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폭력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자와
두려움의 기억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자의 경계가
분명해 지는 공간.

학교.

힘의 불균형, 그것이 학력이던 싸움이던 간에 서열이 정해지는 최초의 공간인
'학교'에서 주인공은 세상의 룰을 배워나간다.


학교는 세상을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자, 세상의 맛배기만큼 처절한 전장터로 변해 있었다.
맞는데 이골이 난 재희는 세상과 맞짱을 뜨기 위해 싸움의 기술을 갈망한다.
그러다가... 무협지처럼 싸움의 은둔 고수를 만나는데....



황당하게도 그는 독서실에서 무협지나 읽고 있는 '백수'의 고수.
광기의 카리스마 백윤식은 싸움의 기술을 무술 영화처럼 생활 속에서 가르친다.



"너 한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피똥 싼다...." 

협박과 온갖 필살기로 무장한 인간 병기 백윤식은 싸움의 고수이지만, 세상의 이단아이다.
룰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러한 룰의 지배를 벗어나 있다. 그것은 세상의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닮고 싶었다."

협박만으로도 세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그의 힘은 동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세상과의 투쟁은 위험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만 하는 산이다.

"상대를 한대도 때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건 네 안에 있는 두려움.
맞아본 자만 아는 두려움때문이야"

그 두려움을 깨는 것,
학생이 세상에 한 발을 내딛기 전에 깨달아야만 하는
학교의 가장 커다란 숙제이자 가르침일 지도....


백윤식의 카리스마가 아주 인상적이다.
정말 멋있는 캐릭터야...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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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민식은 말한다. “내 사진은 부조리 가득한 세상을 향한 저항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분노가 아닌 사랑을 담고자 했다.”고. 작가 하성란은 말한다. “삶이란 사람들의 준말일 것이다. 그의 사진에서 열정과 따뜻한 시선을 엿본다.”


 

 

 

절절한 상담사례를 바탕으로 현대인의 왜곡된 성적 욕망을 파헤치고 그 치료책을 모색한다.

현대인은 성적 억압의 시대, 금기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넘고 보니 어느새 성의 상업화에 빠져 허우적인다. 성의 상업화는 우리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이끌지 않는다.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극단적 양극화 현상을 불렀다. 과도한 성적 욕망의 노예로 ‘사도마조히즘’의 강도가 높아지고, 한편에선 불감증이나 섹스 없는 부부가 확산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욕망의 회복과 유지를 위한 실천적 방안들은 무엇인가. 저자는 상담사례를 통해 ‘부부싸움 잘하기’ ‘욕망의 주기분석’ 등의 방안을 내놓는다. 특히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적 차원에서도 성적 욕망을 알게 하고 이해시키고, 훈련하는 교육프로그램을 강조한다. 성적 욕망은 “진귀한 꽃”과 같아 “꽃을 피우기 위해선 정성들여 키우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욕·독신의 문화사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근래까지 동서양을 넘나들며 금욕, 곧 독신의 여러 얼굴을 들여다본다.

성스러운 자발적 금욕도 많았지만, 강제적이고 악랄한 금욕도 있다. 할례, 내시 등이 대표적. 저자는 금욕은 주체적·독립적으로 살려는 개인의 또다른 욕망과 연관됐다고 강조한다.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결혼과 육아라는 고역에서 벗어나는 수단인 것. 잔 다르크나 엘리자베스 1세, 나이팅게일 등에서 이를 본다.

금욕은 또한 신체적인 강인함, 집중력과 지력을 연마하는 수련의 길로 인식되기도 했다.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들은 예나 지금이나 금욕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벌거벗은 젊은 여인들과 밤을 같이 하면서도 ‘일을 저지르지 않는’ 자신을 흡족하게 여긴 간디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동성애 의혹을 피하기 위해, 아이작 뉴턴은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독신의 길을 걸었다. 작가 발자크는 여자와 관계를 가진 뒤 “또 소설 한 권이 날아갔구나”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현대는 금욕과 독신이 한몸이 아니다. 독신이면서 오히려 풍성한 욕정을 채울 수도 있다. 독신과 금욕으로 본 인간사는 이렇게 흘러왔고, 또 변화하고 있다. 풍성한 읽을거리, 흥미로운 일화를 듬뿍 담은 책은 독신·금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인식이 달라지는지, 또 다양한 삶의 한 방식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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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중은 선하다” 인식 부정하고
강자를 욕망하고 강자에 굴종하는 속물성 직시
대중을 변화시켜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탐색
노동자 자주관리체제 ‘노동민주주의’ 제시
노동의 고통이 노동의 기쁨으로 돌아오리라


고전 다시읽기/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월드컵, 장갑차, 노무현, 황우석의 공통점은? 그렇다. 모두 대중과, 대중적인 운동 내지 대중적인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적극적인 지지나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하나의 흐름이, 대중이 되어 커다란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 사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대해 말하면, 어느새 87년 6월항쟁이나 7~8월의 ‘노동자대투쟁’ 혹은 광주항쟁 등을 떠올릴 것이다. 대중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만들어낸 사건들은 대개 이처럼 혁명이나 항쟁, 저항의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에 관심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을 혁명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지금은 잠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솟구쳐오를 혁명적 존재로. 이런 관념 속에 있는 한 2002년 월드컵의 대중이나 황우석 사건의 대중은 안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1930년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미친 듯이 몰려갔던 대중 또한 안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세계 인민들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밀어주고 블레어를 밀어주는 대중, 혹은 지금은 천황이나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

라이히가 이 책을 쓰던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실히 그랬다. 노동자를 포함해 인민대중들이 미친 듯이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며 지지했지만, 그것은 모두 원래는 선한 그들이 ‘나쁜 넘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거짓’을 폭로하면, 진실을 알려주면 대중이 혁명적인 본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쓸 당시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나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자신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억압할 게 분명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마치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대중은 왜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 혁명적이어야 마땅한 계급의 대중조차 어째서 혁명이 아니라 반동을 지지하거나 욕망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라이히로 하여금 바로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밀려가지 않는 위대한 저작들의 대열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라이히는 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대중은 본래 혁명적이지만 속아서 저런 거라는 식으로 당혹스런 사태에 눈감지 않으며, 그렇다고 하이데거나 고상한 철학자들처럼 대중이란 속물적인 욕망, 복종적인 태도로 사는 ‘世人(세인)’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대중이 갖는 그 노예적이고 속물적이며 때론 반동적이기도 한 태도를 냉정하게 직시하며, 그것이 야기하는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대중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욕망이나 태도를 전환시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해방을 위해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지,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자였음을 확신한다. 진정 혁명을 꿈꾸는 자에겐, 어떤 계급이나 대중이 혁명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의당 혁명적이어야 할 그들이 혁명적이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게, 그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면서 또한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길 욕망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라이히의 이 질문이야말로 혁명을 꿈꾸는 모든 정치학이 대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했던 것일 게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기도 했던 그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변형시킨, 생물학적 욕망과 오르가즘 능력이 강조된 정신분석학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성격구조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지배하려고 하지만 강한 자들 앞에선 굴종하려는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구조는 성적인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

아버지에 복종…성적억압의 산물

물질적 착취나 억압은 그에 대한 반역을 야기하지만, 성적 억압은 복종을 야기한다. 성적 억압은 “네가 원하는 건 네 엄마지?”라고 다그치며 욕망을 수치심으로 몰아넣는 한편, “계속 그러면 잘라버릴 거야!”라며 위협하며 욕망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은 오르가즘에 대한 공포를 낳고, 그것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러한 억압은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작동한다. 총통에 대한 선망, 총통에 대한 복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야기하는 이 성적 억압의 산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이것이 파시즘으로 몰려갔던 대중들의 심리, 요컨대 ‘파시즘의 대중심리’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혁파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욕구의 충족이나 쾌락, 기쁨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금욕적 체제를 넘어서서 노동과 즐거움이 서로 합치하고 노동과 욕구의 충족이 서로 나란히 공존하는 그런 체제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되게 하고, 일이 싫어도 참고 하는 의무가 아니라 좋아서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 이러한 체제를 그는 ‘노동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장인적 생산체제로 돌아가길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라이히는 노스탤지어를 먹고 사는 낭만적 몽상가가 아니다. 거꾸로 그는 기계적 합리화나 분업을 유지하면서 노동이 즐거운 활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를 위해선 노동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하며, 작업 자체를 일하는 노동자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며 관리하는 작업장 자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을 통해 노동자 자신이 작업은 물론 경영 전체를, 나아가 집단의 활동 자체를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기-책임(자율주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한 때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민주주의를 향해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던 이 혁명이 30년대 들어가면서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로 후퇴했음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주관리는 중앙에서의 결정이 집행되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장치와 국가적 통치자로 대체되고, 자발적인 노동은 성과급이나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직장을 고정하는 제도(그는 이를 ‘자물쇠’라고 부른다)에 의해 의무가 된다; 게으른 노동자와 성실한 노동자를 게시하는 제도를 통해 한편에선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심과 증오심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에선 승리감과 공명심, 야심과 자만심을 배양하는 권위적 성격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스타하노프 운동 식의 노동경쟁체제로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적대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등등. 대다수 대중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이런 요소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이후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예리하고 현실적이다.

공산당과 정신분석협회서 쫓겨나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이 탁월한 책이 제대로 된 독자를 발견했던 것은 혁명과 사랑, 혁명과 욕망을 연결하고자 했던 1968년에 이르러서였다. 니체 말처럼 그는 너무 빨리 왔던 것일까? 그러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늦게 왔던 것일까? 어쨌건 그의 책이 갖는 이 '반시대성‘으로 인해 그는 혁명을 하고자 했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성과 욕망, 무의식에 대해 연구했지만 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으며, 나중엔 정신과의사들의 집요한 로비로 미 식품의약청에 의해 체포·투옥되어 옥사했다. 그의 시간이 오기 이전인 1957년에. 그러나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그를 죽인 사람들은 이미 누구도 기억되지 못하지만, 이 책은 이후에도 오랜 시간 살아서 그의 시간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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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의 족보, 생명의 나무

 

우리는 어떻게 생물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침팬지가 닭보다 생쥐에 가깝다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효모나 벼, 대장균 중 어느 것이 침팬지에 가장 가까운지 따져보는 건 난감하다. 판단의 기준이 되는 유사성이나 차이점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양한 종류의 생물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모든 생물은 하나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도 비교할 수 있는 지표가 남겨져 있다. 바로 생명현상의 유지에 가장 기초적인 기능에 관련된 유전자들이다.

침팬지와 효모, 벼, 대장균 모두 DNA로 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다. 또한 DNA의 유전정보는 DNA를 RNA로 복사하는 과정인 전사와, RNA 정보에 따라 단백질을 합성하는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 기능을 발휘한다. 생명현상의 기본이 되는 이런 과정은 모든 생물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여기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다. 이들 유전자는 최초의 공통조상으로부터 여러 종으로 분화해오면서 기능에는 변함이 없더라도 종에 따라 약간씩 달라진다. 따라서 두 종간에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비슷할수록 최근에 갈라졌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유전물질이 DNA임을 발견한 이후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2001년에는 인간의 전체 게놈이 해독됐으며 지난해에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의 게놈까지 밝히는 쾌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의 땀방울로 다양한 종의 게놈 정보 뿐만 아니라 이를 비교해 서로의 관계성을 추정할 수 있는 분석기법, 이 과정에 필요한 방대한 양의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도 갖게 됐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생명의 나무 계통수. 이미지제공 : 유럽분자생물학연구소(EM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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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과를 토대로 독일의 유럽 분자생물학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현재 게놈 염기서열이 밝혀진 191종의 생물에서 번역과정에 관련된 31개의 유전자들을 비교해 그림과 같은 ‘생명의 나무’, 계통수를 얻기에 이르렀다.

또한 새로운 종의 데이터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계통수를 그리는데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제외시키고 계통수가 새로 그려지도록 했다. 앞으로 게놈이 밝혀지는 종이 추가될수록 생명의 나무는 더 많은 가지를 달게 된다.

계통수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그림에서 가운데 세개의 선으로 갈라지는 부분은 모든 생물의 공통조상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뻗어나가는 세개의 선은 각각 고세균, 진핵생물, 진정세균의 큰 가지다. 각 가지의 끝에는 해당하는 생물종의 학명이 표기돼 있다.

생물을 가장 크게 두가지로 나누면(바이러스 제외) 막으로 둘러싸인 핵, 선형의 염색체, 막 구조를 가진 다양한 세포소기관을 특징으로 하는 진핵생물과 이런 특징이 없는 원핵생물로 나뉜다. 그림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진핵생물에 해당하며 여기에는 생물의 6계 중에 동물계, 식물계, 원생생물계, 균계가 포함된다. 녹색영역은 고세균계, 청색영역은 진정세균계이다.

그림에서 가지가 뻗어나간 길이는 유전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진정세균계로 뻗어가는 가지에 그어진 사선은 보기 편하게 하기 위해 길이를 축소시켰다는 표시다. 2시 방향에서 인간(Homo sapiens)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침팬지(Pan troglodytes)와 생쥐(Mus musculus), 쥐(Rattus norvegicus)가 있다.

가지를 따라 올라가면서 만나는 가지를 살펴보면 곰팡이나 효모, 버섯 등이 속하는 균계(Fungi)를 식물계(Plantae)보다 먼저 만나게 된다. 즉 균계가 식물계보다 우리가 속한 동물계(Metazoa)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동물과 식물을 보며 느끼는 생명의 다양성은 생명의 나무에서 작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계통수를 그리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생물간의 관계를 통해서 다양한 가설을 시험할 수 있다. 이 계통수에서 가장 짧은 가지에 위치한 종이 온도가 높은 곳에서 사는 미생물이라는 점은 생명이 온도가 높은 곳에서 탄생했다는 가설을 지지해준다. 또한 이 계통수는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새로운 미생물을 찾아내는 학자들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된다.

현재 지금까지 지구에서 발견된 생물은 약 200만 종으로 인간은 이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였다. 생물학자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생물이 이보다 열배 정도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종이 연구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더 나은 분석방법이 개발되면서 지금 우리가 보는 계통수는 수정되고 보완될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생명의 나무의 세부적인 가지를 그려내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더 완벽한 생명계 밑그림을 보고 싶다면 먼저 다음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으로 인해 수많은 가지들이 그려지기도 전에 잘려나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참조사이트
계통별 생물의 이미지와 설명 사이트
최신 버전의 계통수 제공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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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들의 스펙트럼 색깔 동일

 

지구에서 가장 먼 행성 명왕성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명왕성의 세 위성이 형제자매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허블 연구팀은 지난 10일 허블 망원경을 이용한 세 위성의 스펙트럼 분석결과 그 색깔이 같았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세 위성은 같은 공전 궤도면을 따라 명왕성 주위를 돌고 있다. 이것은 40억 년 전 명왕성이 자신의 크기와 비슷한 다른 천체와 충돌하면서 튀어나온 파편들로 만들어진 것이 세 위성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연구팀의 일원인 미국 존스 홉킨스대 할 위버 교수는 “빨강, 파랑, 초록의 색깔 필터를 이용해 관측한 결과 위성들의 스펙트럼 색깔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런 유사성이 긴 파장에서도 나타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관측을 계속하고 있다.

명왕성의 세 위성은 샤론, S/2005 P1, S/2005 P2다. 샤론은 공전주기가 6.4일이고, 지름이 1200㎞로 명왕성 크기의 4분의 1이나 되는 거대 위성이다. 2005년 허블 망원경에 포착된 S/2005 P1, S/2005 P2는 지름이 각각 60㎞, 50㎞이고 공전주기는 각각 38일과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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