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물통실험’에 관한 300년 과학논쟁이 벌어졌다.
근대 과학혁명의 주인공인 뉴턴이 1689년에 제안한 ‘물통실험’ 모형은 후대 이론물리학자들이 공간의 실체 논쟁을 벌일 때 무수히 등장하는 논쟁거리가 됐다.
뉴턴은 뭘 제안했나. 여기 물이 가득 찬 물통이 있다. 물통을 밧줄에 매단 다음 물통을 한쪽 방향으로 돌려 밧줄이 배배 꼬이게 한다. 이제 물통을 잡은 손을 놓자. 밧줄이 풀리면서 물통은 꼬인 방향의 반대쪽으로 점점 빠르게 돈다. 회전이 빨라지면 물의 가장자리는 위로 올라가고 중심 수면은 아래로 파여 물통 속 수면은 오목해진다.
뉴턴은 뭐라 말했나? 그는 물통실험이 ‘절대공간의 존재를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물이 물통과 함께 같은 속도로 회전하면 물통의 시각에서 볼 때 물은 정지한 셈이다. 그런데도 물의 중심 수면이 오목하게 파인 것은, 물이 물통이라는 상대공간에 대해선 정지상태이지만 어떤 ‘절대공간’에 대해선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뉴턴은 이로써 절대공간의 증명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와 마흐를 거쳐 아인슈타인은 우주와 공간을 정적인 절대공간이 아닌 역동적인 상대공간으로 새롭게 인식했고 상대론은 현재 과학이 됐다. 그리고도 여전히 남은 수수께끼는 많다. 시간과 공간은 과연 물리적 실체인가? 물통실험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의 상식을 깨는 시간·공간과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푸는 재치 있는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42·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의 2004년 작 <우주의 구조>(승산 펴냄)는 과학과 철학의 영원한 주제가 된 ‘시간과 공간’에 관한 교양과학서다. 시간, 공간, 빅뱅, 블랙홀, 암흑에너지, 끈이론 같은 말에 관심을 기울여온 독자라면, 또 그의 전작 <엘러건트 유니버스>(2002)를 읽으며 새로운 우주를 맛본 독자라면 읽어볼 만하다.
그린 교수의 물음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묻자’는 식이다.
시간과 공간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실체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추상적 개념인가? 텅 빈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존재하는 것인가? 시간은 정말 흐르는 것일까, 흐른다면 ‘무엇’이 흘러가는 걸까? 시간은 왜 ‘화살’처럼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걸까, 과거는 왜 되돌릴 수 없는가? 아직도 ‘정글’속 헤매는듯한
시간 · 공간에 관한 과학 역사 정리통해
진리에 닿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모든 힘의 자연법칙 통일하려는
현대 이론문리학의 시도 보여줘 이런 근본 물음은 우주의 근원을 좇는 현대 이론물리학이 고전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넘어 모든 힘의 자연법칙을 통일하려는 근본 탐구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그런 근본 탐구에 시간·공간 실체의 새로운 발견이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과학의 역사를 조목조목 정리하는 그린은 “시간과 공간의 정체를 규명하려는 인간 노력의 역사…에는 깊은 통찰력을 발휘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모든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직도 “정글” 속을 헤매고 있는 셈이다.
초끈이론가인 그린은 자연스럽게 초끈이론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물체를 이루는 최소단위의 구성요소를 ‘점’ 입자’가 아니라 ‘끈’과 그 ‘진동’으로 설명하는 초끈이론은 초기 우주와 블랙홀 이론을 풀 때 언제나 만나는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충돌(모순)을 해결하고자 제시된 최신 이론이다.
초끈이론은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할까. 우리 우주는 ‘10차원 또는 11차원 시공간’이라고 제시하는 초끈이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4차원(3차원 공간+1차원 시간) 이외 차원들은 너무 너무 작은 공간에 구겨져 있거나 너무 너무 넓은 공간에 퍼져 있기에 인식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남는 문제 이런 혁명적 가설은 어떻게 입증될까? 그린은 빅뱅 초기 우주의 에너지 상태를 흉내낼만한 초대형 입자가속기가 건설돼 입자 충돌실험이 이뤄지거나 머나먼 초기 우주의 시간에서 날아오는 원시 빛을 관측해 입증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통일법칙을 좇는 탐구자이며 미지의 정글 속에서 상식과 통념을 버리고 모든 의문을 포용하는 사람’은 이 책에 스며 있는 이상적 과학자의 모습이다. 진리를 향한 투지와 창의력! 우주의 작은 한 점인 지구에서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마치 거대 규모의 우주 밖에서 우주를 관망하듯이’ 우주의 구조를 논하는 이 책은 우주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닿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시간·공간의 실체 인식’ 변천의 과학사
(<우주의 구조>에서 발췌·정리) ◇ 고전적 실체(뉴턴) 시간과 공간은 절대불변의 실체이며 이로부터 구성된 우주 역시 절대 변하지 않는 견고한 세계다. 시간과 공간은 이 우주를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시켜 주는 절대불변의 구성요소가 된다.
◇ 상대론적 실체(아인슈타인)“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관측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새로운 중력이론(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공간은 한 객체의 부분적 특성에 불과하며, 우주의 진화과정은 시공간의 비틀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상태로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는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이나 다를 게 없다.
◇ 양자적 실체(양자역학)양자법칙에 따르면 어떤 물체의 지금 상태를 제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한다 해도 그 물체의 과거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양자적 우주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각인되어 있지 않으며 일종의 확률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 우주론적 실체(빅뱅우주론)시간은 왜 과거에서 미래로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일까? 우주진화론이 그 답을 찾아왔다. 빅뱅이론과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 우주론에서, 거대 물체에 대해선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들어맞지만 빅뱅 뒤 몇분의 1초 정도 지난 ‘작은 우주’를 다룰 때에는 양자역학이 도입돼야 했다. 그러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한데 섞으면 일대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 통일된 실체(초끈이론)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노력은 초끈이론을 탄생시켰다. 초끈이론은 모든 입자는 ‘점’이 아니라 핵자보다 100×10억×10억 배나 작은 가느다란 ‘끈’으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한다. 또 우주의 시공간은 ‘9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초끈이론을 발전시킨 엠(M)-이론은 11차원을 가정한다. 초끈이론이 맞다면 그동안 우리가 믿었는 시공간의 실체는 우주의 복잡한 구조를 덮고 있는 얇은 천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