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 많은 고양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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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2-강유원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2

박지향 외(엮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2>>, 책세상, 2006.

1.
총 29편의 논문으로 된 이 책들의 출간 의도와 구성, 대략적인 내용은 편집위원장 박지향이 쓴 '머리말'에 들어있다. 머리말은 노무현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한 것이 편집진 구성의 직접적인 동기였음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이것이 착각으로 밝혀진 다음 박지향은 "내가 정확하게 짚어보고 썼어야 되는데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동시대의 사건마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이가 사료의 진위를 치밀하게 검증하는 역사가의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남긴다. 게다가 그 기자와의 통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발언의 사실 관계가 아니다"며 "당시 과거사 청산 얘기가 한창 있었는데,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분위를 걱정했던 것"이라고 부연한 대목에서는 자신을 사실관계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할 역사가가 아니라 정치적 해결 분위기를 걱정하는 정치가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또 이어서는 "나도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읍소했는데, 언론에서는 그렇게 쓰는 걸 어떻게 막냐"고 한다.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이건 심각한 자기 분열 증세다. 그는 역사가도 정치가도 아닌 듯하다.

이어서 박지향은 이 책들의 "편집위원들은 최근 발표된 한국 근현대사 연구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생각되는 글들을 엄선"했다고 한다. 역사학이 내 본령이 아니니 수준의 높고 낮음은 검증할 수 없고, "최근 발표된"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최근"을 어디부터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2000년 이후로 잡는다면, 전체 29편 중 그때 이후의 것은 17편 뿐이다. 그런데 머리말 말미에 이와 어긋나는 듯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 축적된 학문적 성과"라는 말이다. '20년'을 '최근'으로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혼란스럽다.

내용에 들어서면 <<재인식>>은 "근본적으로는 <<인식>>이 드러낸 두 가지 문제점, 즉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역사 해석에 끼친 폐해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언급은 두 가지를 지시할 것이다. 이 책들에 논문을 실은 필자들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라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이 끼친 폐해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논문에 그러한 폐해 시정을 위한 시도를 담았다는 사실, 이렇게 두 가지다. 과연 그러한지는 논문들을 읽어보면 알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개별 논문들이 그러한 기조를 관철하고 있지 않다면 박지향은 논문 내용조차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말을 쓰고 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그런데 머리말 말미에는 반대되는 언급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각각의 필자들은 각자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각론에서 필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전개하고 있고 모든 필자들이 편집위원들과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미확인된 사실에 근거한 착각, 구성과 내용의 일관성에 관한 상반되는 발언들로 인해 머리말을 읽은 독자들까지도 자기분열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

2.
이 책들에 실린 논문 대부분은 편집위원장 박지향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미 단행본이나 학술 잡지에 발표"되었던 것들이다. 이번에 새로 쓰여진 것들은 이영훈의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와 김낙년의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 두 편이며, 후지나가 다케시의 "상하이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을 비롯한 몇 편은 과거의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따라서 전체 논문들 중에서 이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몇 편되지 않는다. 더욱이 머리말만 보아서는 이 논문들이 일정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지가 불확실하며, 통독을 하고나서야 각자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쓰여졌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이 책 전체를 평가하는 글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서평은 불가능하고, 각각의 논문에 대한 논평만이 가능할 것인데, 이러한 논평은 해당 전공 분야의 학자가 나서서, 정확한 사료를 취하고 있는지, 사료비판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 특정한 사관을 염두에 둔 자의적인 사료 꿰맞추기는 없는지 등을 규준으로 수행하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는 완전히 새로 쓰여진 논문이 두 편 있다. 하나는 김낙년의 논문인데 이는 '식민지 공업화'라는 주제에 관한 "기존 연구사를 점검하고 식민지 시기 공업화에 대한 이해나 평가가 어떤 점에서 갈리고 있는지 그 논점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별다른 자기 주장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논문에서 필자의 태도는 마지막 각주에 나타나 있다: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의 의지에 반하여 주권을 침탈한 데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예컨대 그 시기 경제적 성과의 좋고 나쁨이라든지 해방 후와의 연속성 여부와 같은 평가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에 대한 비판과 식민지 시기에 나타난 경제 현상에 관한 분석은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각주의 내용은 대체로 다른 논문들도 기본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태도이므로 독자들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새로 쓰여진 다른 하나인 이영훈의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는 논문이 아니라 격문이다. 논문집, 그것도 엄정한 사료와 문헌비판에 근거한 냉철함을 자부하여야 할 역사 논문집에 이러한 투박한 글이 머리말 바로 다음에 끼어들어가 있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격문에 옳은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자질과 윤리는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주장은 어떠한 것이라도 삼갈 줄 아는 절제력이다. 역사가의 발언과 글쓰기는 철저히 사료에 기초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한두 조각의 사료를 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이야기하는 경박함은 역사가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는 사료를 통해 분석적으로 확인한 역사적 사건의 인과 관계를, 그 복잡성과 우연성을 대중에게 성찰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비단 역사가 만이 아니라 무릇 학을 하는 이라면 누구든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영훈은 이러한 경구를 실천하고 있는가.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한 한국 현대사에 관한 연속 기획물로는 최초라는 점 뿐 아니라, 그 책을 학습한 세대가 현 집권 세력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소리없이 대중 속으로 파고 들었으며, 드디어 집권 세력의 일각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해전사'를 학습한 세대가 현 집권 세력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누구의 판단일까? 몇 명이 해전사를 읽었고, 그 중 몇 명이 현 집권 세력의 중심부가 되었는지를 사료를 통해 분석적으로 확인한 역사가의 판단일까, 아니면 잘못 전해들은 대통령의 발언과 같은 한두 조각의 헛소리를 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이야기하는 경박한 정치가의 판단일까. 소리없이 파고든 것에 관한 사료도 없을 터인데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혹시 절제력을 넘어선 초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역사가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이영훈은 이제 문명사라는 관점을 내세우며 역사철학자로 발돋움하려 한다. 그가 주창하는 사관은 제국주의 시대의 문명/야만 이분법을 바탕으로 성립된, 궁극에는 파시즘으로 귀착된 국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이해관계와 사상을 달리하는 인간 집단이, 서로 다투고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되는 기제(機制)로서 정치이다. 국가는 문명의 상징이다. 국가가 없거나 해체된 상태를 야만이라 한다. 야만의 극복으로서 문명은 국가와 더불어 성립한다." 그의 사관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다만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가져다 준 폐해를 아직도 깨닫고 있지 못하다면 이 책들의 편집위원장인 박지향의 <<일그러진 근대>>(푸른역사) 제1장 "문명과 야만의 담론"을 읽어볼 것을 권하며, 동시에 박지향이 그 책의 결론에서 역사주의 일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써둔 다음 언급을 새겨두기를 바랄 뿐이다: "역사에 목표를 설정하고 역사를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상정하여,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전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역사 인식과 '사명감'은 역사를 왜곡하는 지름길이다."

3.
이 책들에 실린 논문들은 해방 전후를 둘러싼 몇가지 역사적 주제들에 관한 역사적 통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은 반드시 책 그 자체가 아닌 논문들 각각을 면밀하게 읽으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역사학자들에 의한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간 진척된 수준높은 학술 논문들을 선정해서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제시해주자"는 이 책의 목표는 성취될 수 없다. 그때까지 대중은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을 거쳐 서중석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로 나아가면 충분할 것이다.

박지향은 머리말에서의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고 "책이 이미 2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3쇄 찍을 때 수정하겠다"고 한 바 있는데, 그에 덧붙여 정치적인 이슈화에 집착하는 이영훈의 글과 잡담에 불과한 2권 말미의 '대담'을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이 책은 '해전사 세대'에 이은 긍정적인 의미의 '재인식 세대' 창출에 아주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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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리?
한겨레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불편하거나 ‘흥미진진’하다. 성폭력을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문제 제기하거나 남성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 “여성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해서 성폭력당해야 한다면, 살의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여성은 왜 웃통 벗은 단정치 못한 남성을 강간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성폭력 가해자도 무서워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여성운동가도 무서워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차별에 대해 말할 때,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강박적으로 사용한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은, 남녀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기 쉽다. 한국 사회의 성폭력 신고율은 발생 건수의 2~6%에 불과하며, 성폭력 가해자의 70%는 아는 사람이며(어린이 성폭력의 경우 80%가 넘는다), 그 중 15% 내외는 가족 내 성폭행이라는 진실을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반면, 피해 여성을 비난하거나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즐기는’ 기사들은 조회 수 폭발이다.

최근 검거된, 100차례 이상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일명 ‘발바리’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가해자를 어떻게 보호하는지 잘 보여준다. 예전에도 상습 성폭력범이 ‘관악산 다람쥐’로 불린 적이 있다. 범죄 용의자를 익명 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인권 보호 방침이지만, 성폭력 피해 여성이 사건 이후 겪는 사회적 배제와 고통을 생각하면 인권 개념의 보편성에서 여성은 분명 제외된 것 같다. 살인, 방화, 강간은 강력 범죄다. 살인이나 방화를 100번 저지른 용의자에게 ‘발바리’나 ‘다람쥐’같은 귀여운 호칭을 붙이는가? 연쇄 살인범은 ‘살인마’라고 하지만, 연쇄 강간범은 ‘강간마’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100번 이상 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권력이다.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며칠 전 30대 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성폭력을 모면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여성은 “지금은 몸이 아프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설득하면서 가해자에게 약속의 의미로 휴대 전화번호를 남기게 했고, 가해자는 검거되었다. 이 여성의 지혜는 감탄할 만하지만, 이 사건은 성폭력의 구조와 원인을 요약하고 있다. 어떤 범죄자가 범죄 현장에 기꺼이 자기 전화번호를 남긴단 말인가? 이런 사건이 가능한 것은, 가해남성이 성폭력과 섹스 또는 데이트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에 관한 한, 남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모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성은 남성 고유의 특권이기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없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X양 비디오’가 없다고 “장사 똑바로 하라”고 호통 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성 판매 여성에게 2만원 주고 원하는 체위대로 안 해 준다고 여성을 경찰에 신고한 남성도 있다. 이 남성들은 자신의 행위가 ‘현행법상 불법’인 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성 구매자는 스스로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발바리’ 사건과 관련해, “여성이 문을 잠그지 않고 자거나 낯선 사람을 집안에 들여 범행 기회를 제공했다”고 보도한 언론사가 있었다. 여성이 조심하라는 얘기다. ‘남의 집에 찾아간 낯선 남자’가 모두 강간범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성폭력의 공포에 떤다. 그렇다면,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 모든 여성이 조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남성들 중 극소수인 가해자를 신속하게 검거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기사등록 : 2006-02-19 오후 06: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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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22.jpg

 

운동은 시절을 거스름으로써 시절을 이끈다. 90년대 이후 운동의 주인을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꾼 운동들은 한 시절 호황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 운동들은 보다시피, 매우 빠른 속도로 흡수되거나 소멸하는 중이다. 시절을 거스르지 않는, 시절을 좇는 운동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런 음울한 풍경 속에서 '소수자'와 '계급성'을 결합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존재는 들불처럼 빛난다. 정태수 열사 4주기를 맞아 토론회를 한다.

- 김규항

 

저 사이트에 가보니..



공지사항에..  ㅡ..ㅡ;

 



꼭 저런데에도 성인광고 올려야 하나...

(사진을 누르면 큰 화면 보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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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그림과 이야기>악몽, 퓌슬리

 악몽, 퓌슬리

그림보여주는손가락 | 2006-02-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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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특히 초등학생 작자미상 교과서 '장님 딜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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