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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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속물이다. '나'는 비겁하다. 그리고 이야기 뒤에 숨어 그것을 위장하지 않는다. 귀족 사회의 모든 화려함을 대변하는 게르망트 가의 별채로 이사한 그는 이제 목하 가장 속물적이고 치기어린 또 하나의 짝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게르망트 부인은 그가 가지고 싶어하고 도달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서 나의 모든 환상과 어리석음과 치기를 구현한 존재다. 젊은 '나'는 미성숙한 '나'는 그 부인의 시선을 한번이라도 받아보려 계획에도 없는 산책을 매일 가장하여 마침내 그녀에게 스토커 같은 인상을 남기고 만다. 게르망트 가의 후계자인 친구 생루의 병영으로 찾아간 것은 우정을 빌미로 그녀와의 만남을 얻어내려는 수작임을 독자에게 밝힌다. 이렇게 솔직하고 어리석고 적나라한 젊음의 치기는 언제나 비현실적이고 때로 기이하게 커져만 갔던 그 미성숙한 모든 우리의 열망들을 반영하고 있어 낯설지 않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언제나 떨쳐낼 수 없는 여정인가 보다. 그 길에서 찾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이상과 모든 아름다움은 예민한 '나'의 시선으로 적나라한 속살을 들키고 만다. 퇴락해 버린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 방문하게 된 것도 '나'의 아버지가 사회에서 원하는 자리를 얻어내려 물밑 작업을 하려 아들을 밀사로 보낸 것이 아닌가. 정작 애송이인 그가 발견한 것은 숱한 어른들의 그 왜곡된 욕망, 저마다의 탐욕, 위선, 가식의 향연이다. 만화경은 유대인을 탄압하려 한 통속이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저마다의 그 잇속에 관려된 왜곡된 진실의 가공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각자의 결핍과 은폐된 욕망을 비춰 준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나의 미래를 격려해 주었던 전직 대사는 정작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나'를 험담하고 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미 늙어버린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여인들은 저마다의 살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추잡한 경쟁과 연극을 벌인다.

 

난무하는 진실을 가장한 허위들을 명료한 시선으로 기술하는 이는 화자가 아니다. 화자를 관통한 시선은 사실 프루스트의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도 아직 충분히 깨닫지도 못한 어린 '나'는 이런 노회한 이들의 살벌한 전장에 발가벗겨진 채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유약하고 무기력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어리석음과 그 모든 편견들은 어느 한 시기 모두 화자를 통과하고 화자를 오염시킨다. 정작 위선과 가식에 귀족연하는 게르망트 부인이 가진 그 숱한 모든 부스러기들이 가지는 환상 앞에서 아연해하는 화자의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게르망트 가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생루가 거리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화자의 도움을 청할 때 때로 그를 도와주고 그의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에 동조하고 싶다가도 그를 둘러 싼 그 공고한 이미 이루어진 기성 세대들의 고정 관념에 복무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미성숙함과도 만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 그 어떤 이상이나 기대도 이미 포기한 프루스트 자신의 체념과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외할머니가 병과 노화로 허물어져 가는 옆에서도 그 모습을 부인하려 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삶을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이 아닌 언제나 얼마간은 비겁하고 얼마쯤은 무감한 것처럼 견뎌나갔고 견뎌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들은 때로 길을 잃는다. 만연체의 문장 안에서, 의식의 흐름 안에서, 시간의 낙차 앞에서. 그런데도 읽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 같아서? 잃어버렸던 그 수많은 치기, 실수, 실패, 환상 들을 이미 주섬 주섬 챙기는 읽기다. 쓰잘데기 없는 것 같은 살롱에서의 그 가식적인 행동들, 비겁한 언동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시공간의 격차를 가로질러 복제되는 축도 같은 오늘날의 현실의 연상에 찌릿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반복이다. 모든 좋은 것도 대부분의 나쁜 것도 결국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속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사회가 주입하는 그 모든 욕망 앞에서 무한정 초연하고 고결해지기란 어렵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 끝이 향할 곳을 예감할 수 없기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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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2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blanca 2015-12-29 18:26   좋아요 1 | URL
네, 다사나단했던 한 해 되도록 잘 마무리하려 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도 미리 복 많이 받으세요.

2015-12-31 0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1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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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랑스 제2제정의 법정에는 두 작품이 풍기문란죄로 소환되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이것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보바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변론해 준 변호사에게 <마담 보바리>를 바친다.

 

<마담 보바리>는 '결혼 생활 만큼 진부해지'는 간통의 파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통이 골격을 이루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인 경우는 거의 없다. 삶을 지나가는 숱한 파국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들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이야기하는 엠마 보바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직접적으로 혼외정사를 묘사한 대목이나 간통을 옹오하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는데 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내는 것은 어쩌면 플로베르의 이 이야기를 법정으로 불러내려 한 이들이 정확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느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플로베르가 엠마가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생활에서 결코 그녀의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킬 수 없어 곁길로 뛰어나가는 것들이 간통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엠마 보바리로부터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샤를르 보바리의 소년 시절의 동급생들이 기억도 못 할 만큼 유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모습, 창턱에 팔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소년은 미래의 아내의 배신과 자신의 몰락, 어이없는 죽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골의 의사가 되어 첫 결혼에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환자의 딸이었던 엠마에게 반해 그녀에게 구혼하는 장면,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신혼생활에 대한 묘사는 아릿할 만큼 아름답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 과한 공상과 환상, 허위에서 허우적대다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 된 귀족의 무도회에서 엠마의 허영심과 외도에 대한 욕망은 비도덕적인 출구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화려한 저기에 시선을 둘수록 여기에서 그녀를 둘어싸고 있는 것들은 헐벗고 초라하게 전락한다. 외도의 초입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가져왔던 환상이나 환각을 구체환 한 것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윽고 그것들 역시 플로베르의 말처럼 진부함으로 지리함으로 치닫는다. 플로베르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택하는 것 역시 '저기'를 '여기'로 변환시키는 삶의 그 가혹한 어쩌면 다행한 속성에 기초한 것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작가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엠마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꿈꾸는 한,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착각, 환상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 한 엠마 보바리 같은 패배는 남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축도처럼 집약된다. 플로베르의 인간형들은 그래서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닮지 않고는 못 배겨낸다. 특히 약제사 오메는 보바리 의사 집안 일에 뻔질나게 훈수를 두고 때로 적극적으로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 부부의 불행에서 상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속물이자 위선자로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보바리 부부가 모두 몰락하여 죽고 나서도 끝까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이 바란 바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는 승리자는 오메이다. 하지만 플로베르가 그의 성공을 묘사하며 정말 삶에 있어 그가 성공을 거두었는 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조소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보이는 성공 안에 진짜 '산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한계 안에서 그러한 시선으로 그러한 만족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다 죽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심판할 수 없는 지대다.

 

번역자 김화영의 작품 해설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에 기반해 한 편의 명강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값지다. 무엇보다 무심코 읽어내려갔던 것들에 대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분석과 플로베르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들이 어우러져 작품 자체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외동딸 엠마를 홀로 키우다 시집 보내고 자살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 루오 영감에 애정이 갔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농부는 전처와 사별한 그래서 장래에 자신의 사위가 될 보바리를 위로하며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귀중하고 다감한 조언을 남긴다. 그것은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목마다 만나는 그 모든 떨쳐내기 힘든 부스러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서 기억해 두고 싶다.

 

그런데 말씀이죠, 아주 서서히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한 조각 한 조각, 한 알 한 알, 흘러가더군요. 사라졌달까 떠나갔달까 아니 가라앉았다고 할까요, 여기 가슴 밑바닥에, 글쎄 뭐랄까......여전히 뭔가 묵직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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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내영화로 본데다 최근 읽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에도 언급되어있어서 조만간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에 조급해집니다.ㅜㅜ 미미여사 책을 후딱 읽고 바로ㅠㅠ;

blanca 2015-12-19 22:33   좋아요 0 | URL
아, 달밤님은 영화도 보셨군요. 아, 꼭 읽으셔야 해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책장은 가볍게 넘어가고 감동은 묵직합니다. 이러니 책 선전 같네요.

2015-12-2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7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trimony : A True Story (Paperback)
Roth, Philip / Vintage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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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에서 필립 로스가 "노년은 대학살"이라 했던 연원은 그 자신이 여든 일곱 살에 죽어가는 아버지의 여정에 통절하게 동참했던 체험에 있었다. 삼백 페이지가 안 되는 이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억의 복기가 일상에  괴팍하고 독선적이면서도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이웃의 할머니와 연애를 하는 정력적인 그의 아버지의 그 대학살의 전장에서의 투쟁, 그리고 그것에 함께 동참하여 그 지난하고 참혹한 노쇠와 소멸의 과정을 절절하게 체험하며 삶에 내재되어 있는 그 근원적 비극성을 생생하게 하나 하나 형상화하는 작가 자신의 고백이다.

 

여기에서 미국의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결정판을 출간하게 되는 작가적 성과는 그의 본질이 아니다. 뇌 속에 종양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치료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아버지는 유대인으로서 미국에 자리잡기 위해 평생을 분투했던 기억을 무한히 반복 재생한다. 그의 삶은 차라리 기억 그 자체였다. 성장기에 필립 로스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종양 생검을 앞두고 탄 택시에서 만난 기사가 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을 때 필립 로스 또한 그를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찬찬히 그 감정의 뿌리를 탐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선적이었고 그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타인의 실수에 때로 가혹해서 필립을 숨막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면면의 반대편에는 또 여느 서구적인 자식과 부모와의 다소 건조한 관계와는 다른 끈끈함이 있었다. 아버지의 투병은 필립 로스가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할 만큼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저편에서 커져가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두고 홀로 여기에 있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의 아버지가 생의 투지를 불태웠던 만큼 급격히 소멸로 가는 과정의 가혹함은 그를 어리둥절케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허덕이다 그와 통화한 여자 친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그를 위로한다. "나는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비로소 그는 잠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질서나 명확한 인과 관계를 요구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번 "왜?"가 시작되고 나면 모든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해 보이고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견뎌나갈 도리가 없게 되기도 한다.

 

너무 늙어버린 아버지를 그대로 두어도 공격적인 치료를 해도 그 어느 지점에서도 갈등하고 회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식의 번민은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 이러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버석거렸다. 그는 몇 번에 걸친 의사들과의 상담으로 아버지에게 장시간의 무리가 가는 뇌수술을 권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과 처분에 경과를 맡기게 되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된다. 뇌의 종양 조직 검사에서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참던 대변을 아들의 잘 꾸며진 집에서 실수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는 삶의 정면을 맞닥뜨린다. 그게 바로 삶의 실재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 준 유산은 돈도 아니고 소중히 여기던 유물들도 아니다. 아들은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눈과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수습해 보려던 아버지의 똥을 대신 닦고 청소하며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유대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별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아들을 들어올리고 평생 강건할 것처럼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와 몸은 졸아들고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 자신이 이제는 자신의 용변마저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서 아들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아들은 생이 가지는 그 처절한 비극성과 부자의 긴밀한 유대를 응시하게 된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면 그냥 무릎을 굽히는 것도 때로 답이 되기도 한다.

 

필립 로스는 대단히 솔직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했던 데에 대한 회한, 연명장치 중단 서류를 은근히 아버지엑 종용하는 모습의 고백 등은 그가 언어 뒤에 실체를 숨기려는 본능을 이겨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가 언어의 장막을 뚫고 호흡하는 지점에는 이러한 솔직한 과단, 진정성이 있다. 한편 때때로 계속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은 좀 아쉽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정체성이 가지는 무게를 감히 쉽게 이해하거나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를 가두는 데에도 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그 일을 지키며 필립은 아버지가 죽어도 영원히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로맹 가리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우리의 내면의 증인이 된다. 어떤 판단, 느낌의 준거점으로 기억의 거점으로 눈물로 남는 것이다.

 

표지 안쪽에는 세 부자가 수영복을 입고 일렬로 서 있는 아름다운 사진이 실려 있다. 서른 여섯의 젊은 아버지, 아홉 살의 필립, 네 살의 남동생의 아름다운 찰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빛난다. 아, 사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대조적이고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또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한 생을 꾸려가는 일은 어찌 이다지도 끝나지 않는 것인지... 이 모든 이상스럽고 신비한 것들의 원리를 모두 알고 이해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을 계속 꾸려가고 계속 읽고 쓰고 사랑하고 표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게 삶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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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2-13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서 다시 아기로 돌아가니,
아기가 된 어버이(아버지 어머니)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서 선 내 모습도
앞으로 내가 아이들과 나아갈 모습도
함께 되새길 수 있을 테지요.
아기가 된 어버이를 마주하고 껴안으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구나 싶어요

blanca 2015-12-14 14:44   좋아요 0 | URL
어른이 되는 길은 아마 죽을 때까지 또 배우고 돌아보는 과정인 듯해요. 거진 다 배웠다고 생각해도 또 튀어나오고 또 나오고 그러네요.

2015-12-14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5-12-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 작가는 굉장히 솔직하구나하고 깜짝 놀라곤 했는데 역시@_@; 읽고싶은데 번역되어있지 않은가봐요. 블랑카님 존경합니다♡

blanca 2015-12-14 14:47   좋아요 0 | URL
아, 필립 로스의 솔직함이라니, 정말 놀라고 또 놀라요. 어느 인터뷰를 보니 `~척` 안 하고 산다고 얘기한 게 빈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일견 자신감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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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p.7

 

이 책의 첫문장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 에릭 포토리노의 체험이다.  평생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물리치료사 일마저 뇌경색 휴유증에 의하여 그만둬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 개인파산까지 했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셋에게 나란히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전해주는 책임은 자신의 성을 주었던 큰 아들 에릭에게 남긴다.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왜 '은밀하게'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러한 표현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용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 가장 드러내 놓고 천명할 수 있는 애정이 아니었던가. 비교적 성공한 언론인이자 작가의 아버지였음에도 끝내 스스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사내에 대한 복기는 왜 작가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를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에릭은 아홉 살이 넘어서야 수줍게 들어서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언론에서 회자되는 가혹하거나 파렴치한 계부와 계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오연하게 서서 생명을 준 아버지보다 더 아들의 인생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다 때 맞추어 망설이지 않고 독립시켜 보낸 훌륭한 아버지가, 심지어 배 안으로 열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작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가 서 있다. 자전거로 인생을 가르쳐 준 아버지. 운동을 마친 아들의 근육을 손수 다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버지. 생부를 찾아 만나겠다는 아들을 운전해서 데려다 주는 아버지.

 

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p.123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 든든하게 지켜서서 그를 응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서히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같다. 아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죽는다. 그와 쌓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 애정, 신뢰는 시간에 허물어져 간다. 견딜 수 없는 망각에서 작가의 언어로 구원 받은 젊고 정력적이고 가장 아버지다웠던 모습들은 주춤 주춤 눈물겹게 아련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때로 짓이기고 묻어버린다. 거기에 대항하려는 글쓰는 이들의 언어들이 뭉클하면서도 때로 무력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스민다. 대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빛나게 생동하던 젊은 아빠의 눈망울은 움푹 패이고 아들의 자전거를 밀던 든든한 뒷배는 정작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어쩌면 작가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눈물 스민 감정의 편린들은 아버지를 둔 그래서 언제나 불효를 했고 불효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식들 모두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저히 눈물 없이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버지를 '그'라 칭하며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다. 이미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둘의 삶은 혼재되고 우리 둘의 이야기는 섞인다. 아무리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우뚝 선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들과의 연결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 속에 스민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간, 노화, 병마, 죽음, 앞에서 점점 종말로 다가가는 그 삶의 경로에 동행하며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 들어도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에서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덧대어질 때 비장해진다. 끝이 있는 이야기에 영원을 꿈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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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0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버렸어요.ㅠㅠ 블랑카님의 명품리뷰ㅠㅠ;; 어제 책을(다이어리를-_-;) 주문하면서 넣었다 뺏거든요.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눈물없이는 열수도 닫을 수도 없다니. 두렵습니다ㅠㅠ;

blanca 2015-12-05 13: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 공교롭게 요새 읽는 책마다 그렇게 눈물 쏙 빼는 내용이라 자꾸 가라앉아 고민입니다. 다이어리. 이미 새 다이어리 증정 받은 거 사용중인데 알라딘 거 보고 흑심이 들어 그것 또한 고민이에요.

2015-12-0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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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목차를 본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그것은 힘들게 묻어버린 기억들을 들추어 낸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을 논한다는 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감내하기 힘들다. 늙어가고 기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독립된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노부모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는 쉽게 꺼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달갑지 않은 주제다. 저자 아툴 가완디도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고 시작한다. 더 많은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생은 때로 과대평가되어 왔다. 그 자명한 유한성은 예술이나 우리가 소비하는 각종 영상들의 마디마다 활용되어야 할 일이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인 필립 라킨의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지 않은 거리는 없다."<앰뷸런스>, 이 단 하나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는 초입에서 머뭇거렸다.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쉽지 않은 나날들에 이러한 이야기까지 사실 듣고 의식하며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은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사실 중간 중간 계속 대면하고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어야 하는 데에서 더한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때로 후회가 들기도 했다. 정말 이런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그럴 거면 왜 태어나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야...결국 이런 거면서...

 

미국인 의사 아툴 가완디는 그 이국적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 출신의 이민 2세대다. 아버지, 어머니, 그 자신이 다 의사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은 현대 서구 의학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결론적으로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저지르고 있는지와 난립하는 요양 병원, 요양원이 노인들의 어떠한 핵심적인 바람을 놓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늙고 병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가족적 지지 안에서 경험하는 전통적인 동양 사회의 모습은 그의 할아버지대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나머지 가족들의 희생과 다툼 등을 들어 그게 최선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현대의 죽음이 어떻게 최신의료기술이라는 미명 아래 과도하게 관리, 제어 당하며 그것을 겪는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지에 대한 자신의 환자, 심지어 아툴 가완디의 아버지와의 그 힘들었던 마지막 시간들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불편하고 너무 두려워서 마냥 다 맡겨놓았던 그것들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이 이야기를 통해 대리경험할 수밖에 없다. 딸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는 그 일과들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두려워했던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의 이야기, 만삭에 폐암 말기임을 알고 아이를 조기 출산하고 아무 성과 없었던 암치료로 마지막까지 고통 당해야 했던 새라, 그 자신이 유능한 의사였지만 생의 말기에 아들을 붙잡고 울먹이며 내가 고통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아툴 가완디 자신의 아버지.  그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생의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이들은 비록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갔다. '한계'와 '끝'을 직시하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소중하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숱하게 그들에게서 그 자신을 빼앗아 왔다. 이제 그들은 치료받고 관리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객체가 되어버린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들이 원하고 편안해하는 곳보다 내 마음이 편할 곳으로 요양원을 생각한다는 요양원의 대안적인 기관인 어시스티드 리빙 설립자의 이야기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아툴 가완디가 힘들게 시작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의 이야기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가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죽음 앞에서의 어렵고 때로는 잔인하고 숭고한 대화들은 사실 우리를 예습 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가장 우려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묻고 어떻게 당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는지를 되물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나고 남는 것들은 사실 그러한 것들일지 모른다. 현대의료행위가 그 수많은 인공장치로 그 시간을 계속 지연시키며 끝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나 갈무리도 하지 못한채 아직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석별들을 당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대목은 차마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하니까.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가 저자를 앞에 놓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라고 했던 이야기가 겹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 내내 밤새 곁에서 책을 읽으며 그 처절한 소진 과정을 지킨다.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버지 유골의 일부를 수천 년 간 그들의 조상이 그래왔던 것처럼 갠지스 강에 뿌린다. 아들은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의 마침표를 성의 있게 찍는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다.

 

노력을 멈추고 '한계'를 인정해고 수용해야 하는 시기는 고통스럽게 온다. 태어나는 힘보다 더 끈질기게 엉겨붙어 그것은 죽음을 학습시킨다. 모두가 기피하는 바로 그 힘겨운 이야기를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분명 나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나라고 특별할 리 없으니 말이다. 덜 늙고 더 오래 살아도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마침내 나까지 저마다의 삶의 충실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제대로 완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도 역시 그것을 의식하는 일은 힘들다. 버티는 게 때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쉽다. 무언가를 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덜 가책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돌아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성에 저항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나아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나이가 들어 배워야 하는 것들은 어쩌면 다 이렇게 절절하고 엄혹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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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1-2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 가완디의<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나오자마자 사놨는데 아직도 못 읽었어요. 왠지 두렵ㅜㅜ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열심히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겠지요.

blanca 2015-11-20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이 저자 책들이 참 좋더라고요. 이과적 지식과 문과적 글쓰기 소양을 고루 갖춘 작가인 듯해요. 사실 읽고 나면 자꾸 생각나고 우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2015-11-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2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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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7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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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8 2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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