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시들지 않는 꽃을 받았답니다-사야님께

 

 

*「군칸지마 - 버려진 섬의 풍경」사진집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왔습니다.

   책이 없다고 일부러 전화하셔서 주문하셨다는 메모 보고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요?)~~

   사진기 밧데리가 다 되어서 사진으론 못 찍고 예전 페이퍼 사진으로 대신. 

   얼른 페이퍼 하나 걸어놓고  집에서 나가다

   우체부 아저씨랑 만났답니다.

   으아악,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한테 절을 했다니까요.

   세로로 쓰여진 고운 편지도 받았습니다.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 날아가시는 날

   사야님, 사야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sandcat님은 내 마음 아실 거야요.

   (술꾼인) 사야님, 술을 어떻게 사드리지요~~

   어떻게 사드리면 좋을까요?

   나갔다가 얼른 들어왔습니다.

   저 위 돌멩이에다 '나는 꽃이다' 이렇게 낙서해놓고 싶어요.

   그러면 꽃이 될 것 같은,  지금 기분을 어떻게 표현한다지요!!

   저는 오늘 시들지 않는 꽃을 한 송이 받았답니다.

 

   "사야님, 너무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단결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프랑스의 새로운 노동법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두 달여 동안 프랑스를 불태웠던 최초고용계약(CPE, 26세 미만의 청년들을 고용할 경우 2년 안에 특별한 사유 없이 해고가 자유롭도록 규정한 법안)을 둘러싼 논란의 패배자는 프랑스 정부였다.
  
  미국 매사추세츠대학 암허스트 캠퍼스의 경제학 교수인 릭 울프는 진보적 평론지 〈먼슬리 리뷰〉 기고문을 통해 "한번의 큰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전쟁은 프랑스와 기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프랑스의 청년과 노동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다.
  
  울프 교수는 "비록 이번 싸움에서는 패배했으나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자본가들과 정부에 맞서 좌파 세력은 이 승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의 승리는 '단결'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지적하고 결국 여러 갈래로 분열된 세력들의 단결만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는 한국사회에게도 프랑스의 승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 청년들과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 끝에 얻은 승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다음은 울프 교수의 기고문 "프랑스 좌파세력의 승리에서 배워야 할 것들(Lessons of a Left Victory in France)"의 전문이다. 원문은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ItemID=10109에 가면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랑스 좌파세력의 승리에서 배워야 할 것들
  

 
2006년 봄의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노동법에 대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는 결국 시라크 대통령의 'CPE 철회'를 받아냈다. ⓒEPA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비롯해 그 휘하의 프랑스 정치인들은 패배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복지를 줄이려 했던 프랑스의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강력한 단결은 26세 이하의 청년들의 고용 보장을 무력화하려 했던 정부의 법에 맞서 싸워 승리를 얻어냈다. 그들은 시라크 대통령이 새 노동법을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이 주장해 왔던 것은 명백히 불법적이고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재 프랑스와 다른 지역의 모든 사람들(경제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을 한 축으로 하고, 학생ㆍ노동조합과 좌파를 또 한 축으로 하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이번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서로 다른 인식은 앞으로 양측이 각각의 조직과 전략, 그리고 전술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프랑스의 우파와 그들의 기반인 거대기업들은 앞으로 그들의 조직과 손상된 대중적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오랜 숙원인 노동법과 여러 조건들을 기업의 이익에 맞게 "재정비"하기 위해 이번과는 또다른 방법을 시도할 것이다. 그들이 이번 패배로부터 얻을 교훈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정치적 패배를 피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다음번에는 이번보다 훨씬 더 잘 좌파를 분열시켜야 함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국가적' 혹은 '경제적', '안보상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위장하려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ㆍ경제 '컨설턴트', '싱크탱크' 그리고 학문적인 '조언자'들을 엄청난 돈으로 매수해 프랑스 우파들의 프로그램을 재포장하도록 만들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 좌파세력,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적들과 맞서고 있는 좌파세력들, 즉 전지구적 좌파세력은 이번 승리로부터 전혀 다른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얻어야 할 교훈은 정말 많다.
  
  첫째로, 나이ㆍ성별ㆍ소득수준ㆍ이민여부ㆍ교육수준ㆍ인종 그리고 수많은 다른 요인들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는 좌파는 이번 사태를 통해 단결이 가능하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하나로 통합시킨 관심사는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둘째로, 이처럼 특정한 공통의 관심사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노동자, 저학력 노동자와 고학력 노동자, 이민자와 비이민자, 젊은이와 나이든 노동자들을 분리시켜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프랑스 정부의 끊임 없는 시도를 약화시켰다.
  
  셋째로, 프랑스 정부는 "법"이란 "국민의 민주적 의지"를 결집한 것이라며 이를 관철시키려 했지만 "법"보다는 "대중운동"이 국민들을 보다 잘, 보다 더 진정으로 대변한다고 믿는 대중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공식적 정부와 비공식적 정부라는 이중권력의 상황이 생겨났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의 수백만 국민들은 공식적 정부가 주장하는 "국민적 단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됐다. ("국민적 단결"을 내세운) 프랑스 민족주의는 프랑스 사회 안에서도 지배세력과는 상반되는 노동자ㆍ학생의 이익이 있다는 반대파의 논리를 이겨내지 못했다. 사회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사회세력간의 투쟁의 장이라는 개념은 이제 좌파는 물론 프랑스의 대다수 민중에게도 하나의 상식이 됐으며 이에 따라 이들은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자들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번 노학연대를 통해 단합되고, 대중이 참여하는, 직접적인 정치행동이야말로 승리의 열쇠라는 점이었다.
  
  프랑스가 얻은 교훈은 또한 우리의 교훈이기도 하다. 한번의 큰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전쟁은 프랑스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그들의 이익과 부유한 관료들의 이익, 기업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법과 규칙들을 제정하라고 지속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넣을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 소비자, 학생들에게 양보를 요구함으로써 국제적 경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계속 노력할 것이다. 기업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먀말로 개혁, 현대화, 번영 그리고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첩경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들은 더 많은 자원들을 대중적 캠페인과 정치인 그리고 여러 '조사'에 쏟아 부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싸움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에 맞선 프랑스의 승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EPA

  노동자, 학생, 소비자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미래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이 단결하고 결집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또 다시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시라크가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계속됐던 시위 기간 동안 이미 떠오른 주요 문제들을 반드시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다음 신자유주의 공격이 닥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또 다시 그것을 쫒아버리기 위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들로 하여금 고용주에 맞서 끝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경제 구조에 도전함으로써 이 전쟁과 맞설 것인가?
  
  노동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생산 관계에서의 기본적 변화를 위해 싸우기 위해 지난 3-4월 프랑스에서 분출된 모든 에너지와 단결된 역량을 총결집시키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전략이 아닐까? 자본주의적인 기업보다는 협동조합형 기업이 노동자-학생-소비자의 동맹에 맞선 기업들의 동맹에 구멍을 뚫기 위한 끝없는 싸움이 없는 미래로 향하는 방법이 아닐까?
  
  미국 대중매체들의 보도행태에서 드러난 부정적 교훈도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한다. 미국의 대다수 대중 매체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무시했다. 몇몇 언론들은 산발적 폭력양상만을 과장하는 데 열을 올렸다. 조직과 기율, 연대가 두드러졌던 전체적인 시위 양상에 비추어 일부 폭력시위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일부 언론은 프랑스정부의 반노동자적인 이번 법률을 마치 가난한 이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인 것처럼 포장하려고 애를 썼다. 명백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대부분의 언론 보도와 분석은 프랑스가 그들의 경제를 미국이나 영국 혹은 또 다른 "진취적인" 경제들처럼 신자유주의적으로 "선진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상업적인 언론들은 2006년 봄 프랑스 투쟁의 열벙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번역=여정민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8. 라주미힌님
9. 물만두님
10. woogi님

 

 

물만두님을 앞지르다.

내일이면 바뀌겠지만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4-2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축하드립니다

라주미힌 2006-04-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덕택으로. ㅎㅎㅎ

비연 2006-04-2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3. 어름왕자님
84. 비연님
85. 이유님

갑자기 넘 슬퍼지는 이유는? ㅠㅠ

 


stella.K 2006-04-21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걸 가지고... 근데 알라딘 블로그 만든지 벌써 3년 됐어요? 나랑 얼추 비슷한데...

urblue 2006-04-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아예 이름 없는 저도 있는데요, 비연님. ㅎㅎ
 

'나라야마 부시코' 허구로 '환경결정론' 옹호라?
[논단] "이규태식 인식은 더러운 침략전쟁 정당화에 일정부분 이바지"
 
이기현
 
그동안 과도하게 이규태를 옹호해왔던 무위가 드디어 소설(영화)을 사실로 묘사해 실제상황과 픽션을 제대로 구분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되는 지까지 의문을 표하게 만들고 있다.
 
무위가 이번에 쓴 도입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굶주림의 계절인 겨울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이웃의 논바닥에 버려지고 여자 아기는 한 줌의 소금에 팔린다. 마을에서 70세가 되는 노인들은 가족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나라야마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에도 있었다는 고려장과 비슷한 풍속이다. 70세가 되어서도 건강한 노인 오린은 자식과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을 만큼 쇠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이빨을 돌절구에 부딪쳐 깨버린다.
 
그렇다. 이것은 일본의 유명한 영화인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의 장면들이다. 무위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있고 이규태가 썼으며 진중권이 비판했던 환경결정론을 옹호하기 위해 바로 이 허구를 끌어들인다.
 
무위는 ‘나라야마 부시코’가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 이것을 그 이후 실제와 연결을 시킨다. 이른바 선의추정원칙에 의거 이렇게 잘못된 논거를 끌어들여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 인정을 한다면 결국 무지에 의한, 이른바 지적소화불량에 빠져 올바른 주장을 펴고 있지 않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가 세계인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척박한 환경이 인간들의 가치체계와 도덕율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진솔하게 표현해 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무위가 영화를 끌어들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저 부분에 있다. 척박한 환경이 인간의 가치체계와 도덕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는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실제 ‘민족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논증은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거의 민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증거들이 더 많다.
 
유럽, 특히 독일이나 영국은 겨울철에 해를 보기 힘들다. 심한 해에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덕분에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자살률이 상당히 높다. 이규태가 주장하는 환경결정론에 따르면 유럽에 사는 민족들은 자살을 유발하기 딱 알맞은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그럴까.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성향이 우울증을 크건 작건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게놈프로젝트에서 우울증에 특별히 약한 유전자가 해석이 됐다. 환경결정론이 옳다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우울증에 강하던지(아니면 민족을 유지하기 힘드니까), 아니면 환경의 영향으로 우울증에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유전자 지도에 따르면 특별히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과 통계적으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다.
 
더 해보자. 처음 이규태가 말했던 아랍사람들은 셈족이나 함족인 단일계통의 민족인가. 최초로 문명을 만들었다는 수메르 사람들은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 이후 아카드인은 셈족계열이고 수메르 민족이 자주 대립을 했던 사람들은 이란계열이다. 지금의 아랍인과 큰 차이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터어키에 있었던 힛타이트 사람들은 인도유럽계이다. 한 지방에서 거의 변화지 않는 문명을 유지했던 이집트의 경우 종종 이디오피아계 왕조가 있기도 했다. 다시 말해 흑인계열도 섞였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의 집단이주 속에서 터어키계를 비롯한 알타이어계 민족들도 다수 유입이 된다. 이들이 섞이면서 현재의 아랍인이 됐는데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더욱 이규태의 당시 칼럼이 문제가 되는 것은 911테러 직후 썼다는 점이다. 이후 미국의 보복전쟁은 어떠했는지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규태식의 인식은 이 더러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일정부분 이바지를 했다. 최소한 당시 테러를 일으킨 사람이 “인살라”라고 외쳤는지는 생존자 중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를 유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그 인식의 저변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환경결정론이 있으며 그 바탕에는 인종주의가 들어 있다.
 
환경결정론은 최대한 봐줘도 증명이 불가능한 이론이다. 이를 학문에서는 이론이라고 하지 않고 “가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위는 주 논점은 아니었지만 이규태의 여성인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했다.
 
이규태를 보고 인종주의자니 또는 남성우월주의자니 하는 폭언을 하는 일은 학문에 대한 몰이해나 지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더 말하지 않겠다. 다만 폭언도 아니고 지적 게으름도 아니다. 직접 무위는 이 글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악소 연령의 하강은 요즈음 아이들의 조숙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종적인 부모의 힘이 약화되고 횡적인 인터넷의 힘이 대신해온 것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으며 호주제 폐지로 자신이 호주라는 의식이 만연, 불량화가 가속화할 것은 뻔한 일이다. 땅 위로 솟아난 불량은 자르면 다시 돋아난다. 그 뿌리부터 알아내는 정부 차원의 원시적(遠視的)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작년 일진회 문제로 언론이 떠들썩하던 때에 이규태가 쓴 글이다. 여기에서 이규태는 옛날에 악소배라는 아이들이 있었고 이것이 일진회와 비슷하다고 말한 이후 원인을 이렇게 해석을 했다. 호주제를 옹호하는 것이 메일쇼비니즘이라는 것까지 여기에서 논증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무위에게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지 말기를 부탁하고 싶다.
 
조금 더 덧붙여서 무위가 “그는 철저하게 '있다. 있었다'라는 Be동사를 사용했지 '해야만 한다(should 또는 ought to)'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 말 역시 틀렸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이규태는 저 글에서 “정부 차원의 원시적(遠視的)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야만 한다(should 또는 ought to)'고 썼다.
 
무위에게 “학문에 대한 몰이해나 지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된” 글만큼은 최소한 공개적인 칼럼으로 쓰지 않기를 부탁한다.
 
덧붙여서 하나만 더 확인하겠다. 무위는 편집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FTA 등 쓰야할 글이 많다.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사실 위 글도 사람이름 하나 정도만 빼면 책으로도 실을 수 있도록 쓰려고 의도했다)
 
그런데 문명비평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자칭하고 있고 자신의 기명으로 칼럼을 기고해 놓고 이후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에 대해 “비생산적인 논쟁”이라고 일컷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진중권은 파시스트”라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을 기고해 놓고 논쟁을 않겠다는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중권은 조갑제가 파시스트라는 것을 논증하면서 수십가지 논거로 몇 년에 걸쳐 ‘비생산적인 논쟁’을 했는데 원래 사상검증이라는 것은 할 수 없다.
 
굳이 이런 엄청난 글을 쓰면서 논쟁하고 싶지 않다면 더 좋은 방법도 많다. 가장 쉬운 방법은 벽보고 말하는 것이다. 혹시 그것이 외롭다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에 자신과 대화해도 좋다.
 
2006/04/20 [04:41] ⓒ대자보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님과 무위의 논란은 핵심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진행 중입니다.
청연
06/04/21 [01:18]
물론 원인 제공자는 진중권이지요. 이규태의 글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어야 하는데, 큰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추상적 용어들을 비판에 끌어 들임으로써, 이와 관련한 논란이 핵심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놓았으니 말입니다. 남의 다리를 긁으면 시원한가요?

아랍이 혹서와 혹한만 교차하는 지역이 맞는지, 맞다면 그런 기후가 정말로 단일한 사고와 행동양식을 만들어 냈는지, 정말로 다양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정도로 호전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단일화 되어 있는게 사실인지를 두고 따졌어야 옳았다고 봅니다.

충돌의 순간에 인샬라라고 외쳤을거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추궁했어야 했겠지요.

진중권이 이규태를 비판하기 위해, '환경결정론'이니, '인종주의'라는 용어를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순간 논의의 촛점이 흐트러진 거라고 봅니다. 두사람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야 마땅했을 '911의 원인에 대한 상반된 시각'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환경결정론'이 옳으니 그르니를 두고 의미없는 쳇바퀴를 돌리게 만들어 버린 셈이지요.

일단 길을 잘 못들고 나면, 아무리 많은 단어들이 무한증식한다고 해도 별 쓸모가 없어진다는 점을 아셨으면 좋겠네요.
수정 삭제
청연님/ 동감입니다.
무위
06/04/21 [01:41]
진중권이 이규태를 비판하기 위해, '환경결정론'이니, '인종주의'라는 용어를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순간 논의의 촛점이 흐트러진 거라고 봅니다. 두사람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야 마땅했을 '911의 원인에 대한 상반된 시각'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환경결정론'이 옳으니 그르니를 두고 의미없는 쳇바퀴를 돌리게 만들어 버린 셈이지요---청연 =====> 이 부분의 지적에 100% 동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에서 괜히 이규태를 끌어들여 그것도 억지 논리를 주장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주간동아 같은 잡지에 진중권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이 정도(正道)였으리라고 말했던 겁니다.

이규태의 글이 논리에 맞지 않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 굳이 논의와 전혀 상관없는 '환경결정론이 고리타분한 이론'이며 또 '이규태가 인종주의'라며 폭언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이기현님이 자주 말하는 논점일탈의 오류이며 또 환경결정론은 고리타분한 이론도 아닙니다.

제가 그 부분을 집중하여 파고 들어 진중권이 얼마나 무식하여 용감한가를 말한 이유는 '진중권현상--뭘 모르면서 전문가들의 영역에 나서서 폭언을 해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일환이었습니다.

물론 아마추어도 나설 권한이 있고 또 요즘에는 그런 기회와 영역이 많이 주어지고 있는 환경으로 바뀠습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상태로 '폭언'까지 하는 현상은 뭔가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모르면 자신이 좀 잘 알게 될 때까지 그 추이를 관찰하는 것도 일종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수정 삭제
이기현님/ 나라야마 부시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닙니다
무위
06/04/21 [02:04]
이기현님은 민화(民畵)나 풍속화가 그 사회의 풍속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는 단순한 예술작품이상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혹시 이기현님은 일본의 민화 중에서 산모가 (쌍둥이?)애기를 낳은 후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먹을 것이 부족해서 이런 참화가 일어났으며 그 풍속화는 그걸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도 KOTRA 홈피 나고야 무역관에서 우연히 본 그림인데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여 드릴려고 찾았는데 지금은 없군요. 아마도 그간 모아 두었던 자료들을 책으로 발간하느라 편의상 삭제를 한 모양입니다.

대신 『일본문화와 비즈니스』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http://www.kotra.or.kr/unicenter/notice/TC270S.jsp?inpt_no=36¬i_cd=177&page=1&search_gbn=ttl&search_txt=%C0%CF%BA%BB%B9%AE%C8%AD&world_cd=9100

제가 환경결정론이 인종주의로 이용될 측면이 없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칼을 예로 들어서 사용하기 나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환경결정론을 자세히 알면 알수록 인간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사실에도 천착하게 됩니다. 쓰나미나 카트리나 같은 자연 재해도 인간의 오만함에서 오는 자연파괴에서 오는 보복이라는 경종도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위대한 존재라고 하더다고 해도 자연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거죠. 서구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수탁자로서의 인간관>이 자연환경의 파괴를 가속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이에 비해서 <무위자연>사상을 축으로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노장사상은 환경에 비해 인간이 우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경결정론과의 새로운 접점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결정론에 대한 일종의 재인식이지요. 이처럼 학설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다른 색채를 부각시킬 수도 있습니다.

북극 등 추운지역에 사는 곰은 따뜻한 지역에 사는 곰에 비교해서 몸집이 훨씬 큽니다. 이건 환경과 유전자 풀(pool)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상관고리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유전자에 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가 될 만 하지요. 아시겠지만 북극곰의 몸집이 큰 이유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체온은 대부분 피부로 발산이 되는데 작은 몸집은 피부껍질과의 비율이 너무 비슷해서 체온보존에 불리하고 큰 몸집은 덩치에 비해 피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관계로 체온 유지에 유리합니다. 환경결정론 아니 환경의 힘은 이렇게 큽니다.

기타 ........

청연님의 지적대로 진중권이 '근거없는 비약과 논점일탈'(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일이 참 많았지요)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p.s)참고로 저는 문명비평도 하지만 문화비평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에 관해서 적어도 10~20여권 정도의 책을 발간할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와 씨받이 글에 진중권의 이름은 단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고 있을겁니다. 자꾸 진중권 이야기 하면서 내 글의 질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진중권이 싫고 질이 낮다는 말이 아니라 남을 비난하는 목적이 주목적인 글은 대체로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KTF 서비스센터인데, 어쩌구 저쩌구
DMB 폰을 공짜로 드릴테니 어쩌구 저쩌구
xxx xxx xxxx 번호 맞으시죠 어쩌구 저쩌구
성함이?"

내 이름을 묻는다.

"저를 어떻게 알고 전화 하셨죠?"

"KTF 서비스센터입니다.
번호 맞으시죠 xxx xxx xxxx
성함이?"

"생각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뚝.

 

아무리봐도 냄새가 나...
보통 서비스센터의 '누구'라고 본인을 밝히던데,
그리고  번호는 알면서 내 이름은 왜 몰라?
이름을 밝히면 주민번호도 물을 것이고, 주소도 물을 것이고...
뭔 짓을 하겠지...


내 안에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다.
어쩌다가... 이리 됐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산 2006-04-2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TF 요금 청구서에 보니까 KTF 사칭하고 이런저런 상업광고 하는거 다 가짜라네요.
그런 전화 종종 오는데, 그게 다 가짜라니....

라주미힌 2006-04-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ㅎㅎㅎ

하늘바람 2006-04-21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그런전화받았어요 전 솔깃했죠 하지만 공짜 아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