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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평점 :
진시황은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자들을 처형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자들의 구호 중 하나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은 권력과 ‘자신들만의 역사’로 늘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자신과 선조들의 업적들을 나열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현재와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한반도의 종속성을 내세운 지배의식을 구조화 시켜왔듯이 조작과 은폐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늘 발견할 수 있는 흔한 현상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식민사관의 잔재는 그 중 하나이며, 우리의 역사를 황폐화 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역사의 의미는 현재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인식의 재발견이며, 미래를 향한 준비된 과정일 것이다. 한반도(이 책에서 말하는 ‘한민족’) 문명교류의 역사를 되짚어 본 이 책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서양에 의해 규정된 오류를 수정하고, 한국 속에서 발견한 세계성이 가진 힘과 문명의 융합과 변이, 창발 과정, 그것의 영향과 결과를 담았다.
저자에 의하면 선사시대 때부터 조선까지 우리의 조상은 이슬람, 로마, 동남아, 아메리카 모든 대륙의 문명과 문화를 진취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사회였다고 한다. 벼, 청동기, 금속활자, 고인돌, 무역, 작물, 조각상에서 나타나는 이국적인 인물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책의 모양새를 언뜻 보면 연대순과 풍부한 도판이 국사 교과서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쉬운 설명과 내용들이 신문에 실렸던 글답게 대중적이다. 게다가 저자의 ‘입담’이 적잖은 즐거움을 준다.
‘수나라는 건국 초부터 분별없이 고구려를 적대시했지만, 600여 년의 경륜을 쌓은 고구려 앞에서는 한낱 애송이의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중국에 귀속 될 수 밖에 없다는 단세포적인 논리다.’, ‘우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이다.’
동북공정이 한참 사회적 이슈였을 때 정수일 교수의 격앙된 논조가 느껴진다.
신문에 실리는 글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시사성이 개입된 고구려, 발해사를 다루는 부분은 이 책 전체의 흐름에 적당하지 않다. 민족주의로 범벅이 된 텍스트와 고구려사 왜곡, 영토상의 제약조건에 의한 불안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논리가 심하게 거슬린다.
이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민족주의는 이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세계성’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계성이란 무엇일까?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인가? 고선지, 장보고 같이 국제적으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세계인인가? 동서양, 국가간의 문물 교류? 물론 이 책에서 밝히는 세계성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의 공유, 타국-타인-타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는데, 그것의 밑바탕은 얼마나 열린 사회인가, 대중의 인식과 자세는 얼마나 열려있는가에 있다.
민족주의 역사관은 영토와 국가의 위상에 대한 집착이자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독 행위이다. 저자는 ’어디서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254p 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세계 최초’, ‘우리의 세계 최고’, ‘우리의 가장 우수한’처럼 우리의 위상을 강조한다. 또한 ’순결성과 정조관념이 유달리 강한 고려여인들에게 원나라에 끌려가는 공녀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순제의 정비가 된 기황후처럼 일세를 풍미한 여걸도 있었다.’ 130p
원나라에 끌려가 순결성, 민족의 혈통성을 잃는 여인들에 대한 치욕은 그곳의 지배계층이 되면서부터 겨레의 위상을 날리는 ‘여걸’이 된다. 20세기 민족주의로 바라본 저자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복잡한 계산 방식이다. 불리한 것, 가령 사대주의에 의한 문물의 수용은 국제정치에 현명하게 따르는 것이고, 우리의 것들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뛰어남에 있다는 공식.
이 책의 내용 중에는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될 정도로 우리는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 하지만, 일본의 기술의 후진성에 대한 멸시가 깔려 있다. 우리의 우월함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타’의 열등함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서 느끼는 ‘우월감’은 그들 국가의 ‘열등함’에 있듯이 말이다. 민족의 우월성과 독자성을 늘 강조하고, 영웅-지배계층의 신화적 해석을 통하여 ‘겨레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요소로 이용하고 있으면서 과연 ‘세계’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을 다르게 생각해본다.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민족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 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에서는 동질성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자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58p
이 글을 한 단어로 함축하면 ‘획일화’이다. 의식 구조, 가치관, 소양과 행동 양식들을 철저하게 뜯어 고쳐서 그 문화에 ‘용해’되지 않으면 들어 올 수 없는 ‘철저하게 닫힌 사회’라고 해석을 하면 비약일까?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갖기 무척이나 어려운 것을 보면, 이것도 ‘전통’일 수도 있겠다. 한마디로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면 이미 ‘한국인’이다.
국가와 영토에 닫혀있으면 세계를 말할 수 없고,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묶여 있는 개인은 세계인이 될 수 없다.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만을 그것이 세계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우승열패의 신화’의 연장선일 뿐이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보여주었던 겨레의 위상과 긍지의 회복’이 아닌 ‘미래를 위한 과거의 문명교류를 통하여 성찰할 수 있는 세계성’이었다. 반은 발견했고, 반은 버렸다. 그리고 교류란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주체’가 핵심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주체성과 정체성을 계속 강조함으로써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다시 쓰여진다면 ‘관계’가 중심이 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한국 속의 세계란, 겨레의 위상을 되찾는 일대의 역사다.’ 247p
그래서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학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