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세계 신비의 순간3 - 췌관 스텐트 속 깊은 바다
제2회 전국 바이오현미경사진전 당선작
2005년 10월 28일 | 글 | 이상엽 기자ㆍnarciso@donga.com |
 


권중균·한양대 의대 전자현미경실 (바이오기술상)

반짝이는 산호초 사이를 누비는 신비로운 바다생물을 보는 듯하다. 수명이 2~3개월인 췌관 스텐트를 3년 만에 교체한 환자의 낡은 스텐트 속을 전자현미경 배율 3만배로 들여다봤다. 췌관 스텐트는 췌장염 환자의 막힌 췌관을 넓히기 위해 사용하는 의료기기다. 여기 관찰된 것들은 세균, 효모, 탄산칼슘, 옥살산칼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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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저점을 치고 있다.
  
  KBS MBC SBS 등 공중파 3사가 내보내고 있는 영화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의 덫에 걸려 인기 연예인들을 앞세운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으로 둔갑한 지는 이미 오래. 그러나 최근 들어 그 같은 '찰라적' 경향이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예컨대 SBS TV <접속 무비월드>의 경우 최근 프로그램 구성을 메인MC 체제에서 코너별 진행으로 전면 개편하되 진행자들로 가수 옥주현을 비롯, 개그맨 등 인기 연예인을 기용해 기존 MC였던 영화배우 김서형이 나머지 녹화분의 출연을 거부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진행자 교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단순한 잡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금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방향타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정작 시청률은 점점 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KBS의 <토요 영화탐험>을 비롯, MBC의 <출발 비디오여행>, SBS의 <접속 무비월드> 등이 모두 시청률 4~5%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평균 8~12%선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도 시청률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제작구조에서 나온다. 모두 외주 제작사들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제작사들이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 프로그램을 문화예술적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본사로부터 시시때때로 가해지는 계약 해지라는 위협을 감수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작금의 우리 방송 환경에서 그렇게 '간이 큰' 외주 제작사는 있을 수가 없다. 본사에서 끊임없이 시청률을 가지고 '달달 볶고' 있는 상황에서 외주제작사들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곧 인기 연예인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또 확대발전한다. 전문성이 취약한 진행자들을 내세우다 보니 프로그램 내용도 보다 가볍고 쉽게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들 공중파 프로그램들이 대동소이하게 개봉영화의 줄거리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화계 전문용어로 '스포일러(spoiler)'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애초부터 영화에 대한 단순 소개 외에는 저널비평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 프로그램이 종종 방송위원회로부터 간접광고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을 추구하다
  
  지상파 본사로부터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수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청률이라는 토끼를 잡아야 하며, 시청률을 위해서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을 대거 출연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작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질곡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에서 현재 저널이 갖추어야 할 공격적인 비평과 비판의식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중파 3사 영화 프로그램의 제작 모토는 거의 한결같다. 좋은 얘기는 많이 하되, 나쁜 얘기라면 아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른바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비판한다'는 소극적 비평 기능만으로는 방송의 영화 저널리즘이 올바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포기하면 할수록 거꾸로 영화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의 기능성을 가지고 영화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영화사가 영화 프로그램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상파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사의 영화를 친절하고 상세하게 홍보해 주고 있는 마당에 100%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케이블TV나 위성TV의 영화 프로그램들에게까지 영화사들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그런 영화사들의 가장 큰 무기는 자료협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방송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 그림 자료들의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영화사들의 이 같은 비협조적인 행태는 때에 따라 해당 영화에 대한 현장 취재나 감독이나 배우들에 대한 인물 인터뷰를 전면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해 좋은 말만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자승자박의 결과다.
  
  이제 영화 프로그램에서 뉴스와 논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화 프로그램의 내용은 사전에 머릿속에서 기획된 것이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뒤쫓아서 이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고 논평을 추가하는 형식이 아니다. 산업이나 정책과 관련한 정보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영화 프로그램에서도 스크린 쿼터 문제나 영화 심의 문제, 투자 환경과 관련한 문제, 제작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 메이저급 배급사들의 전횡 문제 등등이 상세하게 거론되는 적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딱딱하다, 재미없다,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취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 프로그램 제작진 가운데 산업과 정책 분야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는 인력들이 거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연성화에 대해선 백번 양보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소개되는 영화들조차 철저하게 상업영화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것은 국내 영화 문화의 장기적 발전을 놓고 볼 때 치명적인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비상업영화라고 불리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 혹은 예술영화는 이들 영화 프로그램들이 관심을 가져 주면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비상업영화관이라 불리는 <씨네 큐브>나 <하이퍼텍 나다>, <씨어터 2.0> 등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지상파 영화 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국내 영화 산업의 독점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프로그램이 죽어야 영화 프로그램이 산다
  
  대다수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4년 사이에 영화 관련 프로그램들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이 저널로서 올바로 기능하지 못함에 따라 영화문화는 여전히 하위문화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매년 5월 칸 영화제가 열리면 TF1 등 각 방송사들이 영화제 소식을 헤드 뉴스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프라임 타임대 방송 뉴스에서 단신 정도로 처리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게 지금의 우리 영화 문화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찌 보면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이 그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1대학 철학교수 이브 미쇼는 <예술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현대 예술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무의미한 형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어야 '진짜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브 미쇼의 말대로, 우리의 방송 영화 프로그램들은 현재, 무의미한 형식과 내용을 고집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프로그램'들이 죽어야 '진짜 영화 프로그램'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동진/프레시안 영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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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주 > 장자의 싸움닭이 그립다

장자(莊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싸움닭을 만들기로 유명한 기성자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싸움닭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이제 대충 되었는가?"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한창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또 물었다.
"대충 되었겠지?"
"아직 멀었습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덮치려고 날리를 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또 물었다.
"아직도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 적을 오직 노려보기만 하는데 여전히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길 40일째 되던 날, 왕이 묻자 마침내 기성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望之似木鷄矣망지사목계의, 其德全矣기덕완의). 다른 닭들이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살벌한 전의만 불사르는 것은 투계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이며 오로지 이기려는데만 목표를 두는 것도 도의 경지에 이른 모습은 아니다. 외연의 세계에 처연할 수 있는 경지야 말로 진정한 용사 투계로 거듭나는 모습이라고 장자는 나무로 만든 닭으로 '목계지덕'을 가르쳤다.

십 여 년이 흐른 뒤에도 다림질하면 최루가스로 날기침이 날 만큼 그 때 입은 옷들은 나의 청년기 한 토막에 "투쟁"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난 원래 싸움 체질도 아닌데 세월이 더러워서 우리는 '386세대'를 마치 훈장처럼 달고 있다. 지금이사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기껏 눈물 콧물이나 훌쩍거리는 본연의(?) 약자의 모습으로 회복하였지만 어쩌면 내 속에도 그 날의 투혼이 꿈틀대고 있을 런지도.

그러나 불혹을 낼 모레 바라본다. 가끔은 정의의 이름으로 내 속에 있는 날 벼룬 칼을 꺼내들고 싶을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싸움 없는 세상이 내가 지향하는 바이지만 사람 사는 풍경이 어디 매번 그러한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겠거니 하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 몸으로 맞아야할 나는 이승사람이다.

그래도 아쉽다. 나야 뭐 어차피 "맞은 나도 이렇게 아픈데 때린 그 손목때기는 을매나 더 아플꼬."같은 성자 흉내라도 내는 것이 쌈닭 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그래서 애시당초 쌈 잘 하긴 글러먹었지만), 투계판에서 목계지덕을 갖춘 닭을 여간해서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도의 경지에 오르진 않았더라도 최소한 싸움의 도가 뭔지는 들어본 그런 투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일방적인 언사로 소통 자체가 되지 않고 주어들은 건 많아서 궤변이나 그럴싸하게, 목적은 오로지 상대방이 피를 철철 흘리는 걸 볼 때까지 쫀 데를 또 쫄 뿐이다.

어디 기성자같은 사부가 없을까? 그 닭도 알고보면 좋은 기질도 많을 텐데 아직 가르침이 부족하고 수양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처음부터 쌈닭이 아니라면 푹 고아서 원기 부족한 날 몸보신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051027 폐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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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게으름뱅이_톰 > 나는 까칠한 인간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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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다시한번 내 삐딱함을 깨닫게 되는 책. 얼떨결에 강매당하여 읽은 책인데, 좋다는 사람, 읽기 편했다는 사람 별별 사람 다 있더만, 나는 영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 뭐가 심리/여행 에세이라는거냐. 여행을 다닌게 아니고 장소만 옮겨다니면서 사람들을 재단하고 다녔더라. 그러면서 뭐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타인의 행동을 재단하는 사람이 싫다고? 저자가 딱 그런 자세로 글을 쓰고 있는걸. 쯧쯧

 

자기을 유난히 따르던 어린 학생들은 모성애 결핍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 조종하려는 사람들이다. 관광객인 저자에게 기쁘게 담배를 권하는 마오리족 여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행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다. 한밤에 전화하여 고민을 털어놓는 후배에겐 '너는 조언이 필요한게 아니고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거야. 이제 다 컸으니 자신은 스스로 돌보라'고 단칼에 재단해 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자신이 몇 년동안 정신분석을 받은 것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상담결과를 텍스트북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판단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건 어릴적에 이러저러한 결핍이나 억압 때문이었다고 하더라. 앗, 저 사람이 나랑 똑같이 행동하네. 저 사람도 분명히 나랑 똑같은 상처가 있을거야.'

이게 무슨 선무당 사람잡는 행동인가 모르겠다. 몇 년간 정신분석 받으면 덩달아 심리 상담가가 되는건가? 아니 점장이라도 되는건가보다. 여행 중 스쳐지나는 사람들을 단 몇 분, 길어야 몇 시간의 만남으로 단칼에 정의한다.

 

진짜 맘에 안 드는 저자다. 내가 문학과 멀리 떨어져 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러한 판단도 물론, 편견이다. 책 한 권으로 저자를 내모는것.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저자라면 굳이 소설 찾아 읽고 싶지 않다.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이라는거 이런 땐 참 편리하기도 하네. 이런 글을 묶어서 책으로 낼 수도 있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찬사도 받고. 나처럼 맘에 안 든다고 하는 사람은 몇 없더라. 역시 나란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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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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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죽어가는 한 나치의 참회를 들어야만 했던 한 유대인의 불안과 고민, 참상을 담은 실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를 당신에게 질문하며,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 학자들의 포럼으로 2부를 장식한다.
이 책의 질문은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과 고민을 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삶에 투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죽어가면서 남긴 한 나치의 반성을 용서해 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질문이었지만, 질문 그대로를 쓰기엔 약간 핀트가 안 맞기 때문에 좀 더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당사자(피해자, 가해자)도 아니며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미시적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참회를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역사적인 사실로 각인되어야 할 것을 개인의 용서로 축소하는 식으로 하나의 논의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중에 아시아에서 저질러졌던 제노사이드와 반인륜적인 범죄를 참회하는 몇몇의 일본인들의 반성을 국가적인 것 또는 역사적인 것으로 피해국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끝냄’이다.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라면 용서 받을 일을 저지르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워서는 안 된다’고 이 책에 쓴 홍세화씨의 글은 명확하고도 날카롭게 이를 지적한다. 용서는 결코 남발될 수 있는 성향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조차도 용서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기만행위의 결과로 나타났지, 위대한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사형은커녕 사면된 전두환,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말짱한 사회 지도층, 부유층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용서한 자들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난 이렇게 질문을 바꾸겠다. ‘용서할 수 없는 짓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 처벌, 보상, 복원이라는 조건을 미래 지향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하겠다. 처벌은 단순한 복수 차원이 아닌 훼손된 정의와 역사적 진실을 되돌리기 위한 당연한 권리라고 본다. 처벌에 의한 가해자의 죄의식과 참회는 그렇게 역사적인 것이 되고, 은폐와 망각에 지워질 수 없는 의미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며, 미래의 참상을 방지하려는 예방적 보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정상성을 복원하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죠. 바로 독일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비록 개인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수치심만큼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저지른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승객이 전차에 올라탔다가 내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는지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일인 모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5p

독일인을 이스라엘의 유대인으로 바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에 대해 똑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누구보다도 그 고통을 잘 안다는 것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나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게다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위와 같은 고민은 사치스럽다. 피해의 역사를 뒤집어 쓰고서 가해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으로 뻔뻔하게 포장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다. 인간의 비인간성을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실례를 그들이 보여주기에 곤혹스럽다.
이 책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나치와 유대인의 무덤에 사이 좋게 피는 해바라기를 소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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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2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전땡의 똥꼬 깊숙히 엥똘레랑스, 한 방~

라주미힌 2005-10-2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복돌님이.. ^^;
복돌님의 한표가 만군을 얻은 것보다 큽니다용 ㅋ.ㅋ

로드무비 2005-10-30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표는요?^^

라주미힌 2005-10-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하. 로드무비님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