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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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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미없더라, 위대한 개츠비."
"나도 들었어, 그 책 재미없다는 사람 많더라." 
................................................................
영어학을 전공했던 친구의 재미없다는 얘기는 그 후로도 <위대한 개츠비>의 명성과 비례하는 부정적 아우라였다.
걸핏하면 쏟아져 나오는 가장 위대한 영어 소설이라느니 미국대학생들의 필독서라느니 하는 찬탄은 역으로
그 책을 더 얄밉게 보이게 했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 재미없다고 학교 게시판에서 한 마디 거들다가 개츠비 추종자로부터
약하게 한 대 얻어 맞은 기억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얄미운 개츠비가 성큼성큼 걸어온 것은 문학동네전집의 책 디자인이 요요하기도 했고, 번역자 김영하에 대한
무언가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영하가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번역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서점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다"고 성토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에 바쳐지는 각종 헌사들 그 자체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개츠비가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점에는 동감할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만난 개츠비에 대한 기억의 고백은
되레 너무 재미있어서 중간에 덮어 놓고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정. 말. 이. 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한 가난한 남자가 부잣집 아가씨에게 차이고 난후 절치부심하여 거부가 되어 나타나 그녀와 재회하고 밀회를
즐기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 간단한 플롯의 로맨스가 사실 졸라 재미없을 정도로 처질 것은 아니지 싶다.  
충분히 재미있을 개연성을 품고 있는 스토리가 그간 번역의 한계의 틀 안에서 지루하게 처져버린 것이다. 
그 안타까움은 김영하가 다 스러지게 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자~ 그럼 김영하 오빠의 귀환 신고식의 향연들~ 

좀 재수없었다. p.22
웬 촛불? p.24
나야 뭐, 올해 오십이고, 있어봐야 주책이고......p.93
미친 거 아냐? p.146

 

김영하 번역의 미학을 뛰어넘는 피츠제럴드의 저력은 상황과 풍경과 인물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다. 그 묘사는
여느 다른 고전의 나른함과는 다른 통통 튀는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의 집에서 커튼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장면의 묘사는 그 커튼 자락을 독자의 코 앞까지 드리운다. 또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분위기와
개츠비의 지향의 덧없음을 표상하는 데이지의 묘사는 당장 1920년대 중반 미국 동부의 된장녀를 끌어다 내 앞에
세워놓는 듯한 환각에 빠지게 할 정도다. 데이지는 이런 여자다.
 

"저 분홍색 구름 하날 가졌으면 좋겠어. 거기다가 당신을 집어넣고 밀고 다닐 거야." p.119
이런 뻔하고도 수작 좋은 얘기를 개츠비를 버리고 떠나 부유한 톰 뷰캐넌과 결혼할 때는 언제고 부자가 되어 컴백한
그한테 했던 여자라면 짐작 가능할 것이다. 

오후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허망한 꿈만이 홀로 남아 싸우고 있었다. 방 건너편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향해,
더이상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암울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으면서 끝까지 분투하고 있었다.-p.169 

물질만능주의로 흥청대던 전후상황에서 신생 제국 미국의 인격화라고 개츠비를 이해하는 당시 평자들이 많았다지만
우리는 이미 2010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 개츠비를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개츠비는 누구나의 마음속에나
살고 있고 죽을 때까지 붙들고 싶은 무모한 순정에 대한, 무모한 열정에 대한, 무모한 도전에 대한 아련한 향수라고.  
그 지향이 덧없음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순정을 가녀린 손끝에 걸치고 있었던 우리 스스로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개츠비의 외로운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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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10-01-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럭... 이 뽐뿌질은 정말이지, 너무하십니다아아아아아아!
저 위대한 개츠비 이미 세권이나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게다가 그 중 한권은 민음판 세계문학 전집의 75번 이구요. 저 또한번 강력 주장하건대, 민음판 세계문학전집 이미 백오십권!!!이 넘게 콜렉션 했단 말이여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ㅠ.ㅠ
괜히 샀어, 괜히 샀어, 사지 말걸, 문학동네 기다릴 걸, 괜히샀어, 괜히샀어~!!!

자, 이제 제 앞에 요술봉을 삐리링 하고 휘저어 주셔요. 제발!

blanca 2010-01-05 14:23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세 권이요?ㅋㅋㅋ 그럼 안사심이 맞을듯. 제가 저지하겠습니다. 아무리 김영하라지만 개츠비 네 권은 좀--;; 이 정도면 되나요? 개츠비 네 권 주르륵 꽂혀 있는 모습은 과히 바람직해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1-0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도 민음사 위대한 개츠비지만, 이런 뽐뿌질은 피해갈 수 없을거 같아요.
다독다필상 적립금 들어오면 님께 땡스투 할랍니다.ㅋㅋ
고딩때 그러니까 30년도 더 전에,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개츠비에 껌뻑 넘어갔던 1인~ 내사랑 개츠비!^^

blanca 2010-01-05 16: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대단하십니다. 연초부터 여기저기서 상금이^^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였어요?
우와~ 지금 막 상상하고 있어요^^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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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p.134)  
   

주인공 요조를 통해 세상에 뱉어낸 유일한 완결된 말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자이 오사무는 서른 아홉의 나이로 생애 다섯번째 시도한 자살에서 성공한다. 그에게 자살은 하나의 처세라고 번역자는 얘기한다. 맞다. 그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유 때문에 습관처럼 자신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번번이 아주 실제적이고도 자잘한 생의 고충들을 다룰 줄 모르는 미숙함이 그를 습관처럼 자살시도미수의 진창으로 끌고 갔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어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익살을 부리며 미숙하게 살아가는 부잣집 도련님의 얘기.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에서의 주인공의 가정환경과 연약한 성품과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아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분위기는 대척점에 놓을 수 있을만치 사뭇 다르다. '인간실격'의 분위기는 음산하고 무언가 기괴한 구석이 있다. '그후' 전체를 관통하는 몽환적이고 유미주의적 분위기가 걸어 들어갈 틈이 없다. 나쓰메의 제자였고 상류층 출신이라는 동류의식은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세계의 냉혹함과 그 기만이 횡행하는 곳에서 어기적거리며 헤매는 요조의 시선은 한없이 음울하고 기묘하다. 이 기묘함이 군데군데 정말 독자를 웃기는 아주 예리한 유머로 작용할 때는 웃으면서도 그 껄쩍지근함을 떨칠 수가 없음에 답답하다.  

세상을 향해 독설을, 그 부적응에 대한 절망을 뱉어내며 자조하는 요조는 결국 다자이 오사무다. 그는 결국 세상에의 적응을 포기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생을 종결하는 그 자유의지 만을 손에 넣어 이 작품의 속편을 스스로의 삶으로 답한다. 요조의 세 장의 사진을 통해 문을 여는 그 참신한 시도부터 결국 이 것이 요조의 기록을 제3자가 정리한 것으로 매듭짓는 그 완결감까지 아주 잘짜인 직조물에 걸린 그 수많은 허무와 음울함, 외로움, 부정들의 찌꺼기들의 미세함까지 탄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게 되지는 않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밀어넣은 그 비애와 절망이 불편한 까닭이다. 그리고 마치 모든 작품의 후속편은 그의 죽음으로 얘기되고 있을 것 같다는 기괴한 착각 때문이다. 모두가 칭송하는 행운아라는 외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만든 불행의 등에를 짋어지고 세상을 향해 뿜어내는 자신의 숨결을 그러모아 흩어 놓고 만 그의 생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는한, 그의 작품은 나를 계속 불편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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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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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얘기이다.  
진부한 플롯이고 사건전개가 다이나믹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서사의 빈곤함을 채우는 그것이 아주 기가 막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솔직히 그것을 내 손안에 움켜쥘 수가 없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소설적 성취의 지향점에 
이 작품이 돌올하게 서 있다. 미학의 완결이라고나 할까? 그런 완성도를 보이면 지루하기라도 해야 공평할텐데
또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 하늘의 별을 다 따다 주어도 이 소설의 평점으로 완벽하지 않다. 나에게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두번째이다.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읽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아닌, '도련님'으로
그와 첫대면을 했다. 워낙 삽화도 내용도 아기자기하고 귀염성 있어서 기대가 컸던 첫만남은 처음 나간 소개팅에서
폭탄을 맞은 기분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그 재미있기 쉬운 신참교사의 스토리가 더없이 지루했다.
그래서 수많은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 작품도 그저 한 번 읽어 두어야 할 것 같은 부책감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표지가 작품의 분위기를 잘 응축했다.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은 마치 주인공 다이스케가 사랑하는 미치요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그 정경이 연상된다. 절제된 우수가 차갑게 흐르는 일본소설의 그 본래적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지배적이다. '설국'만 해도 소설 전체를 관류하는 그 차가움이 서걱거리지 않는가. 그런 차가운 관조성이 일본소설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이 또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로서 매력의 한 요인인 것도 같다. 또한 그 단문들의 명료함이라니.
우리나라의 작가들이라면 한 문장으로 표현했을 그 서사나 묘사가 그들에게서는 적어도 두 세 문장으로 뚝뚝 끊겨져 나온다. 
그 막간 호흡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려처럼 느껴져 읽기가 쉽다. 하이쿠의 영향인가.

심리적 부분, 특히 후각을 자극하는 그 묘사는 탁월하다. 다이스케가 은방울꽃을 수반에 담아 머리맡에 두고 그 향기로
선잠에 들어가는 몽환적인 대목과 그 수반의 물을 마셔버리는 미치요가 향기가 난다고 얘기하는 부분,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백합향기 속에 세상에서 격리되어 갇혀 버리는 대목
은 환상적이다. 작가도 독자가 이 장면 둘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어떤 지리멸렬한 묘사나 서술보다 그 두 등장인물들의 감정교류의 본질에
이 향기들이 가장 근접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속에 뛰어들어 생계를 주도적으로 끌어나가지 못하는 고등유민인
다이스케가 그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생활과 남자들에 순응하다 사랑을 자각하고 깨어난 미치요와 손을 맞잡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우니. 그 깨어질 것 같은, 부서질 것 같은 투명한 아름다움은
은방울꽃과 백합꽃 향기와 닮아 있다. 

한 편의 시를 읽은 것도 같고, 그림을 본 것도 같고, 아무튼 활자의 집합체 속에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아주 묘한 환상미가 있는 작품이다. 둔감한 코끝에 백합향기가 매달리는 듯한 착각에 잠시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열린 결말의 허무함이 제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 그 자체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싶다면
저어하지 않고 바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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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의 이 리뷰를 읽고 나니 저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에 대해서 갑자기 궁금해져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었었는데요, 그 책에서는 '친구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했던 여자'에게 '먼저 고백해서 결혼해버린'남자가 나오거든요. [그 후]라는 이 소설은 혹시 그 뒤의 이야기일까 싶기도 하구요.
혹은 이런 이야기들을 쓰는건 작가 본인의 삶과 연관된 것일까 싶기도 하구요.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blanca 2010-01-12 10:05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다락방님~<산시로>,<그후>,<문>이 3부작이라네요. <마음>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좋다는 얘기가 많네요. 읽어본다 하면서 아직. 아무래도 나쓰메가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간에 긴장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그후>는 딴 걸 다 떠나서 참 재미있습니다. 재미있을 건덕지가 그닥 없는 단조로움이 이렇게 재미를 줄 수 있다는게 놀라워요. 강추합니다.

반딧불이 2010-03-1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세키의 '빈곤한 서사'를 채우는건 심리묘사가 아닌가 생각해요. 소세키 작품의 대부분이 별다른 사건은 없지만 묘하게 재미있었어요. 그 이유가 블랑카님 말씀처럼 묘사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련님>은 번역본에 따라 느낌이 좀 다른듯한데 일문학 전공자들은 문예출판사 오유리 번역을 권하더군요.
책을 다시 사야할 일이 있어서 블랑카님 리뷰를 보게 되었네요.

blanca 2010-03-16 22:45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안녕하세요. 그죠. 정말 아주 묘하게 묘하게 너무 재미나요. 전혀 지루하지 않고. <도련님>은 제가 건성으로 독서하던 시기에 읽은 책이라 저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나쓰메 소세키를 제대로 읽으시고 좋은 리뷰도 쓰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있는 책 다 떨고 소세키를 다시 찾는 날 반딧불이님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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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수많은 방언들, 토속어들, 주어를 찾으려 두 번정도는 다시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만연체의 문장들. 지극히 남성적인 거칠고 투박한 묘사들.  

한국 문학의 금자탑으로 추앙받는 이 연작 소설이 나에게는 사실 뒤이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성장 소설들에 물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상큼하지도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아 조금은 심드렁하게 읽혔다면 무식의 자랑이 될까, 오만이 될까. 

이 소설은 흔히 그렇듯 작가의 실제 성장기에 가깝다고 한다. 70년대에 씌어진 작가의 유년시절을 보낸 관촌에서 측근들(특히 이 측근들은 대체로 식모, 머슴 등 그의 기준에서는 하층민이다)과 어우러져 겪은 수많은 추억들에 대한 회상이다. 그는 특히나 상주목사의 증손자로서 한산이씨의 명문 거족의 후예라는 것을 할아버지의 얘기를 풀어가며 고백하게 된다. 평론에서 언급됐듯 그에게 은연중 유교질서에 대한 선망이 아로새겨져 있는 듯한 것이, 어린 나이임에도 하대하며 지내는 주변 인들에 대한 관찰기에 우리는 은연중 계급의식이 고착화되어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70년대라는 산업화의 질주 환경 속에서 가지는 이 작품의 의미를 복원할 수 없는 나의 한계가 이 작품의 무게를 제대로 달 수 없게 하는 것 같다.

여하튼 이 책을 다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수많은 토속어와 순우리말들을 건져올린 것에 의기양양하련다. '이슬바심'이라는 예쁜 말을 훔치면서. 

이슬바심 : 이슬을 맞거나 이슬이 내리는 풀섶을 헤치며 걷거나 일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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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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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떴는데, 그녀는 그 눈빛에서 아침에 보았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우수였다. 그녀는 그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녀의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서재를 나와 그녀의 방으로 가서 고개를 작업용 탁자에 떨어뜨린 채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잠시 두었다. <중략> 

그러나 이제 슬픔 자체가 되어버린 여자는 무릎을 꿇고 이 내방객들의 숨소리를 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중략> 

아,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야 하나.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교보문고에서 서서 '죄와 벌'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친구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한 원죄가 섞인 기억만 있을 뿐, 별다르게 그 작품에 대한 감동도 기억도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고등학교 때 노총각 문학 선생님이 약간 변태스러운 눈빛(우리들은 대체로 그렇게 느꼈다)을 번득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위대함을 강변했던 기억 정도가 덧붙여질 수 있겠다. 그는 줄치며 읽는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고 몸을 떨며 외쳐댔었지. 그 후로 그 선생님과는 별개로 줄치며 읽어야 하는 그 소설에 대한 일종의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줄곧 따라다녔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의무감이 그 작품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결론은, 아직 그것을 읽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절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소설은 픽션과 사실이 혼재하는 메타픽션 장르라고 한다. 그 기법이 대단히 도발적이고 문체가 세련되서 전문적으로 소설작법을 치열하게 공부한 작가의 작품인 듯 보이나, 기실은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설을 출판해 보지 못한 치프킨이라는 불운한 작가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의사이다. 20세기의 작가(화자)는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 안에 앉아 재혼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페테르부크를 떠나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는 여정에 3인칭 시점으로 동참한다. 이 경계는 굉장히 모호해서 작가의 자전적 얘기와 페쟈(도스토예프스키의 애칭 이하)의 얘기가 혼재되어 흔히 말하는 '서술의 일탈'(해설 인용)을 노출함에도 그것은 어떤 오류로 보인다기보다는 몽환적인 시의 잔영을 떨치는 듯한 마력이 있다. 이것은 나의 얘기, 저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얘기라고 친절하게 구획을 지어주는 대신 그는 끊임없이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왕복하면서 어쩌면 그 둘의 삶을 의도적으로 섞어 버린다. 이런 서술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의도적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치프킨의 유대인을 경멸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경배의 노래는 이렇게 둘의 비애어린 삶을 결국은 한데 뭉뚱그림으로써 완결되었다고 보여진다면 무리일까.  

페쟈의 여정은 그의 다혈질적이고 나약한 성격에서 비롯된 도박에의 중독, 간질발작, 러시아의 주류문단에 대한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노, 거기에 더한 안나에의 집착어리고 열등감어린 애정들이 사물과 사건들에 투영되는 과정이다. 수전 손택은 무엇보다 이 여정이 부부애로 집약된다고 결론지었는데, 페쟈의 속기사로 들어왔다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된 안나의 유약한 성격과 남편의 파멸에의 은근한 방관자로서의 모습은 무언가 아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비애가 서려있는 것이며,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판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녀의 옷가지까지 저당잡히는 페쟈를 그저 울면서 지켜보는 이 여인의 모습은 앞서 인용한 폐자의 임종 앞에서 슬픔 그 자체로 화한다.  

모스크바의 박물관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며 주위의 경악어린 시선을  끌어모으는 페쟈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화랑의 방문객들이 앉아서 쉬거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는 다른 의자들과는 달리, 왠지 거기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의자는 화랑의 직원을 위한 것이거나, 어쩌면 의자 자체에 뭔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페쟈는 뻔뻔스럽고 터무니없게 그 의자에 척하니 두 발을 올려 놓고 직원이 제지하든, 또 거기에서 파생되는  어떤 굴욕감이든 이겨내고 그 한계를 넘어야 했다. 그것은 폐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다수의 관념, 그것에서 파생된 관습, 그 관습이 만들어낸 말, 말, 말. 상징적으로 소묘된 이 대목은 그 내포한 많은 의미들을 차치하더라도 페쟈의 귀여운 오기가 상상되어 웃음짓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상상해 보라. 머리가 까진 중년의 눈이 퀭한 남자가 갑자기 푹신한 안락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번쩍 올라가 고작 그림을 열심히 보고 있을 모습이라니. 

옆의 그림이 페쟈가 그렇게 쇼를 하며 감상한 그림이고 죽기 얼마전 지인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 생각해 복사본을 선물하고 지금까지 그의 임종을 맞은 그 소파 위에 걸려있다. 

사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상징과 페쟈의 선호를 연결지어 분석할 만한 지적 소양이 없기에 그저 이 그림을 들여다 보고 그가 임종 직전에도 무신론적 삶과는 달리 복음서를 애타게 찾아 안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사실과 견주어 그가 신을 조롱할 거리를 찾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서두에 인용한 페쟈의 죽음 대목이다. 안나는 페쟈가 그녀에게 어렵게 구해줘 함께 먹었던 포도를 그 때 그처럼 어렵게 구해 그의 입 안에 한 송이 한 송이 넣어주며 그의 회복을 염원한다. 마치 그 한 송이 한 송이에 생명줄이 달린 듯이 눈물을 목 안으로 넘기며 그랬을 안나의 환영이 떠오르고 페쟈의 거친 숨과 계속되는 각혈로 물들은 목언저리의 피들과 그리고. 그리고. 또 눈물 흘리는 나. 그는 알았을까? 평생을 빚과 도박과 따돌림과 간질로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그렇게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을 줄을. 또 그는 알았을까? 이렇게 폐자의 궤적을 따라가는 쓸쓸한 여정을 그 어떤 지원도 없이 홀로 치루어 냈던 그의 책이 결국 사후에 발간되고 문단의 극찬을 받았을 줄을. 결국 이 둘의 삶은 하나인 것이다. 현실적 한계를 딛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냄으로써 지고의 진리에 합치되는 그 지점에이 처절한 희구. 그것은 둘 다 공교롭게 사후에 완결된다.  

수전 손택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극찬했던 이 유명하지 않은 소설에 나는 지극한 찬탄과 감동어린 눈물을 바친다. 그리고. 페쟈의 예술을 대가로 처절하게 휘저어진 정돈되지 못한, 정당화되지 못하는 그의 삶에도 후대의 독자들을 대신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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