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 폐지에 관련된 논란 속에 제가 한심하게 생각하는 부류는 한국의 영화가 아직도 '문화의 전위' 쯤으로 착각하고 스크린 쿼터 폐지를 반대하는 층위이죠. 이런 집단들, 영화=문화라는, 영화 원리주의자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자, 한번 봅시다.

우리나라가 요즘 천만 관객 동원 시대니 뭐니 하고 떠들지요? 기존에 서편제 등은 많아야 백만 정도였고 80년대 초 상영되었던 '겨울 여자'가 관객 백만 동원이라는 기록이 십여년 넘게 유지되어 왔는데 갑자기 천만 관객 동원이라니...

이 것이 한국 영화 관객이 폭증한 것으로 판단하시나요? 한마디로 웃기는 야그입니다. 일종의 '통계 마술'이죠. 예전에는 관객수를 서울의 개봉극장에 한해서  집계를 했지만 지금은 전국을 대상으로 집계를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다양한 영화를 선택헤서 볼 수 있었지만 요즘 천만을 넘거나 근접하는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들은 전국의 영화관을 과점한 상태에서 상영되는 것입니다.

관객 동원 신기록을 세운 태극기 휘날리며...가 상영될 동안 전국의 개봉 극장에서는 다른 영화가 걸리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 천만을 넘긴 실미도 역시 전국의 개봉 극장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었고 또한 올해 최고의 흥행 영화라는 '왕의 남자' 역시 극장 싹쓸이를 했었지요.

자, 봅시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이 어땠지요? 표면상으로는 흥행에 성공을 했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의 대부분을 소비했지요. 어디 '인디 영화'가 걸릴 틈이 있었나요? 즉, 한국 현대의 영화 구조는 비록 헐리우드의 자본에는 턱도 없지만 이미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고유 문화 사수' 운운하는 헛소리를 보다 보면 하품도 안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흥행작을 만든 회사들을 볼까요? 작년과 올해의 흥행작들과 그 흥행작들을 만든 회사입니다.

쇼박스가 만든 영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말아톤
가문의 위기
가문의 영광

CJ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영화

왕의 남자
친절한 금자씨
‘마파도
너는 내 운명

감 잡힙니까? 이미 한국도 자본에 의하여 영화가 지배 당한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한국의 고유 문화 사수' 운운하는 것은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쿼터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고용의 문제입니다. 언젠가 제가 언급을 했지요? 우리나라의 여행수지 적자가 백억불을 넘었는데 그 것이 심각한 이유는 신문에서 떠드는 것처럼 '외화 소비'가 아니라 고용 창출이 안되기 때문이라고요?

서비스업은 다른 직종과는 달리 고용창출율이 높은 직종인데(고용창출율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십억 투자 당 발생하는 일자리 수인데 각자들 검색해 보세요. 귀찮으니까.) 바로 해외여행 수지 적자가 백억불을 일자리로 환산하면 십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즉, 이 한심한 정권과 언론들은 '여행수지 적자'의 본질을 모르고 엉뚱한 것 가지고 떠들어 댄다는 것인데 마찬가지예요. 바로 스크린 쿼터를 유지시켜야 하는 이유는 영화 산업이 서비스 산업이고 그래서 고용창출율이 높은 직종인데 그 것을 제조물과 바꾸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수출 아무리 잘되도 일자리 늘어나지 않는데 스크린 쿼터 폐지하면 우리나라가 반대급부로 챙겨 미국에 수출은 늘어나지만 그 반대로 일자리는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즉, 스크린 쿼터 폐지는 '부의 독점 현상'을 부채질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질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영화는 고유 문화'라고 떠들어 대는 영화 원리주의자들, 떠드는건 헌법에 보장된 님들의 자유인데, 머리는 좀 채우고 떠듭시다. 시끄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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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2-1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크린 쿼터제를 보는 각도.. 정말 다양하네..
자본주의 시선, 민족문화주의 시선, 정치적인 시선...
일단, 영화인들이 대중의 인기에만 매달린체 민중의 삶을 외면했으니
나도 그들의 밥줄을 외면할란다... ㅡ..ㅡ;
괜히 핑계로 예술 영화, 단편, 실험 영화, 다양성 등의 변명 늘어놓기만 하구 ㅡ..ㅡ;
어차피 큰놈이 폭식해 오던거 변하나... 안 변하지.
어디 짱박혀서 '신비주의'로 몸값만 높이던 것들을 지지할 명분은 솔직히 많이 사라진 것 같다. (물론 빛을 못보고 고생만 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
 


사랑해요 하마스! 기대해요 하마스!

그들은 어떻게 팔레스타인 민심을 사로잡았나, 중동정세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총선감시단원으로 활동한 외국어대 홍미정 연구교수의 동예루살렘·라말라 르포

세계는 지금 팔레스타인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1월25일 열린 총선에서 강경 이슬람단체로 알려진 하마스가 60%가 넘는 득표율로 집권당인 파타를 누르고 제1당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긴장하고 있다. 이들의 정치·경제적 압박으로 중동 정세가 더 혼미해질 것이라는 국제사회의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가 그 어느 때보다 공정했으며,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기층 민중들의 기대와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 역시 진실에 가깝다.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만 여기는 것은 지식의 모자람일 뿐이다. <한겨레21>은 두 달간 동예루살렘과 라말라에 머물며 총선 감시단원으로 활동한 외국어대 연구교수 홍미정씨의 르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과 중동 정세를 조망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팔레스타인 땅, 이스라엘 정착촌>이라는 연구서를 펴낸 바 있는 홍미정 교수는 현재 학술진흥재단의 ‘중동 부족주의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 12월30일부터 현지로 건너가 연구·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 편집자


△ 무스타파 아부스웨이 예루살렘대학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홍미정 외국어대 연구교수. (사진/ 홍미정 제공)

▣ 예루살렘·라말라= 홍미정 중동문제 전문가·외국어대 연구교수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PASSIA)는 항상 외국인들과 내국인들로 북적인다. 세계적인 TV, 신문, 정치인, 학자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정보를 얻는다. 지난 1월25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선거 전날까지도 연구소는 각국의 선거감시단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이후 이 연구소는 평소보다도 매우 한산하다. 모든 인터뷰와 강연 등을 마디 압둘 하디 연구소장이 일절 사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 이후 연구소장의 표정은 어둡고 말이 없어졌다.

부패 척결과 독립국가 건설의 꿈

1월31일은 이슬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었기 때문에 연구소가 문을 닫았다. 호텔에서 약간 늦은 아침식사를 하면서 유엔 구호단체에서 파견됐다는 스위스 여성과 팔레스타인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하마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유럽과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의를 제기했다. 유럽연합은 지난 1월28일 원조를 계속할 것이라 선언하지 않았는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부시 대통령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를 계속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사실 예루살렘과 라말라에서 하마스에 투표를 했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서방의 외국인들과 이해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하마스의 집권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선거가 매우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에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 하마스는 창설 이후 계속된 사회 봉사활동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안지구 라말라의 시민이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사진/ EPA)

1996년 1차 자치정부 의회 선거를 거부했던 하마스가 10년 만에 의회 선거에 참가하면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하마스는 132석 중 총 74석을 장악했다. 이 중 45석이 지역구에서 나온 것이다. 하마스는 가자 지역에서 15석(기독교 1석을 제외한 총 23석 중 칸 유니스 3석, 데이르 알발라 2석, 라파 0석, 북가자 5석, 가자 5석)을 확보함으로써 65%의 의석을 차지했고, 난민 캠프가 밀집한 라파에서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서안에서는 30석(기독교도를 제외한 총 37석 중 헤브론 9석, 예루살렘 4석, 베들레헴 2석, 제닌 2석, 라말라 4석, 살피트 1석, 투바스 1석, 툴카렘 2석, 나불루스 5석)을 획득함으로써 81% 정도의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선거가 끝난 뒤에 만난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타 시대의 부정부패 척결과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꿈이 그 중심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 어린이들을 위한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칼리드 나집(34)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주변 사람들이 체험한 하마스의 구호활동을 들으면, 하마스가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처럼 보일 만도 했다. 칼리드에 따르면, 하마스는 서안 저항운동의 중심지인 제닌에서 9년 전부터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칼리드의 친구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지난해 12월에 20일 동안이나 무료로 치료를 받았다. 하마스는 가자와 서안의 난민 캠프 등 빈민가에서도 92개의 작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왔다고 한다. 더불어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학자금 지원사업도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칼리드의 사촌동생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다. 지난 2년 동안 하마스에서 대학 학자금을 지원받아 올해 졸업하기 때문이다. 하마스의 봉사활동은 주로 모스크와 연대해 이뤄지며, 자금은 팔레스타인 내부와 전세계의 무슬림형제단에서 제공된다고 한다. 그의 말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라말라 중심가의 한 모스크 지붕 위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초록색의 하마스 깃발이 바람을 타고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칼리드는 “대부분의 모스크 이맘(이슬람 성직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하마스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1988년 창설 이후 계속돼온 사회 봉사활동을 통한 청렴한 이미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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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나자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사타르 카셈(56)은 이야기할 것이 많으니 서안 내 도시 중 하나인 나불루스로 오라고 호텔로 전화를 했다. 그는 이전에 파타 소속이었고, 지난해 수반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을 주요 이슈로 삼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번 선거에서 그는 하마스를 지지했다. 1월29일 아침 나불루스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나불루스 주변의 모든 검문소가 닫혀 있어 갈 수 없었다. 나불루스행을 단념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겁을 먹고 움찔했다. 동행하던 팔레스타인 친구는 “파타 당원들이 화가 나서 공중에 총을 쏜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주말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사타르 교수는 메일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전직 파타 당원이었던 사람들 몇 명도 하마스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고 전했다. 해체 위기에 직면한 파타와는 달리 하마스는 모스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의 내부 사회 주민들 속에 뿌리박고 중앙에서 조직적으로 선거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번 선거에서 하마스 출신의 무소속 후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각 당파에 속하지 않은 주민들과 다수의 파타 당원들조차 하마스에 투표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의 적십자라 할 수 있는 적신월사(Red Crescent·붉은초승달회)에서 근무하는 파티 펠레펠(38) 박사는 “자치정부 10여 년 동안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고 한탄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을 점령지 내에서조차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수 없었다. 툴카렘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라말라에서조차 팔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도시 단위로 갇혀 있다. 이것이 10여 년 동안 이스라엘과의 협상 결과다.” 한 달 전에 둘러본 툴카렘과 칼킬리야가 생각났다. 이 지역은 토양이 검은 빛을 띨 정도로 비옥했고, 오렌지 농장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 검은 빛 땅은 떨어져 썩어가는 오렌지들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칼킬리야에서 만난 오렌지 농장 주인인 무함마드(35)는 오렌지를 팔 곳이 없어 수확할 필요가 없다면서 자신의 농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무함마드는 썩은 오렌지들과 올리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스라엘의 이동 차단과 수출 금지 정책으로 판로를 찾을 수 없다. 저기 분리장벽을 보라! 저 너머에 내 올리브 농장이 있다. 나는 분리장벽 건설 이후 저기 내 농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저 철책 장벽에는 전기가 흐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2002년부터 시작된 분리장벽 건설 이후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점령 상황이 종결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렌지는 왜 썩어문드러지는가

하마스 지지자들은 하마스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리라고 생각한다. 라말라 중심가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하마스 활동가 무사(38)는 “하마스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과 강력한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강력한 협상의 주제는 1967년 6월 전쟁 이전의 휴전선(1948년 전쟁의 결과 만들어진 휴전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 획정, 이스라엘 정착촌의 완전한 철거, 동예루살렘의 주권 회복, 1948년 점령된 땅(현 이스라엘 국가 영역)에서 추방된 난민을 포함하는 50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9천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감옥의 수감자 석방, 이스라엘군의 완전한 철수가 될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주제들에 대한 협상을 거부한다면,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마스가 내세우는 주제들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주제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0년 오슬로 최종 지위 협상에서 팔레스타인 대표들이 테이블에 올려놓으려고 시도했으나,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이를 거부한 바 있다. 이에 실망한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자살폭탄 공격을 동반한 제2차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를 주도했다. 이를 빌미로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또 자살폭탄 공격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 즉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PFLP, DFLP, PPP, 알아크사 여단 등을 테러 단체로 지목하면서 자치 정부에 이들을 분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타르 카셈 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폭력이 단계적으로 고양될 것이라 전망했다. “국제 사회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과 관련된 하마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도 거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마스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총을 쏠 것이고 보복은 되풀이될 것이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과 서방이 문제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항복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테헤란-다마스쿠스 축(이란-시리아)은 새로운 동력을 얻고 있다. 이 축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소망과는 반대로 가동되고 있다. 어려움이 많아질수록 하마스 운동은 더욱 활력을 얻을 것이다. 나는 하마스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 선거 캠페인 마지막 날 깃발을 바로잡고 있는 라말라의 청년.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강력한 협상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예상을 넘는 선거 승리로 이어졌다. (사진/ EPA)


△ 서안에 분리장벽이 세워진 뒤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극도로 빈곤해졌다. 점령지 내에서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고 생산한 농산물조차도 장벽 넘어에서는 팔지 못한다. (사진/ EPA)

그렇다면 하마스 통치 기간에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사타르 카셈 교수는 세 가지 주요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첫째, 파타는 하마스가 실질적인 성과를 이뤄나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하마스의 토대를 침식하기 위해 공세적인 정책을 단계적으로 펼 것이다. 셋째, 미국과 유럽은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마스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 하마스는 잘 조직돼 있고, 부유한 아랍과 무슬림 개인들과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자금을 지원할 것이다.” 이와 함께 팔레스타인이 외국인들의 재정 지원에 포박돼 있는 현실도 지적했다. “그것은 해방과 충돌되는 것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

내가 묵고 있는 동예루살렘 크리스마스 호텔 소유주인 에밀 자르아위(65)는 파타당 소속으로 당선된 기독교도 의원이다. 1월30일 저녁 늦은 시간에 호텔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에밀 자르아위 의원의 말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하마스 선거 승리 이후 모든 외부 자금 유입이 중단됐다. 이제 하마스의 정치 프로그램을 기다려봐야 한다. 파타는 그 프로그램에 따라 협력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하마스는 파타에 연합 정부 구성을 여러 번 제안한 상태다. 그러나 아직 파타는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예루살렘대학 이슬람학 교수인 무스타파 아부스웨이(50)는 “파타가 너무 충격을 받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라 분석했다. 또 있다. 파타는 40년 동안 권력을 안정적으로 독점해왔기 때문에 공유해본 경험이 없다. 그리고 이 심각한 상황에서 하마스와 협력하지 못하도록 파타 지도자들에게 국제적인 압력이 행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스타파 아부스웨이 교수는 “국제 사회가 하마스 정부를 인정한다면 파타는 훨씬 유연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잇따르는 관광객들의 호텔 예약 취소

그러나 훨씬 큰 문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것이다. 하마스는 파타가 성취하지 못한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시도할 것이고, 이스라엘은 끝내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29일 시리아에 머물고 있는 하마스 1인자 칼리드 마셜은 1967년 6월 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국경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과 관련해 이스라엘에 양자 대화를 제안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이 체결한 어떤 협정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익이 되는 한 존중하겠지만, 지난번 협상에서 개입한 미국 등 제3의 중재자는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동예루살렘에는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외국 관광객들의 호텔 예약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하마스 정부의 분명한 정치 프로그램이 제시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듯 보인다.


파타는 왜 참패했는가

내부부터 무너뜨린 부패와 개선되지 않는 점령 상황 때문


△ 파타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 45석만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된 뒤 분노한 파타 지지자가 하늘에 총을 쏘고 있다. (사진/ EPA)

선거 다음날인 지난 1월26일 저녁, 라말라 근교의 초발이라는 마을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팔레스타인 적신월사에 근무하는 파티 플레펠 박사가 이번 선거에서 감시단원으로 활동한 외국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을 초청한 것이었다. 파티 분위기는 자못 무거웠지만, 이들은 전통 악기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들은 모두 파타의 완패에 관해 너무나 뜻밖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 중 모스크에 열심히 나가는 파티 박사의 어머니만이 하마스에 투표를 했고, 파티에 참가한 10여 명의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은 모두 각각 사회주의 계열 정당에 투표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다수가 유럽과 미국의 원조를 받는 비정부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중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산업시설이 전무한 팔레스타인에서 비정부기구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상당한 돈벌이를 제공한다. 현재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마스 집권 이후 유럽과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는 것이다. 원조의 중단은 곧 실업을 의미한다.

1996년 의회 선거에서 전체 의회 의석인 88석을 모두 장악했던 파타는 이번 선거에서 132석 중 단지 45석(지역구 17석, 전국구 28석)만을 획득하는 참패를 당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하마스 활동가인 무사는 “무능과 부패 탓”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번 의회선거에서도 미국은 2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공표했다. 파타는 공식적으로 그 돈을 받지 않았다고 발표했고, 그 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그 돈은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을 것이다. 파타는 자치정부 수립 이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함께 대화에 참가했던 사회주의 계열인 PFLP 지지자인 압둘 라힘(40)과 예루살렘 대학의 국제법 교수인 압둘 말렉(37)도 무사의 주장에 동조했다.

파타가 팔레스타인 내부의 격렬한 비판에 직면한 상황에서 파타 소속의 지식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제3의 길’ 등 새로운 정당이 창설됐고, 파타는 선거 이전에 이미 그 내부에서부터 조직이 붕괴됐다. 이와 관련해 라말라에서 비정부기구를 운영하면서 사회주의 계열인 PPP를 지지하는 살림(37)은 “이번 선거에서 출마한 파타 의원들은 거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오직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경력 따위만을 내세웠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동예루살렘의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인 디니스(35)는 “늙고 학식이 없는 파타의 지역구 후보들과는 달리 전국구 후보들은 젊은 지식인 출신이 대부분”이라면서 살림의 주장을 확인해주었다. 살림과 디니스의 주장은 전국구 투표에서 1석 차이로 하마스와 거의 동등한 의석을 획득한 파타가 왜 지역구에서는 거의 전멸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특히 파타는 예루살렘, 라말라, 베들레헴에서 기독교도에게 할당된 5석을 제외하고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예루살렘대학 국제법 교수인 압둘 말렉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서안 지역에서 가장 격화됐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05년 1월 수반 선거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파타 후보인 마무드 아바스에게 67%의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1년 동안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라말라, 베들레헴을 갈라놓는 분리장벽 건설을 강행하자, 2006년 현재 서안 지역과 동예루살렘은 완전히 분리됐다.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도 동예루살렘 주변 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진행됐다.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은 1994년 자치정부 건설 이후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상황에 대한 책임을 파타에게 물은 것이다.

사실 이번 선거에서 서안과 가자에서는 전 인구 대비 50%가 유권자 등록을 한 반면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단지 10%만이 유권자 등록을 했다. 게다가 그 등록자의 70% 정도만이 투표에 참가했다. 투표인 등록 명부를 확보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거주권을 박탈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불안감을 이해할 만도 했다. 지난 1월29일 라말라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동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검문소에서 중무장을 한 이스라엘 군인이 승합차에 탄 승객 15명의 하늘색 예루살렘 거주민증을 모두 걷어갔고,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대답과 동시에 손을 들게 하면서 얼굴과 대조했다. 두 승객이 녹색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주민증을 예루살렘 방문 허가증과 함께 내밀었다.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고, 이스라엘 군인은 죄인을 심문하는 검사와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나 역시 문제를 일으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무표정하게 여권을 내밀면서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거주권 박탈 등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서안 등으로 내몰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타르 카셈 교수는 “파타는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권리도 확보하지 못했다. 국가는 수립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분리장벽 건설 등을 통해서 땅을 강탈하고 정착촌을 건설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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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하고픈, 반드시 암살하고픈…

이스라엘이 꼭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던 3인의 하마스 지도자들을 말한다
강경파로 꼽히는 마셜, 실용주의자 하니야, 야신의 주치의 출신 알자히르

▣ 박민희 기자/ 한겨레 국제부 minggu@hani.co.kr

하마스의 창설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셰이크 아메드 야신은 2004년 3월22일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됐다. 몸이 마비돼 휠체어에 의지하던 야신이 살해된 지 5주 만에 그의 후계자인 압델 아지즈 란티시도 다시 이스라엘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숨졌다. 그 뒤, 2년도 안 돼 그들의 동료와 후계자들이 팔레스타인 정부를 이끌게 됐다.

칼리드 마셜의 영화같은 독극물 사건

란티시가 암살된 지 한 달 만에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비밀리에 지도자를 선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스라엘의 암살을 우려해 지도자를 공개하지 않아왔다. 그렇지만 총선 승리 이후 정치국장 칼리드 마셜을 비롯해 이스마일 하니야, 마무드 알자하르 등 하마스 지도자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 역시 거듭된 이스라엘의 암살 공격을 딛고 살아남았다.

현재 실질적인 하마스의 최고지도자로 꼽히는 것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머물면서 활동하고 있는 칼리드 마셜이다. 1956년생으로 알려진 하마스 정치국장 마셜은 물리 교사 출신으로 1990년대 요르단에서 하마스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면서 아랍 국가들과 이란 정부 등과 관계를 다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왕세자(현재는 국왕)와 만났다는 보도가 있으며, 2004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장례식에 사우디 왕족들과 함께 나란히 참석하는 등 사우디 왕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라파트 정권과 파타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해왔지만, 총선 승리가 확정된 1월26일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 구성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또 하마스가 집권하더라도 무장해제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면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동의 아래 모든 파벌들의 무기를 하나로 모으고, 독립국가와 같은 군대를 창설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침략에서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007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암살 사건의 ‘희생자’로도 잘 알려졌다. 영국 등의 보도를 보면 1997년 9월25일 당시 요르단에서 살고 있던 마셜은 거리를 걷다가 두 명의 괴한의 습격을 받고 뭔가에 찔렸다.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고, 귀에 특수한 독극물이 주입된 것이 발견됐다. 이스라엘 벤냐민 네타냐후 정부의 지시를 받은 모사드 멤버 10명이 캐나다 관광객으로 가장해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요르단 당국은 모사드 요원 2명을 체포했다. 당시 중동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하던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해독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네타냐후가 이를 거절하자 당시 미 클린턴 대통령이 개입해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해 마셜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요르단에 체포된 모사드 요원들은 이스라엘이 야신을 포함한 20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하기로 하고 맞교환돼 풀려났다.


△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칼리드 마셜, 하마스가 이번 선거에 임하면서 꾀한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 이스마일 하니야, 야신이 암살된 뒤 그의 후계자로 거론된 마무드 알자하르(왼쪽부터). (사진/ EPA)

알자히르, 폭격에도 살아남다

후세인 국왕의 후계자인 압둘라 요르단 국왕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을 받고 암만의 하마스 사무소를 폐쇄하자, 마셜은 시리아로 망명했다. 마셜은 하마스 내 강경파로 꼽히고 있다.

하마스는 이번 총선에서 다양한 성향의 후보들을 영입해 ‘변화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이 후보 명부에서 1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 이스마일 하니야(42)다. 그는 팔레스타인 내에서 하마스 선거운동을 지휘했으며, 언론에 하마스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하마스의 ‘얼굴’로 알려졌다.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자치정부의 총리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가자지구의 알샤티 난민촌에서 태어난 하니야는 가자의 이슬람대학에서 이슬람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졸업 뒤 3년 동안 이스라엘 감옥에 구금됐다가 레바논으로 추방됐다. 1년 뒤 돌아와 이슬람대학 학장이 됐고, 1997년 야신이 이스라엘 감옥에서 석방된 뒤엔 야신의 비서실장이 됐다.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 동안 야신을 보좌하면서 하마스 지도부 안에서 자리를 굳혔으며, 야신과 란티시 등 여러 인물들이 암살되는 동안 살아남아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유럽·미국·러시아·유엔 등에 무조건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등 유연한 노선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마스의 3대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무드 알자하르는 하마스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다. 1945년 팔레스타인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카이로대 의대를 졸업하고 카이로 아인샴스대학에서 외과의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팔레스타인의학협회 창설을 돕고 가자 이슬람대학을 창립하기도 했다.

1988년 하마스 설립을 주도하면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대변인이자 야신의 주치의 역할도 해왔다. 2004년 야신이 암살되자 알자하르가 후계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2003년 9월 이스라엘 F-16 전투기들이 그의 집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다. 그는 약간의 부상을 입고 살아났지만 그의 아들과 경호원이 숨졌고 그의 딸을 포함한 20여 명이 다쳤다. 그의 집을 비롯해 주변의 집 10여 채와 사원이 파괴됐다.


△ 대부분의 하마스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암살과 폭격으로 사망했다. 하마스의 창설자인 야신과 그의 후계자 란티시도 미사일 폭격으로 숨졌다. 병원으로 후송되는 란티시를 본 아들이 오열하고 있다. (사진/ EPA)

이슬람주의 단체의 원조 격으로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채택하고 있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하마스가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의 ‘1차 인티파다’ 기간에 결성되자, 초기에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야세르 아라파트의 강력한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점점 더 무력 저항을 강화해갔으며, 결국 88년 “이스라엘 파괴”를 강령에 명시하고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을 시작했다.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뒤 10년 동안 파타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아무런 변화와 희망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삶의 곳곳을 짓누르는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분리장벽’으로 상징되는 억압이 점점 높고 길게 팔레스타인 구석구석을 가로막는 현실이 결국 하마스 지도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키워준 호랑이

파타가 오랫동안 야세르 아라파트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온 데 비해 하마스는 개인의 면면보다는 그들이 공유하는 이슬람적 가치와 이스라엘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결속해왔다. 하마스 지도자들을 암살함으로써 하마스를 무력화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전략이나 ‘중동 민주화’를 통해 이슬람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적 정권’들을 만들어내겠다는 미국의 전략은 계속 빗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마스 지도자 암살은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순교자’와 ‘희생자’ 하마스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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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스크린쿼터'는 대선공약이었다


‘인터넷 패권주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통 매체들이 인터넷에 굴복하고 있다. 인터넷의 강점은 무엇인가? 유통 파워다. 자체의 콘텐츠 생산 능력으로 보자면 인터넷 포털업체는 신문사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감히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신문사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에도 신문사들이 포털에 납작 엎드린 이유는 우리 시대의 대중이 ‘접속’을 의식주(衣食住)에 이은 삶의 4대 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접속’의 흔적인 댓글마저도 콘텐츠로 축적되는 세상이다. 우리 시대의 콘텐츠는 동어반복이다. 남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검색 순위에서 밀려나면 있어도 없는 게 된다. 빼어난 콘텐츠는 반드시 빛을 보게 돼 있다는 속설은 믿지 않는 게 좋다. 콘텐츠는 기본일 뿐, 대중은 주류 유통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콘텐츠를 만날 길이 없다.

●정부 고충 있겠지만 방식이 비겁

인터넷을 기반으로 삼은 신경제의 문법은 오프라인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통산업의 거대화는 유통을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백화점과 할인점 애용자들이 단지 상품 콘텐츠 때문에만 그곳을 찾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재래시장에선 찾을 수 없는 편의와 쾌락을 동시에 즐기고자 한다.

사정이 그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파워에 대한 신앙은 여전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유통 권력에 대해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스타는 콘텐츠 스타다. 영화배우 이름은 알아도 제작ㆍ배급사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름은 알아도 출판사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투쟁에 대중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영화인들의 책임도 있다. 극소수 영화가 ‘대박’이 터질 때마다 대박 관련 영화인들은 “대다수 영화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했어야 했다. 인터뷰를 하는 기자들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다른 다수 영화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널리 알려지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좋은 홍보 기회를 다 놓치고 말았다.

대중은 영화시장에서 유통 권력이 누리는 괴력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최근 본 영화들이 대부분 한국영화였다는 기억만으로 콘텐츠 파워를 신봉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 점을 노리고 ‘왕의 남자’라는 대박 분위기를 이용해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발표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방식이 비겁했다. 지원책이라고 내놓은 것도 엉터리였다.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진다 해도 ‘왕의 남자’와 같은 대박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염려하는 건 영화산업 전체다. 정부가 그 염려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다면, 영화인들이 지금처럼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묘한 일이다. 유사 이래 현 정권처럼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 정권도 없었건만 왜 이리 진정성 없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 드는지 말이다. 스크린쿼터제 사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에 그걸 뒤엎고자 한다면 더욱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졌다는 이유는 너무 궁색하다. 대선공약이 나온 2002년에도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8.3%였다. 아니면 대선 땐 몰랐는데 이젠 스크린쿼터제 사수가 영화인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든가 하는 무슨 해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노 정권에게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있다면, “영화인들의 주장이 타당하지만, 형편이 이리 됐으니 죄송하게 됐다, 우리 한번 최선을 다해 미국 영화들과 붙어보자”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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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빛깔보다 더 진한 ^^;

단무지는 어찌나 깔끔하던지

아작아작... 아작을 내줬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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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2-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고픕니다. 남은 단무지 있으면 그거라도...ㅡㅜ

라주미힌 2006-02-1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사 안하셨어요?

로드무비 2006-02-1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을 먹었어도 이 시간이면 배가 고프죠.
단무지보다 깍두기에 한 표!^^

아영엄마 2006-02-1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로드무비님, 저 아직 저녁 못 먹었어요.. 남편 들어오면 밤참 삼아 먹으려다 못 들어온다고 해서 잠깐 졸고 일어났네요. 지금이라도 뭐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