 눈을 치켜뜨던 순간.
그 두 순간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조르주 페렉은 참 쉽고 간단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문제는 자성과 자각, 생각은 늘 그것이 남의 것일 때에만 쉽다는 것. (제겐 그랬어요ㅠㅠ 저 그리고 오늘 후레쉬베리 사서 블랑카님의 이 좋은 리뷰를 읽으며 그만 한번에 여섯 개 `마셨`어요ㅠㅠㅠㅠ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다 내가 많이 먹어서......)

blanca 2015-04-16 13:16   좋아요 0 | URL
`한끝 차이` 이 말 좋네요.^^ 맞아요, 어느 책에서 인간들이 사실은 대부분 아주 비슷한 평균적 대응, 반응을 보이는데 자기만은 특별할 거라 생각한다는 지적이 떠올라요.

후레쉬 베리. 저도 그래요. 한 개로 절대 끝나지 않아요.--;; 여섯 개는 좀 과한대요 ㅋㅋ 저는 며칠 전에 아이가 베란다에 던져 놓은 후레쉬 베리 두 개를 발견하고 원샷했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5-04-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리뷰가 그리웠어요. ^^

blanca 2015-04-20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프레이야님이 그리웠답니다. 돌아오신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