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업과 IT, 빌더의 철학

김국현(IT평론가)   2005/12/22

 

신생 분야 IT는 자신의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정의되어야 할 갖가지 과제를 기존 타 분야의 관념에 빗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난히도 은유가 풍부한 분야가 되고 말았다.

‘인헤리턴스’나 ‘폴리몰피즘’과 같이 생물학에서 가져 온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축과의 밀월은 넓고도 깊다. 특히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나는 다양한 행태, 예컨대 하청과 하도급이 난무하는 관행은 꽤나 흡사하다. 또 설계나 구축, 아키텍트나 빌더와 같은 업계 용어도 건축으로부터 차용한 것이 많다.

IT. 수학적 알고리즘에서 시작한 이 순수 과학은 경영의 시녀인 SI 산업으로까지 급박하게 변모해 간다. 21세기가 이 산업에 거는 기대란 20세기의 경제 발전 5개년 계획 등지에서 건축과 토목이 해 왔던 인프라 건설의 역할에 비견할 만 할 것이다. IT839 정책 등에서 볼 수 있듯, IT는 어느새 사회 간접 자본으로서 여겨지고 있다. 건축에 대한 은유는 IT의 오늘을 잘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사판이 되어 버린 SI 산업을 한탄하며, 소프트웨어란 그리고 프로그래밍이란 창의적 지성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라 믿고 싶은 오늘,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괴리에서 고민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한다.

벽돌을 올리는 인부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지겨워 죽겠어. 오전 내내 시멘트만 개고 있으니까."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골목의 랜드마크가 될 10층짜리 벽돌 건물을 짓고 있지."

이 것이 바로 빌더의 철학이다.

테라코타 붉은 벽돌로 유명한, 교보 강남 빌딩과 리움 미술관의 설계자 마리오 보타는 "건축은 모든 예술의 모체"라 말한다. 우리가 막노동판이라고 야유하던 그 산업을 두고 말이다.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살려 명성을 얻은 건축가 마리오 보타. 지방의 건축물들이 세계적 화제를 사고 그 양식이 다시 지역과 무관하게 퍼져 나간다. IT는 그럴 수 없을까?

예술로서의 건축처럼 테크놀로지가 미감과 교차하고, 단순한 기능을 시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기에는 IT 산업 구조가 너무나도 미국 중심의 일극 주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미국에서 솟아 나와 흘러 나오는데 무슨 지역적 아이덴티티가 있겠느냐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덴마크를 생각한다. 걸출한 건축가를 수없이 배출해 낸 덴마크. 그 곳에서 C++이 탄생했다. 터보 파스칼, 델파이, C# 모두 덴마크인의 작품임을 기억한다. 오브젝트 지향에 관해서는 스캔디나비안 학파를 알아 주며, 모듈화의 은유에 등장하는 '레고 블럭'마저도 덴마크가 준 선물이다. 면면하게 이어지는 지역적 아이덴티티란 이런 것이다. 진정한 건축 강국이란, 진정한 IT 강국이란 이런 것이다.

건축으로의 은유를 IT가 지닌 숙명이라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교훈도 IT가 닮고 싶어했던 건축이 주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건축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빌더의 철학이다.

혼을 담은 예술이라 생각하는 건축을 하지 않는다. 막노동이라 투덜댄다. 그러다 보면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대교가 끊어져 가라 앉는다. 빌딩의 수준은 빌더의 철학을 반영할 뿐이다. 철학이 없다면 이러한 수준의 IT 밖에 될 수 없다.

으레 건축에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기묘한 형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오브젝트(Object)'와 '컨텍스트(Context)'에 대한 건축가의 해석으로 표현된다. 오, 너무나도 IT에 익숙한 용어다. IT에게도 이러한 해석을 기대할 아키텍트가 필요할 텐데, 코딩도 할 줄 모르는 아키텍트가 무책임한 제안서와 타성에 젖은 개발자들과 씨름하고 있다.

지나치게 험난한 SI 현장에 있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냐"는 빌더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자. 지나치게 무모한 제안서를 써야만 한다면, 현상 공모에 도면을 내는 건축가의 심정이 되어 보자. 이러한 마음가짐은 업계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빌더의 철학이 담긴 분위기가 자리잡을 때, 너무나도 한국적인 IT, 한국다운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살린 성과물로 세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IT 강국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짠 한 줄의 코드가 다음 시대의 랜드마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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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ama 2005-12-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추천하고 퍼갑니다.
 

커피와 담배
Cellular
킹 아더
월드 오브 투머로우
포가튼
스타워즈2
아라가미
네버랜드를 찾아서 (Finding neverland)
화씨 911
쿵푸 허슬
뉴 폴리스 스토리
큐브 제로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Team America : World Police
주온 미국판
밀리언달러 베이비
씬시티
레이
킨제이보고서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스타워즈 에피소드3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범죄의 재구성
킹덤 오브 헤븐
파이널판타지7: 어드벤트 칠드런
간 큰 가족
스팀보이
The Machinist
거미숲
팻 걸(Fat girl)
혈의 누
호스티지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
아일랜드
우주전쟁
레버레이션(Revelations)
인터프리터 (The Interpreter)
칠검(Seven swords)
랜드 오브 데드 (Land Of The Dead)
달콤한 인생
노보(NOVO)
나이트 워치
듀마
여고괴담4 - 목소리
House of wax
친절한 금자씨
니벨룽겐의 반지
웰컴 투 동막골
크라이 울프
Serenity
POLISSONS ET GALIPETTES

호숫가 살인사건
Stratosphere girl

55편....

예술 영화랑은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여가 차원에서 본 영화들이 대부분...
올해는 썩...  작년, 재작년 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흔해 빠진 액션과 공포물이 꽤 된다.

딱 베스트 7편만 뽑는다면

-화씨 911  : 편집 기술의 승리... 액기스같은 영상 자료와 환상적인 배열.
                      부시의 마지막 말이 압권
                     '속았다면 그건 네탓이다!!!'
-쿵푸 허슬  : 말이 필요 없는 주성치 코미디... 화려한 CG와 쿵후
-씬시티        : 최고의 비주얼과 스타일, 매력적인 캐릭터가 드글드글...
- 레이            :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하고, 인간이 가슴을 흔드는 좋은 느낌..
-The Machinist  :  죽음만큼 외롭고 고독한 인간의 혼란스러움을 극대화 시킨 아주 독특한 '반전 영화'  
-노보                  : 준비된 과거와 이별, 새로움(NOVO)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크라이 울프  : 완성도 높고, 세련된 스릴러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진실 게임'

조명이 가장 좋았던 영화 : 크라이 울프
음향효과가 가장 좋았던 영화 : 크라이 울프, 우주 전쟁
음악이 가장 좋았던 영화 : 레이
배경이 가장 좋았던 영화 : 웰컴 투 동막골,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대사가 가장 깨는 영화     : 범죄의 재구성
가장 특이한 영화               : 커피와 담배
가장 잔인한 영화              :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
가장 웃겼던 영화              : 쿵푸 허슬

가장 짜증난 영화             : Stratosphere girl
가장 빈티나는 영화         : POLISSONS ET GALIPETTES (100년 전이니 ㅡ..ㅡ;;)
껍데기보다 알찬 영화     : 팻 걸
껍데기만 화려한 영화     : 무지 많으나, 파이널판타지7이 대표적..
최고 똥폼상                      : 킹덤 오브 헤븐의 올랜드 블룸.. 꾸엑...
최고 엽기상                      : Team America : World Police
최고 특수효과상              : 스타워즈 시리즈

울트라 수면제상             : Stratosphere girl, 간 큰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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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2-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정말 많이도 보셨군요!
가만있자.. 도대체 내가 본 영화는 몇 개인거야...ㅠ.ㅠ

라주미힌 2005-12-26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는게 워낙 많아서.. ^^;;

페일레스 2005-12-2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쿵푸 허슬 진짜 감동이었어요! 재미없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성치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가는 듯.

산사춘 2005-12-2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쿵후허슬... 명작이죠. 라주미힌님과 페일레스님께 친근감 이빠이... 주성치 영화는 거의 다 소장하고 있어요. 아무리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마태우스 2005-12-2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히 많이 보셨네요. 베스트 중 저랑 겹치는 건 쿵푸허슬 뿐...

로드무비 2005-12-2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와 담배 특이하면서도 좋았죠?
그 까치둥우리 머리 남자들, 보기만 해도 심란한 얼굴......^^

라주미힌 2005-12-26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너무 난해해요.. 황당하면서도 웃기기도 하고 내가 뭐하고 있나, 회의감도 들고 ㅎㅎㅎ

주성치 와방~! 입니다.. ㅎㅎㅎ

마늘빵 2005-12-26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씬시티와 레이 좋았어요. ^^

moonnight 2005-12-2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 중에 제가 본 건 두 편이네요. 화씨911이랑 쿵푸허슬요. ^^ 머시니스트, 참 땡겼던 영환데 아직 못 봤어요.
 

얼굴이 바뀜... 2m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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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신기해용~

산사춘 2005-12-2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신기! 현실에서도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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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5-12-2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현란합니다. 게다가 저 여유있는 태도란... 정녕 고수답습니다.

라주미힌 2005-12-2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산사춘님이 등장하시면 꼭 사진 눌러봐요..
눈이 참 똘망똘망하십니다.. ^^;;

산사춘 2005-12-2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선 그리 보이려고 무지 노력합니다. 평소엔 게게 풀려있어요.
 

YTN과 <조선일보>는 어물쩍 넘어가선 안된다        
[진중권 칼럼] '황우석 조작극' 가담한 언론의 난치병        
진중권(angelus) 기자            


▲ 황우석 교수가 2005년 <사이언스> 논문조작과 관련해 23일 오후 대국민사과와 함께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황우석 박사의 논문은 예상대로 조작으로 드러났다. 황 박사의 성과가 세계적이었으니, 이 사태로 인한 망신도 국제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국민의 90%를 졸지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황우석 해프닝. 21세기에 일어난 이 황당무계한 사태에 우리의 언론들은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언론, 대중을 선동하다

언론의 책임은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단계는 < PD수첩 >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다. 이때만 해도 언론이 대중을 이끌었다. 즉, 황우석 박사가 이룩했다는 '위대한 업적'에 눈이 멀어, 그게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때만 해도 황 박사를 의심할 근거가 없었으니 딱히 언론에 이 부분의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제 막 출발한 줄기세포연구가 당장 척추손상 환자들을 걷게라도 해줄 것인양 거짓 희망을 노래한 책임, 330조니 33조니 하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하면서 이 연구의 가치를 부풀린 책임, 나아가 성과에 눈이 멀어 배아복제나 난자 채취에 따르는 윤리문제를 가볍게 처리한 책임은 오롯이 언론의 몫으로 남는다.

대중이 언론을 이끌어가다


▲ 후폭풍... 11월 26일자 <동아일보> 1면 보도. 11월 22일 < PD수첩 >의 황 교수 윤리 문제에 대한 비판 방송 이후 대중의 분노는 이상하게 황 박사가 아닌 MBC쪽을 향했고, 이 즈음 언론의 대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동아 PDF

두번째 단계는 < PD수첩 >에서 문제를 제기한 이후다. 이때부터는 거꾸로 대중이 언론을 이끌기 시작한다. 난자 채취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고, 황 박사는 그로 인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도 대중의 분노는 이상하게 황 박사가 아닌 MBC쪽을 향했다. 이런 대중의 윤리적 도착증과 부조리한 행태를 자제시키기는커녕 언론은 이 부조리한 분노에 편승하기에 바빴다.

이미 논문의 진위에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언론이라면 중립적 위치에서 누가 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가려야 했다. 언론이 제 임무를 방기하고 일방적으로 황 박사의 편을 드는 사이,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은 '브릭'의 젊은 과학도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론화한 매체는 <프레시안>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인터넷 매체로는 <오마이뉴스>와 <업코리아> 정도가 비교적 공정성을 유지했고, 나머지 매체들은 온과 오프의 구별 없이 MBC의 살을 뜯어먹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일보>를 비롯한 마이너 신문들의 보도도 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KBS와 SBS 역시 진실보다는 MBC 때리기를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거국적으로 반성들 해야 한다.

YTN의 '공작'


▲ 지난 4일 YTN의 김선종 연구원 인터뷰 보도 화면. ⓒ YTN TV 촬영

단연 고약했던 것은 YTN과 조선일보. 물론 YTN에서 MBC의 취재윤리 위반을 보도한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YTN의 취재 경위에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수상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김선종씨는 YTN 인터뷰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진술번복(?) 역시 황 박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밝혔다. 한마디로 YTN이야말로 황 박사와 손잡고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강압 취재를 한 셈이다.

YTN의 것은 '보도'가 아니었다. 보도를 하려 했다면, 김선종씨가 < PD수첩 >에서 한 발언의 진위를 꼼꼼히 따져봤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 PD수첩 >의 취재윤리 위반만 부각시켜 그것으로써 애초의 인터뷰에 담긴 실체적 진실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외려 덮으려 드는 것. 이것도 '보도'라 할 수 있을까?

조선일보의 '선동'

<조선일보>는 좀 다른 맥락에서 고약했다. 그들은 < PD수첩 >에 쏟아지는 분노의 파도를 타고 랄랄라 즐겁게 이념공세의 서핑을 했고, 그 결과 과학논문의 진위 논란이 졸지에 좌우의 이념대립이 되어 버렸다. <조선일보>의 공세는 MBC에 그치지 않았다. <한겨레>, <오마이뉴스>는 물론이고, 애먼 민주노동당과 과거의 운동권, 나아가 좌파 일반까지 표적으로 삼았다.

YTN과 <조선일보>의 것은 '보도'가 아니었다. YTN이 '공작'을 했다면, <조선일보>는 '선동'을 했다. 군중의 폭력에 영합한 다른 언론사도 책임이 있겠지만, 적어도 YTN과 <조선일보>만은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두 매체는 국민을 기만하고, 이견을 가진 시민들을 음해한 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연구를 못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연구를 못 하겠다." 몇 달 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민주노동당에서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방해하고 있단다. 알고 보니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미 있는 자료를 비공개로 열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고 한다. 이 정당한 요구를 <조선일보>는 '황우석 때리기'로 규정했다.

그때 <조선일보>의 매도가 없었다면, 황 박사에게 들러붙은 의혹들은 더 일찍 밝혀졌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제기하는 의혹이 마음에 안들면, 취재를 통해 그 의혹의 진위를 밝힐 일. 하지만 <조선일보>는 해야 할 취재는 하지 않고 황우석 박사의 말만 옮겨 적었다. 취재를 안 한 것도 문제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밝히려는 남의 노력까지 방해했다는 점이다.

PD는 PD다?


▲ < PD수첩 > 사냥... < PD수첩 >을 강하게 비난하는 12월 6일자 <조선일보> A3면 보도. 하지만 결국 < PD수첩 >의 보도는 진실로 밝혀졌다. ⓒ 조선 PDF

재미있는 것은 한학수 PD의 과거 전력을 들먹인 부분이다. 과거에 한 PD가 좌파 운동권의 PD계열에 속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학생 시절에 운동을 한 것과 제보를 받아 취재에 나선 것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조선일보>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에 운동권이었던 민주노동당과 연결되어 있다며, 황우석을 내세워 좌파와 진보 사냥에 나섰다.

'황교수 물고 늘어지고 PD 수첩 편들고... 민노당 도대체 왜?'라는 12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민노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이 황 교수 문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좌파들의 "이념"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문의 진위를 가리는 과학의 일상은 졸지에 이념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김대중 칼럼은 <조선일보>의 정치적 리비도다. 12월 6일자 칼럼의 첫 머리. "'황우석과 MBC PD수첩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이상한 현상을 목도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좌파 매체와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MBC PD수첩의 보도를 옹호하거나 더 나아가 '황우석 깎아내리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공격은 이제 진보매체로까지 확장된다. 그는 <한겨레>,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프레시안>을 차례로 도마에 올린다.

왜 그럴까? 물론 진보성향의 매체들을 씨잡아 매도함으로써 다가올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유리한 매체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속셈이다. 더 황당한 것은 김대중씨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대목. "이런 것들이 '황우석 사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왜 제 입으로도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 짓을 하는가?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사냥


▲ 선동... 12월 6일자 <조선일보> A34면 '김대중 칼럼'. 이 글에서 김대중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좌파 매체와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황우석 깎아내리기'에 동조했다"고 비난했다. ⓒ 조선 PDF

이 정도야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 칼럼의 제목.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 사냥'. '마녀사냥'이란 다수가 소수에게 행하는 부당한 탄압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MBC가 보통사람들을 사냥한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보통사람들이 떼지어 MBC를 사냥하지 않았던가. 보통사람들에 의해 방송사의 광고가 모두 끊어지는 사태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었고, 세상 어느 곳에서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 설사 MBC가 제기한 의혹이 그릇된 것으로 밝혀져도 집단적으로 광고까지 중단시키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게다가 군중들이 PD의 가족사항을 게시판에 공개하고,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쫓아가 폭언을 퍼붓고 공공연히 협박까지 가하는 게 어디 정상적인 상황인가? 그런데도 마녀사냥을 당한 것은 대중이란다. 이게 바로 <조선일보> 특유의 도착적 성취향이다.

'소폭' 지원하면서 '대폭' 지원도 하고


▲ 이랬던 조선일보가... 12월 7일자 <조선일보> A2면 보도. 이 신문은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에 정부는 올해에만 30억원을 지원했다"며 "예산만 소폭 지원"했다고 비판했다. ⓒ 조선 PDF        

▲ 이렇게 변했다... 12월 19일자 <조선일보> A5면 보도. 불과 12일전인 7일 "예산만 소폭 지원"했다고 비판했던 이 신문은 이날 기사에서는 "황 교수의 연구는 정부예산 400억원이 지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며 황우석 사태에 대한 '정부책임론'을 들고나왔다. ⓒ 조선 PDF

<조선일보>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역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슬쩍 도망갈 때. 많은 이들이 <조선일보>의 도주로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슬쩍 발을 빼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뒤집어씌우려 들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런 행태를 보이리라는 것은 종을 치면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의 행태만큼 명증한 사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우석이 잘 나갈 때는 야박한 정부가 황박사의 연구를 "소폭 지원"했다고 불평하더니, 황우석이 무너지는 듯하자 갑자기 멍청한 정부가 황우석을 "대폭 지원"해왔다고 말한다. '소폭'과 '대폭'은 논리적으로 서로 배척한다. 어떻게 소폭 지원이 동시에 대폭 지원이 된단 말인가? 논리를 초월한 이 심오함이야말로 <조선일보>의 두개골을 채우는 생명의 신비다.

줄기세포도 포기하다

언젠가 줄기세포의 비밀은 해명될지 모르나, A와 ~A가 동시에 성립하는 <조선일보>의 두개골 속 사정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남을 것이다. 언젠가 황우석 박사가 무덤에서 일어나 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하면, 이 분들의 뇌부터 치료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줄기세포가 환자 맞춤형이라니, 고민이다. 얼빠진 환자의 머리를 그대로 복제한 맞춤형 머리라고 어디 기능이 온전하겠는가.

결국 황 박사의 창작 시나리오대로 노성일 박사가 김선종 연구원을 시켜 미즈메디에서 확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수정란 줄기세포로 바꿔치기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에는 면역거부 반응이 일어난다고 하니,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줄기세포가 모든 난치병을 치료해도, 이성과 합리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조선일보>의 뇌만큼은 영원히 난치병으로 남을 것인가?

사과가 익어가는 방식


▲ 용서? 사과는? 12월 24일자 <중앙일보> 31면 '중앙 포럼'. 이 글에서 이연홍 논설위원은 난데없이 "좌도 우를 용서하세요, 우도 좌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한다. ⓒ 중앙 PDF

몇몇 언론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겸허한 반성을 했다. 제일 먼저 <헤럴드경제>가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사과를 했다. 기계적 균형을 유지했던 <경향신문>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반성했다. 방송사 중에서는 SBS가 국민을 오도한 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 황우석팀의 진실은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YTN만은 아직도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계속 뺀질거린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중·동은 사과를 하는 방식도 변태적이다. 먼저 <조선일보>를 보자. <조선일보>는 스스로 반성을 하는 대신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이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소유하고 있는 이화여대 유세경 교수를 내세웠다. 진실의 규명을 외면한 경마식 보도행태 등, 그의 지적에는 틀린 말이 없다. 하지만 유 교수는 정작 <조선일보>가 저지른 범죄적 행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황우석을 내세워 군중을 선동하고 좌파 사냥을 한 점. 이걸 뺀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중앙일보>의 변명은 실소를 자아낸다. 중앙포럼이라는 데에 실린 이연홍 칼럼에서 몇 구절 인용해 보자. "황우석도 노성일을 용서하세요. 노성일도 황우석을 용서하세요. … 좌도 우를 용서하세요. 우도 좌를 용서하세요. 그리고 용서받으세요. 좌가 어디 있고 우가 어디 있나요. 우리 속의 하나잖아요." 이제 와서 우리가 '하나'란다. 이거 읽고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여기에 대한 코멘트는 딱 한 줄이다. '이연홍씨, 웃기고 자빠지셨어요.'

황우석에게 준 인촌상을 슬쩍 취소하고, 부랴부랴 어린이용 황우석 위인전도 수거하고 있다는 <동아일보>. 아주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의 반성문 하나 올리고 대충 넘어갈 태세다. 정부도 잘못하고, 과학계도 잘못하고, 국민도 잘못하고, 언론도 잘못하는 와중에 <동아일보>라고 조금 잘못을 안 할 수는 없었다는 식이다. 여전히 "원천기술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황 박사의 후속논문은 <동아 사이언스>에서 실어주는 게 어떨까?         

2005-12-24 23:27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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