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순위 그룹>

이영애, 김민정, 제시카 알바, 나

<2순위 그룹>

마태우스 ㅎㅎㅎㅎ (이벤트 결과에 ... 헴)

<3순위 그룹>

부시, 김정일, 노무현, 황우석  (꼴통 4인방)

<4순위 그룹>

그때 그때 달라요.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영엄마 2006-02-1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녀는 관심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지요? =3=3=3

이매지 2006-02-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2순위는 단 한명이라니 ㅋㅋ 마태님의 위력인가요? ㅋ

라주미힌 2006-02-1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ㅎㅎㅎ

마늘빵 2006-02-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민정 좋아요.

stella.K 2006-02-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4순위 그룹쯤 끼어 있을라나? ㅎㅎㅎ
 
 전출처 : 마늘빵 > 내가 관심있어 하는 이들

<1순위 그룹>

김두식 - <헌법의 풍경> 저자이다.

김상봉 - 학벌반대모임을 주도하며 <학벌사회>라는 책을 내기도, 최근에는 현 도덕교육의 파시즘적 성격을 비판하며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란 책을 내기도 한 철학자.

조국 -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책을 낸 법학자. 동국대 교수였다가 서울대 교수로 옮긴지 좀 됐다.

고종석 -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한국일보 편집위원이었다가 지금은 시인의 풍경(?)인가 하는 글만 연재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대표작으로 <국어의 풍경들> <자유의 무늬> <서얼단상> <엘리야의 재야> 등

탁석산 - 철학자. 자기딴에 대학 1학년 때 조동일과 맞짱 떴다는 철학자. 조동일도 그렇게 생각해줄지는 의문. <철학 읽어주는 남자>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등

박홍규 - 전천후 지식인. 법학교수이지만 그보다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더 알려져있다. 강준만이 책내기를 책읽듯 한다면, 박홍규 교수는 번역하기를 책읽듯 한다.

김용석 - 그레고리안대학 철학교수로 있다가 현재 아마도 영산대 교양학부 교수로 있지? 철학의 대중화를 개척하는 분. 사회적 발언은 하지 않으나 본래 이 분의 성향이 그다지 논쟁적인 발언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

진중권 - 진보진영에서도, 보수진영에서도 싫어하는 왕따 지식인. 미학철학자로서도, 비판적 지식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대표적인 지식인.

 

<2순위 그룹>

임지현, 김규항,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3순위 그룹>

신영복, 김호기, 노혜경, 김정란, 이정우, 이윤기, 김훈, 김우창, 김상환, 강유원, 권혁범, 문부식, 손호철, 조혜정, 조희연, 김동춘, 송두율, 강정구, 박이문, 고미숙, 손석춘, 김용옥, 복거일, 장정일

 

<4순위 그룹>

이문열, 조동일, 조갑제

 

 

* 분류 기준 : 내 맘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

006년 1월은 PC 바이러스가 등장한 지 딱 20주년이 되는 해다. 컴퓨터 바이러스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 1972년. 데이비드 제럴드의 공상과학소설 'When Harlie was One'에서 "한 과학자가 다른 컴퓨터에 계속 자신을 복제, 컴퓨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서 점차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장치를 배포한다"는 내용으로 바이러스 개념을 완성시켰다.

1986년에는 사상 첫 컴퓨터 바이러스인 '브레인'이 만들어졌다. 파키스탄의 컴퓨터 수리 전문가이자 프로그래머인 알비 형제는 자신들이 애써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불법 복제되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브레인 바이러스를 제작, 불법 복제 프로그램의 설치 디스켓을 통해 유포시킨 것이다.

안철수연구소 초창기 시절 분석을 위해 바이러스를 디스켓에 담아두었다. 개중에는 20년 가까이 된 디스켓도 있다고
브레인 바이러스는 국가대표 바이러스 백신 'V3'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이러스 전파가 지금과 같이 빠르지 않았던 도스 시절이었기에 브레인은 2년이 지난 88년도가 되어서야 국내에서 퍼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의대생이었던 안철수 박사는 후배와 자신의 컴퓨터에 브레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발견하고 백신 프로그램 V3(당시 '백신' 이름으로 개발)를 개발한 것이다.

이후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해당 바이러스의 위력을 무효화시키는 백신 엔진이 개발됨을 반복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브레인 바이러스를 통해 현실이 된 후 20년이 흐른 최근에는 바이러스와 웜, 트로이목마 등의 악성코드는 사이버 세상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가 됐고 백신은 컴퓨터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솔루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이러스를 포함한 악성코드는 초기 도스용부터 시작해 윈도우, 네트워크, 인터넷으로 진화되어 확산/피해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초창기에는 단순히 플로피디스크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됐지만 PC통신, 인터넷, E-메일, 네트워크, 메신저 순으로 유포 경로가 변하면서 확산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것이다.

최근에 떠도는 악성 코드는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정보를 빼내는 것은 물론, 네트워크 전체를 마비시킴으로써 막대한 금전적 피해를 입힌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안철수연구소 설립 초기, 당시 대표였던 안철수 박사에게 온 고객의 바이러스 치료 요청 편지
특히 지난 99년에는 대량 E-메일을 통해 전파되는 원조격 웜인 '멜리사'가 등장했고 이후 네트워크 공격이라는 새로운 공격 형태를 보인 님다, 블래스터, 소빅, 베이글 등 신/변종 웜이 쉴새없이 쏟아졌으며 이로 인한 피해도 큰 문제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모바일 기기용 악성코드도 출현해 휴대폰도 바이러스로부터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 됐다.

지난 1999년 4월, 하드디스크의 바이오스를 손상시키고 각종 파일을 삭제하는 CIH 바이러스 때문에 보안업체와 컴퓨터 수리업체를 찾는 사람이 줄을 이었으며 2003년 초에는 1.25 인터넷 대란을 일으킨 SQL_Overflow(일명 '슬래머') 웜으로 국가 인터넷망이 마비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첫 등장 후 20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 바이러스는 안전한 사이버 세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으로 IT 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컴퓨터 이용자가 바이러스의 완전 소멸을 소망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요 악성코드와 피해 사례
■ 86년. 파키스탄에서 첫 컴퓨터 바이러스인 브레인 바이러스 발견.

■ 87년. 예루살렘 대학에서 13일의 금요일에 맞춰 실행되는 예루살렘 바이러스가 발견. 후에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초창기 바이러스는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플로피디스크를 통해 전파됐기 때문에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 1999년. 4월 26일에 활동하던 CIH 바이러스가 하드디스크 바이오스를 손상시키고 파일을 삭제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일으키며 컴퓨터 이용자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CIH바이러스는 1998년 6월 이미 발견된 바이러스고 발견 직후 해당 백신이 나와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백신을 사용하지 않아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외에도 워드 문서에 첨부돼 메일로 자동 발송되는 멜리사 바이러스가 이 해에 등장했다.

■ 2000년. 아웃룩 주소로 자동 발송되어 JPG, DOC 등의 파일 손상을 일으키는 러브레터(Loveletter) 웜, 아웃룩 주소로 자동 발송되어 감염되면 눈 모양의 아이콘이 생기는 나비다드(Navidad) 웜등이 등장했다.

■ 2001년. 아웃룩 주소로 자동 발송되어 EXE 파일을 손상시키는 님다(Nimda) 웜, 자체 SMTP를 이용해 메일로 발송되며 C드라이브 파일과 폴더를 삭제하는 서캠(Sircam) 웜 등이 위협을 가했다.

■ 2003년. 1. 25 인터넷 대란을 일으킨 SQL_Overflow(일명 슬래머) 웜이 등장, 보안에 신경 쓰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8월에는 1, 2분 간격으로 컴퓨터를 강제 재부팅 시켜서 큰 피해를 발생시켰던 블래스터 웜(Blaster worm), 웰치아 웜(Welchia worm), 엄청난 양의 스팸 메일을 집중 발송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소빅.F 웜(Sobig.F worm) 등 1주일만에 엄청난 영향력의 3개의 웜이 대 공습을 보였다.

■ 2004년. 마이둠 웜(Mydoom)은 1월 26일 처음 등장해 역대 최고의 전파속도로 세계적으로 100만대 이상의 PC를 감염시켰다. 나쁜 운명, 파멸, 최후의 심판이라는 이름(doom)의 사전적 의미를 실감케하는 피해였다. 이외에도 넷스카이(Netsky), 베이글(Bagle), 새서(Sasser) 웜 등이 지속적으로 변종을 등장시키며 악명을 떨쳤다. 한편 이 해 6월에는 자기 복제와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는 최초의 웜 형태의 휴대폰 악성코드인 카비르(Cavir) 웜이 등장해 휴대폰도 악성코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 2005년. 3월에는 블루투스 외에 멀티미디어메시징서비스(MMS)를 이용, 감염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로 악성코드를 퍼뜨리는 휴대폰 악성 코드 컴워리어(CommWarrior)가 등장, 전파 방법상에서의 지역적 한계를 넘기도 했다. @Buzz

자료제공·안철수연구소(www.ahnlab.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오주석 선생님, 당신을 그리워하며...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 선생이 1년 반의 백혈병 투병 끝에 지난 5일 오후 9시 반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향년 49세의 일기로 소천(召天)하셨다는 기사를 읽을 때 제 마음은 쿵하고 저 밑으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매번 당신의 건강을 묻던 김명인, 이용식, 노대명, 장석남, 백원담, 김진방 편집위원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자문회의에 참가하시던 김동춘, 홍윤기, 한홍구 선생님들이 늘 당신의 안부를 물었는데, 번번이 제가 연락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다가 건강이 많이 호전되셨다는  당신의 이야기가 있었노라, 조만간 한 번 나오시겠노라, 하시더란 말씀만 그렇게 전해드렸었는데 별안간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 번도 병문안을 가보지 못하고 신문 기사로 그 소식을 접한 제 게으름에 부끄러움으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주석 선생과의 인연은 "옛그림읽기의 즐거움"을 펴낸 지난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주석 선생을 처음엔 저자와 독자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고 누구인지 미술쪽, 우리 한국고미술 분야에 정말 괜찮은 감식안과 문재를 지닌 미술사학자가 등장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열화당에서 근무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옛그림읽기의 즐거움"에 실린 "인왕제색도""고사관수도"의 이미지를 복사하여 액자로 만들기도 했는데, 오주석 선생과 저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런 관계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지난 2001년 9월부터 당신이 제가 몸담고 있는 잡지의 편집자문위원이 되셔서 한달에 한 번씩이나마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올해가 2005년이니 햇수로는 4년이고, 만 3년 정도의 기간동안 뵈올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신의 부음에 즈음하여 신문에 실린 고인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 고증으로 회화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고 사람들은 평하더군요. 오주석 선생의 그간 활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평가는 지극히 당연하나 그럼에도 당신의 넓은 도량과 흐뭇하고 온유한 미소, 우리 미술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편집자들은 본의든 아니든 일반 독자들이라면 글이나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유명 필자들을 실제로 곁에서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미인으로 알려진 어떤 작가는 실제로 보면 사진만 못한 경우도 있고, 누구는 작품 활동, 혹은 사회 활동은 매우 건강한 듯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풍문을 먼저 접하게 되거나 혹은 직접 목격하게 되는 일들도 종종 있지요. 거리와 시간이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좀 더 실제 모습에 가까운 맨얼굴을 보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업무적인 특성상 그런 분들을 가까이 뵙게 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만하면 단련이 될 법도 한데, 여전히 글보다 인격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의 실망감은 일반 독자들이 느끼는 것 못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 오주석 선생님에게서 제가 받은 인상은 글과 사람이 일치하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의 문장이 풍기는 고아(古雅)한 맛이 당신의 실제 행동이나 어투에서도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책에서도 밝히듯 "무릇 그림이란 마음 가는 바를 따르는 것이리라(夫畵者從于心者也)" 하였는데, 그 말씀대로 당신 역시 마음 가는 바대로 글을 썼고, 글 가는 대로 따르기 위해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기회 닿을 때마다 주역 공부의 즐거움에 대해 말씀하셨고, 앞서간 선배이자 스승이셨던 강우방 선생님에 대해서도 늘 겸손하게 말씀하셨고, 거문고의 즐거움, 옛 선비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호해야 하는 순간엔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종종 당신께서 말씀하는 세상사 이야기가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은 결국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정치란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다스리는 이가 바르게 하면 누가 감히 부정을 하리요.(政者正也, 子歸以正, 孰敢不正)"와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병증을 자세히 알기 전에 저는 선생을 모시고, 함께 역사기행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신께 좀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것, 좀 더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신은 늘 음악과 술을 즐겨하였고, 조선시대의 도학자들이 지닌 높은 정신세계를 흠모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거문고를 익히고 연주하고, 옛그림을 보되 이를 해석하기 보다는 이를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비록,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주장하는 바에 자신의 이익이나 영달을 꾀하는 법이 없었고, 세사(世事)의 바르지 못함을 참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우리 옛 미술을 욕되게 하는 비평과 해석에 대해서는 더욱더 참지 아니하였습니다. 가끔 당신은 "고흐" "김홍도" 중 어느 그림이 더 귀한가를 묻곤 하셨습니다. 물론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는 고흐의 그림이 더욱 비싼 값에 팔릴 테지만, 그것은 단지 고흐가 복이 있어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이들, 후손이 부자여서 그럴 뿐 김홍도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의 귀하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시곤 했습니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이 없으나 다만 어떻게 볼 수 있을까가 당신에게는 더욱 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가진 존재(人者天地之心也)"라는 당신의 말씀은 어쩌면 이 책 전체, 당신의 삶 전체를 관류하는 커다란 흐름이란 생각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들은 하늘과 땅의 마음을 잊어버린 채 날마다 바뀌는 표면을 어떻게 가꾸고, 숨길까를 생각하는 약삭빠른, 천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당신이 펴낸 글과 마음은 "좋은 것은 변하지 않고 더욱이 가장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듯 합니다.

이 책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 책에 수록된 6편의 글 가운데 "한 선비의 단아한 삶 : '이채 초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소나무 아래 산중호걸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화폭에 가득 번진 봄빛 :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 문인화, 옛 선비 그림의 아정(雅正)한 세계, 겨레를 기린 영원의 노래 : 정선의 '금강전도', 딸에게 준 유배객의 마음 :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뿌리뽑힌 조국의 비애 :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 조선과 이조"의 5편은 "황해문화" 2001년 가을호(통권32호)부터 2002년 가을호(통권36호)에 연재되었던 글들입니다. 당신께 원고와 그림을 받아 작업을 하는 동안 매호 당신의 원고를 미리 읽는 즐거움으로 작업의 고단함을 잊었더랬습니다. 잡지의 어쩔 수 없는 여건상 그림들을 컬러 도판으로 수록하지 못해 늘 안타까와했는데, 이렇게 컬러 도판의 좋은 화질로 작업되어 책으로 묶인 것을 보니 그때의 죄송한 마음이 더욱 도집니다.

당신이 이리도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역사기행 갔을 때, 당신의 쑥빛 나는 수건을 탐내하자 지금은 땀에 젖어 안되니 나중에 서울가서 잘 빨아서 그 때 주겠노라 하셨는데, 그 뒤로 당신이 몸져 누울 줄 알았겠습니까. 당신은 우리가 서양미술가들은 알고, 좋아하되, 단원의 그림은 그만 못하다 여기는 자세를 질타하고, 우리가 우리 옛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이를 마음으로부터 좋다 여기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와 했습니다. 이제 뉘 있어 우리의 이런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겠습니까. 조선의 그림이 초기에는 중국 그림에 묻히고, 구한말 강점기를 거치며 왜색에 침탈당한 사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여 이제라도 우리 옛그림의 당당한 아름다움에 대해 당신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옛 것의 아름다움을, 당신의 그 마음과 해석을 즐겨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학문적으로 더욱 많은 일들을 하여 주실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등지니 애석한 마음 누를 길이 없습니다.

당신의 일주기를 맞아 나온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곁에 두고 오래도록 당신을 추억하고 그리워하겠습니다.

2006. 2. 風簫軒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려받기] ‘참여정부, 진보개혁세력의 고뇌’ 토론원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