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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 생각하는 그림들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정’… 인간의 냄새가 가장 짙게 베어있는 정서이기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그것의 실체를 어떤 이는 피속에서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휴머니즘에서 찾기도 한다. 인간적 사랑일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예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분명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은 인간의 체온이 식지 않는 한, 영혼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 지지 않는 한 그것은 늘 우리의 호흡과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존재함으로써 알게 되고, 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경배한다.
‘정’이 인간의 영혼을 잇는 고리라 하면, ‘미’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고리이다. 설레임, 고독, 죽음보다 강렬한 유혹. 추구하되 소유하면 잃게 되는 마르지 않는 욕망. 그 중심에서 꽃피는 예술은 탐닉을 일삼게 한다. 아찔하게 비척거리는 정체성은 파고드는 나의 욕망으로 서서히 잠식되는 자아의 발견으로 확인된다.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인간 정서의 공통분모. 그림 읽기는 그 둘의 결정체를 다듬고 새기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접근한다. 알아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면 보인다. 보이는 것에 모든 답이 있으니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림과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 그림은 나직이 속삭임을 내뱉는다. 속삭임은 나의 감각을 울리고,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 사랑, 관심, 감사, 지혜, 열정, 희망, 고독, 번뇌, 투기, 질투, 실패, 고통…
그림은 이 세상의 저편에서 자신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술가의 재능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차이에 변화를 줄 뿐이다. 예술이란 벽은 무관심으로 다져진다. 우리의 삶, 이웃의 삶에 대한 무관심은 척박함을 낳고, 잔인하게도 그림의 대화를 닫아버린다. 생각하는 그림들 ‘정’, 이 책은 닫아버린 대화의 창을 여는 창문이다. 하얀 벽지에 작게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밀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이 그림은 나에게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