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회찬-심상정 '외로운 투혼'에 박수 보내는 이유

얼마 전 여의도에서 택시를 탔다. 한나라당 당사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고 있었는데, 편하게 한나라당 당사 앞에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내가 한나라당에 근무하는 줄 알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인 즉, “지금 구도는 60년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와 같다. 공화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지지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당이 비젼도 없고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요즘 나는 조금 다르면서도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단지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었다. 즉 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60년대 중반 한일회담 투쟁 때는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킬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발전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할 때

그러나 60년대에는 민주당이나 신민당(67년에 만들어짐)이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것은 박정희를 넘어서는 대안적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행적 정당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한단계 비약은 바로 70년대 김대중과 김영삼이 주창했던 ‘40대 기수론’이 나타나면서였다. 박정희를 대체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희망’이 보일 때 대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도 거대한 발전을 해가게 된다. 이렇게 ‘희망으로 발동이 걸린’ 반독재 운동을 수용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진압하고자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반독재 세력을 대표하여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개혁자유주의 정당이 있었다. 그런데 평가가 어떠하건, 정작 반독재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그 정당의 새로움과 비전이 고갈되었고, 자유주의 정당의 단일 리더십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것이 바로 현단계 한국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정체 지점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MB정부 하에서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하여, 자연히 반MB 연합을 위한 노력들이 나타났다. 힘이 부치니 연합해서라도 희망을 만들어보고, 단일 리더십이 없으니 집단 리더십을 가지고라도 MB에 대항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4로 상징되는 반MB 연합 시도는 민주당의 리더십 부재와 민주당 내부의 다양한 이기심들로 인하여 좌초했다. 그렇게 되자 불안이 커지는 시점에서, 국민들은 수도권의 유력 후보들, 예컨대 김진표-유시민의 단일화에 대해서도 반가움을 느꼈고,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 해져, 단일화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노회찬・심상정, 전진 보폭 만큼 반MB는 풍부해져

이러한 상황의 반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 시각에서 보면, 전 정권의 두 정체성을 상징하는 연합만으로는, 자칫 ‘전 정권 대 현정권’의 대립구도로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친노세력이 부상하면 한나라당이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하는 한나라당 일각의 분석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유시민-김진표의 연합이나, 한명숙과 이상규의 연합만으로는, 한나라당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히 풍부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부분을 넘는 더욱 높은 수준의 희망을 상징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그들이 우뚝 대중들 사이에 서고, 그 기초 위에서 연합을 해야 그때의 반MB가 MB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반MB가 국민적인 것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새로운 대안적 리더십들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과잉 폄훼당했던 참여정부를 국민들이 재평가하고 있지만, 분명 참여정부 하에서 실망한 국민들도 존재한다. 한나라당이나 참여정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빈민들도 존재한다.

물론 MB정부의 신권위주의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정치 일반에 대해 허무주의적으로 느끼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 따로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국민들이 새 정치라고 느낄 수 있어야, MB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온전한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다.

노회찬과 심상정의 외로운 투혼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어려운 완주’를 하건, 완주하지 않고 ‘막판 단일화’를 하건, 그들의 전진의 보폭 만큼, 한국정치의 희망이 자라고 반MB는 풍부해진다. 그들의 어깨에 MB를 넘어서는 희망이 걸려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79년과 07년,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

약간 구조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한국사회가 아시아의 여러 민주화 국가들과 비교하면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거쳐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발전해왔지만, 79년 박정희의 죽음이라는 계기가 주어졌을 때, 결국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을 통과하지 못하고, 전두환 정부라고 하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하에서 국민들이 고통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대중 자신의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고, 결국 민주화의 대전환점인 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하였다. 현단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무현 정부 말미에 이미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추동하는 대중적 힘이 부족하였고 결국 MB정부라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제 MB정부 하에서 고통받으면서 진보개혁운동과 대중 자신이 변화하면서 또다른 추동력을 얻어, MB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두가지 도전

변화와 새로운 도전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포스트-민주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87년 이후 지난 20년간을 ‘민주화’ 시대라고 표현한다면, MB정부 이후 한국사회는 ‘포스트-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민주화 체제 하에서는 여전히 많은 민주개혁의 과제-예컨대 보수언론의 개혁 등-가 남겨져 있음으로 해서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일정 측면 유효하게 남아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대치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치를 현실화하기 위해 두가지 주체적 변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이다. 앞서 노회찬·심상정의 투혼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을 대체하는 더욱 새로운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출현시켜야 한다.

아니 87년 6월 민주항쟁에 담겨진 민주주의적 과제를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리더십을 창출해야 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의 소진은 이들이 “독재와 싸우는 데는 선전(善戰)하였으나 결국 세계화의 도전에 선전하지 못한" 데서 주어진다.

즉 반독재 민주정부 시기에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이 대중들의 민주개혁적 정치요구를 일정하게 실현하였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을 수용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파괴적 현상들-예컨대 양극화와 고용불안정 등-에 급진적인 사회경제정책으로 응전하지 못함으로써 대중들이 이반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로 대중에게는 더 이상 희망의 언어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최장집의 표현을 빈다면, “한국의 민주정부는 급진적 신자유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허무는 위험지역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담론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두고 있는 반독재 민주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고, 이명박 정부의 출현에서 상징되듯 새롭게 보수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최근 ‘연합정치’의 공간은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이 세계화의 도전 앞에서 좌절했으나, 진보정치세력이 그 리더십을 대체하지 못함으로써 출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지난 20년 간의 정치적 리더십을 넘는 새로운 리더십을 진보정치세력이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담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견결하고 급진적인 계승자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혹은 지난 10년 동안 대중들이 좌절하였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극복의 희망을 담지하는 세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않된다. 여기에 지난 민주정부 시기에 더욱 급진적인 입장에 서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했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세금폭탄이라는 ‘선동’에 주눅들지 않는 국민

둘째의 과제는 국민들의 진보적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진보적 세력들이 아래로부터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적 세력들이 대중적인 기반을 가져가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이다. 이를 필자는 ‘대중의 급진화’로 표현한다.

이명박 정부라는 ‘우회로’를 도약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담지하기 위해, 대중들 자신이 새롭게 변화해야 하며, 진보세력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는 ‘증세와 복지확대’를 피해갈 수 없다. 그럴 때 ‘세금 폭탄’이라고 하는 보수언론의 ‘선동’에 주눅들지 않고 과감하게 ‘부유세’를 요구하는 대중이 출현해야 한다.

민주정부 10년에 약간 제도화된 복지에 대해서 보수언론들이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융탄폭격할 때 “또 장난치는군”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진보세력은 지역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보수 일색인 대중들의 생활세계 현장에서까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어려운 ‘하방(下方)적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차이 속 연합’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의 정치연합이나 반MB연합은 '차이 속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연합 논의는 사실 대중 앞에 충분히 차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MB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들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과 다른 정치세력들이 대중 앞에 부상하고 대중 속에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대중들의 좌절된 요구와 이해가 수렴될 수 있는 새로운 ‘차이로 이루어진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진보의 전진을 위해서 반MB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토론회에서 김민웅 선생이 반MB야말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라고 한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MB가 ‘폭력적으로’ 작동해서는 않된다. ‘제2의 6월 항쟁’을 기대한다거나 민주세력이 다시 결집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묻지마식 반MB'에 대해서는 전략적 입장에서도 그리고 실리적 입장에서도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서둘러 반MB로 모인다고 그 연합이 대중적 효과를 갖는 것도 아니다. MB가 잘못한다고 우리에게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며(지금도 많이 잘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역전의 노장’들이 모인다고 지지가 다시 모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차이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앞에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넘는 ‘차이’를 갖는 세력들이 대중적으로 부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연합이 이루어져야 MB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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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시>가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등급을 따지자면 황금종려상과 심사위원대상에 이은 3등 상에 해당하지만, 무엇보다 시나리오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 최고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수상한 것에 왠지 유인촌의 문광부와 한국영화산업을 총괄하는 영화진흥위원회는 맘이 편치 못 할 것 같다. 특히나 다른 상도 아닌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지난해 7월 영진위는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에서 <시>를 탈락시켰다. 한 심사위원이 시나리오에 0점을 주면서 평점 평균이 70점을 못 넘겼고, 결국 선정 가능성이 우세하다는 의견이 많았음에도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나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창동 감독의 <시>에 0점을 준 심사위원은 "<시>의 시나리오가 각본의 포맷이 아니라 소설 같은 형식이어서" 0점을 줬다고 한다.

마스터영화 제작지원 사업이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의 국제적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작품성, 예술성 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술영화 제작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다. 현금 4억과 현물 2억 등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명망있고 역량이 우수한 감독들의 영화 제작을 도와주려는 것이 사업의 취지다.

당시 이창동의 <시>를 떨어뜨린 것은 전임 정권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의 문화정책 수장을 지낸 이창동 감독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보복이라는 것이다.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 감독 이전에 유명 작가로서의 능력도 인정받고 있는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에 0점을 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당초 2편을 선정하기로 했던 마스터영화 제작지원작품이 1편으로 줄어든 것도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했다.

결국 칸 영화제가 당시 심사에 문제가 있었음과 함께 한국 영화 정책을 주관하는 영진위의 무지함을 준엄하게 꾸짖은 셈이다.

아래는 당시 마스터 영화제작지원을 심사한 심사위원 명단이다. 세계적 명성의 영화제가 인정한 시나리오에 0점을 준 심사위원은 이창동 감독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것이 예의 아닐까?



*2009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 심사위원(7인)

이름     활동분야
김세훈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김기현 한국영화감독협회 부이사장
유상욱 영화감독
이창세 영화제작
김갑의 영화기획, 제작 (심사위원장)
윤석훈 시나리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이사장
권영미 시나리오

요즘 영진위는 조희문 위원장이 '독립영화 제작 지원 심사'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조 위원장이 칸에 있으면서 심사위원들에 개별적으로 전화해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압력을 넣었음이 심사위원들의 공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스터 영화제작지원 심사가 조희문 위원장과 연관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취임하기 전의 일이어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명박 정부의 전위대 유인촌 장관이 주도하는 문화 정책이 빚어내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문화정책 담당자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못 알아보는 것은 정권의 수준 탓이기도 하겠지만...



출처 블러그: 오늘을 생각하며 http://blog.ohmynews.com/doomeh/264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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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0-05-2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점... 아무리 그래도 이창동 영화인데.. -_-; 하여간 쥐의 젖을 먹는 것들 수준하고는.

순오기 2010-05-2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창동은 소설도 썼다는 걸 알고...시나리오가 소설같아서 빵점을 줬군요.ㅋㅋ
정말 하는 짓들이 너무 부끄러워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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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서울대)는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진보개혁진영이 추구한 ‘반MB 연대’는 “향후 한국 정치에서 진보·개혁진영 사이의 연합정치는 필수품이 될 것”이며 “연합정부를 전망하는 선거연합전략으로서 한국 정치사상 획기적인 시도”라고 평가했으나, 이 같은 ‘전략이 작동·관철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유감’이라는 내용의 글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보개혁 연합정치는 필수지만

조 교수는 한겨레가 20일 문을 연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 High-Quality Online Opinion in Korea)에 올린 “‘친노냐, 친MB냐’,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같이 밝히고 △민주당과 연대를 우선시한 민주노동당의 태도 △공개토론과 검증이 빠진 민주당의 후보 결정 절차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 후보 사이의 공개토론과 정치협상 실종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우선 “노무현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으로 정부와 각을 세웠던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는 ‘반MB연대’를 당면한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면서, 같은 진보정당인 진보신당 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대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제기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당세 확장을 위하여 진보대연합 대신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원에서 얻을 지분이라는 실익을 냉정하게 선택”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과 이회창 사이의 차이가 한강 샛강이라면,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한강 본류가 흐른다’라는 권영길 의원의 공언은 무색해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반MB연대’를 위한 제1야당 민주당과의 연대는 필요하다는 점, 정당이 당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이전에 뿌리가 같은 진보정당과의 연대가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이번 민주노동당의 결정은 두 진보정당 사이의 이미 존재하는 감정적 앙금을 더욱 짙게 할 것이며, 향후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보정당 사이 앙금 더 짙어질 것"

조 교수는 민주당 경선과 관련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는 달리,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애초부터 김빠진 맥주 격이었다.”며 “TV 토론과 국민 참여 경선을 요구한 이계안 후보의 요청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고 지적하고 이는 사실상 ‘전략 공천’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명숙 후보가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묶을 수 있는 최적의 후보이긴 하나, 전략 공천에 따라 이계안 후보의 탁월한 많은 공약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단일화는 민심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여론조사로 정치를 대체해버리는 위험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한명숙, 유시민 등 범야권의 주류 단일 후보와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의 후보 간의 ‘반MB 연대’를 위한 공개토론과 정치협상의 실종”을 지적하고, “‘반MB후보단일화’ 프레임이 야권 내의 모든 논쟁과 토론을 묻어버리면서 진보신당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종합 HOT 신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노 후보의 정책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2010년 6월』의 내용이나, 경제정의실천연합의 경기도지사 후보 공약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심 후보의 공약은 선거판에서 사라졌다.”며 한명숙, 유시민 후보 측에서 노회찬, 심상정 두 후보에 대해 “음양으로 중도 사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는 듯하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당내 경쟁자도 아니고 노선과 정책, 이번 선거에서의 목표가 다른 정당의 후보인데, 그들이 후보와 정책에 대한 상호 검증을 요구하고 완주 의사를 밝히면 바로 ‘분열주의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라며 “야권 후보단일화 프레임의 최대 수혜자인 한 후보 측이나 유 후보 측이 소수의 진보신당 지지표가 필요하다면, 진보신당이 납득할 수 있는 단일화의 방식과 절차를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를 위하여

그는 “연합정치가 성공하려면 소수 정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진보신당은 이번 선거에서의 나쁜 성적을 감수하고 2012년과 그 이후를 바라보며 독자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루어진 여러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연합정치의 기준과 절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연합정치는 어려워질 것이고 진보·개혁진영은 내부로부터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 교수는 “토론과 경쟁이 빠진 진보·개혁진영의 무조건 단결과 여론조사에만 의존한 후보 선정은 소수파 후보에게만 ‘독배’―이계안 후보의 말을 빌자면―를 강요하는 문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진보·개혁진영 전체가 ‘독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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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필자에게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진보가 배제 혹은 소외된 정치경쟁의 구도가 실현된 점을 꼽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내지 진보 개혁 세력 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속칭 ‘반MB’라고 불리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향후 한국정치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의 표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문제보다 이 점을 훨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2.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주의는 반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는 곧 전복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 내지 경쟁의 내용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절멸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세력은 정치의 장에서 힘을 갖기 어렵게 되며, 공존을 전제로 한 경쟁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초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던 많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만큼 혁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티테제는 없다.

결국 민주주의가 지속될수록 점진주의적 진보파만이 살아남고 ‘관용’, ‘타인에 대한 정중함’, ‘상호성’ 등의 가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아는 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나라들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이를 벗어나는 경향을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와 혁명

이 점에서 반MB는 민주주의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 보수파들의 잘못된 열정으로 표출된 ‘반DJ’나 ‘반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인격적 모독과 인간적 무례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우리 사회 보수파가 갖는 권력 상실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내지 적대감이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 별다르지 않은 반MB 담론이 진보와 개혁 세력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이나 보수를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의 축’으로 보는 태도는 권력을 상실한 개혁파나 누구보다 강한 반정부성을 자랑하고 싶은 진보진영 내부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보통의 상식을 갖는 시민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집권 2년 반을 지나고 있는데도 역대 정부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고 있는 데에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반대세력의 잘못과 과도함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3.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때의 다수는 수많은 소수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수 지배는 ‘소수파들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를 형성하고 정치경쟁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잠재적 다수를 구성하는 내부의 이견과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견과 차이가 민주정치가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나 장애가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논리적 순서를 제대로 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이견과 차이를 다루면서 광범한 대중의 에너지와 힘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의 비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에서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견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법이다.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연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견과 차이가 희생되는 게 필요하다는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견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상호 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각각의 견해를 일정한 영향력으로 환산해서 거래하고 타협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협의와 토론을 통해 현재의 이견을 변화시켜 새로운 견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조정 이후에도 기존의 이견은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견의 구조나 분포 자체가 달라진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 원로 사제적 권력의 반민주성

반MB 연합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도덕주의적으로 강요되었고 따라서 협력과 연대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로써 그 자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원로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그들이 발휘했다고 알려진 영향력의 기초는 물론 역사적 요청을 대행하는 윤리적 명령이었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사제적’ 권력 행사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MB 연합이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집약되었을 때, 누가 왜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사라지고 후보가 누가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규범적 공리주의 내지 맹목적 성과주의로 전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후보 조정의 최종 단계는 어느 후보가 더 협박 능력이 강한가를 시험하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반MB 연합 내부적으로는 경선이라는 민주적 후보선출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외부적으로는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약한 정치세력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번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명박 정부를 중심에 두고 김대중 정부(민주당)와 노무현 정부(국민참여당), 나아가 박정희 정부(박근혜당)라는 과거 세력들이 경합하는 구조로 퇴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4.

반MB가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편으로 집권세력 대 반MB 세력 사이의 정치적 적대는 격렬하게 나타나는 반면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에서는 경쟁이 참여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한국정치에서 지금의 경쟁 구도는 대중 참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언론의 영향력에 대한 의존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독점적 지지 시장을 갖고 있는 정당들 사이의 퇴행적 다툼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선거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열정을 갖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난 주 마감된 후보등록 상황만 봐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새로운 정당이 더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자 비율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출마자 비율이 낮아진 이유

유권자는 어떨까. 중앙선관위가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투표 참여 독려 광고를 보면, 4명씩 두 번 나눠서 기표하는 선거 방식이 쉽고 편하니 이제는 ‘투표로 말하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그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사는 선거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8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번 선거에서 필자가 놓고 고민해야 할 후보의 숫자는 23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슨 세탁기 세제 고르듯 선택해야 할 판이다.

물론 선관위는 각각의 후보들이 만든 홍보물과 공약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단다. 선거법의 규정대로 모두가 다 보낸다면 아마 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될 것이다. 과거 선관위가 보낸 후보 관련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그런 자료를 보고 투표 결정을 하긴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누군지로 모르는 후보들 이름을 놓고 장막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의 고독한 독백’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선거에 책임을 져야할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반MB 연합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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