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파시즘: 유능한 파쇼와 무능한 자유보수주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새 나에게 주목받고 있는 신생출판사 가운데 하나가 "교양인"이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스콧 터로의 "극단의 형벌", 히틀러 평전으로 유명한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최후의 14일"(이 책은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다. 어떻게 알고... 감사) 그리고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이 그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는데, 현재 내가 알고 있기로는 모두 8종의 책을 낸 것으로 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탄탄한(물질적 측면이 아니라 출판사를 꾸려나가기 위한 다른 역량-문화적 마인드, 필자 풀, 번역서의 경우엔 그걸 분별할 수 있는 식견 등) 역량이 돋보인다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도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원제는 "The Anatomy of Fascism"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시즘의 해부" 정도가 될 수 있는, 이 책은 "교양인"에서 출간한 책 가운데 현재로서는 가장 두툼한 부피를 자랑하는 책이다. 전체 600여 쪽의 책 가운데 주석 부분과 기타 참조 부분(용어, 인명 찾아보기 등)이 100여쪽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전문적인 학술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읽는데 족히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이 분야에 흥미가 많은 탓이고, 둘째. 필자와 역자, 그리고 편집자들의 수고 덕이겠지만 읽기 쉬웠다. 셋째.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책값이 27,000원인데 10% 할인해서 24,300원인데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나로서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전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지인에게서 그런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본인에게 직접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잘 안 난다. 한홍구 교수는 최근 국내 최초로 평화박물관을 개원해 몸소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하느라 무척 바쁘다.) 평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엔 이 분야가 특히 취약해서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민주주의에 대입해 보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독재 체제(파시즘, 전체주의, 권위주의 등등)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스운 말이지만, 우린 해방 이전과 이후의 근대화 기간 동안 전쟁과 너무나도 가깝게 살아온 나머지 웬만한 전쟁 이야기엔 면역이 되어 있고, 해방 이전엔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해방 이후엔 권위주의 독재, 군부 독재 시대를 거쳐온 탓에 독재 혹은 권위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거나 지나치게 관대한 측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드 세르토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거대 도시의 마천루적인 시각과 더불어 그 밑을 걷고 있는 자의 시각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어떤 관점은 지나치게 원경으로, 어떤 관점은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들어가고 있으므로 일반인들로서는 다소 곤혹스러울 수 있는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머리말을 쓴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유효적절해 보인다.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안이하게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또 그럼으로써 '진짜' 파시즘이 출현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미 양치기 소년 증후군에 중독 되어 파시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다. <본문 14-15쪽>"

팩스턴의 "파시즘"은 모두 8장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 운동하는 파시즘"은 파시즘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주요 전략, 정치적 운동 방향 등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파시즘의 정의를 시도한다. "2장. 파시즘의 탄생"은 말 그대로 파시즘이 탄생할 수 있었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 등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어떤 징후들이 나타나는가를 분석한다. "3장. 뿌리 내리기"에서는 파시즘의 준동이 유럽의 각국에서 어떤 형태로 출현했는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이탈리아, 독일 등과 달리 다른 유럽에서 파시즘이 실패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4장. 권력장악"에서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정권 탈취에 실패한 파시즘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5장. 권력행사"에서 팩스턴은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한 뒤 어떻게 내부 분열을 겪고, 그 가운데 지도자 중심의 권력 독점으로 기울게 되는지에 대해, "6장. 급진화인가 정상화인가"에서는 파시즘이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파시즘의 어떤 요소들이 이런 급진화를 부추겼는지 살핀다. "7장.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종말을 고한 듯 보이는 파시즘이 1945년 이후 유럽에서 어떤 형태로 잔존했는가? 이후에도 파시즘의 출현은 가능한가를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 "8장.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현대 사회에 출현 가능한 파시즘을 예측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팩스턴은 마치 법의학자가 시신과 대화를 나누듯 파시즘의 세세한 측면들을 들춰내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미국 출신의 학자임에도 미국에 존재하고 있는 파시즘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파시즘은 무엇이다'란 식으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팩스턴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파시즘이 주요한 정치 이념으로 출현해 다시 정권 탈취, 권력 장악을 하도록 방치해선 안 되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힘은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파시즘에 대한 기존의 고정 관념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파시즘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 형태 중 가장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파시즘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다음과 같은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무아경에 빠진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광신적 애국주의 선동정치의 모습,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젊은이들의 행진 장면, 악마로 둔갑한 소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특정 색깔의 셔츠를 입은 극렬분자들, 새벽녘의 갑작스런 가정 침입, 함락된 도시를 행진하는 규율 잡힌 병사들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파시즘의 그러한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파시즘 선전원들이 거둔 최후의 승리다. 또 그 이미지는 파시즘 지도자를 승인하고 용인한 국가에 핑계거리를 제공하고, 그 지도자를 도와준 개인, 단체, 제도로 향하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훨씬 더 정교한 파시즘 모형이다.
환호하는 군중의 이미지는 몇몇 유럽 민족 내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파시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그런 민족적 특성 때문에 파시즘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가정에 힘을 실어준다. 이 가정으로부터 한 나라의 결함 있는 역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는 겸손한 듯 오만한 믿음이 따라 나온다. 이러한 믿음은 쉽게 파시즘을 방광하는 국가들의 알리바이로 바뀔 수 있다. 즉, 자기네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 38-39쪽>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영화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엘 시드"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 한 가지를 던져준다. 1492년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모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레콩키스타"로 알려진 실지 회복 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기독교도 왕국이 된 스페인은 이교도에 대한 이전의 관용정책을 포기한다. 이전까지 종교적 자유 아래 기독교도 국왕인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무어인들은 개종해야 했고, 개종한 무어인들은 '토르나디소스(tornadizos, 변절자)'란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대규모 인종학살이 빚어진다. 1391년 세비야에서만 4,000여 명의 유대인이 불 속에 던져졌다. 레콩키스타를 종료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시대를 거치며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서구 유럽의 자본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촉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고, 이들 사회가 새로운 격변을 맞이한 것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였다.

1900년에 이르러 18세기 계몽사상에 의한 과학 ․ 이성 ․ 진보의 힘은 유럽의 체제를 크게 바꿔놓았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발명(증기기관, 내연기관, 무선통신, 사진, 영화 등), 철도와 기선의 출현(미 대륙 횡단철도, 유라시아 횡단 철도, 대양 운송)으로 인해 낡은 농업사회의 자급자족제도를 파괴하고, 도시로 유입된 다수의 노동자 계층을 생성시켰다. 농민에게는 전통적 생산수단을 현대화하도록 강요(문화적 재생산의 차단)했고, 인구의 이동성을 높여 도시의 거대화를 초래한다.

자유주의, 자유자본주의 모델은 그 물질적 장점으로 인해 정치적인 틀을 크게 변모시킨다. 언론, 상거래, 과학적 탐구의 자유, 노동의 유동성과 확대된 선거권에 기반한 민주적 자치(自治)에 대해 각성한(영국의 경우 1867년 도시소시민, 노동자, 1884년 광산노동자, 농민, 1918년 남성 보통선거, 1928년 보통선거 확립)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구상의 인구는 1900년 당시 16억 3천만 명에서 2000년 무렵 60억으로 폭발적인 증가세(1820년대 영국 리즈, 버밍엄, 브래드퍼드는 각각 47%, 40%, 65%의 인구 증가)를 보였다. 산업화와 도시화,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대중들의 의식을 변화시켰고, 교육받은 중산층과 소수 기술노동자 계층의 출현으로 새로운 형태의 매스 미디어들(신문 - 1700년대부터 인쇄되어 구독되었던 소책자나 정보지로 출발, 18세기에 이르러 일간지가 일반화됨, 1840년대 대중잡지, 1920년대 라디오, 1940년대 TV)의 출현을 가속화시켰다.(1843년 영국 카툰 잡지 <펀치 Punch>, 사진의 출현, 포르노그라피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영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이론가였던 M. 아널드는 "대충 교육받은 다수가 아닌, 고도로 교육받은 소수가 항상 인류의 지식과 진실의 기관 역할을 해왔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과 진실은 결코 인류의 대다수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란 말로 대중사회의 도래를 기존 사회 체제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 요소로 보았다. 자유주의 사상가 J.S.밀과 A.토크빌은 대중사회가 확대된 민주주의(보통선거)에 의해 수적으로 증가한 (정치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한)대중을 오도하여 선출된 소수 개인의 의지에 따라 민주주의가 변질되는 것을 새로운 전제주의적 횡포로 생각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즘'들은 정치가 교양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적인 '이즘'은 그 사상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그 이즘들의 강령을 검토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파시즘은 대중 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이었다. 파시즘은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실린 수사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 <본문 53쪽>

대중사회는 출현했으나 대중을 노동계급으로만 해석한 사회주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세력으로 파악한 보수주의, 교육받은 시민들만을 정치 세력으로 인정한 자유주의 모두 대중을 정치권력의 파트너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대중은 분명한 정치세력이었으나 이들을 단지 무지몽매한 세력으로만 파악한 기존의 정치이념들이 놓친 공백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대중을 인정치 않거나(보수주의, 자유주의) 반대로 대중이 지닌 보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대중은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의식과 더불어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성향을 함께 지녔다) 사회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자유주의는 파시즘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거나 세력, 대안을 조직화해내지 못했고(무능했고), 보수주의는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다른 정치 세력으로 파시즘을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의 하나는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였다.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가장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 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토론의 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은 파시즘이 자유주의의 위기를 기반으로 삼아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중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자유주의 정권이 확립돼 있었거나 자유주의 체제 확립으로 나아가던 중이었다. 자유주의 정권은 개인은 물론이요 집권당의 경쟁세력인 여러 정당에도 자유를 보장해주었으며,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부 구성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또한 시민과 기업에 광범위한 자유를 허용했다. ...<중략>... 이런 유형의 자유주의 국가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사라졌다. 전면전을 수행하려면 정부의 강력한 조정과 규제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전쟁은 끝났으나 자유주의 정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전쟁 이후 밀어닥친 여러 갈등, 위기, 긴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팩스턴은 이런 현상이 사상적 문제이기 보다는 위기에 처한 "통치의 기술" 문제라 말한다. "좋은 집안 출신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명성과 존경에 의지해서 선거에 계속 당선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명망가의 지배"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 거물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정치를 이용해 좌파에 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노동계급을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파시즘"의 정권 장악엔 필연적으로 "대중의 동의"가 뒤따랐음을 지적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다. 물론 이런 지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시즘의 등장을 대중의 동의 탓으로 밀어 붙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과거의 잘못과 오류를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대중을 파시즘의 정치적 동반자로 부각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과거 자유주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중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무지몽매한 군중(mob)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와 결합하면서 대중을 다시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게 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과거 박정희 유신 독재, 87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의 책임(양 김의 득표가 노태우보다 훨씬 더 상회했음에도)을 대중에게 전가시킨다. 이들은 중요한 사실(fact)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1921년 10월 30일 로마진군을 결정한 무솔리니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은 대중이 아니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다. 이탈리아 국왕은 파크타 총리가 제출한 계엄령에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무솔리니에게 정권을 내어줄 결심을 내비쳤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상황을 결정지은 것은 파시즘 세력이 아니라, 무솔리니에 맞선다면 자신들의 권력이 위험에 처하리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두려움이었다. 로마진군은 오합지졸의 거리 행진에 불과했으나 효력을 발휘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성공은 곧바로 독일 나치스를 부추겼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 폭동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이 정권을 헌납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폭동은 간단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정부 기능이 아직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들은 아직 히틀러를 신뢰하지 못했다.

독일 좌파들은 히틀러가 앞으로도 이탈리아의 방식(쿠데타, 폭동)을 통해 정권 탈취를 노리리라고 방심하고 있었다(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히틀러는 쿠데타라는 불법적인 방식의 권력 탈취 기도가 성공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에 참여해 이전과 비교했을 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의 힘을 빌어 좌파 세력을 견제하려는 결정을 내리기에 미적거리는 동안 나치당의 인기는 다시 하락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적은 사실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런 위기에서 히틀러를 구해준 것은 보수주의자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그는 정치 초년생인 히틀러를 명목뿐인 수상에 올려놓고, 자신이 부수상에 올라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직도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독일의 유권자들은 나치당에게 과반수의 표를 준 적이 없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1932년 7월 31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나치당이 37.2%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독일 의회에서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 1932년 11월 6일 치러진 선거에서 지지율은 다시 33.1%로 하락했다.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전 독일을 지배하던 1933년 3월 6일에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지지율은 상당히 올랐지만 아직은 미흡한 43.9%에 그쳤다. 나치 돌격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2명 중 1명 이상이 나치당에게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1921년 5월 15일에 참가한 자유 의회 선거에서 535석 중 불과 35석을 얻는데 그쳤다."  <본문 225쪽>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나치시대의 일상사"를 통해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정치적 권력 장악 이후 문화적 헤게모니까지 장악해 대중의 일상까지 모두 손아귀에 넣기 위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보여준다. 히틀러의 계획은 노동계급의 일상까지 파괴하고 있으나 동시에 히틀러와 나치의 문화정책의 의도가 대중의 교묘한 저항에 부딪쳐 어떻게 변질되고 좌절되었는지도 잘 묘파해준다. 대중은 히틀러의 문화정책을 교묘하게 비틀었는데, 예를 들어 모든 히틀러 유겐트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식과 달리 나치 이념을 전파하는 본래의 목적엔 전혀 관심없는 이들에 의해 장악되어 친교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히틀러 유겐트 조직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일종의 반항집단화된 하위집단)의 저항을 받아 유겐트 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이런 반항이 나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진 못했지만, 최소한 나치 체제의 붕괴를 앞당기거나 대중이 무조건적인 동의를 보냈다는 편견은 시정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최근의 사태를 맞이해 다시 중요해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의 연원에 대해 팩스턴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의미가 있을 듯 하다. 그는 1920년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일본의 파시즘은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이 철저하게 탄압당한 반면, 파시즘의 일부를 모방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 존재해왔음을 지적한다.

"제국주의 일본이 파시즘을 모방하였으며 파시즘의 특징을 여럿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일본식 파시즘은 단일 대중 정당이나 대중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유럽식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을 무시하거나 억압했다. 마치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타도한 결과로 유럽에서 파시즘이 확립된 것과도 같았다." <본문 446-447쪽>

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정권은 비록 파시즘 특유의 대중 동원 기술을 사용했지만, 지도자들과 경쟁을 벌일 만한 자생적 대중 운동이 형성되지 못했기에(나는 아직까지도 일본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시민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 물론 전후 일본을 통치한 미국의 입장 때문에 철저한 전후 처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 일본의 정치질서는 비록 겉으로는 몇 차례 변동을 겪은 듯 보이지만 정치 권력 체계는 본질적으론 시민사회 혹은 대중사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본다. 일본을 유럽의 파시즘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 가장 큰 차이는 사상적으로 파시즘을 따른 것이기 보다 국가가 지원하는 대중 동원을 포함한 국가주의 군부 독재란 점이다. 즉, 유럽에서와 같이 명망있는 기존의 정치가들을 전복시킨 파시스트 세력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명망있는 기존 정치가들이 파시즘을 모방하였고, 그들이 전쟁을 치르고, 전쟁 이후 현재까지 일본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정치 세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일본, 평화헌법의 일본에서 우경화로 나아가는 현재까지 마치 수백년을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온 뱀파이어처럼 단 한 차례도 교체되지 않았다.

이제 우리 사회의 문제, 세계화가 진행된 현대 사회의 우리들에게 파시즘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팩스턴은 파시즘이 기존의 다른 정치 이념과 달리 강령이나 어떤 주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집단이기 보다는 권력 그 자체의 쟁취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내세웠던 강령 역시 시시때때로 변화시켜왔음을 지적한다. 그런 까닭에 파시즘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며, 팩스턴이 내리는 파시즘의 정의가 비록 협소한 의미의 정의에 불과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파시즘적인 방식을 모방한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군부 독재, 급진화된 민족주의 정치 질서의 출현 자체를 긍정할 수는 없다. 팩스턴은 "파시즘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셔츠 색깔을 보거나 20세기 초 반체제적인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들이 내세운 구호의 메아리를 찾아볼 것이 아니라, 과거에 파시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시즘의 단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 위기에 직면한 정치적 교착상황에서 나타나는 불길한 경고 표지를 더 많이 읽어낼 수 있다. 이 때는 위협을 느낀 보수세력이 적법절차와 법의 지배를 포기할 태세를 갖추고 더 강한 동맹 세력을 찾아 헤매며, 국가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선동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 보수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테크닉을 빌리기 시작하고 파시스트들의 '결집된 열정'에 손을 내밀며 파시즘 추종 세력을 흡수하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본문 458-459쪽>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시즘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정치 세력과 결합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태로 존재할 때, 기존의 정치 세력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엔 마치 휴면에 들어간 바이러스처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효용에 눈뜬 보수세력과 결합할 때, 파시즘은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바로 그 점이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군부독재와 기묘한 동거를 자청했던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 그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 "파시즘"은 별다섯이 아깝지 않은 매우 좋은 책이고, 부피에 주눅들지만 않는다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 가운데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어느 분이 지적하고 있듯 중간 몇 부분에 다소 어이없는 교정실수들이 보인다는 점은 옥의 티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180쪽 13번째 줄엔 "그러나 신당은 1931년 10월 선거에 단 하나의 의석도 없지 못했다."란 문장이 있는데, "얻지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이 책이 많이 팔리길 바란다. 써놓고 보니 어느새 200자 원고지 60매였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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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뉴스의 두 얼굴
제정임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2002년 말에 나온 것을 보니 한참 대선이다 뭐다 해서 시끄럽고, 보수 언론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한참 달아올랐던 시기였던 것 같다. 어수선할수록 인간의 야욕과 이해의 충돌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곧은 목소리는 보석처럼 빛나기 마련이다. 비교되게도 같은 시기에 언론 개혁의 선봉장 강준만씨의 수많은 책들이 노무현 사수를 위해 날카로운 정치성을 드러낸 반면에, 같은 언론 개혁을 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정치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순수 언론 비판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목에 있듯이 경제 뉴스로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 언론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취약성과 오점은 변하지 않기에 비판의 칼날은 한국 언론 전체를 향한다. 때문에 정갈하고 당찬 느낌이 드는 책이다. 또한 아주 촌스러운 표지 디자인이 무색하게 보석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이다.

14년 기자생활을 한 저자의 양심고백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은 진원지의 지진과도 같다. 지금은 경제 섹션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2002년에 따로 분리되어 두꺼워진 분야), 신문의 경제면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재테크 돌풍은 서점을 휩쓸었고, 몇 억 만들기는 시민들의 꿈이 되었다. 주식 시장의 들썩임에 개미 투자자들의 가정 불화도 들썩이는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 경제 관련 기사들이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라면 독자들은 고스란히 피를 보게 된다. 따라서 심봉사의 눈보다 어두웠던 독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경제 뉴스의 두 얼굴’이라는 지진은 꼭 필요한 재앙이 된다.

설마 저렇게 언론이 지저분할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찌라시’는 조중동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더니 한국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이며,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권력, 정치권력의 감시자가 되야 할 언론이 그들의 마이크 노릇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찌라시’ 레벨은 귀납적인 결과였다. 죽은 언론은 사회정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부패의 비용이 수익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것이다. 171p’. 누구 때문에 부패의 비용이 낮을까? 마땅히 항생제가 되어야 할 언론이 사적인 관계에 얽매여 있고, ‘빠르고 부정확한 정보’라도 좋으니 특종만을 추구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카드라’ 뉴스, 껍데기만 핥고 깊이는 없는 기사들, 여기 저기서 휘둘리고 치이고 꼴이 말이 아니다. 마땅히 미생물, 세균의 번영을 돕고, 공생을 추구한 죄는 불신과 일갈로 다스려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명확히 지적해 줄 수 있다는 것은 해결방안 또한 명확히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은 독자의 높은 의식 수준을 의식하여 언론도 수준이 높아져야 할 것이다. 독자의 높은 의식 수준을 드러내려면 망하는 찌라시를 만들어야 한다. 망해도 싼 찌라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아직 망한 곳이 없으니 아직 그러한 희망은 요원한 것 같다. ‘특종경쟁보다는 뉴스의 이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심층분석, 세상의 흐름을 집어내 주는 기획기사, 감춰진 비리를 고발하는 탐사보도 등 질적으로 차별화 된 정보를 기대한다. 285p’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러한 기대를 만족 시켜준다면 제대로 된 언론이라 하겠다. 언젠가는 신문기사가 학술자료로 인용될 만큼의 신뢰와 깊이를 지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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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은 적극 동감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마릴린, 금세기 최고의 섹스심볼.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노마진,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았고, 9살 때 고아가 된다.


마릴린, 모든 남성들을 휘어잡으며 열광시키다.
노마진, 의붓아버지에게 끝없이 성폭행당하다.


마릴린, 1년동안 30개의 잡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노마진, 굶어죽지 않기 위해 누드사진을 찍어야했다.


마릴린, 최고의 야구선수와 화려한 2번째 결혼.
노마진, 16살에 한 첫 결혼 후 자살기도.


마릴린,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노마진, 평생 천박하고 골빈 금발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마릴린, "나는 잠자리에선 아무것도 입지 않아요, 샤넬 5를 제외하곤."

노마진, "사람들은 자신의 틀에 나를 가둬요.숨이 막혀와.날 보는 시선이 싫어!"


마릴린, 희대의 극작가와 3번째 결혼에 성공했다!
노마진, 그토록 염원하던 아이를 유산하고 그 충격으로 머지않아 이혼하고만다.


마릴린, 그녀앞에 영화제의가 산처럼 쌓여만 갔다. 언제 어디서나 환호받는다.
노마진, 그 영화들은 모두 "섹스어필" 뿐. 극도의 신경쇠약과 무대공포증..


마릴린, 최고의 여배우 중 한 사람으로 사람들 기억속에 영원히 간직된다.
노마진, 아이도, 남편도, 가정도 원하던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의문사한다.









노마진베이커...마릴린먼로의 본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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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은하단과 행성 2005-04-1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 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게 아니라 노마진을 추모하는 버전으로.
그전까진 마릴린먼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때부터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언젠가 이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물론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진 못했지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관점의 차이겠지만, 마릴린은 아름다운 배우인건 틀림없지만 그렇게까지 절정의 미녀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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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송두율 - 과학·기술·인간

과학·기술·인간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철학)

 

  
 1.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
 2. 과학과 기술의 낙관론과 비관론
 3. 기술이해의 폭
 4. ‘기술입국’ 이데올로기
 5. 기술자와 기술관료주의
 6. 과학과 윤리
  
  
 
 
1.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

1월 9일자 『한겨레신문』을 들추어보던 중 신문 한 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광고에 나의 눈길이 멎었다. 큼지막한 활자로 ‘자유 평화 미래’라고 쓴 바로 밑에 “맥도널 더글러스의 FA-18기를 선정해주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 있고, 이어서 “세계의 하늘, 자유의 하늘을 지켜온 맥도널 더글러스 항공?우주?정보?과학분야에서 최첨단의 기술력과 발군의 개발?탐구정신으로 오늘에 이른 맥도널 더글러스가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겠습니다. 한국 항공 우주산업과 맥도널 더글러스와의 공동사업 성공은 첨단사업으로의 도약과 새로운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여줍니다”라고 계속해서 적혀 있다. 다음 세대 전투기로 확정된 F18기는 대당 3,500만 달러로, 완제기 도입 12대, 조립생산(삼성항공에서 조립) 36대, 공동면허생산(삼성항공?대우중공업?대한항공 참여)이 72대로 98년까지 120대를 한국 공군에 배치하게 되는데 총 42억 달러가 이에 소요된다고 한다.

이 기종의 우수성은 도하의 신문에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소련의 미그 29기와 여러 각도로 자세히 비교해서 나열되어 있어서 문외한들도 알기 쉽게 설명되었고, 조립과 공동면허 그리고 대응구매를 통해 한국의 첨단산업도 비약적인 발전과 통상증대에도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자유?평화?미래’라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는 것처럼 해설되고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행정부가 입안하고 추진한 ‘별들의 전쟁’이라는 ‘SDI’계획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미국, 서구 그리고 일본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뉴햄프셔의 다트머스 대학의 지구물리학자 로버트 재스트로(R. Jastrow)는 소련이야말로 악마의 왕국이기 때문에 오로지 군사적 우위를 통해서만 이를 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SDI’계획의 실현을 강력히 요구한 데 대하여, 스탠포드 대학의 물리학교수인 시드니 드렐(Sidney Drell)은 반대로 1972년 미소간에 체결된 ‘미사일 방어체계제한’ 협정을 미국정부는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자들 스스로가 그들이 직접 관여하는 연구대상과 국제정치적 구조와의 관계해명, 그리고 이를 통한 구체적인 정치적 태도표명은 최근 핵발전소, 생명공학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범위에 걸쳐 나타나고 있고, 연전에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의사’ 모임이 노벨평화상을 받기조차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과학자와 전문직기술자들이 가령 미국과 서독에서 ‘SDI’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펼쳤던 것처럼 이번 F18기 도입과 개발에 대한 공개적인 의견표시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장의 폐수로 죽어가는 남해의 문제를 연구해서 논문을 발표했던 어느 해양생물학자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이 바로 몇년 전의 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하나의 ‘새로운 형이상학’(H. Schelsky) 또는 ‘숨겨진 이데올로기’(J. Habermas)로서 가지는 의의를 반성하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 과학과 기술문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 같다.
 
2. 과학과 기술의 낙관론과 비관론

1985년에 실시된 ‘대서양 연구소’의 한 여론조사는 약 반수의 미국인, 24퍼센트의 일본인, 그리고 12퍼센트의 서독인이 컴퓨터가 오히려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인과 일본인에 비해서 서독인들이 기술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이러한 조사보고는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경쟁승리만이 현대적 산업사회가 생존할 수 있다고 보는 서독의 집권당인 기민당이 적극적으로 서독도 SDI계획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화시켜주었다. 이에 대하여 야당인 사민당은 일본에서 급속도로 진척된 과학과 기술발전은 반드시 ‘국가’의 주도하에서 또 군사목적을 위한 연구와 연결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사실상 1982년 일본의 과학과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액 중 국가가 직접 투자한 액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23.6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국의 비율은 46.7퍼센트 그리고 서독은 43.1퍼센트로 상당히 높았다(한국도 이러한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는데 1986년 과학?기술을 위한 연구개발비 중 국가투자는 26퍼센트였다).

또 같은 해에 ‘군사용’ 연구가 이러한 국가의 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은 0.5퍼센트인 데 비하여, 미국은 16.4퍼센트, 서독은 2.2퍼센트였기 때문에 군사목적의 연구가 반드시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폈다. 물론 사민당이 SDI계획에 서독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내놓은 기술대국 일본의 예가 적절한 예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대종을 이루는 민간기업체의 기술개발연구비가 꼭 ‘민수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이시가와지마하리와중공업, 히다치 등의 대기업은 특히 미국의 군산복합체인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스, 그루먼, 록웰, 노스럽, 록히드 등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서독도 일본도 SDI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과학과 기술개발문제 그리고 군축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사회여론화시키고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집권당인 기민당은 야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이 과학과 기술개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은 직접적으로 핵에 의한 에너지정책 문제에 관한 대결로 나타나, 점차적으로 핵에 의존하는 에너지정책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사민당, 그리고 당장에 핵에너지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녹색당의 정책을 산업문명을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비난으로 연결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SDI참여문제보다 더 일반시민의 직접적인 관심을 끌었고 여태까지 이 핵에너지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중이다.

한쪽에서는 과학과 기술발전을 통해서만 경제성장과 생활환경 보호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활환경 보호를 위해서 맹목적인 경제성장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자는 ‘기술천국’(Technopia, Technik+Utopia)을 이야기하고 후자는 ‘환경보존천국’(?otopia, ?ologie+Utopia)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오늘에서야 나타난 문제는 물론 아니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지만 사상적 원류는 더 길고, 동양에서도 ‘근대화’를 둘러싼 근대주의자와 보수적 전통주의자 사이에 벌어진 투쟁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여러 사상가들이 씨름했다.


3. 기술이해의 폭

과학, 기술 그리고 산업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이야기하는 기술시대, 산업사회 그리고 기술과학문명은 야스퍼스(K. Jaspers)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우리를 파악하는 데 아마도 가장 중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술’(Technik)이라는 개념은 종종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경험적인 숙련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플라톤은, 기술은 학문적인 반성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경험의 반복을 통해 축적될 수 있는 ‘기교’(技巧)나 ‘기예’(技藝)와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기술이라는 의미도 기계기술이나 질료적 구성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더 광범하고 새로운 내용을 그동안 담게 되어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까지를 의미하는 ‘정보-체제기술’로서 오늘날 기술은 이해되고 있다.

기술이 지니고 있는 총체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최초의 사상가는 역시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순수’과학과 비교해서 열등한 의미로 기술은 이해되었으며 헤겔도 시민사회의 생산력발전을 ‘숙련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첫째권 중에 ‘기계’(Maschinerie)라는 장에서 자본주의사회의 기술과 생산조직이 지니는 혁명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기술발전이 ‘자동화’라는 하나의 총체적인 체계로 발전될 것이라 이미 예견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강조하면서 가령 한스 렝크(H. Lenk)는 마르크스를 경제학자 내지 계급이론가로서는 물론 기술문제이론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녔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개조를 통한 인간의 자기실현이라고 기술을 규정한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달리 ‘인간기관(器官)의 연장(延長)’이라고 규정한 캅(E. Kapp)이나 ‘이념의 현실화’라고 규정한 데사우어(F. Dessauer), 존재사적으로 발전된 자연의 ‘끄집어내기’(Entbergen)나 정초(定礎)라고 본 하이데거의 입장은 ‘인간학적인 입장에 가깝고, 이러한 철학적인 기술이해는 겔렌(Arnold Gehlen), 셸스키(Helmuth Schelsky), 프라이어(Hans Freyer) 등에서 주로 기술과 사회의 연관문제로서의 기술관료주의로 연결되었다.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볼 때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본 겔렌은 다른 동물이 모체로부터 빨리 독립해나갈 수 있는 데 비하여 인간은 거의 20년 가까이 부모 곁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제도’라는 ‘제2의 자연’ 속에서만 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술은 바로 이러한 결핍된 인간존재의 기관(器官)을 대체하고 이의 부담을 더는 체계라고 겔렌은 보았다. 셸스키도 기술을 ‘인간적 정신이 세계대상성(Weltgegenst?dlichkeit)으로서 구현된 형식’으로 보았으며, 프라이어는 기술은 하나의 ‘세계관계의 객체화’이며 구체적 사회의 목표규정 형식이라고 보았다. 기술은 자연의 변화로 향하는 인간의 의지 표현이며 또 인간의 내재적 본성에 속하고, 결코 인간에게 밖에서 와 닿는, 소외시키는 그러한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된 정치경제학적인 기술파악과 보수적인 30년대 라이프치히 대학의 사회철학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겔렌, 프라이어 등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기술관과 접촉하면서 이전의 문명비판적?낭만주의적 기술비판과는 다른 사회철학적 차원에서 현대의 기술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대표적인 학자는 역시 마르쿠제(H. Marcuse)였다고 할 수 있다.

마르쿠제는 특히 그의 저서 『일차원적인 인간』 속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결정적인 요소로서의 기술의 의미에 주목하여 현대 산업사회의 경제적인 생산관계 문제에서 생산력 문제라는 의미에서의 기술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기술문제를 넘어서서 산업사회로서의 사회주의에서의 기술과 과학문제도 그의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서구적 사고는 가치와 합리적?철학적인 가치논쟁을 잊어먹고 주어진 목표와 가치의 효율적인 실현만을 문제삼는 ‘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은 순전히 지배를 위한 도구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곧 기술이고 이는 사회적 통제와 지배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기술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지배로서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을 해방하는 힘으로서의 기술이 해방을 오히려 방해하는 정치적 조작기계가 되었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기술을 이와 같이 지배의 도구로 보는 그가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의 새로운 ‘해방의 기술’(Technik der Befreiung)을 주장하는데, 이는 자동화가능성을 완전히 이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인간의 유희적 충동이 만개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젊은 마르크스가 『파리철학수고』(Pariser Manuskripte)에서 전개한 ‘자연주의=인간주의’라는 기술적 휴머니즘의 이상이 마르쿠제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기술적 현실성을 완성시키는 것이 ‘기술적 현실성을 넘어서는 데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토대’라고 보았다. 기술적으로 지배되고 조직된 일차원적인 세계 극복을 위해서 그는 미래의 만족스러운 세계를 위한 총체적인 기술자동화를 이야기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마르쿠제의 입장을 하버마스는 생산력 자체는 정치적으로 ‘무죄’라는 생산력―생산관계의 고전적 명제에 서 있다고 비판하면서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의 비극을 낳은 장본인이라고 보는 입장도, 또 과학과 기술 자체는 이에 대하여 책임 없다는 입장도 비판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단순히 ‘생산력’으로 파악하는 고전적 내지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어떠한 특정 계급의 지배이해만을 정당화하거나 이에 저항하는 다른 계급의 해방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해를 넘어선 ‘해방적인 총체적 종(種)의 이데올로기’(emanzipatorische Gattungsideologie)라고 파악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생산력’으로 보는 입장은 특히 소련에서 1961년 공산당강령에까지 등장하여 ‘직접적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로 정식화되었고, 중국에서는 ‘4개의 현대화’와 더불어 ‘유생산력’(唯生産力)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생산력 발전을 억제하는 생산관계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발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들이지만, 최근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과정 중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사회주의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고, 소련의 경제개혁 이론가의 한 사람인 타타야나 자슬라프스카야(T. Zaslavskaja)는 소련의 현재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수준에 오히려 뒤떨어져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학과 기술을 ‘생산력’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 과학과 기술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상부구조적?생산관계적 성격을 하버마스도 그리고 다렌도르프(R. Dahrendorf)도 주장하고 있는데, 기술발전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기술은 사회발전의 ‘원인’이라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결과’이며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관계’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즉 기술적 혁신은 인간적 노동에 비하여 싸기 때문에 진행되고 있고 이른바 ‘구조적’ 또는 ‘기술적’ 실업문제도 인간노동에 비해서 기술혁신이 오히려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다렌도르프는 보고 있다. 이러한 다렌도르프의 주장은 이른바 후기 ‘산업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노동사회’의 의미 자체가 변하는 서구에서는 타당할지 모르나 기술혁신보다는 인간노동이 아직은 저렴한 한국적 상황에는 어긋나는 주장이다.

4. ‘기술입국’ 이데올로기

물론 저임금에만 의존할 수 없는 한국산업의 성격과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술혁신 그리고 한국산업의 기술적 종속문제가 최근 자주 논의되고 있다. 기술혁신과 함께 기술종속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개개 기업에 의해서도 물론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특히 ‘국가’라는 하나의 ‘총체적 종(種)’에 의해서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명제는 ‘기술입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하겠다.

‘수출입국’에 이어 전개된 ‘기술입국’ 이데올로기는 아마도 일본적 발상만은 아니고, 미?소 그리고 서유럽에서도 이른바 ‘제3의 산업혁명’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불꽃 튀기는 전쟁이 벌어지는 ‘기술제국주의시대’ 내지 ‘새로운 기술의 세계질서’ 속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권에 대한 기술이전을 엄격히 제한?통제하고 있는 이른바 ‘코콤’(COCOM)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공동체(EC)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기술개발 경쟁은 가히 기술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국모델’이 계속 뒤쫓고 있는 ‘일본모델’이 창출한 기술입국이라는 신화를 간단히 조명해보고 이 새로운 ‘숨겨진 이데올로기’(Hintergrundideologie)의 몇 가지 측면을 들여다보자.

국민총생산에 대한 연구와 개발비의 비율이 한국은 1986년에야 2퍼센트 수준에 다다른 반면에 선진국은 이미 70년대 말에 벌써 2퍼센트 수준을 넘어섰다. 1981년에 이 비율은 일본이 2.1퍼센트였는데 서독은 2.7퍼센트나 되었다. 일본이 비록 하나의 기술제국주의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해도 1975년에서 1982년까지 기술수입국으로서 주로 미국에서(66.2퍼센트) 필요한 기술을 들여왔고, 기술수출은 주로 아시아(42.4퍼센트), 북미주(22.1퍼센트), 서유럽(21.1퍼센트) 선으로 되었다.

전자산업과 철강생산에서 일본의 기술수준은 상당히 높으나 특히 통신, 제약 그리고 자동차건조기술(!)에서는 기술무역에서 많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일본에서 국가의 과학기술개발투자 비율이 미국과 서독에 비하여 적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과학과 기술개발 분야에 절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의 결과로 60년대 말에야 기술이전이 자유화되었으나, 1980년까지 새로운 기술수입에 대해서 국가는 일일이 통제를 했고, 1981년 이후 실시된 기술이전의 완전 개방 속에서도 문부성?과학기술처?통산성 등은 직접?간접으로 기술입국을 위한 국가적 정책을 입안?조정하고 1982년에는 ‘제5세대 컴퓨터’ 개발을 위해서 통산성이 직접 나서서 대기업들의 이 분야 연구를 총괄하기 시작하였다.

기술입국을 위한 관(官)?산(産)?학(學)의 협동작전은 후발적인 자본주의가 선진자본주의를 따라잡기 위한 총력전이라는 집체적인 민족적 이데올로기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것도 ‘기술대국’이 되어야 ‘정치대국’이 될 수 있다는 정치로서의 기술의 의미를 이해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 시대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이 경제나 정치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비율은 오히려 줄어들고 그것은 과학과 기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기술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경제나 정치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기술입국이나 기술대국이라는 정치적 이념은 일본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정치대국이라는 군국주의의 현대적 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이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서두에도 꺼냈지만 F18기의 도입 결정을 자축하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자유?평화?미래’라는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정치, 경제 그리고 기술의 복합적 이데올로기 구조가 잘 드러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반공의 무기로서, 경제적으로는 항공산업 등 첨단산업으로의 도약을 보장하는 기술이 숨어 있는 F18이 그러나 일본처럼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우선 남북간에 점차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데에 노력을 경주하고 F18에 소요되는 42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원을 교육투자에 선용하여 현재 취약한 기초과학 분야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왜 펼 수 없는가 하는 반문이 당연히 나오게 마련이다.

군비경쟁을 통해서 남북이 더 심각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당한다는 이러한 비판은 분명히 정치문제를 단순히 기술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입장일 것이다. 모든 문제를 기술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결정론적인 견해가 우리에게는 기술이 가지고 있는 원칙적인 제한성을 간과하는 정도가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문제까지도 우리의 시야로부터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5. 기술자와 기술관료주의

과학과 기술이 갖는 일반적인 표상 즉 ‘가치중립적인 객관성’이라는 표상은 기술이 인간에게 복무한다는 신화를 낳았고 따라서 자연과학자나 기술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성을 호도하기도 했고 또 이를 정당화하기조차 하였다.

흔히들 “우리는 ‘쟁이’이기 때문에 정치는 모른다”는 이야기를 기술자나 자연과학자들은 한다. 물론 ‘기술인텔리’를 기업이나 공장의 이윤극대화의 수단적인 계급 내지 계층으로 보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적 태도일 수도 있고, 또 문명비판적 기술이해나 기술에 관한 전통적인 철학적 해명이 기술을 규정하는 사회적 요소나 현상, 그리고 기술과 기술발전이 역사적으로 축적해온 문제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지 못한 데에서부터 연유할 수도 있다.

어떻든 기술자의 반(反)정치적 또는 정치무관심적 태도는 우리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기술자나 공학도들이 매니저로도 많이 진출하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많은 경우 어떤 식으로나마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 비하여, 가령 전통적으로 법학이나 상경계통을 공부한 후 매니저가 되는 경우가 많은 서독에서는 아직도 기술자나 자연과학도들이 정치적으로 느끼는 무력감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할 것 같다. 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를 바라보는 사회적 눈과 기술고시를 바라보는 눈이 분명히 다를 것이다.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적 서열이 아직도 한국인의 가치관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종 중에 의사나 변호사들은 강력한 이익단체(‘의사회’나 ‘변호사회’)들을 구성하고 있는 데 비하여 기술자들의 이익단체의 사회적 영향력은 서독에서조차 아직은 미미하다. 물론 몸이 아프거나 소송사건 때문에 의사나 변호사를 찾을 때 의사나 변호사가 보여주는 전문직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이 직접적인 데 비하여, 기술자가 지니는 영향력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일반 사람들에게 감지되지 않다가, 가령 정전사고가 나서 도시가 암흑천지가 되었을 때에야 전기기술전문가의 존재와 그 위력은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술자의 정치적 무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령 기술자의 조합을 결성하자는 제안도 있고 전문교육과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관련 속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역할에 대한 종합적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는 대안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술자가 지니는 계층으로서의 복잡성으로 인한 조합결성의 어려움, 그리고 그러한 교육도 사회과학적 인텔리들을 기술자들이 보좌하는 정도를 오히려 강화시켜줄 뿐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기술자의 현실적인 정치적 무력은 분명히 기술의 영역은 정치의 수단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는 정반대로 정치영역을 기술영역의 수단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정치를 기술로 완전히 대치할 수 있고, 따라서 사회를 정치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전문가에 의한 통치’(Expertokratie)로, 사람이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物)이나 ‘도구’가 통치하는 것으로, 나아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한다는 ‘기술적 가능성의 규범성’을 주장하는 기술관료주의가 그러한 입장이다. ‘인간기계’(L’homme machine)를 주장한 생시몽(Saint-Simon)을 원조로 하는 이러한 이론은 독일에서는 셸스키의 ‘기술문화 속의 인간’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데 자기제어적인 ‘기술적 국가’(technischer Staat)에서는 정치, 정치적 결정영역은 사라지고 순전히 기계처럼 정확한 ‘물’의 객관적 논리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산업사회가 전문가들에 의한 관료주의적 운영에 의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내에 존재하는 여러 이익집단이 참여하는 오늘의 국가는 그렇게 전능한 것도 아니고, 기술적 국가라는 모델은 또 비역사적이고 보편적으로 해석된 인간학을 바탕해서 고도로 추상화된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이와 같은 기술관료주의가 비정치화된 대중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정당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는 이 모델이 문화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의 세계’(Lebenswelt)를 목적합리적 행위와 수용적 태도라는 범주로만 환원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기술전문가의 정치적 무력과 무능을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전문가에 의한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이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기술전문가가 전문영역의 제한성과 고정적인 방법론 때문에 제약되어 있고, 또 정치가들은 선거를 의식하기 때문에 보편적 이익을 장기적으로 계획할 수 없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술전문가와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 사이에 비판적 교호(交互)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장기적으로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1954년에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은 “만약 인류가 핵전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류는 기계와 컴퓨터를 조작하는 독재자의 전제 밑에서 무디고 어리석은 피조물의 무리로 전락될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영역에서 특히 정치에서 우리는 인간적 경험과 인간관계의 이해를 자연과학과 기술의 이해와 통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들은 또 행동하는 인간이어야지 관조만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전화를 도청하는 ‘검은 상자’(Black Box)가 얼마 전에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의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어떠한 고민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자와 기술자의 윤리는 옛날처럼 엉터리 이론을 펴서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1974년 유네스코가 "과학자의 위치"에서 지적하였던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자연을 위하여 과학자는 복무해야 한다는 적극적 윤리이다.

6. 과학과 윤리

우리나라에서도 시험관아기나 대리모가 안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고 원자력발전소나 공해문제를 둘러싼 시민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그들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이론과 이의 실제적 전용(專用)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문제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중에 사용되어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독가스 개발과 관련되었으나, 정작 독가스를 개발한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또 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하버가 독일민족의 전쟁승리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것은 SDI개발계획을 소련을 견제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과학적?기술적 실천 정도로만 이해하는 과학자의 입장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입장에 대항해서 SDI개발보다는 군축협상을 요구하는 미국과학자들의 모임인 5,000회원을 가지고 있는 ‘FAS’(Federation of American(처음에는 Atomic) Scientists)나 10만 회원이 가입된 ‘UCS’(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의 반(反)SDI캠페인은 SDI계획을 철회시키지는 못했지만, 일반시민과 과학자 심지어는 행정부내의 고위관리들 속에까지 SDI가 하나의 ‘환상적인’ 계획이라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SDI투자예산 규모도 그후 많은 삭감을 당했다.

서독에서는 1983년부터 미국의 중거리유도탄의 서독설치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과 더불어, ‘평화를 위한 책임, 새로운 핵유도탄을 반대하는 자연과학도’라는 주제 밑에 전국적인 강연?시위?토론을 통해서 수천의 자연과학도들이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해서 과학도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교회가 지니는 윤리적인 규범력이 급속히 약화된 서독사회에서 자연과학적인 인식에 기초를 둔 객관적인 자연과학도들의 평화에 대한 설득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서독에도 중거리유도탄이 설치되지만, 자연과학도들은 어떠한 연구의 결과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과학연구가 지니고 있는 애매한 성격 속에서도 부정적인 결과가 예견될 때는 분명히 이에 대하여 행동으로 ‘아니오’를 표명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특히 히틀러 치하에서 인간말살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던 과학연구가 지니고 있는 무거운 짐을 진 독일 자연과학도들의 윤리적 자기반성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renmatt)가 ?물리학자들?(Die Physiker)이라는 작품에서,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는 자연과학도들의 양심의 고민을 그려 보인 문학적 결론은,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ker)가 말한, 기술시대의 윤리는 오로지 인간이 정말로 계획과 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결론과도 통한다. 『미래의 충격』을 쓴 토플러(A. Toffler)는 기술혁신에 대한 저항을 예방하기 위한 책임있는 기술을 논한 적이 있다.

생태계 파괴 문제와 관련된 시민들의 예민해진 자연에 대한 감각과 의식은 서구에서 녹색당의 등장을 가져왔고, 현재 동구의 변혁 속에서 등장하는 야당들은 거의 모두 그들의 강령에 ‘생태계 보호를 지향하는 사회적 시장경제’(?ologisch orientierte soziale Marktwirtschaft)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핵무기나 핵발전소 또는 화학적 문제로부터 연유하는 생태계 위기에다가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이 가져오는 가공할 ‘인간’ 개념의 변화도 심각하게 토론되고 있다. 이러한 공상과학적 소설의 테마가 되고도 남을 상황을 불교에 심취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1932년에 발표한 풍자적 미래소설 ?아름다운 신세계?(Brave New World)를 통하여 이미 고발하였다. 과학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치규범으로 되어 있는 이 세계에는 어떠한 신도, 아니 모든 세계종교가 지금까지 덕목에 적어넣은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도가 단순한 ‘자연의 광적인 세심한 장사꾼’이 되었다고 비판한 호프만(E.T.A. Hoffmann)이나, 과학이 ‘존재질서의 하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야스퍼스의 꿈도 오늘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고 있다. 특히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핵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문제가 하나의 민족경제단위의 사활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학과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이나 비현실적인 문제로 들릴 것이다.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나 사회적 책임은 그러나 그렇게 추상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전화도청을 위한 기계장치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가 그의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은폐된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해문제, 남북무기개발경쟁의 반평화적 구조, 노동재해, 식품공해, 약품공해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제기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브레히트(B. Brecht)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자들의 사고를 지배해왔던 연구와 기술의 비책임성 내지 몰가치성이라는 ‘발명가적 난쟁이’(erfinderlicher Zwerg)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미래 속에서 일면적으로 ‘희망’만을 보고 있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너무나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와 후손에 대한 책임은 과학과 기술문명시대의 주역인 과학자와 기술자에게는 더욱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풀포기를 단지 냄새 맡아서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무슨 풀포기인지 알기 위해서 그것을 뽑는 사람도 역시 그 풀포기를 모른다”고 횔덜린(F. H?derlin)은 ?히페리온?(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land)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지니는 미래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생명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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