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을 위한 유쾌한 성공론 - 내 인생을 바꾸는 82가지 질문
김도연 지음 / 원앤원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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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가지 질문을 내놓고 답변하는 식의 구성으로 된 깔끔한 책이다. 쉽게 읽히고, 고민 없이 볼 수 있어서 금방 읽게 되는데, 왠지 모르게 식상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구들, 유명인의 말, 너무나 뻔한 명제들(실천, 목표, 꿈, 성찰, 대인관계). 방법론은 어찌나 다들 비슷하던지 이런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포장지만 다르지 거의 다 똑같다. 물론 저자의 해석이 가미되고 포장에 들인 노력을 인정해줘야 하겠지만, 읽어서 뭐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책들이 던지는 화두와 면면들을 가만히 보면 살면서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이고 고민했던 것들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답들은 물음표로 남았거나 해결된 것들, 아직 진행중인 것들, 영원히 풀 수 없는 것들로 되어 있다. 문제는 고민 없이 책이 제시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신과의 대화는 줄어든다는 점에 있다. 이건 책의 의도와는 반대로 실패하는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책은 많이 읽을 필요 없다.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충실하게 산다면 되는 것이고, 미래를 보장 받고 싶다면 준비하고 더 노력하면 된다. 말은 쉽다. 책도 그렇게 쉽게 던진다.

How? 저자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일. 오직 본인만이 그 해답을 갖고 있으니 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길. 교훈적인 문장, 예가 많으니 가끔 보면 기분은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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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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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날 적잖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장한 각오로 출근 전선으로 투입된 전사들 사이에서 나 홀로 히죽히죽 웃기란, 괄약근의 힘으로 조이고 조여 설사를 틀어막고 오리걸음을 간신히 떼는 것만큼의 심한 내외합일을 요구했다. 이외수씨의 이미테이션 같은 범상하지 않은 외모는 ‘이 괴수’의 글에 담긴 비범함을 분명히 초반부터 경고하고 있다.

글에도 돌연변이가 있으니, 이 터무니 없이 진지하고도 자학적인 개그는 분명히 다이옥신과 페놀이 다량 함유된 어느 공장의 폐수를 먹고 자라났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달짝지근하지만 살짝 유통기한이 지난 콜라 같은 쌉쌀한 맛이 우리의 기억과 감각을 점유해 버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책의 흡입력의 정체가 혹시 돼지 발정제를 책에 발라놓아서? 꿀떡 삼키자니 찝찔하고, 어쨌든 먹다 보니 재미, 비애, 감동, 오르가즘, 잡스러움, 자유분방함, 질퍽하고도 쿨하게 내지르는 문장들의 반란에 온 몸의 털이란 털은 기개를 드높인다.

인천, 만년 하위권 야구단, 바글대는 신도림역. 소설 속의 풍경은 수 많은 이들의 삶을 투영한다. 인천에 살고 있고, 후속 모델 태평양 돌핀스를 좋아했고, 신도림역을 8년째 왔다 갔다 하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그래서 남다르다. 소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이유는 아마 내 삶을 관통하고 있는 시대적 공감의 절규라서 그럴 것이다. 으아악.

프로. 어쩌다 보니 난 프로의 삶을 갈구하고 있었다. 평범하다고 믿었던 그 삶은 썰렁하게 선인장만 덩그러니 있는 황무지였다. 현실적인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찍어대는 채찍질에 청춘은 시들어가고, 그렇게 지나온 세월에 삶의 진의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박제가 되어 간다. 이것을 흔히들 평범한 삶이라고 부른다지만, 사실 평범해지기 위한 노력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쟁취한 ‘위대한’ 투쟁의 노획물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놓고 본다면, 위대함은 ‘위가 크다’는 것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보다 더 먹어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위대함은 사회 곳곳에서 누런 이를 드러낸다. 학벌의 위대함, 자본의 위대함, 소속의 위대함,
위가 커서 슬픈 짐승이여, 그들은 너무나 굶주려서 외롭다.

더 먹어야 한다. 보다 많이, 보다 빠르게… 올림픽 구호가 아니다. 삶은 전쟁이다. 자본을 신앙으로 삼아, 국가 경쟁력의 첨병이 되어 금메달을 향해 총력전을 펼치는 영웅적인 삶이 인생의 목표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러한 세상을 가르는(홍해를 가르듯) 구세주의 느낌이 들게 든다. 공부하느라, 암기하느라 삶을 소비한 주인공에게 주체적 삶을 가르쳐 준다. 실패하면 뭐 어때? 도발적인 질문은 충만한 은혜로운 빛이며, 행복으로 가는 비단길을 펼쳐놓는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뉴스를 보라.
‘자본을 섬기지 않는 게으른 일가족이 생활고를 못 이겨 집단 자살했습니다. 당신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제난으로 실업자가 늘고, 개인파산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안전합니까?.’, ‘학벌과 소속, 능력으로 당신의 몸값을 높이세요. 당신의 삶은 그것에 좌우됩니다’.

어디를 가던 우리는 사회적 협박과 공포에 주눅이 든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안정적인 삶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한 칸을 자리잡았다. 안정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당연히 실패 없는 삶이다. 무결, 무패,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9회 말까지 퍼팩트 게임을 만들어야 우리는 안도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이란 언제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소설처럼 그냥 방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가끔 앞 뒤로 뒤집어가면서 사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전문 용어인 ‘폐인’이란 수식어가 붙겠지만, 인간이란 뭐든지 금방 익숙해질 수 있는 사회적 짐승 아니던가. 열심히 살려는 의지만 없다면 누구나 ‘실패’를 맞보기 힘든 성공적인 삶의 한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이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고 가벼운 소설일까. 재미를 살짝 걷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스물거리는 우리 사회의 억압 기제가 내 몸을 서서히 타고 올라와 소름을 돋게 한다. 자조적인 성찰이 숙연하고도 진지한 자극이 되어 12만 볼트에 이른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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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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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충만감이 끔찍하게 차오른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데, 심하게 곤혹스러웠다. 제목대로 사후 경직된 시체가 주인공인지라 겉 표지에 있는 시신의 하얀 발부터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시신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을 떠나 세밀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가 가득하여 원치 않는 상상의 날개를 절로 달게 된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질병, 사고, 불행, 혐오의 상징인 시체를 담은 이 책을 굳이 읽은 이유는 지적 충만감이 주는 황홀함을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가 종교적인 관심사였다면, 사후 처리되어야 할 육신은 사회적 관심사이다. 수없이 많은 탄생 뒤에 찾아오는 죽음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될 만큼의 시사성을 가진다. 뉴스기사로도 가끔 등장하는 묘지가 매년 여의도 면적의 몇 배 만큼 증가 한다는 둥, 화장터, 납골당 유치 문제로 지역주민과 마찰이 있다는 둥. 인간은 죽어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의 상황과는 연관성이 없는 듯 하면서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게 이 책은 시신의 유용성과 다양한 사후 처리를 말한다. 해부 실습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장례절차를 거치지 않는 망자들의 다양한 행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예를 언급하자면, 충돌 실험용, 해부 실습용, 탄도 실험용, 종교성을 띤 십자가 실험, 기요틴으로 참수 된 시체를 이용한 머리 이식, 의료용 식인행위, 퇴비 등의 예는 죽음 뒤의 세상을 실험실로 연상케 한다. 자르고, 베어내고, 찢고, 드러내고, 안구에 강한 충격을 주고, 총을 쏘고, 장기를 적출하고, 피를 뽑고, 펌프로 대동맥에 방부액을 밀어 넣고, 심지어 간다. 이쯤 되면 좀비, 슬래시, 스플래터, 하드고어 영화가 떠오른다. 비슷하긴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시체는 얌전하고 사전에 동의를 했다는 점(유족 또는 본인)이다.

기증이라는 절차를 거쳤으므로 잔인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끔찍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적인 분해과정(범죄 수사를 위한 사체 연구소의 실험), 방부 처리하여 장례를 치르는 과정 또한 HDTV급의 선명한 묘사를 하며, 미적차이는 별로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레닌처럼 깔끔한 박제(미적으로 뛰어난)가 되려면 어느 공장의 생산라인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단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얇게 저민 살(삼겹살이라 명명된), 벗겨낸 피부(돼지 껍질), 머리와 발(머리고기와 닭발, 족발), 살아있는 채로 살을 발라내고(회), 배를 가르고, 뼈를 몇 시간동안 삶는다. 고추장도 모자라 온갖 자극성 있는 물질로 잘 버무려지는 대상들 또한 살아있었던 생명체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인식, 감성적 반응을 무뎌지게 하는 작업이 꼭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에 대한 위대한 휴머니즘, 존중을 유지한 채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들(의사, 연구원, 장례업자 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일들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익숙함과 식상함이란 신이 준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저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섬세하게 적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의 눈과 귀는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엔진이 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기능의 중추를 인터뷰가 담당하고 있는데, 꺼림직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만큼의 사실성과 현장감을 전해준다.
‘의학도들은 해부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대면 하기도 한다. 또한 존중과 동정이 아닌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의식적 동일성 상실은 인간이 자연과의 격리에서 오는 고립에 근거한다. 유일하게 그 끈을 이어주는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저승행 열차를 타는 순간인데, 인간이 가장 당황스러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을 가장 훼손당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불경에 ‘염처경’을 보면 시체를 곁에 두고 가르침을 받는 부분이 나온다. 시체는 썩어가고 승려는 어느 순간 한줄기의 미소를 짓는다는데, 육체의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이라고 한다.

덧없는 육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자는 식의 뉘앙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죽은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시체의 유일한 재능은 고통을 받아넘기는 재주 아니던가. 그러한 재주 때문에 당신의 안전(안전 벨트, 에어백의 안전성은 그들이 검증했다), 당신의 생명(장기 이식 또한 그들이 주는 새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다. 이것을 안다면 감동은 아니더라도 이해는 하게 된다.

의학, 범죄, 과학, 역사 등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위험스럽고, 혼란스럽다. 뇌사자가 죽음에 가까운가, 생에 가까운가를 따지는 일 만큼이나…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가사상태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죠.’

말없는 시신이 유일하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부담스럽지만, 생의 조건(유감스럽게도 죽이는 조건도 부수적으로 밝히는)을 밝히는 빛이다. 불교의 덧없음과 살포시 맞닿아 있기에 절묘한 양립이 경이적인 이 책은 겉 표지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쓰여져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죽음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이성적, 감정적으로 바라본 장기기증에 대한 이율배반적 인식이 조금은 달라질 듯 싶다. 끔찍하게 재미있으니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라는 일은 처음과 다르게 사람을 꿀에 절여서 약재로 쓰는 밀화인(본초강목 기록된)이나 약재로 미이라나 사람을 먹는 행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마냥 신기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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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2-25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아무 손질도 안한 사진일까요? 정말 대단히 신기한 사진입니다.

아영엄마 2005-02-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멋진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구먼요! @@

날개 2005-02-2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를 손에 쥐고 있는 저 사진이 맘에 들어요..^^*

라주미힌 2005-02-2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인들은 참 운이 좋아요. 저런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게...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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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에 따라서 거북한 느낌이 드는 책일 수 있다. 학자다움이 물씬 풍기는 뻣뻣한 한자 어휘들(외국 학술 용어의 어색한 ‘한국화’)과 문장들은 매우 건조하다 못해 지식인들의 고매한 정신까지 풍부하게 담아냈으니 반은 실패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 책은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쓴 글이라면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이지도 않으면서 대중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함이 보이는 주석과 각주의 인색함은 이해를 떨어뜨리고, 집중을 방해한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실렸던 글들의 난잡스러운 짜집기 구성은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본문은 이 책을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니라, 이 책을 내기 위해서 급조된 스크랩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동의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감내할 수 있다면 나머지 반의 성공은 인식의 재발견, 전환이라는 커다란 파괴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공론화 되어(어느 정도 되어있긴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반 대중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컨텍스트가 양적으로도 풍부하고 질적으로 양질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거북한 느낌이 드는 진짜 이유이면서 이 책의 중요한 화두는 일반 대중에게 침투되어 있는(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에 오염된) 권력 담론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불감성과 종교적인 맹신에 대한 질타에 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심장에 전기충격이 필요하듯이 의식의 흐름이 정체된 것에도 뼈아픈 질타와 자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죽어가는 육신을 깨우는 전기충격이며, 죽어가는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따라서 그의 국사 해체론과 반민족주의 외침에서 ‘한민족 반만년 역사’만을 가르치는 국정 교육에 대한 반란이며, 그러한 교육을 받고 그렇게 믿어온 대다수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무슨 짓을 하길래 이 책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빼곡하게 적어놓았는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국제 사회의 관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한 국가 내에서의 다층적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담론의 본질을 파악하여 서구적 근대화에 종속되고, 억압 받는 주체들의 자각과 해방을 촉구하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저항 민족주의는 서구식 근대화 논리 안에 존재하여 서구 중심에 결국에는 인정 받고 편입되려는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면서도 상대 진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 따라서 서로의 '존재'는 '서로의 존재'를 보장하고, '적대감'은 각자의 논리와 힘에 '정당성 증대'를 의미 하게 된다. 같은 논리 위에 같은 목표를 가진 이원적 관계이기에 시오니즘과 나치즘,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의 테러리즘,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김일성식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 중국에서 보이는 민족주의 등의 모든 것들의 공통분모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는 용어로 함축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의 근본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집단에 대한 의지와 목표의 획일화를 통한 권력의 획득. 그것을 통한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다. 그렇게 탄생한 인간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의 총체적 결정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공동체의 응집력에 달려있다. 기본적으로 권력은 성장을 지향하고(거대성이 주는 거대한 영향력), 인간들은 그것에 지지를 보낸다. 권력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은 우리 사회와 인류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복잡도를 증가시킨다. 복잡도와 인지 능력의 반비례성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비판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여 새로운 대안을 세우려는 노력은 우리의 상식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커다란 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사생아’인 민족 분쟁의 끝은 보이질 않고, 일본의 식민지로 영원히 남고 싶어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노예가 되어버린 ‘민족성’에, 위대한 반만년 역사는 그 속에 민중을 파묻어 버리고, 서구적 극단적 근대화인 ‘세계화’에 맹렬하게 돌진하는 한반도의 오늘은 말 그대로 ‘적대적 공범자들의 종합세트’이다.

특히 약소국의 위치(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은)를 끊임없이 재확인함으로써 민중의 집단 의식(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을 고착화 시켜버렸다. 집단 의식은 권력의 좋은 먹잇감 아니던가.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은 순수함을 추구하고, 혈통에 대한 집착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억압의 당위성을 이미 내포한 상태를 지닌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냉전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외부의 적을 내세워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결속에 의해 잘려나가고 무시되어 온 담론들이 많을수록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나치즘, 시오니즘은 이를 증명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역사를 낳았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일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국가, 민족, 인종의 신성화, 집단에 대한 헌신과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대중의 열광적 지배자 숭배’

이 낯설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 박정희의 망령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선동을 이끌고,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놀이판을 장식한다. 인종, 민족, 젠더의 소수자들을 냉철하게 타자화하고 배제시키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쯤에서 권력 담론의 본질적인 성찰과 물음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국가와 국민,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변종을 생산해내어 곳곳에 파고드는 권력의 식민화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다. 도리어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참여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과거사 청산이 가진 문제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권력의 영향력은 대중의 암묵적 또는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발휘될 수 없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오직 국가 권력에만 물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정부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어, 경제 개발이나 국가 안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일반 대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었다는 점이다. 집단적 유죄를 묵과하고 소수에게 그 역사의 짐을 맡기는 것은 권력 본질에 면죄부를 주어 좀 더 세련되고, 은밀한 대중의 억압기제의 출연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 논리의 틀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동원된 대중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하고 키우고 있는 참여정부를 향한 대중의 비판적 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획일화의 강요를 통한 권력 담론의 폭력성은 내 안에서부터 국제 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외부에 드러난 것은 강력한 저항으로 소멸하기 쉬우나, 전산학에서 말하는 ‘은닉화’, ‘추상화’와 같은 가공을 거치면 그것은 영속성을 띠게 된다. 이 책은 해체논리를 펼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실효성을 논하지도 않는다. 다만 ‘타자화 된 시선’의 폭력성을 알리고, 각자의 삶 속에 스며든 권력의 헤게모니들 속에서 무엇을 성찰해야만 하는가를 깨닫게 할 뿐이다. 같은 논리 위에 존립하는 이상 우리는 모두 공범자이다. 그러한 틀을 깨기 위해서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어 해방을 위한 다각적인 대안을 모색하여 다층적 사회의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지현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은 격찬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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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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