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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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훼손하고 폄하하고 사람이 타인의 삶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국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그의 생은 읽기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문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어제는 고귀한 일을 행했던 오른손으로 오늘은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는 왼손을 숨기는 인간의 치사한 면으로 인간 전체를 매도하거나 역사 전체를 악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반문합니다. 아주 많이 늙어 깊이 성숙하여도 나는 똑 떨어지는 답을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들을 더듬어 봅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잊혀진 잃어버린 목소리를 각자의 시선에서 복원해 낸다. 비단 열여섯 살 소년 동호 한 명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청년들의 그 날의 경험, 그 일이 남긴 상흔이 그들의 이후의 삶에 어떻게 드리워졌는지에 대한 천착은 실제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게 하는 착각을 낳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처절하다. 작가가  그들을 '너', 혹은 '그녀'로 거리두기를 하며 객관화와 중립의 거리두기를 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완강히 버티는 그 믿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사실들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킨다. 모두가 대단한 명분이나 현학적 가치를 지향하여 온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선의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함부로 도륙된 같은 인간들의 몸을 수습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부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절규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의 욕구와 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여름을 견딘 자들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파괴하려 했음에도 끝까지 남는 건 무얼까? 이 질문은 내도록 읽는 일을 힘들게 했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을 아직 꾸지 못한 꿈, 만나지 못한 사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파괴한 저들도 과연 여전히 인간일 걸까? 그들을 이미 만나버리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은 대체 그 절망을 어떻게 수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잊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이야기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거대한 악의 현장은 빈곤한 명분과 허접한 논리들로 뒤덮이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고 그것이 짓밟아버린 선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여전히 멀다. 


"우리는 고귀해"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끌고 지나간다. 아무리 파괴하고 앗아가려 해도 결국 절대 함부로 갈취할 수 없는 그것의 고결한 핵에는 깨끗하고 절대 오염되지 않는 성역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든 짓밟으려는 거대한 악의 빈곤한 행사에 도취된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한강은 그것을 머리로 해석할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진혼제를 정성껏 지낸다. 소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역사를 망각하고 그 실수와 그 상처와 그 훼손을 묻어버리고 정치와 권력행사를 혼동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해져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와 폭력이 만날 때 빚어질 비극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위협한다.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 있다. 흩어진 비극적 사실들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증언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중한 무게를 가진다. 경청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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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설가의 사물 - 사소한 물건으로 그려보는 인생 지도
조경란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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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가족의 안부에 관련된 안좋은 소식을 들었다. 순간 멍해졌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연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처럼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만큼은 찡하고 쌉싸레하지만 결국 남길 그 진한 여운으로 마음이 가라 앉았다. 일상은 다시 예전처럼 단단하고 안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순간, 비록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감사했다.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예가체프를 천천히 간다. 커피 향이 퍼지면 마음은 누그러져버리면서 뭐 이 정도도 괜찮잖아? 싶다. 삶의 바닥에는 수많은 단층선이 있고 그것 중 언제 하나가 일상을 뒤흔들게 될지 알 수 없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순간, 커피를 내리는 순간, 좋아하는 책 한 페이지를 읽는 순간, 괜찮은 순간들이 모이면 정말 괜찮은 하루가 될지 모른다.

마침 지금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이런 문장과 함께 위안을 받았다. 이 대목은 소설가의 사물 중 '핸드밀'에 나온 것. 그녀처럼 커피 원두를 직접 볶거나 핸드 드립을 하여 마침내 마시게 되는 커피는 아닐지라도 이제 나를 전혀 처음 보는 혹은 스쳐 갈 낯선 이로 치부하지 않는 점원의 다감한 눈빛과 함께 받아 드는 아메리카노는 나를 지금 흔드는 삶의 단층선의 진동을 조금 떨어져 느낄 수 있게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단단하게 나를 지지해 줄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소설가의 사물은 달걀, 레몬, 연필, 뒤집개, 타자기, 깡통따개 등속이다. 그녀의 삶과 그 안의 사물과 그녀가 읽고 쓰는 일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야기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여행하며 간절했던 손톱깎이는 마침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도 남자가 손톱깎이를 자신에게 주는 대신 주겠다고 얘기하는 영원히 여행할 수 있는 차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 주섬주섬 펜을 꺼내 이 부분을 메모한다. 언젠가는 이 영원히 여행하는 차표와 손톱깎이의 교환의 등가여부를 판단할 수 있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사물은 작가의 일화와 작가의 독서와 작가의 쓰기와 어긋남이 없이 만나 어느덧  그 사물과 그 책을 찾게 한다. 뜬금없이 텀블러를 꺼내고 손톱깎이를 꺼내어 별로 길지 않은 손톱이나마 자르기 시작하는 것.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는 것은 저녁잠을 망치게 되는 일이라 좀 망설여지지만.


시간은 앞으로 간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사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물을 쓰고 경험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망각하는 시간 자체가 삶일 테니 당연한 결론일 것같다. 나답게 잘 버티어내야지. 명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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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싫어했다. 지금도 여행을 그리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크고 낯선 곳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여행은 다시금 용기를 준다. 다음에 또 가고싶다,는 느낌은 참 신기하고 고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아주 특이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자각이 좋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정도다. 


어쩌다 보니 이십 대가 태반인 패키지 여행에 유일한 가족 단위로 합류하게 됐다. 시작도 전에 가슴 한켠이 답답해왔다. 민폐 작렬일까봐. 삼십 대도 아니고 이십 대라면 상상도 잘 되지 않았다. 출발 당일, 약속 장소에 한 명씩 나타나는 젊은 친구들은 내가 내 모습이라고 여기던 모습들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늙었던 것이다. 자기가 늙었다,고 자각하는 일을 그런 식으로 경험하니 뭐라고 말로 옮기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렇게 일박 이일을 함께 했다. 


친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질문도 수다도 삼갔다. 초면인 친구들 역시 서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청년들은 과묵했다. --;; 차 안의 수다는 주로 우리 꼬맹이들, 엉뚱한 싸움에 간간이 웃음소리가 나오는 정도. 서로 힘든 일을 맡아 하려는 자세도 놀라웠다. 한 마디로 놀라운 청년들이었다. 내가 저 나이 때 하지 못한 것, 시도하지 못한 것, 참아내지 못한 것들을 잘 해내는 젊음을 보니 또 가슴 시리도록 부러웠다. 다시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삼십 대 중반 정도로 타협하고 싶지만 그런 젊음이라면 이십 대 후반도 괜찮을 듯.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놀라운 경관 앞에서는 함께 점프 사진을 찍었다. 사진 때문에 카톡을 어쩌다 공유하게 됐지만 그렇게 거리를 지키며 함께 한 여행의 잔상이 오래 간다. 




김연수가 얘기한 청춘과 김연수가 예고한 중년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 사십 대가 되어 가장 힘들다는 그 골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한정없이 뻗어나가는 시간을 죽이는 청춘의 미학도 모든 것을 지나온 오십 대의 여유도 없다. '청춘의 문장'을 이야기했던 김연수가 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문장의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연재했던 글들은 한 바닥씩 조금씩 읽기 좋다. 전 세계 유명 여행지를 개관한 것은 아니고 그가 여행했던 곳중 개별적인 의미나 여운을 남긴 곳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자의 정서, 삶 그자체를 바라보는 이야기다.


작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사진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게 더 좋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절이 이제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도, 그래서 누군가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나빴던 시절을 그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해 말하리라.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그러고 보면 여행은 삶과 참 닮았다. 지나오고 나면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힘들었던, 나빴던 시절도 결국 서사가 된다. 그것이 고이는 곳이 우리의 기억이다. 삶의 끝에 다다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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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National Book Award Finalist) (Paperback) - 애플TV '파친코' 원작/2017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
이민진 / Grand Central Pu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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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잘 견디다가도 한번씩 무릎이 꺾이는 경험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제들로 더 한층 그럴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생계나 강제징용 같은 상황으로 한국을 떠나 일본에 거주하다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는 차별과 소외의 역사다. 일단 그들의 이주는 여타 다른 나라로의 이민과는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강제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분단된 국가로 인한 국적 선택 문제로 인해 색깔론으로 변질되거나 이용된 경우도 빈번하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재일 일본인의 이야기가 공론화되거나 이야기된 경우는 최근까지도 극히 드물었다. 한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아닌,  재미교포 작가가 <파친코>라는 소설로 4대에 걸친 자이니치의 파란만장한 가족의 서사를 다룬 것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는 1910년 한일합병기 부산 옆 작은 섬 영도에서  장애를 가진 청년 훈이 영진과 만나 딸 선자를 낳는 얘기로부터 선자가 유부남이었던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들 노아를 갖게 되고 어머니 영진이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만난 이삭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전개된다.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피지배 민족으로 거주한다는 건 빈곤과 멸시, 차별의 일상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일자리는 사행산업인 파친코에서 파생된 것이 많았다. 소설의 제목 '파친코'는 이러한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적 입지와 고난의 은유다. 이야기의 속도는 가파르고 인물들의 묘사는 생생하다. 개인적 삶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역사적 격랑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수많은 갑남을녀의 생존과 어떻게 어우러져 흘러와 오늘날까지 왔는지에 대한 가족적 서사시다. 


작가가 이미 그 자신이 국외자라는 점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양날의 검이다. 일단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공감력이 설득력과 핍진성을 띠지만 한국적 정서를 백프로 이해하고 역사적 입지의 취약한 부분을 냉철하게 관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재일 한국인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전형화 하는 대목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끝부분에 이를수록 약해지는 감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역사를 끌고 가는 힘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그 파고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저다마의 삶을 최선을 다해 지탱해 나가야 하는 다수의 익명의 평범한 이들의 잊허진 이야기와 만난다는 각성은 이야기의 전면에 유유히 흐르고 있고, 이것은 <파친코>의 큰 미덕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도 그렇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태어나 꿈꾸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때로 절망하고 또 다시 일어나 묵묵히 걸어나가다 마침내 죽음 속으로 잊혀져 가는 수많은 그들이 비록 국경을 벗어나 있지만 내 안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값지고 뭉클한 것이었다. 영웅이 되거나 이름을 드날리지 않아도 저마다의 운명과 그 안에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그들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감동을 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마지막 선자가 돌아온 곳에서 선자가 소녀 시절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한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결국 위험한 사랑에 빠졌던 소녀가 일본으로 건너와 그 사랑의 결실을 낳고 키우고 살아나가는 인생의 여정은 피할래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자신을 배반했던 사랑과 닮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흘러간 것이다.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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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8-20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blanca님 서재에서 처음 듣는 책이고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책소개에서 작가소개 읽어보니까 이력 자체가 무척 특이하네요.
이 책도 참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저는 blanca님 리뷰가 더 좋네요.
이 책을 읽게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 없을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8-08-21 02:1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접한 작가예요. 완성도면에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라 일단 책장이 잘 넘어가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감은빛 2018-08-22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선 얼핏 듣고 번역본을 보관함에도 넣어두긴 했는데,
왠지 구매가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쩌면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쓴 텍스트를 다시 번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왠지 뭔가 빠진 것 같고, 어딘가 어색할 것 같은 느낌.
근데 또 원서로는 읽을 실력과 여유가 없어서 시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블랑카님의 감상과 평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8-08-22 04:28   좋아요 0 | URL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한 걸요. 아, 보관함에 넣어두셨었군요. 책장이 굉장히 잘 넘어가는 책이에요. 재미있어요. 저도 분량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금세 다 읽게 될 정도로 이야기의 힘이 있더라고요. 이 책 그 자체도 그렇지만 무언가 어떤 계기가 없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hnine 2018-09-12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표기되긴 했지만 이 책 제목을 보고 일본의 그 도박게임 빠찡꼬인가보다 담박에 알아차렸답니다 ^^
이 작가의 이전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blanca 2018-09-13 03:11   좋아요 0 | URL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안 그래도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거든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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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오래 살면서 소설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 사람, 사진 보면 완전히 할아버지잖아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놀랍습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니 충격이긴 하네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p.245>


인터뷰는 자신을 규정하거나 포장하거나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쉽다.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때로 과장이나 거짓이나 속단이 되어 버린다. 인터뷰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란 그래서 어렵다. 애초부터 작은 기대와 많은 한계를 감안하며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면 그냥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인터뷰의 대상은 하루키. 인터뷰를 하는 작가는 가와카미 미에코.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로 데뷔했다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루키의 팬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을 공들여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루키의 우물에 가닿는 그녀의 신공이 놀랍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진지하고 머뭇거리고 솔직하다. 이제 곧 일흔이 될 그는 자주 불러오는 삽십대 중반의 주인공의 감성과 직관과 개방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꼰대 마인드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의 그 성실함에 대한 언급은 하루키 작품 속 남자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진다. 꾸준히 성실히 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영감에 의존하여 일필휘지로 완성해 내는 작품과 하루키는 멀다. 언제나 성실히 열 장 가량 매일 쓴다. 열 번 이상 고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문장을, 문체의 정밀도를 높여 나간다. 결국 궁극의 문장을 향한 그의 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좁혀질 것이다. 


시스템이 양산해 내는 악에 대한 일침이 와닿는다.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악을 근원적으로 완벽하게 몰아내기도 힘들다,는 인식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악을 탐사하고 그 악을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의 우물이다. 그 이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얘기의 자리가 아쉽다. 그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 그 이상에 대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남자 인물들이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나 구도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에 대한 언급은 사실 항상 느꼈던 바라 궁금했다. 하루키의 대답은 싱겁고 사과는 빠르다. 자기는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의식하거나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의 해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해 준 가와카미 미에코와 그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인터뷰 내내 흐른다. 인터뷰의 내용은 그래서 쉽게 우회하거나 얄팍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쓰는 일에 대한 작업 비밀을 어떻게든 솔직히 알기쉽게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가 서 멈추지만 결국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가 요체가 될 것 같다. 가르칠 수 없지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후배 작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려는 그의 사려깊음이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결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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