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공산주의자의 향기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지금 읽어봐도 예리하게 ‘이광수 파시즘’을 비판한 1930년대 논객 김명식
비판적 학문 업적에 비해 문집이나 평전 하나 없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라면 ‘독자를 얻지 못하거나 잃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의 19세기를 빛낸 다산 정약용(1762~1836)과 혜강 최한기(1803~79)는 생전에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못한 비주류였지만 지금은 조선 철학의 진취성과 잠재력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의 19세기를 빛낸 쇼펜하우어(1788~1860)나 니체(1844~1900)의 강의에 학생 몇명밖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랍기만 하다. 글쟁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동시대인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것보다는, 미래에 시대적 의미를 잃어버린 작가로서 역사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일 것이다.

정약용과 쇼펜하우어의 시대성

특히 특정 이데올로기의 범주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그 이데올로기의 퇴조 이후에 빨리 잊혀진다. 가령 지금 박은식(1859~1926)이나 장지연(1864~1921)의 글들을 애착을 갖고 찾는 독자들이 몇명이나 되는가? 그러한 독자들이 없는 이유는 당시의 개화주의적 주장들이 지금은 답답한 훈육주의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1980년대의 ‘신식민주의’의 분석들도 더 이상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한때에 소비됐다가 유효기간이 만료되면 폐기되는 것이야말로 글쟁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근대적 글쓰기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범주에서 쓴 수십년 전의 글이 지금에 와서도 현 시대 논객들의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경우들이 있다. 대개 그러한 글들은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몰두하기보다는 그 틀을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분석에 적절히 이용하는 실사구시적 냄새가 나는 논저들인데,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면 마치 오늘 쓴 것인 양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1920~30년대 공산주의적 사상가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1890~1943)의 ‘이광수 파시즘’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70년 전에 쓴 글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시의성을 과시할 수 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 김명식은 1999년에야 애족장 포상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게 포상 신청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광수의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1910년대에 ‘우매한 민중을 계몽할 사명’을 맡을 신지식인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했던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몽주의자인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노동자의 파업과 반란을 낳아 위기로 치닫는 서구의 자유주의·개인주의·무정부주의적 경향’을 질타하고,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이 엘리트 지도자에 의해 집단에의 봉사정신을 익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 민중이, <우덕송>(牛德頌, 1925)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멍에를 지고 밭을 갈았다가 나중에 인간에게 살과 피, 가죽을 주면서 죽는 성인(聖人)과 같은 소’와 같이 지배자들을 위해서 살고 죽는 우민(愚民)이 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주장했다.

‘강력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중이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지도자론>(1931)은 공산주의 이론가 김명식에게서 비판의 화살을 맞는다. 김명식의 이광수의 비판(<삼천리>, 1931년 9월) 논리는 참으로 명쾌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족 전체를 계몽·지도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지배자를 위해 절대 다수의 이익을 짓밟을 텐데 그건 계몽·지도가 아니라 지배다. 피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도 없이 자본가 위주로 만들어진 ‘민족’의 미래를 들먹인다면 극히 폭력적인 지배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주에 가서 다르게 생각해보라

이에 이광수가 반박문을 쓰고 흥분했지만 몇 개월 뒤 김명식의 비판 제2탄(‘영웅주의와 파시즘’, <동광>, 1932년 3월)이 날아와 이광수의 정체가 더 확실히 드러난다. 이광수는 힘이 바로 정의라며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친 초강력의 집단의 힘을 찬양했지만, 김명식은 역사적 진보의 논리를 따르는 힘만이 정당할 수 있으며 해방을 구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인권·자유를 짓밟는 힘은 반역사적 폭력일 뿐이라 못박았다. 또한 유럽·일본, 조선의 부르주아들까지도 피지배민의 해방 투쟁에 맞서 폭력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적 위기가 닥쳐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김명식의 논리였다.

민중을 ‘지도자’ 중심의 재벌 집단의 ‘세계적인 성공’에 열광하고, 허울 좋은 ‘2만달러 소득의 동북아 허브’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는 소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는 자들이 아직 많아서일까? 70년 전 그의 글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광수가 숭배한 이순신에 대해 과연 거북선 제조가 이순신의 천재성 덕분일까, 당대 조선의 기술적 수준의 반영이 아니었을까라는 김명식의 반문을 읽을 때, 수많은 조선 기술자와 병졸, 의병에 가담한 농민·노비 등을 외면한 오늘의 영웅주의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김명식은 “이순신이 나타나지 않아 조선이 일본이나 명나라의 지배에 들어갔다 치자. 그렇다고 피착취 민중의 형편이 조선왕조가 지배할 때보다 크게 나빠졌을까”라고 되묻기도 한다. 민족주의적 통념으로는 거의 독신(瀆神)에 가까운 이야기다. 민족주의적 ‘상식’으로 민족 멸망 이상의 재앙은 없다. 그런데 농민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김명식은 “경주의 화려함을 볼 때 신라 노예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7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경주에 가서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가?


△ 이광수(오른쪽)는 근대문학의 창조자 반열에 올라 있는데 그를 비판한 김명식은 현재 좌파 지식인조차 잘 모른다. 김명식과 활동한 김철수(왼쪽)역시 최근에 서훈됐다.

그러나 역설 중의 역설은 파시스트 이광수가 지금 누구나 아는 ‘근대 문학의 창조자’ 반열에 올라 있는 반면, 그의 예리한 비판자 김명식은 현재의 좌파적 지식인들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제주도의 진보 인사들에게는 제주시 근처의 조천리에서 100년 전 양반 유지의 가정에서 태어나 1940년대에 낙향생활을 하다 고향마을에서 서거해 묻히게 된 김명식은 ‘제주 진보운동의 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조국 해방을 위해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이광수 등과 함께 와세다대학에 다녔다가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1916)을 만들고 그 뒤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공산주의 조직인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1920)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혁명 사상의 대중화에 뛰어들어 혁명적인 글들을 게재한 죄(?)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식민조선 사상 최초의 ‘필화 재판’(1923)을 받아 형살이를 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명식을 알 것이다.

말년의 타협은 아쉬움 남겨

그런데 고문, 가혹한 감옥 노역, 말라리아로 1920년대 중반부터 거의 귀가 먹어버려 걸어다니기 힘든 병자가 된 김명식이 그 뒤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쓴 수십편의 당대를 떠들썩하게 한 뛰어난 논저들이 아직도 문집으로 묶이지 않고 있으며 김명식의 평전 역시 쓰인 일이 없다. 이제 안재홍(1891~1965)과 함께 1930년대의 최고 논객으로 꼽혔던 김명식에 대해 현대인들은 거의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무지가 강요된 것은, 그 사상이 지금도 불온하게 느껴질 만큼 이 땅의 지배자들의 이면을 잘 파고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황천으로 떠난 김명식으로서 어쩌면 행복해할 일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다른 글과는 달리 그의 글은 아직도 쓸모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명식에게도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소련이 파시스트 독일과 야합해 그가 유럽의 조선이라고 여겼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실망시키는 등 암흑의 상황에서 일제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리던 말년의 김명식이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창씨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氏制度 창설과 鮮滿一如’, <삼천리>, 1940년 3월) 등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쓴 일이다. 자신을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르고 개인적으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죽으면서도 “해방될 때까지 내 사망신고는 하지 말라”고 하는 등 나름대로 지조를 지킨 그가 이와 같은 종류의 타협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상상이 간다. 인간이었을 뿐인 그도 당연히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극빈 생활과 투병의 고통 속에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진보적인 비판을 해온 그를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요즘 좌파적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지만 형식적인 서훈보다는 그들의 훌륭한 사상을 오늘의 입장에서 해석·이해하고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나 싶다.

참고문헌

김철, 신형기 외 지음,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 2001.
박종린, ‘한국의 사회주의: 인물(1) 꺼지지 않은 불꽃, 송산 김명식’, <진보평론>, 제2호, 1999.
박종린, ‘김윤식사회장 찬반 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재편’, <역사와 현실>, 제38호, 2000.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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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리더십의 폭력성

[강준만의 세상읽기]

대연정 제안을 반대한 것은 ‘제2의 민주당 분당’처럼 보였기 때문
언제부턴가 뚜벅뚜벅 걷는 법 잊은 대통령이 드라마 PD가 된듯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노무현 대통령님, 안녕하시지요? 이 글을 올리기까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대통령에게 과부하를 주는 한국 사회의 ‘대통령 중독증’을 비판해온 사람으로서 저까지 그 ‘중독증’에 일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강준만, 나는 누구인가

그런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대통령님께 글을 올리기로 한 건 소통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님을 비판하건 지지하건 대통령님에 대해 언급한 그 어떤 글을 봐도 상대편과의 소통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대통령님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모두 참 답답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저 자신 그간 대통령님을 꽤 비판해왔습니다만, 저의 비판 역시 소통을 위한 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대통령님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분들도 소통을 우선시하지 않는 건, 이유는 각기 다를망정 저의 경우처럼 그럴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더군요. 저는 모든 분들께 그 내면의 이야기까지 다 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소통을 위해서입니다.

저부터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의 대통령님 비판은 그간 대통령님의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가장 많은 비판은 제가 감정적 대응을 한다는 것이었지요. 민주당 분당에 반대했던 사람으로서 그때의 ‘반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좀 다른 이유에서 그런 비판에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동의할 수 없는 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점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저에 대한 과대평가라고 보았지요. 저는 그간 국가와 민족, 즉 전체를 위한 글쓰기를 해온 것이었을까요? 전 그건 아니었다고 봅니다.

대통령님에 비해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만, 과거 제 인생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어느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 왕따를 당하는 겁니다. 왕따당할 만한 일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 사람에 대한 조직 성원들의 응징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전 홀로 그 왕따를 당하는 사람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제겐 조직의 안녕과 번영 따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정의를 대변한다는 다수의 ‘폭력’에 대한 반감이 저의 모든 관심을 지배했지요.


△  대통령의 열성지지자들에게 선명한 개혁전선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일해야 하는 권력 엘리트층에 그 전선은 다분히 허구적이다. 지난 9월 노사모 전국대표일꾼 선거 출마자들의 토론회 모습. (사진/ 류우종 기자)

저는 평소 소심하고 여린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정의감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연에 의해 선택을 사실상 강요당하는 상황, 또는 자신이 했던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까지 내뺄 만큼 슬기롭지는 못합니다.

대통령님은 최근에서야 공개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만, 대통령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민주당 분당은 제게 매우 폭력적으로 비쳤습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게 앞으로의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정당이며 당연히 개혁 대상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요. 그래서 전 “정당으로 쳐들어가자”는 선동을 하기도 했고 유시민씨가 깃발을 든 개혁당 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지요. 제 딴엔 민주당의 대대적 개혁을 위한 대행진에 미력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님은 민주당 분당을 원하셨습니다. 좋습니다. 분당도 못할 건 없지요. 제가 폭력적으로 느꼈던 건 민주당을 ‘반개혁 정당’ ‘지역주의 기생정당’으로 몰아붙이는 전략이었습니다. 저로선 결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모두 대통령님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게 다 이 나라의 개혁을 위하는 정의로운 일이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분열주의 전략은 얄팍하다

그렇지만, 대통령님! 모두 다 개혁의 화신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민주당이 그렇게까지 매도되어도 좋을 정당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극소수나마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다 자신도 가담했던 과거에 침을 뱉으면서 새 역사 창조에 줄을 서야 하고 꼭 국가와 민족이라는 전체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전체 중심의 사고야말로 개발독재 시대의 유산이 아닐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독재정권 시절에 탄압을 받으면 명예나마 얻을 수도 있었지만, 대통령님의 뜻에 반해 몰락하면 반개혁·지역주의 기생세력으로 전락해 영원히 불명예에서 벗어날 길이 없잖습니까. 설사 대통령님의 비전에 공감해 대통령님을 지지했고 여전히 지지하고 싶어도 방법론에 조그만 이견이라도 드러내 대통령님의 줄에 서지 않으면 그런 운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대통령에게 대들면 그래도 용감하다는 칭찬이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대통령님처럼 탈권위주의의 화신으로 비쳐진 대통령의 뜻에 반하면 그런 혜택조차 주어지지 않지요.

대통령님! 전 이 모든 게 폭력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상징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 이상으로 무서울 수 있다는 것도 절감했습니다. 이는 제가 대통령님의 매력에 반해 지난 2001년 봄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을 썼을 때의 그 심정입니다. 전 당시 개혁세력 내부에서조차 노무현을 왕따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분노해 그 책을 썼고, 몇년 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 대통령님의 줄에 서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에 분노해 대통령님을 비판하게 된 겁니다.

전 대통령님이 제안한 대연정에 반대했습니다만, 그 이유는 다른 분들의 반대 이유와 좀 다릅니다. 저는 그걸 ‘제2의 민주당 분당’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관성은 대통령님께 있다고 믿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대연정 제안에 대한 싸늘한 반응을 보고 의아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수개월동안 국민들에게 연정을 ‘학습’시키려 했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거부로 한발 물러났다. 10월1일 계룡대 연병장에서 만난 노 대통령과 박 대표.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저는 또다시 대연정 구상에서 폭력성을 발견합니다. 대통령님 못지않은 개혁 의지로 충만한 열린우리당 의원일지라도 죽어도 대연정엔 찬성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대연정 드라이브가 성공한다면, 그들은 또 반개혁 세력으로 찍히는 동시에 몰락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통령님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지요. 제가 알기로 대연정의 참뜻은 ‘화합과 포용’인데, 대통령님의 일부 지지자들은 공격적인 적대감으로 무장해 대연정을 외치고 있으니 이걸 어찌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 소용돌이 효과를 아십니까

대통령님! 저의 문제의식은 대통령님이 구사하시는 리더십의 폭력성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새판 짜기를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분열주의 전략은 새로운 정치 시장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파워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폭력성과 더불어 ‘얄팍함’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거지요. 문제의 핵심은 그건 ‘노무현 브랜드’와 전혀 맞지 않는 속성이라는 겁니다. 그건 일종의 부메랑 효과로 나중에 대중적 냉소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간파하기가 쉽지 않으니 더 문제지요. 대통령 비판이 ‘국민 스포츠’가 된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의 음모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대통령님은 언제부턴가 뚜벅뚜벅 걷는 법을 잊으셨습니다. 대통령님이 자꾸 드라마 PD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대통령님의 대통령 당선 자체가 드라마의 연속으로 가능했던 것인데, 그건 불가피한 게 아닌가 하는 이해를 해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만, 그렇게 해선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였지요. 노무현 브랜드의 정체성이라는 건 이념이나 정책노선보다는 오히려 노무현 개인의 행태적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점이 여론조사로는 결코 규명될 수 없는, 대통령님의 지지도 하락 이유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국민들의 탄핵 반대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대통령 소용돌이 효과' 때문이다. 노사모 회원들이 탄핵 기각을 기원하며 고양시 장항나들목 가로수에 매달았던 리본.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대통령님! 대통령직을 수행하시는 데에 생각하셨던 것보다 어려움이 많지요? 그 어려움엔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무언가 빨리 이루려는 대통령님의 조급증과 더불어 과도한 자신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 안희정씨가 역설했던 ‘386 역할론’에 주목했습니다. 안씨는 “젊은 세대가 정권의 주역이 된 것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40년 만”이라며 “그때는 군인들이 총칼 들고 한강을 건너 정권을 장악했지만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주장했지요. 전 처음엔 이 말을 수사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게 아니더군요. 대통령님도 공감하는 참여정부의 기본 신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보며, 바로 그런 신념이 참여정부의 어려움을 초래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님은 너무도 탈권위주의적이라 이해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국 사회의 숙명이라 할 ‘대통령 소용돌이 효과’는 독재정권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답니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건 대통령님에 대한 지지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중심인 대통령을 흔들어 혼란을 초래하는 작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당의 몰락도 호남인들의 개혁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대통령 권력에 의한 소용돌이 효과 때문이라고 보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겁니다.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참여정부 스스로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며, 실제로 이는 대통령님은 물론 대통령님의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 자주 발설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오랜 세월 누적된 수구 기득권 세력의 거대한 포위망에 갇혀 있으므로 오직 그들과 맞서 싸울 뿐 내부 비판을 할 겨를이 없다는 논리와 그에 따른 실천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거든요.

너무 겸손해 겸손을 잊어버리는 역설

대통령님! 그렇게 선명한 전선이 그어질 수만 있다면 그런 논리와 실천도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만 대통령님이 직·간접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한 500대 고위직 인사들을 놓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중 대통령님의 개혁 비전과 열망을 공유한 사람이 얼마나 되리라고 보십니까? 이건 정말 중요한 점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공기업에 수많은 대선 공신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갔습니다만, 과연 어디에서 이렇다 할 개혁의 움직임이 일고 있던가요? 지금 저는 참여정부를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름 없는 대통령님의 열성 지지자들만 생각하면 선명한 개혁 전선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실제로 일을 해야 할 권력 엘리트층을 놓고 보자면 그 전선은 다분히 허구적이라는 거지요.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자)’만 놓고 보더라도 참여정부가 이전 정부들에 비해 큰소리칠 게 전혀 없다는 거지요.

실제로 부동산 투기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통령님부터 자꾸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강조하십니다만, 그게 그렇질 않습니다. 저항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훨씬 더 중요한 정책 실패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 박태견 <프레시안> 논설주간이 최근에 출간한 <참여정권, 건설족 덫에 걸리다>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전 대통령님이 꼭 그 책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시지 않더라도 부동산 투기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쪽은 다름 아닌 대통령님 자신일 수 있다는 성찰을 해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대통령님! 지금 저는 뜨거운 개혁 열망을 자제하시라거나 자책을 먼저 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참여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대국민 관계에서 ‘인식의 괴리’와 ‘소통의 부재’에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는 신념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님에게서 역설을 자주 봅니다. 예컨대, 너무도 겸손한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겸손을 잊어버리는 역설입니다. 가수 조영남씨는 “돌아가신 울아버지 울어머니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 되는 것은 딱 한 가지 그건 겸손이라네”라고 노래했지요. 대통령님의 경우엔 늘 개혁을 생각하다 보니 도저히 겸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국민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시고 입술을 깨물어가면서라도 늘 겸손하시길 빕니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의 겸손은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주장했습니다만, 그건 대통령님의 리더십 모델과는 다른 모델에서나 통하는 말이겠지요.

꼭 성공하셔야 합니다

저는 참여정부의 성공을 바랍니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대통령님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이나 대통령님의 측근 인사들이 행여 손 탁탁 털며 “우린 애초부터 잃을 게 없었다”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꼭 성공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자주 이런 편지를 올려 대통령님과 민심의 상호 소통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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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0-2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따 무지 기네..
 

(고뉴스=이은식 기자) 펄떡거리며 살아있는 생선을 그 자리에서 씹어먹는 사람이 있다?

살아있는 생선을 입으로 뜯어먹는 엽기적인 식성의 주인공은 50세 안철진 씨.

특이한 식성 때문에 그는 항상 낚시터에서 눈에 띈다. 보통 물고기를 잡으면 그것을 냄비에 끓여 매운탕을 만들어 먹지만 안철진 씨는 날생선을 입으로 뜯어 먹는다. 회는 내장을 제거하고 살만 먹는 것이지만 그는 생선의 모든 것을 먹는다. 낚시터에서 잡는 민물고기의 비린내도 아무 사오간없다는 듯 한입에 뚝딱 해치운다.

"잡은 물고기를 바로 입안에 쏙 넣으면 쌉싸름하고 비릿한 맛이 너무나 좋다"고 밝힌 안 씨는 "날생선에 신 김치를 사서 먹는 것은 정말 일품요리"라고 덧붙인다.

그가 생선을 먹는 방법은 입으로 비늘을 쭉 벗겨내고 날생선에 신 김치를 싸서 한입에 넣는 것.

팔딱팔딱 뛰는 생선이 아니면 맛이 없다고 말하는 식성의 안철진 씨. 특이하게도 그는 20년 넘게 횟집을 경영하는 사장님이다. 안 씨의 물고기 선별법도 직접 보고 씹어 먹는 등 독특하다.

그의 독특한 일상과 엽기적인 식성은 오는 27일 SBS TV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통해 자세히 공개된다.

 



표정은 썩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는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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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부자동네 (上)◆

찰리 채플린, 마이클 더글러스 등 내로라하는 역대 미국 영화배우들이 줄줄이 거주해온 로스앤젤레스 북서쪽의 부자동네 '베벌리힐스'. 멀찍이 베벌리힐스가 보일 만한 곳에 이르면 '베벌리힐스 안내지도'를 파는 상점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영화배우들의 저택을 골목골목마다 표시한 지도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에게 인기만점이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의 몬테레이에 있는 고급 주택가를 낀 세 븐틴마일스 도로는 관광객들에게 아예 통행료를 받는다. 관광객들은 베벌리힐 스, 몬테레이와 같이 소문난 부자동네들을 둘러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관 광객들을 부럽게 하는 것은 먼저 아름답고 웅장하게 꾸며놓은 집들이요, 그 다 음으로는 그런 집들을 관광지 삼아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경색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이다.

◆ 미국 부자들도 은둔을 선호하기는 마찬가지=화려한 나무담장과 정원수로 뒤덮인 베벌리힐스를 둘러보며 관광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사실 미국에서 부자동네를 열거하다 보면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는 부자촌에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이다.

올해 4월 미국 광고전문사이트인 애드에이지닷컴(AdAge.com)이 미국 50대 부자 촌을 분석했을 때 베벌리힐스는 부자동네 50곳 중 35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특히 평균소득에 있어서는 50대 부촌 중 겨우 49위에 올랐다.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1위 부자동네로는 샌프란시스코의 애서턴(Atherton)이 꼽혔고 50대 부자동네 중 24곳은 뉴욕, 5곳은 보스턴에 몰려 있었다.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를 둘러보며 "미국의 부자동네는 관광지처럼 개방된 곳"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미국에서도 진짜 부자동네는 소문나지 않은 곳에 조용히 가려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남부 대표적인 부자동네 가운데 하나인 스타아일랜드도 농구선수 샤킬 오 닐이 2300만달러짜리 주택을 구입해 주목을 받았으나 일반 관광객은 둘러볼 엄 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다. 마이애미 앞바다 비스케이만에 인공섬을 만들어 부 자동네로 탈바꿈시킨 이곳 스타아일랜드는 다리 하나로만 육지와 연결돼 있으 며 외부인 출입이 제한된다.

비스케이만을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면 멀리서 스타아일랜드 별장들에 관한 설 명을 들을 수 있으나 그리스ㆍ로마 신화를 듣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일반인 들에겐 별세계일 뿐이다.

미국 동부의 어지간한 부자동네들도 일반인의 통행을 직접적으로 차단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이 접근할 만한 틈이 없다. 쇼핑시설도 놀이시설도 없이 높은 담장들만 이어지는 부자들의 동네를 일반 서민들이 굳이 찾아나설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관광지로 소문나 있는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에서도 막상 동네에 들어서서는 높은 정원수와 담장에 가로막혀 마당을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길거리에 주차할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게 바로 미국 부자동네의 분위기이다.

◆ 빈부격차 심할수록 높아지는 부자동네 담벼락=부자들이 경외의 대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부자동네들이 은둔 속에 감춰져 있 다면 빈부격차가 심한 아시아ㆍ중남미ㆍ동유럽ㆍ아프리카권 국가들의 부자동네 담벼락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아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근교에 여러 채의 단독주택들이 밀집된 타운하우스 형태의 부자동네인 '데인펀골프촌'은 아예 방범용 전기펜스로 울타리를 둘러쳐 놓고 있다.

순찰대원들이 24시간 방범순찰을 도는 것은 기본이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브라질 이집트 등 대다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신흥 부자동 네가 고급아파트 단지로 하늘 높이 건설되고 있는 추세다.

인도네시아 부자들이 1998년 경제위기 때 시민폭동으로 곤욕을 치른 후 고급아 파트를 선호하는 현상이 부쩍 심화됐는데 이들 국가에서 고급아파트 선호현상 이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옛소련권 국가들에서는 당간부들이 주로 거주하던 단 독주택단지에 신흥 부자들이 합류하면서 부자동네가 여전히 단독주택단지 모습 을 띠고 있다.

모스크바 외곽순환도로 인근에 위치한 루블료브카, 타슈켄트 시내중심가 등이 바로 이런 지역에 해당한다. 이들 지역 대저택들도 예외없이 전문 경비인력의 순찰지원을 받고 있고 타슈켄트 중심부 저택들은 높이 3m에 이르는 담장을 둘 러쳐 아예 집안을 둘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 부자의 사회적 책임=인도에서는 "교통사고를 내면 우선 도망가라"는 조언 을 자주 듣게 된다.

현장에서 사태를 수습하려다가 자칫 군중에게 집단폭행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 인데 경찰마저도 때로는 "일단 현장을 벗어나고 수습은 나중에 하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한다. 이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인도에서 부유층에 대한 일반 서민들 의 인식이 얼마나 나쁜지를 대변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반면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부자와 서민 사이의 갈등이 부각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부자들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감세정책의 일환으로 상속세 폐지를 단계적으로 추진해왔 다. 부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처럼 보이는 이 세제개편안은 그러나 정 작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워런 버핏, 록펠러 가문 등 내로라 하는 부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들은 뉴욕타임스에 광고까지 내가며 "상속세가 폐지되면 기부문화가 타격을 받고 빈부격차가 더 확대되는 등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것" 이라며 반발했다. 워런 버핏은 올해 4월 워싱턴에서 열린 '책임지는 부자'라는 이름의 모임에서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1만3000가구의 소득이 못사는 2000만 가구의 소득과 맞먹는 현실에서 부시 대통령이 추진하는 상속세 폐지법안은 얼 토당토 않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미국 서부 네브래스카주 작은 도시 오마하에 45년째 살고 있는 '세계 제2의 부 자' 워런 버핏은 지난 2003년 "내가 거주하는 50만달러짜리 집의 재산세는 1만 4401달러"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미국의 재산세율은 주별로 1~3%로 차별 화되고 소득공제 등의 혜택 때문에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도 곤란하다.

그러나 미국 제일 부자동네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 애서턴에 위치한 래리 엘리 슨 오라클 사장의 저택은 침실 7개, 일본식 정원, 테니스코트, 분수 등을 포함 해 공식가격이 2500만달러(약 250억원)에 달한다. 캘리포니아주의 재산세가 다 른 주에 비해 낮은 점을 감안해도 이 정도 저택이면 연간 수억 원대 재산세를 납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애서턴 지역의 지난해 평균 주택가격은 250만달러(약 25억원)였다.

시가 5억원짜리 아파트를 보유하고서도 연간 50만원 안팎의 재산세만 납부하는 한국과 비교하면 부자동네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기획취재팀=최경선차장ㆍ팀장 / 뉴욕 = 전병준 기자 / 도쿄 = 김대영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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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저 아저씨만 나오면 넋 놓고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감과 끌(?)만 있으면 쓰윽~ 쓰윽~ 칙~ 칙~

산, 오솔길, 나무, 구름, 시냇물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생기는 것이 흡사 마술 같았죠.

단 20분만에 그렸던 저 그림들...

그리면서 가끔 '정말 쉽죠?' 라고 하는데, 내가 해도 쉬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만들었드랬죠.

기계적으로 생산된 것들의 작품성은 둘째 치더라도

정말 부러웠던 것은 자연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신비감을 힘껏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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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0-2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
이발소 그림이긴 하지만.. 진짜 좋아했었죠. ^^

라주미힌 2005-10-26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발소 그림... ^^;
판다님 이발소 출입하시나봐요.. 큭큭..

panda78 2005-10-26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 이발소 그림을 우습게 보심 안 되지라- 이렇게 엄연히 책도 나와있당게요. ^ㅂ^;;

 


아영엄마 2005-10-2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지 감탄하면서 보곤 했답니다. 어쩌면 저렇게 쉽게 잘 그리나.. 나도 한 번 해볼까.. (잘 될리가 없겠지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그림들에 등장하는 배경들이 비슷한 경향이 있는 듯..

릴케 현상 2005-10-26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가 좋아했던 기억은 나는군요
하지만 될리가 없는 걸 쉽게 된다고 하면 사기 아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