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한 줄로 이 책을 설명하자면 그림은 삶의 투영이다. ~싶을 때, ~싶지 않을 때, ~그리울 때, ~생각날 때, ~느낄 때… 책의 각 단락들은 이렇듯 우리 일상의 순간들을 그림과 함께 소박하게 담아내었다. 살아있어서 감사해야 하나. 살아있어서 느낄 수 있는 것들… 감각이 퇴행적이지만 않았어도, 예술은 없었을 것이다. 기억의 저편에 대한 아쉬움, 동경은 미술이라는 복제를 낳았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 감정. 순간. 현대의 사진이 많은 부분을 이를 담당하고는 있지만, 그림에 담긴 손길과 인내의 온정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사진은 차갑다. 렌즈는 보여주기만 할 뿐 소통은 적막하다.

이 책에서 시선이 머무는 곳을 천천히 살펴보자. ‘베일을 쓴 여인’ <17p>의 눈에는 수정 같은 사랑이 빛나고 있다. 그녀의 시선에 나의 시선이 닿자마자 차원의 문이 열린다. 사랑은 눈빛에서도 발견 할 수 있는 선명한 것이다. 그렇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중에서)<42p>. 이해라는 이름의 그것은 피만큼이나 진하게 젖어 든다. ‘아버지’<41p>는 희생의 다른 이름이었다. 깊은 골, 굳어버린 생명력에는 한 인간의 일생이 닳고 달아 존재의 흔적만을 남긴다. 닳아서 모두 없어질까 우려하는 마음이 그림을 메우고 가슴을 메운다. 그렇지만 복제의 욕망은 진정한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내 자식이 아무리 예쁘다고 그 아이를 수십 명 복제하고 싶지는 않지요. 하나로서 오히려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결코 복제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지요. 소중하나 복제하고 싶지 않은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이가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183p>

이주헌씨의 이번책은 그림이 주인공이 아니다. 그림 속의 내가 주인공이다. ‘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라는 제목은 여인의 시선에 자신을 던지고 싶어하는 저자의 시도이고, 바람이 담겨 있다. 어머니의 시선, 아내의 시선에는 저자가 느끼지 못했던 위대한 감성의 보고, 삶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믿음과 진리로서 예술을 뛰어넘는다. 하여 이 책에 수록된 인간적인 그림들은 그가 해석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들이다. 가장 완벽한 이해는 ‘되어 보는 것’이기에 저자의 친절한 시도는 독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되어 보기. 그림을 읽는 것은 사실 어렵게 느껴진다.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여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 벗은 느낌. 깊이 감추어 놓은 것을 꺼내 놓았을 때 진실 또한 거짓이 없다. 그렇게 표출한 감정의 누드를 이 책은 ‘댓글’로 보여준다. 인터넷의 풍경은 댓글 문화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권장한다. 이 책의 출판 계기가 된 사이트에 전시되었던 그림과 댓글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기에 풍성함, 생생함을 한껏 느낄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독자의 마음을 쓸 수 있는 공간 여백이 꼭 있다는 점이다. 이름란과 밑줄란. 이 책을 읽을수록 저 공간이 탐이 난다. 나도 댓글을 달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펜을 짚는다.

무엇을 볼 것인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림 속의 나에게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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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고싶다 > 늪으로 빠지고 있는 젊은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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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나메기] 제2권(2000년 여름)에 게재



늪으로 빠지고 있는 젊은이를 위해                                                               김세균  (정치학자)



1

젊은이는 어떤 존재인가?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젊은이란 대체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인 20대 나이를 지닌 사람층을 가리킨다. 그러나 같은 20대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본다면, 젊은이라고 해서 이들을 간단히 하나의 범주로 묶어 고찰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따른다.

한국사회는 '학력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학력은 어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지위를 누리는가에 매우 중요한, 때로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대로 사람대접을 받고 살려고 하면 최소한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때 한국사회에서 그런 대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산다는 것은 사회의 권력적 위계질서 속에서 최소한 중간적 위치는 차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사회 속에서 그 질서의 하층에 속한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라도 자신이 하층에 속했기 때문에 받았던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사회 속에서 부와 명망을 누리는 부모들도 자기 자식이 남보다 더 나은 대학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젊은이들을 크게 보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층'과 '대학에 진학한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빈한한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초-중등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대체로 육체노동자나 기술직 노동자 또는 말단 사무직노동자 등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사회적 위계질서의 하층으로 편입되어 대체로 노동자계급의 성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오늘날 예를 들어 노동운동의 중요한 활동가나 중견간부들 중에는 고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후자의 젊은이들은 전자의 젊은이들이 이미 직업전선에 뛰어든 시기에 대졸 학력을 취득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여러 사회층의 자제들로 구성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 젊은이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 젊은이 중에는 사법고시 등에 합격하여 일찍부터 사회적 위계질서의 상층으로 편입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들의 많은 부분은 고위관리자층 등으로 상승할 기회를 지닌 -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실제로는 소수에게만 부여되지만 - 사무전문직 노동자나 중간관리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때문에 같은 젊은이라고 해서 이미 노동자계급의 성원이 된 젊은이와, 대학졸업 후 사문전문직 노동자나 중간관리자로 취업하게 되는 젊은이들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몰라도 -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영양상태와 건강상태 등에서 차이가 나타나지만, 그러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기인하는 생물학적인 차이이다 -, 사회적으로 본다면 하나의 젊은이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같은 젊은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와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는 구분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일찍 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문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 즉 젊은 노동자층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중간관리자층이 된 젊은이들의 문제는 젊은 중간관리자층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은이의 문제를 제기하면, 이 문제는 주로 아직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의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앞서, 여기서는 먼저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떤 교육과정을 받으면서 자라왔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는가는 기본적으로 이미 성립되어 있는 사회의 구성원리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사회가 출세와 돈벌이를 중시하고, 경쟁과 효율 등의 원리를 앞세우는 사회라면,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 역시 그러한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사회가 노동하는 대중을 존중하고, 연대적 우애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라면,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 역시 그러한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리는 성립된 사회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을 총괄하는 국가의 성격과 정책으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가정과 학교의 교육내용은 큰 틀에서는 국가의 성격과 정책에 의해 규정된다. 이 점에서 가정은, 국가와 구분되는 사회의 기초 생활단위이긴 하지만, 사회적 역할 면에서는 대체로 주어진 사회질서의 구성원리를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세포'로서 기능하게 되며, 부모는 대체로 그러한 국가장치의 '인격적 대변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학교 역시, 그 학교가 비록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그러한 내용의 교육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기능하게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라는 점을 반영하여 가정과 학교로부터 '성적이데올로기'가 전능의 힘을 발휘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이데올로기에서는 오직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 보다 좋은 상급학교나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만이 중시되며, 성적만으로는 결코 반영될 수 없는 아이들의 다른 잠재적 능력이나 적성들의 개발은 무시되거나 억압받게 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주문이 부모와 학교로부터 끊임없이 전달되며,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과외공부 등으로 내몬다. 그런데 어떤 과외공부를 받는가와 가정형편이 어떠한가가 아이들의 성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단란한 집안의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좋은 대학에 갈 비율이 오늘날에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조건 속에서 공부하든, 좋은 성적을 내는 아이들은 '우등생'으로 칭찬받는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열등생' 등으로 천대받는다. 그런 가운데 우등생들은 좋은 성적을 내고 더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자신의 다른 모든 욕구들을 억눌러야 하는 반면, 열등생에게 학교가 제공해 줄 것이라곤 질책과 천대 이외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학교는 학생들을 외줄에 서도록 강제하고, 그 줄에 서지 못하는 아이들은 처벌하는 거대한 '생명억압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나 오늘날 한국의 아이들은 그러한 억눌림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인기가수들의 공연 등에 몰려들어 열광하는 것과 방식으로 그러한 억압이 만들어내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하는 질서에 대한 저항이자,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더라도 성적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질서에 다시 순응하는 학생들이 '모범생'이라면, 많은 학생들은 '열등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량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량생의 행위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긴 하지만, 모범생의 행위를 더욱 빛나게 하고, 학생들이 따라서는 안될 이탈행위의 모범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억압적 교육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그 질서를 더욱 완고하게 만든 데에 기여하게 된다.

학벌이 사회적 지위확보에 결정적 중요성을 차지하고, 좋은 지위 획득을 위한 좋은 성적 확보를 지고의 가치로 앞세우는 성적이데올로기가 판치는 곳에서 교육내용이 우리가 사는 사회과정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당한 비판정신을 가진 부모일지라도 자신의 자식이 그러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렵게 여기며,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식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이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학교 역시 학생을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학교교육은 학생들에게 완고한 반공의식을 주입시켜왔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수준을 반영하여 가장 기초적인 민주적 시민교육의 내용조차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은 기초적인 기능적 지식들을 두루 습득했지만, 사회과정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상태에서, 그리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정의감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대학졸업 이후 좋은 직장을 구해 안락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를 삼는 상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3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산 노동을 착취하는 노동현장의 체험을 통해 자본주의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에 일찍부터 눈을 뜨게 된다. 이 점에서 착취의 현장인 노동현장은 착취당하는 사람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게 만드는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자각할지라도 자신을 짓누르는 구조적 힘에 압도되어 저항을 포기하거나 체념하기도 하지만, 많은 젊은 노동자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투쟁에 나서는 주역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투쟁은 대체로 경제투쟁을 거쳐 정치투쟁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자본이데올로기에 포섭하고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막으려는 자본과 권력의 기도에 항상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은 전자의 젊은이들과는 판이한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환경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모했다. 특히 유신체제 이후, 그리고 광주민중봉기 등을 거치면서 군부독재체제는 학생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들의 일거수일거족을 감시-통제하는 가운데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욕구를 전면적으로 억압했다. 그로 인해 많은 학생들은, 그리고 1980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제대로 만끽해 보지도 못한 채 군부독재 타도와 정치적 민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대정부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정부투쟁에의 참여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뜨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학생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획득에서 더 나아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노학연대를 추진하거나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 변신시켜 나갔다. 선후배간에 행해진 토론과 자체학습 등도 후배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 대학생들의 행동양식은 크게 변하게 된다. 1987년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 이후 민주화가 일정하게 진척됨과 더불어 대학공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학생들의 자유의 폭이 크게 신장되었다. 게다가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한 젊은이들조차 민주화의 일정한 진척과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기 시작함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만드는 선후배간의 토론과 자체 학습 등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우선 그간 자신들을 억눌러온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려고 한다. 이들은 우선 놀고, 친구들과 사귀고, 억눌려온 자신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려고 든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흡수시키는 다양한 기제와 공간들을 제공해 줄 능력을 지니고 있고, 또 실제로 제공해 주고 있다. 이로 인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젊은이들의 활동은 자본이 친 그물망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점에서 이들의 문화적 욕구의 충족은 자본에 의해 포섭된 문화적 욕구 충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대학생들에게는 고학년에 들어가면 갈수록 대학 졸업 이후의 취업문제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문화적 욕구 등을 충족시키기 위한 생활만을 마냥 즐길 수 없고, 대체로 고학년에 들어가면 대학 졸업이후의 취업을 위한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IMF 위기가 발생하고,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재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고학력실업자의 수가 늘어나고 취업경쟁이 치열해면서 고시공부나 취직공부의 열풍이 대학가에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게다가, 대학교육의 내용은 크게 보면 학생들을 체제순응적인 기능적 지식인으로 양성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오늘날의 한국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뜬 비판적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은 다른 한편으로 아직 성장과정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 전체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유익한 활동을 하려는 욕구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젊은이의 문제를 중요시여기는 것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4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구조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고용 불안정성을 극도로 높이고 있고,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약자로 만들고 중간층의 몰락을 재촉해 사회를 '20 대 80의 사회'로 급속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환을 맞이하여 오늘날 많은 대학생들은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맞서 '20 대 80의 사회'를 변혁시키려기 보다는, 그러한 전환에 적응해 20%의 대열에 끼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80%도 크게 보면 국민의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운명을 앞으로 겪게 될 것이다.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80%에 해당하는 이들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20%에 끼이기 위한 노력이 치열해 질수록 '20 대 80의 사회'는 더욱 견고한 구조로 정착하고,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배가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20%의 대열에 끼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구조 속에서 누리는 '행복'이란 결국 반사회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회성을 결여한 행복의 추구란 결국 '허무주의'의 추구에 불과하다. 허무주의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 자체를 착취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포획하는 메커니즘인 황금과 황금지배를 보장하는 권력이 우상으로 격상하고,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부정되고 파괴된다. 허무주의에서는 황금신의 지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불행이 외면되고, 사회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허망한 것으로 배격된다. 허무주의에서는 사회과정에 대한 진지한 지성적 성찰과 변혁적 실천 등이 냉소의 대상이 된다. 허무주의는 타인의 행복과 고통 위에 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체념과 절망을 강제한다. 허무주의가 판치는 곳에서는 황금신의 지배하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불행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허무주의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사회 속에 만연되어 있는 허무주의를 깨뜨리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지 않을 수 없다. 다수대중이 겪는 사회적 고통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힘찬 행보에 나서고 있는 시점에 많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허무주의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만연하고 있는 이러한 허무주의는 그러나 젊은이 자신의 본래적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이 그들을 허무주의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가정과 학교가 행한 역할, 대학생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 정치지형의 변화, 한국자본주의의 문화적 능력의 제고, 한국사회의 급속한 신자유주의적 개편 등이 그들에게 허무주의를 만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허무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현상이 비록 그들 자신의 탓이 아닐지라도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젊은이들 자신이며, 그러한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일차적으로는 젊은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허무주의는 젊은이들에게서 사회성을 지닌 인간으로 무한히 성장해갈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고, 지성과 비판적 실천의식을 마비시키는 독버섯이다. 이 점에서 허무주의의 극복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당면한 최대의 당면과제이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그 극복을 위한 젊은이들 자신의 움직임은 참으로 소중하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바치는 젊은이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젊은이들에 대한 희망을 결코 저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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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 : 590원(3%)
2004-05-03 | ISBN 8957690131
양장본 | 515쪽 | 206*152mm
올해 안으로 읽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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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6-0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나는 책 코너를 두루 둘러보았는데 제 짧은 식견으로 봐도 책 고르는 안목이 참 훌륭하신 것 같아요. 철학/사회과학/문학에 대한 안배도 적절하고요. 삶에 향을 더하는, 그런 책들입니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라주미힌 2005-06-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은 있는데, 소화력이 무지 딸려요. ^^;
 
 전출처 : 마태우스 > [퍼온글] 여백의 미, 마태우스-'대통령과 기생충'


너무 잘 나면 미움 받는다.

상당히 잘 나면 욕 먹는다.

이도 아니면 상대 안해준다.

새벽에 인터넷 서핑을 하는 사람은 대개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

너무 잘난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형 인간이란 무엇인가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할 생각이 없고

상당히 잘난 사람은

출근을 해야되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할 시간이 없지만

아예 아닌 사람은 생각도 시간도 많아서 마냥 자유롭다.

그런데 가끔 예외가 있다. 

그 사람의 객관적 라벨만 보면 상당히 잘난 사람인데

본인은 전혀 아니라고 우기고

결과적으로는 아주 잘난 사람이 되는 경우.

마태우스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서울대 의대출신에 현재는 겨우 서른 몇살의 나이로 단국대 조교수.

이 쟁쟁한 그라운드를 그간 출간한 몇권의 책으로

자신의 재기와 명민함으로 화려하게 데코레이션한 매력만점(?) 독신남.

게다가 소탈하고 인간성도 좋아서 친구도 많다니, 어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내가 그 사람이 아닌 바에야  한없이 배아픈 고통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의 서재에 올린 마태우스의 사진을 보고

그냥 난 그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아무런 이유는 없다.

그냥 용서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냥 친근한 마음뿐이다.

역시 사람은 다 가지면 안된다.

아아~

이제 그의 책을 주문해야겠다.

되도록이면 그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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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퍼온글] 교육사령부를 해체하라 - 홍세화

'교육사령부'를 해체하라

[한겨레 2005.06.01 19:08:00]



[한겨레] “전시 좌경학생 지도 및 교원. 교직단체 대책 : 순화가 곤란한 학생은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격리 조치한다. 배후 조종 교사는 격리 차원에서
교원징계위원회에 회부해야 한다. 학교장은 관련 교사를 ‘전시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으로 수사기관에 고발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예비검속’을 돌아보게 하는 이 지침은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유물이 아니다. ‘민주화된 시대’ 노무현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의
작품이다. 그들은 최근에 “학생과 교사를 ‘좌경’과 ‘건전’으로 구분해
좌경학생을 격리조치하고 좌경교사를 감찰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16개
시도교육청에 내려 보냈다. 학생들을 전시대비 학도호국단 체제로 편제하여,
학교장을 대대장으로, 교련교사 군복무 경력 교직원을 중대장으로, ‘건전한’
학생을 소대장급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그들의 발상은 식민지
때나 권위주의 독재 시기 그대로다. 이 참에 교육인적자원부를 그들의 정신과
구실에 맞게 교육사령부로, 교육부 장관과 관료를 사령관과 참모로 바꿔 부르기로
하자.

군국주의 일본이 이땅에 학교를 세운 일차적 목적은 황국신민화에 있었다. 조선
백성의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배반하고 일왕한테 충성하는 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학교의 일차적 목적이었다. 둘째 목적은 전시동원 체제의 요구에 따른
총알받이가 되도록 미리 훈련시키는 교육장으로서의 학교였다. 셋째 목적은 식민지
중간관리자 양성, 곧 식민지 ‘마름’ 양성에 있었다. 지주가 마름을 통해
소작농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듯, 식민지 수탈과 관리는 식민지 출신 중간
관리자들을 통하여 지배할 때 더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군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절한 학교는 그 구조부터 달랐다.

일반적인 학교가 아닌 군사학교를 본뜬 것이다. 우리네 초·중·고등학교가
‘수위실=위병소’, ‘운동장=연병장’, ‘조회대=사열대’의 병영구조를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앞으로 나란히!”로 시작되는 학교생활을
통하여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군사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기존 체제와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의식을 형성했다. 군국주의 일본이 사라졌고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물러났지만, 학교 구조는 예전 그대로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장이란 구실은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일왕에게 충성하던 의식을 길러내던
곳에서 안보와 반공의식 세뇌의 장으로, 다시 질서의식과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는
곳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날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가 사장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듯이, 학교
분위기와 교사와 학생의 일상은 교장에 따라 달라진다. 걸핏하면
교사·학생·학부형이 ‘교육의 세 주체’라고 강조하지만, 교사회, 학생회는 아예
없거나 유명무실하고, 학교의 실제 주인은 ‘대대장’인 교장인 게 현실이다.

교육사령부에 충성해야 대대장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 마름은
단위학교에서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교육사령부-교육청-교장-교감-부장-교사-학생으로 일사불란하게 관철된다.

교육사령부 참모에게 일선교사는 말단 소총부대 소대장이다. 역대 정권의
충성스런 마름 노릇으로 닳고닳은 교육사령부는 노회하게도 학부모들을 앞장세워
소대장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민주화된 시대’에 맞게 학교를 민주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대대장’
임용제도를 바꾸는 데서 시작되며, 구시대적 ‘마름정신’의 본산인 교육사령부를
해체해야 가능할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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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6-0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분노에 살이 떨리는군요. 미친 자본주의 하의 학교가 체제순응적인 양순한 머저리들을 길러내는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좌경학생이란 허울 좋은 잣대로 그나마 깨어있는 학생들마저 체에 걸러 버리려는 저 세뇌권력의 매카시즘, 그 음탕함, 폭력성에 토할 것 같습니다.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 나오는 폐쇄 병동이나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추천하고 제 서재에 좀 옮겨 가겠습니다.

알고싶다 2005-06-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런데 어떻게 퍼가는거죠? 서재 연지 두달도 안된지라.... 뻘쭘 ^^; (후다닥 도망간다)

라주미힌 2005-06-05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페이지의 하단에 보면 추천하기, 퍼오기 가 있는데.. 거기서 퍼오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좋은 주말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