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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군요. 이거 퍼가요.

라주미힌 2006-02-1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스모그 낀 하늘만 보다보니.. 너무 신기합니다. ㅎㅎㅎ
 
 전출처 : 마늘빵 > 결혼 적령기 테스트

http://japan.daum.net/transweb/jtk.cgi?trn=1&frmbar=0&url=http%3A%2F%2Fnandemo.with2.net%2Fmarry.html

한글 번역이 매우 어색합니다. 알아서 읽으셔야 하는 부분이 좀 있는데 의미 전달은 되는 듯.
 
 
 
 
 
라즈미힌씨의 결혼 적령기는···34세입니다

그리고 불과5년 후군요.


각 분류의 비율·정도···
분류명 랭크 그래프
연애 성공율 B 62.6%
연애 지배율 D 29.7%
연애 겁장이도 D 32.2%


당신의 이상에 가장 가까

운 연예인은···


야마구치 모모에
씨입니다.
(결코 조화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주의해 주십시오)


각 분류의 설명···
연애 성공율B랭크
당신의 연애는 상당한 확률로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단조로운 연애가 되기 쉽기 때문에 나날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합시다.

연애 지배율D랭크
당신의 연애의 스타일은 상대에게 맡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가끔씩은 스스로 여러가지 기획을 세워 봅시다!

연애 겁장이도D랭크
연애에 대해서 그다지 겁장이로 안 되는 타입이군요.사양과 겁장이임은 다른 것이므로 착각 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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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지나지 않아서요^^ 부디 성공하시길~

라주미힌 2006-02-1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헉.. ^^;

마늘빵 2006-02-1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라주미힌 2006-02-1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헉... 반사~!!!

stella.K 2006-02-1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라주미힌님 나이가? 음...독신으로 평생을 살 것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결혼하시는 게 난데...저 나이도 너무 늦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빨리 좋은 짝 만나시길...!^^
 

 

중국에겐 한국의 ‘냄새’가 난다

구더기가 들끓는 장독 같은 중국의 현실을 고발하는 <추악한 중국인>
인간관계가 법을 지배하고 내분 일삼는 모습에서 한국을 떠올린다

▣ 장정일/ 소설가

중국인은 단결할 줄 모르고 내분을 일삼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다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또 법의 원리가 적용돼야 할 곳에서 인간관계가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가졌으며, 중국인이 자랑하는 인정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 사이에서나 작동되지, 낯선 사람들에게는 매몰찬 배제의 원리가 된다. 영성이 발달하지 못하고 사회적 책임이 방기된 중국에서 ‘바른 길’이란 부귀공명을 의미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는 행위는 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나라에서 민주란 “너는 민(民), 나는 주(主)”를 의미한다.

장제스 모독으로 9년간 옥살이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보양(柏楊)의 <추악한 중국인>(창해·2005)은 중국 문화에서 배울 점은 하나도 없으며, 중국이 곧 망할 듯이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예거된 중국인의 단점은 우리의 추악상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한국인을 따라잡으려면 “10만 광년”이나 걸린다는 글귀는 빨리 잊어야 한다. 이 책을 보며 위안하는 한국인이 많을수록 21세기는 고단해진다. 오히려 ‘추악한 중국인’을 ‘추악한 한국인’으로 바꾸어 읽으면 얻는 게 생긴다. 중국인은 한국인과 같이 여러 종류의 장(醬)을 담가 먹는데, 보양은 뭐든 오래되고 케케묵은 것일수록 좋다고 믿는 중국인의 의식을 ‘장독 문화’라고 부르면서, 그 원인을 유교사상에서 찾는다. 정치와 조상숭배를 결합한 유교가 중국을 지배하면서부터, 중국 문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구더기가 들끓는 장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익이 열 배를 넘지 않으면 변법할 수 없다”는 장독 문화의 썩은 냄새를 우리는 쉬지 않고 맡는다.

1985년 대만에서 초간된 이 책은 양안(兩岸)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대만과 중국에서 똑같은 책이 열화같이 읽히게 된 맥락도 흥미롭지만, 보양이라는 인물도 만만치 않게 극적이다. 장제스 숭배자였던 보양은 18살 때 국민당에 입당한 뒤 대륙이 공산당 손에 넘어가자 대만에 정착했다. 교편을 잡고 작가 생활을 겸하던 그는 언론인으로 날카로운 사회 비판 칼럼을 쓰기도 한다. 그러던 1968년, 한 신문에 미국 만화 <뽀빠이>를 연재 번역하면서 장제스 정권을 빗댄 일로 ‘간첩죄’와 ‘국기문란죄’ 등의 죄명을 덮어쓰고 12년형을 선고받는다. 화소도에서 9년간 옥살이를 하며 완성한 책이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맨얼굴의 중국사>(창해·2005).

우리나라에도 번역되고 영화로도 소개된 보양의 소설 <이역>(시대문학사·1991)은, 1962년 대만에서 출간돼 100만 부나 팔렸다. 대륙이 공산화되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한 뒤에도, 본토 탈환을 위해 윈난성에서 항전하던 부대가 있었다. 마지막엔 공산군에게 쫓겨 윈난성과 가까운 버마·타이·라오스 접경지대에 은거하게 된 그들은, 그곳에 본토 탈환의 거점을 세우고자 했다. 대만 정부의 외면 속에서 11년씩이나 공산군과 싸우고, 국경을 침해받았던 3국 정부군의 토벌에도 맞섰던 ‘잔여분자’의 처절한 투쟁을 기록한 <이역>의 외양은 반공 성전. 하지만 실제 인물의 수기를 옮겨놓은 이 작품에는, 장제스 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생생한 육성이 깔려 있었다. 즉, 잔여분자들이 대륙과 타국에서 싸우고 있을 때, 재물욕과 권세욕에 취한 고급 장교와 권력자들은 모조리 대만행 비행기를 타고 달아났으며 그것이 현 정권이라는 것. 보양의 독방은 이때 예약됐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날조가 오리엔탈리즘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에 대한 동양의 날조를 일컫는다. <옥시덴탈리즘>(강·2001)이란 책을 쓴 샤오메이 천은 그것을 ‘관변’과 ‘반관변’으로 나누었다. 관변 옥시덴탈리즘은 국민을 지도하는 정권이나 체제의 필요에 따라 서구를 부정적으로 채색한다. 서구 민주주의를 방임과 비효율이라고 명명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시하거나(박정희), 서구 공산주의를 모조리 수정주의로 폄하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우는(김일성) 작업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서구의 합리주의와 민주주의를 이상화하면서 자국의 정치적 후진성을 비판하는 경우가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이다.

아편전쟁이 1천 년이나 앞서 일어나 “서방의 현대화된 문명이 낡은 중국으로 좀더 일찍 치고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서구의 인권·법치·자유·민주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책은, 확실한 반관변 옥시덴탈리즘 텍스트다. 80년대 중반, 청년·학생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악몽을 진단하는 교서 노릇을 수행했던 이 책은 한때 중국에서 금서가 되었으나, 오랫동안의 묵인을 지나 2004년부터는 정식 출간이 허용됐다. 중국 공산당의 맷집이 이 정도는 수용할 정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반관변 옥시덴탈리즘마저 중국 국민의 자아를 교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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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최대·최초, 행복하십니까?

[강준만의 세상읽기]

초고층 건물에 집착하고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인격을 재는 한국인…좌파 지식인들도 거대담론 증후군… ‘지속가능한 우쭐’을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동양 최고’ ‘동양 최대’ ‘동양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 등과 같은 ‘최고병’ ‘최대병’ ‘최초병’을 앓아왔다. 역사적으로 너무 당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들은 최고·최대·최초주의에 한이 맺혔다. 최고·최대·최초를 향해 목숨 걸고 질주한다. 황우석 사건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남 이야기인 척하진 말자. 그거 우리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이건희 회장

최고·최대·최초주의가 한국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컨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 빌딩을 가리키는 마천루를 만드는 경쟁은 서양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1932년 뉴욕에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만들어놓고 유럽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거 세계 최고다. 너네 이런 것 없지?” 이에 열받은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는 뉴욕 사람에게선 시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기네 시정(市政)에 대해서도 항상 그런 자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썼다.

자부심에 집착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89년 제13차 평양청년축전을 과도한 비용을 낭비해가면서 치렀는데 이때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에 세우려다 중단한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그런 과시 사업의 하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공사가 중단된 105층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지난해 9월12일 서울 신라호텔에 열린 삼성전자 2005 반도체 총괄 발표회에서 황창규 사장이 50나노 기술을 이용한 16기가 반도체의 '세계최초' 성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두바이다. 아랍에미리트에 소속된, 인구 120만 명의 작은 토후국이다.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길이 없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국가 홍보 전략인 셈이다.

두바이의 그런 집착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실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은 실질을 말하기엔 제법 큰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은 여전히 자부심과 자존심에 집착한다. 그래서 초고층 건물을 짓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애국심이 강한 소설가 이문열은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물로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기도 하고 경제성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서울도 지금쯤은 세계가 돌아볼 만한 초고층 건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삼성 회장 이건희다. 이건희는 지금의 타워팰리스 자리에 원래 102층짜리 초대형 사옥을 지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9층짜리 타워팰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이건희는 최고·최대·최초주의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고·최대·최초’라는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와 삼성의 오빠부대 요원들도 ‘반도체 세계 1위’ ‘LCD 세계 1위’ ‘휴대폰 세계 3위’ 등과 같은 순위를 들먹이기에 바쁘다.

한국 민주주의도 과도하게 폄하?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 받고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선수는 한국인밖에 없다. 이것 하나로 다 정리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이 조만간 치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많은 걸 이루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자부심 또는 자존감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한국이 그만큼 형편없는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비교 대상에 문제가 있다. 신문도 좋고 학자들의 논문도 좋다. 국가 간 비교 사례를 보라. 예외 없이 선진국과의 비교 일색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와 비교하는 법은 없다. 비교 대상은 죽으나 사나 미국, 일본, 유럽이다.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공되는 비교 연구 자료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늘 비교만 했다 하면 선진국과 비교하는 버릇은 빨리빨리 정신에 따른 과욕일까?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비교 대상이 돼 과도하게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다.


△ 황우석 사태는 한국인의 최초, 최대병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지난해 5월 런던 황우석 교수와 피츠버그대 의대 제럴드 섀튼 교수의 기자회견 모습. (사진/ 연합)

강정인은 ‘서구 민주화 경험에 비춰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는 생각하지 않고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걸 비판하면서 “한국의 현실은 비록 급진주의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울지언정 참을성 많은 역사가의 눈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구 국가들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로 성숙하는 데 적어도 200년 이상 걸렸다”면서 “지난 50년간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를 자기 비하적으로 ‘일탈’ ‘파행’ ‘왜곡’으로 보는 시각을 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국민적 자기 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존감 투쟁에 일로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면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은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즈의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크기와 인구 크기는 세계 대비 각각 0.078%에 0.73%다. 이걸 모른 척하고 넘어갈 한국인이 아니다.

큰 사이즈에 민감, 얼굴 크기만 예외

한국인의 자존감을 위한 투쟁은 꼭 밖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내부적 생성 요인마저 처음엔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화된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는 뜻이다.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내적인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밖과의 관계에선 늘 사이즈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한국인은 사이즈에 대단히 민감한 민족이다. 꼭 크다고 성능까지 좋은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걸 크게 늘리기 위해 별일을 다 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부터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개조하는 걸 무척 사랑한다. 그래도 얼굴 크기는 작을수록 좋다고 보는 게 기특하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크기로 인격을 재거나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됐다. 특히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큰 차를 좋아하고 경소형차를 천대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티코를 조롱하는 개그가 유행했던 걸 생각해보라. 티코의 바퀴가 도로 위의 껌에 붙어 꼼짝도 안 하더라는 둥,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해 어찌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때마침 거세게 분 바람에 날아갔기 때문이라는 둥, 자기 승용차도 없는 사람들까지 주제를 모르고 그걸 개그랍시고 해대며 키득거리곤 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차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총 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10년 전엔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볼보 승용차와 프레스토 승용차가 추월 경쟁을 벌이다 볼보 승용차에 탄 사람이 공기총을 쏴 프레스토 승용차를 탄 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왜 볼보가 프레스토를 향해 총을 쐈겠는지 각자 생각해보시라.

사정이 그와 같으니 경소형차 사용 비중이 높을 리 없다. 일본이 20%를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은 4.5%로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교체주기도 엄청나게 빠르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교체주기와 비교해 한국은 2배 이상 빠르다.


△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무시, 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은 경소형차 비중이 일본에 비해 아주 낮다. 강남 거리를 대형 외제차들이 달리고 있다. (사진/ 류우종 기자)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전국의 자동차 번호판이 통일되면서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마저 차별의 요인이다.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서울 강남구 번호판을 달고 다니면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해에 신규로 강남구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번호판 중 강남 비거주자 비율이 절반을 웃돌았었다.

“큰 것은 아름답다”는 신념은 지식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거대담론증’이다. 한양대 교수 임지현은 “남한 지성사의 파국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세련된 자유주의와의 공개된 논쟁 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통’과 ‘최대주의’의 장막 속에 안주했다는 점이다”며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거대담론 지향성은 좌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대담론이란 게 과연 무언가? 거대한 걸 이야기하는 걸 거대담론이라고 그러는가? 꼭 그렇진 않다. 실천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예컨대, 바닥이 더러우면 우선 걸레질부터 하고 찾아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걸레질할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집의 구조에서부터 창문과 바닥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대담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모든 미시적 분석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크게 봐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자기 성찰과 교정은 불가능해진다. 자기 성찰과 교정을 위한 시도는 크게 봐서 나쁜 편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한 거대담론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고·최대·최초주의와 거대담론 증후군은 ‘우쭐’의 산물일 수 있다. ‘우쭐댄다’함은 ‘남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서 나타내는 행동’을 말한다. 잘난 척한다, 젠체한다, 폼 잡는다, 목에 힘준다, 거들먹댄다, 으스댄다, 뻐긴다 등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최상진은 한국인에겐 우쭐대는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고 다니며 외국 유학생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실속 있는 대학보다 선호하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관계없이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와 유관한 현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같은 발전도상국을 여행할 때, 돈을 잘 쓰며 ‘우쭐’대는 행세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경제 선진국인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기죽지 않고 활보하면서, ‘미국 별거 없어’라고 자기들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가 살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쭐댄다고 볼 수 있다.”

황우석에 던진 돌을 자신에게!

물론 우쭐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인들이 유일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쭐대더라도 ‘지속 가능한 우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면 되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인에겐 그게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우쭐’은 영원하다.

‘우쭐’은 왕성한 삶의 투쟁 의욕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한국인의 ‘최고·최대·최초’ 투쟁에 돌을 던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밖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는 자존감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볼 때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자존감’을 위해 황우석에게 던질 돌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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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가요. ^^ 꾹.

2006-02-12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