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deviantart.com/view/1790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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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6-1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판으로 저런걸 그릴수 있다구요? +.+ 헉~

깍두기 2005-06-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인가요? 우와~(설마 라주미힌님이 그리신 건 아니겠죠?^^)

라주미힌 2005-06-1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꿈에서는 무지 잘그리는데.. 쭈웁
 

스피박 넘기 - Critical Thinkers 03 
스티븐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 앨피 / 2005년 6월
12,500원 → 11,870원(5%할인) / 마일리지 360원(3% 적립)

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30원(10% 적립)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 은둔형 외톨이 전문의가 파헤치는 '지금 여기'의 사춘기 현상학 
사이토 다마키 지음, 김영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590원(5% 적립)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1,710원(20% 적립)
다양성 - 오해와 편견의 역사 
피터 우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해바라기 / 2005년 6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9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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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우즈베키스탄의 '개새끼' (강병태)

[강병태 칼럼] 우즈베키스탄의 '개새끼'
정세 격동 바탕은 강대국 패권 다툼
지정학적 큰 틀에서 보는 안목 절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유혈사태 속에 영국언론의 ‘개새끼’ 논평에 눈길이 갔다. 쌍스러운 말이 거슬리겠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을 인용한 이 논평은 서구언론의 시각을 대표한다.
루스벨트는 니카라과의 악명 높은 우익독재자 소모자를 지원하는 데 대한 비난을 “그가 개새끼(son of a bitch)라도 우리 개새끼”라고 일축, 강대국의 국익중심 외교를 ‘개새끼주의’(Sonofabitchism)라고 일컫는 계기가 됐다. 미국이 전략적 이해 때문에 카리모프 우즈벡 대통령의 독재를 용인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첫째는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의 영향력 경쟁과 관련, 이미 카리모프 정권과 노골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사실이다.

둘째는 안디잔 지역의 소요사태가 민중시위에 끼어 든 정체불명 무장세력의 교도소와 정부기관 공격으로 악화한 사실이다. 이를 간과한 채 사태를 독재와 민주의 대결로 보는 것은 이 지역 정세가 격동하는 근본이 강대국의 석유패권 다툼이란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우즈벡에 군사기지를 확보한 미국의 영향력은 러시아 중국의 반격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이 지역의 미국세력 확장에 맞서 중국과 러시아가 조직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지난해 6월 우즈벡에서 열린 것은 상징적이다.

여기서 러시아는 우즈벡과 전략적 동반관계를 맺었고 중국은 15억 달러 원조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 기울던 전략적 균형을 반전시키고, 우즈벡 석유가 중국에 공급되는 것을 막으려는 미국의 의도에 타격을 주었다는 평가다.

이런 변화의 중대성은 그 다음달 미국과 유럽이 우즈벡 인권상황을 이유로 경제원조를 동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체제 변혁을 꺼리는 카리모프 정권 붕괴를 통해 영향력 회복을 노린다는 관측이 나왔다. 반면 러시아 중국 일본은 지역 중심국 우즈벡까지 미국이 장악하면 전략적 다극화가 무산될 것을 우려, 카리모프를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배경과 사태 자체 의혹에 비춰 볼 때, 카리모프를 ‘개새끼’로 규정하고 미국의 ‘개새끼주의’를 비난하는 시각은 사태를 제대로 보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 후진사회의 모순과 외세 다툼이 뒤얽힌 혼돈을 통치자 개인의 독재성을 부각시키는 상투적 시각을 좇아 헤아리는 것은 무모하다.

옛 소련체제를 승계한 카리모프 정권이 독재적이고 족벌지배 폐해가 큰 것은 사실이다. 또 잡다한 부족으로 갈린 사회에서 지역 계층간 격차가 확대되면서 갈등과 불안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카리모프가 우즈벡의 이익을 해치는 ‘개새끼’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그는 소련붕괴 직후의 경제적 추락에서 일찍 벗어나 성장을 이뤘고, 전략적 요충 지위를 활용하는 능력도 과시하고 있다.

독재자를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우즈벡이든 어디든 외세 다툼이 노골적인 나라의 정치적 격동은 언제나 지정학적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등을 휩쓴 현란한 상징색깔의 시민혁명을 지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자세로는 강대국들이 21세기 전략적 판도를 놓고 맞부딪치는 중앙아시아의 격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즈벡 정부가 안디잔의 무장소요를 촉발한 배후세력을 아프간의 탈레반이라고 규정한 것은 흥미롭다. 자취도 없이 사라진 탈레반을 지목한 것은 미국이 최근 확산된 아프간의 반미 유혈시위를 탈레반이 부활한 탓으로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거 없지만 편리한 핑계다.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을 끌어대면 어떤 과오도 가릴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혼돈 속에서 진짜 ‘개새끼’가 누군지는 그야말로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다만 강대국의 피비린내 나는 탐욕을 외면한 채 민주와 인권을 떠드는 것은 지나치게 한가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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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미리 보는 새책] 이상한 나라 앨리스 팬을 위한 희소식





올해는 앨리스를 좋아하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각별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마틴 가드너의 <주석 달린 앨리스>가 4월에 출간되었고, 또 이 책이 출간될 예정이니까요. 존 테니얼의 삽화가 그려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고, 로버트 사부다의 팝업북이 있고, <주석 달린 앨리스>까지 끝내 구입하셔서 '이제 앨리스는 그만!'이라고 공언하신 분들이라면 페이퍼를 읽지 마세요. 이번에 소개할 <이상한 나라 앨리스> Classic Illustration Edition은 정말 못견디게 가지고 싶은 책이니까요. 무엇보다 그림책에 욕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첫눈에 반할 정도입니다. '그림없는 책을 무슨 재미로 본담'이라고 투덜거렸던 앨리스라면 이 책을 아주 좋아할 겁니다. ^^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가 주석판 앨리스라면, 베틀북 클래식의 첫번째 권으로 6월 13일에 출간될 예정인 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러스트레이션판 앨리스입니다. 20세기 초에 활동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려낸 앨리스의 다양한 모습들을 한 권의 책에 알차게 실려있습니다.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삽화의 올스타팀이라고 할까요? 또, 루이스 캐럴의 원문을 꼼꼼히 살린 점도 높이 평가할만합니다. 이미 원서로 많이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캐럴의 말장난은 아무리 노력해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 역시 앨리스를 좋아해서 여러 번 앨리스를 읽었지만 솔직히 번역본으로는 캐럴의 '말장난'이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원서를 읽었을 때는 부족한 영어 실력과 배경지식으로 역시 그의 위대한 '말장난'의 맛을 알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캐럴의 책에는 '그림'이 있습니다. 온갖 기괴한 것이 출몰하는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데에는 글보다는 역시 그림이 좋은 안내자이지요. 상상한 것 이상의 그림을 만날 때 삽화는 책을 이해하는 도구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책을 새롭게 해석하는 틀이 되기도 합니다.

기존에 출판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주로 존 테니얼의 삽화를 만나셨다면, 이 책에서는 또다른 맛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존 테니얼은 물론 찰스 로빈슨, 아서 래컴, 윌리 포거니, 마거릿 태런트 등 20세기 초기에 활동했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29명이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림들이 실려 있답니다. 고전적인 느낌의 그림, 푸근한 유화 느낌의 그림, 섬세한 그림, 기괴한 그림, 장난스러운 그림, 장식적인 그림 등 하나의 텍스트가 이렇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출간된 이래 수없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이 책은 비교적 옛날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린 그림답게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넘칩니다. 레이스, 부풀린 소매, 하얀 양산, 부드러운 금발 머리, 푸른 잔디밭에서의 티파티. 빅토리아 시대의 풍요로움과 우아함, 낭만이 넘친답니다. 특별히, 이 책에 수록된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명성에 비해 실제 작품으로는 만나기는 힘든 작가들이라 기쁨이 배가됩니다.

 
정말 유명한 앨리스의 첫장면. 회중시계를 가진 토끼의 뒤를 쫓아간 앨리스는 정말 '이상한' 나라로 빠져듭니다. 테니얼의 앨리스가 기괴했다면 첫장을 장식한 앨리스는 참 소녀답게 이쁩니다. 푹식해보이는 금발도 그렇고, 빨간 입술도 그렇고... 느긋하면서도 활동력이 있어 보이는 소녀네요.

 
아기가 돼지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앨리스는 어떤가요? 앞의 아이보다 훨씬 도회적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입니다. 소녀다운 나긋나긋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보다는 씩씩한 아이다움이 더 느껴지는 앨리스입니다. 여러 명작동화에 삽화를 맡은 아서 랙컴의 그림입니다.


 

아주아주 무례하고, 아주아주 어이없고, 아주아주 괴상한 티파티. 빈정거림의 명수 토끼와 제멋대로 매드해터, 그리고 잠꾸러기 도올마우스의 티파티에 버릇없이 끼어든 앨리스의 모습. 다들 이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과 동물들이죠. 이상한 나라에서는 오히려 정상일수도 있겠군요.



가엾은 앨리스. 그저 장갑을 가져다주려고 했을 뿐인데 몸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고... 이 무슨 수난이랍니까. 동물들은 그저 웅성거릴뿐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군요. 등을 보이고 있는 토끼가 바로 앨리스를 '메리 앤'이라고 부르며 장갑 심부름을 시켰던 그 정신없던 토끼겠지요.



상당히 독특한 느낌의 그림입니다. 20세기 초의 고전적인 느낌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이 더 강해네요. 앨리스가 빨간 머리라니. 전형적인 영국 귀족 소녀였던 앨리스가 이 그림 속에서는 골목을 뛰어다니는 평범한 가정의 둘째딸처럼 표현되었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이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2005년은 정말 앨리스 팬에게는 최고로 즐거운 한 해가 -그러나 지갑은 한없이 얇아질- 될 것 같습니다.

-알라딘류화선(yukineco@aladin.co.kr)

*페이지 제작에 사용한 이미지와 새책정보를 제공해주신 베틀북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책정보를 보시려면 표지를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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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시민 불복종 세계를 뒤흔든 선언 3
앤드류 커크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사회에 있어서 개인이란 무엇인가? 사유의 공간, 행동의 조건이 집단, 기관, 정부에 의해 규제되고 조정되어 진다면 개인이 진정 개인으로 존재하는가? 자아의 의지와 인식의 출발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삶과 개인의 성찰로 향하는 시발역이면서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훈육된 의식이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는 현실의 종착역이다. 공간의 뒤틀림으로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는 듯한 우리는 과거와 미래,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경험한다. 개선의 의지는 모호하며, 현실의 현상은 난해하다. 어쨌든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61p)’ 아니겠는가.

에티엔느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은 고도화 된 사회적 억압기제에 무기력해진 개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목표를 추구하기에 개인은 소외되고, 초라하고, 나약해진다. 그렇게 탄생한 흔해빠진 편의의 논리, 편의의 정치학은 경쟁이란 구도 위에서 무적이 되곤 한다. 그렇다 타산적인 이해를 부정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적 존재로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인 것이다.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였고, 우리는 양심을 안락사 시키기 위한 독극물을 늘 염두에 두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목이 칼칼하지 않을까. 심장이 뜨끔거리고 식도가 타는 느낌에 밤잠을 설칠 것 같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존엄은 내 안에서 스스로 결정 해야 한다. 그래야 생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윌든’에서의 녹색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개인의 양심, 자연적 도덕률을 깨우는 아침 수탉의 횃소리가 되기를 선언한다. 이름하여 ‘시민 불복종’.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우월한 지능이나 정직이 아니라 우월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 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155p)

전쟁에 반대하고, 노예제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들의 힘보다는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따르겠다는 그의 선언은 책 제목대로 세계를 뒤흔든다. 맑스주의자, 자유주의자, 환경주의자, 인권운동가, 히피 등을 비롯해 간디, 마틴 루터 킹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은 수많은 이들의 영감이 되었고 실천이 되었다. 150년 전의 선언은 현재에도 유효하기에 예언자로써의 그의 영향력과 선견지명이 놀랍지만, 그만큼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변화는 무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여튼 당시에는 비난과 왜곡된 평가로 무시되어온 개인의 목소리가 세계의 양심을 이끄는 초석이 되었다. 소로우가 말하는 저항정신,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개인의 힘에 현대인의 무기력증을 대입시키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시작이 얼마나 작아보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어떤 일이든 한번 제대로 행해지면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48p)

사실 현대인들은 결과를 두려워 한다. ‘결과가 나에게 이득일까. 손해를 본다면?. 시간낭비일수도 있고, 귀찮아!.’ 그렇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서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진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운명은 비극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장미빛이었던 경우가 있었던가? 기득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가슴 속에 공포와 좌절을 심어준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외친다. ‘나에게 힘을 달라. 내가 세상을 바꿔주겠노라.’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종이쪽지 한 장이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45p’
우리는 우리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를 못하고 있다. 양심의 목소리보다는 왜곡된 ‘상식’과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사슬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은 그 사슬을 더 견고히 하기에 바쁘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사상전향이나 병역을 거부한 양심수들일 것이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느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54p)

법과 질서, 제도와 정치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 하고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데에 기꺼이 동조하는 경우가 있다. 빨갱이, 병역기피자로 보는 건조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기계적인 관성으로 보아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 국가주의적인 요소가 깊숙이 박혀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사회는 단결이 잘 되는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법을 잘 지키는 사회가 아니다. ‘국가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의 원천으로서 개인을 더욱 고귀하고 독립된 힘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대접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자유롭고 계몽된 국가는 없을 것이다.’ (125p)
다수가 하나인 사회가 아니라, 하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게 산다면 수치스런 일이며,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 65p
소설가 공선옥씨는 그 수치스러움을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라는 산문집에서 제대로 느끼고 있다. 나의 배부름을 나의 부끄러움으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책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힘이 개인에게서 나올 수도 있다는 역사를 담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개인의 힘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것에 간디의 비폭력,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의 힘),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그리고 환경운동 등으로 확장되고 진보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개방성의 일면을 드러내려고 이 책은 친절하게 그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사상의 배경’, ‘선언문’, ‘선언의 여파’. 크게 보면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어느 곳을 펼쳐도 역사의 각 장면들을 선명한 칼라로 확인할 수 있다.

얇으면서도 강렬한 책이다. 안 읽으면 후회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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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6-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리뷰에서도 사티아그라하가 느껴집니다. 안 읽으면 후회할 리뷰를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라주미힌 2005-06-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닉네임 바꾸셨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