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몽고에 밥을 먹듯 매일 흙을 먹는 소녀가 있어 화제다.

27일 동포신문인 길림신문에 따르면 내몽고에 사는 우치파라치치거(19)라는 소녀는 7세 때부터 흙을 먹기 시작해 지금까지 3천근(1천800kg 정도)을 먹었다.

'보배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끼니마다 흙이 있어야 할 정도로 흙을 즐겨 먹는다.

그는 "한번은 강변에서 놀다가 갑자기 흙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한 입을 먹어 봤더니 맛이 좋았다"며 "그 후 호주머니에 늘 흙을 넣고 다니면서 먹고 싶을 때마다 먹었다"고 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에 놀란 부모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또 한번 놀랐다는 것.

부모는 우치파라치치거가 학교에 들어가자 담임 교사를 찾아가 흙을 먹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화장실 등에 숨어서 몰래 흙을 먹었다.

체격이 커질수록 먹는 흙의 량도 늘어났다.

그는 "하루에 적어도 2~3냥(75g~0.1kg)은 흙을 먹어야 하고, 많을 때는 2근(1.2kg) 정도를 먹는다"며 "흙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ghwang@yna.co.kr

 

 

흐...

먹을게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지렁이도 아닌데..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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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자린고비의 저렴한 마법

▣ 반이정 미술평론가 http://dogstylist.com

핀업(pin-up)의 시조가 된 40년대 리타 헤이워스와 50년대 베티 페이지는 본디지(결박)를 포함한 여하한 섹스어필의 총동원으로 핀업의 답안을 제시했습니다. 2차 대전 중 병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고안된 벽보형 자위 기구의 성능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벽 위에 큼지막한 여체만 덩그러니 매달아놓기가 무안했던지 깨알만 한 숫자로 ‘달력’을 만들어, 당당히 품질경쟁에 임했습니다.


풍만한 종이 글래머의 호객 행위는 다분히 남성 기호적이라, 자동차 용품 매장에선 신상품 엔진오일 교체를 선동했고, 선술집에선 주객의 엉덩이에 납덩이를 달아 몇 시간이고 붙잡아두는 실천적 역할도 했습니다. 핀업의 효험은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듯’으로 정리됩니다. 일테면 성인용 자린고비라 할 만합니다. 천장에 매달린 조기를 응시해 미각을 보상받는 자린고비의 저렴한 마법은 접촉을 허하지 않고도 욕망을 달래는 브로마이드 비키니 언니의 실체 없는 미인계와 일맥상통합니다. 선술집 고용주가 이 다부진 무급 여사원을 마다 않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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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4-2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 만 글 같군 ㅡ..ㅡ;
 

9시 40분 출근

1시간 신문 보기, 인터넷 하기

30분 졸기

이제 점심 시간까지 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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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4-2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칠 때까지 서핑^^
 
 전출처 : 릴케 현상 > 경상도 방언[중급] 강의(퍼온 글)

경상도 방언[중급] 강의(퍼온 글)


1. 단디 ~ 하다 (= do동사 + completely)
표준어로 "확실히", "분명히", "단단히"란 뜻.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상투적인 배려의 표시다. 부산/경남지역 20대 사이에 광역적으로 번져있는 관용구이며 서울사람이 한 번 맛들일 경우 정감 어린 새시대 새주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예제)
◆ 이번 시험은 단디 봐라.
◆ 추운데 옷 단디 입고 나가라.
◆ 미꾸자꾸 단디 메고 학교 잘 다녀와 : 주로 노인분들이 애용
※ 동의어 :학시리, 츨즈히, 메메 [me■e me■e]


2. 만다 그라노? 만다꼬? (= What"s up? / What"s going on?)
"왜그래?" , "그럴 필요가 있을까?", "쓸데없는 짓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화들짝 놀란척, 걱정하는 척하며 안면을 약간 찌그리거나 목소리를 구엽게 질질 끌면 걱정의 강도가 더욱 깊어진다. "만다꼬" 뒤에(!) 표가 붙으면 "다 부질없다"라는 등 극단적 해석도 가능. 실제로 부산지역 고교/대학사회에서는 짝사랑의 아픔을 이 한마디로 대신하기도 한다.

예제1)
A: 그 머스마가 니 마음에 안등다 그 카드나? 계속 꼬시보지?
B: 만다꼬. (옅은 한숨)
통상적으로 "만다꼬"는 부가의문문의 기능을 담당하여 시비조로 들릴 수 있으나, 때에 따라 연인사이에서 예술로 승화되는 모습도 목격된다.
예제2)
A: 가스나야 일로 쫌 와봐라.
B: 으은 ~ 다. 와이카노. 만다꼬 이라노 ~~♡
※ 동의어 : 갠히 그란다. 와 이카노 ~~♡, 어데 ~~?


3. 고마 쌔리, 마! (= shut the fuck up / Right away)
직설적이고 파괴본능을 감추며 살아가는 영남인의 인생관을 대변한다. 호전적이되 그 이면에는 여린 속살로 버팅기는 인간일수록 자주 애용한다. 20대는 주로 미팅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시험성적 저조할 때 사용하며, 그 밖에는 대체로 직접적인 폭력과 관련된 일부 거리의 시인들을 제외하곤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예제) 하! 칫나? 고마 구석에 쎄리 공가가 마, 칵~~마!
하! 이거 바라바라바라, 와 째리나?
이기이기이기 하! ....그냥 도망가면 된다.
※ 동의어 : 학! 쎄리 마!


4. 문디 (= dumb ass)
1,4 후퇴의 역사적 아픔에서 비롯되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생성된 문둥병 환자에 대한 속어이다. 그 후로 용어사용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다가 인기스타 강호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망을 타게 된 불멸의 역작이다. 현재는 동질환의 발병률이 상당히 낮은 관계로 가벼운 구박을 표현하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문디" 는 친구간, 가족간 회화시 사용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고, 연인사이에 통용되도 상스러움이 없다고 인식될 만큼 지역사회에서는 이미 굵직한 한 획을 긋고 있다. 어른에게 무단으로 사용하면 소정의 벌칙을 받게 된다.

예제)
◆ 문디 자슥아, 와 인자 연락하노? (애칭적용법)
◆ 뭉디 콧구멍이 王자다! (접속어용법)
◆ 생긴거는 문디 같아도, 아는 착하드라. (간접적 애교용법)
◆ 문디 꼭 지같은 생각만 하제. (3인칭 지칭)
※ 동의어 : 등씬


5. 우야꼬 (= What can I do ? / Oh my God !)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거나, 말못할 사정으로 신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이에게 본인의 동정심과 걱정을 전달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일식 우동을 연상하시겠지만, 역시 아니올시다이다. "우야꼬"는 표준어로는 "어찌할까", 혹은 "이걸, 어쩌나"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며 이미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친숙한 지역사회의 용어이다. 20대가 어떻게 이런 말을 쓸 수 있느냐. 환경지배론!

예제)
◆ 우야꼬, 내가 잘몬했데이 (감탄사적용법)
◆ 많이 아프나? 우야꼬~~(고통분담의 용법)
* 변형 :시상에, 아이구야, 바라바라


6. 머째이 머째이 사회자 머째이! (= MC is cool so much!)
멋쟁이, 멋쟁이에 비음이 첨가되면서 유행한 행사용 멘트. 유난히 애교 많은 경상도 아가씨들이 기분 UP될때만 쓰는 말. 여기서 사회자는 불특정 다수의 깔삼한 남성들을 이른다. 이 문장은 여교 앞 튀김집 사장님에서부터 서면, 남포동 나이트클럽 부킹 男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의 남성을 사용자 임의대로 지정할 수 있으며, 퀸카로부터 이 말을 들어야만 공식적인 직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예제)
◆ 아저씨, 멋째이네예


7. 그그는 그기고, 이그는 이기지....! (= A and B has a different general concert or circumstances)
부산사람들은 유난히 시끄럽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냉철함보다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저것 전후사정을 놓고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은 위 문장을 목숨처럼 애용한다. 이러한 어조는 시내 교통사고 현장이나, 부산지방검찰청과 법원, 각 관할 구청 및 종합병원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사용자의 감정상태에 따라 시비 가리기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목소리 큰 깍두기들 사이의 친목용어로 활용될 수도 있다.

예제)
◆ 이 바라, 자야, 친정은 친정이고 시댁은 시댁 아이가?
◆ 돈은 돈이고, 사람 목숨은 목숨 아인기요, 고마 합의 없으이까네, 포기하고
※ 동의어 : 어데? (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8. 으은~~다! (No.....well....mmm....is it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청춘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半거절형식의 문장이다. S+V+O+C 의 복문형식에서 주술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문장으로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말이 된다. 발전과정에는 어린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젊은 여성층에서 많이 사용한다. 가끔 좌석버스에서 애인과 통화하는 남성으로부터 이 문장을 접할 때가 있는데 경청하지 말 것! 신의 저주가 이런 것이다. 이 때 입을 쭈삐 내밀고 연음발음을 하면 더 귀엽다. 등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어도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남자들이 할 경우, 음폭을 최대한 중후하게 해야 멋이 난다.
주의사항 : 부산사람이 서울말 반에 부산말 반 섞어 이야기 한다면 면박을 주자. 누가 들어도 당신이 잘했다고 할 것이다.

예제)
A: 니 오늘 내하고 영화나 한 편 때리러 갈래?
B: 으은~~다, 고마 니하고 조용히 같이 있을란다.
※ 동의어 : 이라지 마라. (자기 너무 좋아 ~)


9. 내사 괘안타...(= It"s so feel sad or To be sorry)
가지기는 싫고 남 주긴 아까운 심정을 노래한 문장이다. 주로 나비처럼 날아온 여인을 놓쳤거나, 남정네를 다른데 빼앗긴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는 절대 안 괜찮다는 대의가 숨어있다. 수많은 아쉬움과 회한이 함축되어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외적으로 가끔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중년의 여인이 이 대사를 읊을 때가 있는데, 반드시 스토리 전개를 참조해가면서 문장을 파악해야 한다.

예제)
A: 니 저번에 금마 그거 양다리 걸치가 째짓다메? 어야노?
B: 내사 괘안타 (머릿결을 날리며...이미 지나간 일이야)


10. 밥 문나? (= How about these days? / How do you do?)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뜻. 영남 20대 지역사회인들의 일상에 가장 친숙하게 자리잡은 의미심장한 名文이다. 활용빈도가 높고 가치 함축적이라는 장점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코드로 자리잡았다. 특히 길이나 복도에서 누군가와 지나칠 때 이 인사말은 필수적인 인간미, 표현미의 상징이다. 최근의 근황을 묻거나 걱정거리가 어떻게 해결돼 가는지도 포괄적으로 질문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약속장소에서 연인이 만났을 때 처음 터뜨리는 애정표현 양식(내, 니 조타)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서울사람들은 월요일엔 원래 보고싶고....등의 미디어族 관용구로 공략한다.

예제) 연인을 만났을 때
A: 자야, 인자오나, 내 하나도 안보고 시픗따.
B: 대뽀까지 마라...(침묵)...밥은 문나?

"밥 문나"는 영남권 일상회화의 기본을 이룬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문득 친구에게 전화해서 활용해 보시라.
A: 팔봉아, 내 그 가시나 때매 미치삐겠다.
B: 그래? ...(침묵)...그래 밥은 무가면서 미치겠나? (그래....니 마음 다 안다)

※ 동의어 : 어데 가노? (어디 가는 길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묻는 것임을 명심할 것)


♧ 기타 약식 숙어
◆ 알라 오줌 만키로 : 갓난아기 오줌만큼 (매우 작은 양 = a little bit of)
◆ 됐다! 고마해라! : 이제 그만 좀 해둬! (이렇게 나오면 진짜 화난거다)
◆ 니 내 존나? : 사랑해, 니 마음은 어때?
◆ 맞나? : 오 그래?(상대방에게 장단 맞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낮게 발음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증거로 입증되며, 고음 처리하면 방정맞게나마 동의한다는 심정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역시 활용빈도가 높다.)
※ 동의어 : "~글나?", "진짜가?", "대뽀아니고" 이 밖에도 성격 좋은 척 하려면 "고마 웃기" 또는 "실실 쪼개기" 등의 언어 외적 기술에 승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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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4-2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데예(where)'하고 '은지예(when)'의 차이도 한번 연구해 보심이 어떨지. 그리고 9번은 아마도 '개안타'가 더 많을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복모음 발음이 잘 안되거든요. 저도 보리 문디라 이렇게 말해도 개안아요... ㅋㅋ

토토랑 2006-04-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지빼까리다 는 말도 비경상도 사람드링 들으면 재미있어 하더라구요 ^^
~, 이에? 하는것도 오랫만에 들은 말입니다.

하늘바람 2006-04-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상도 시낭 탓에 해석 가능한 말들이군요 첨에 단디라는 말이 얼마나 웃겼는지
밥을 먹어도 단디 먹고 옷을 입어도 단디 입고 ^^
 

비틀어진 사회의 이면, “내가 불안해!”
[오동명의 직격토로] 신중한 자의 악한 의도와 단순한 자의 선한 의도
 
오동명
 

 지하철에서였다. 저만치서 칠순쯤 돼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앉은 자들에게 구걸하듯 손을 내밀며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껌을 내 앞에 내민다. 2천원을 주머니에서 급히 꺼내 "괜찮습니다"며 껌은 받질 않았다. 할머니가 굳이 껌 두 통을 손에 쥐어주며 하는 말은 "내가 불안해" 였다.
 
시중가 5백 원짜리 껌 한 통에 두 배인 천원을 받아가긴 하지만 내 선입관과는 달리 무작정 구걸은 아니었다. 그 말 한마디 내려놓고 옆 자리로 또 손을 내미는 할머니를 줄곧 쳐다보게 되었다. 껌을 사주는 이를 보지 못했다. 저리 팔리지 않는데 적지만 도움이라 여기고 껌 대신 돈을 받아도 될 만도 하겠다 싶은데 굳이 손을 저어 사양해야 했을까? 할머니가 거스름돈 대신 내게 주고 간 “내가 불안해!”라는 말 한마디를 진종일 귀에서 벗어내질 못했다. 
 
 몇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만났다. 인왕산 자락의 옛 집을 올라가는 길가엔 텃밭이 있었다. 상추를 따고 있는 팔순의 할머니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 상추를 받아 2천원을 지불하려는데 할머니는 내게, 나더러 칼 들고 강도질을 하라 하지, 라며 역시 다른 봉투를 만들어 상추를 그득 담아주었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나는 내 얼굴에서 내내 웃음을 떠나보내질 않았었다. 아니 절로 웃음이 나왔더랬다.
 
 늦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뉴스를 들어보기 위해 TV를 켜려다 그만 멈췄다. 신문이 그랬듯이 TV 역시 정보는커녕 이마엔 짜증, 그리고 입엔 욕만 늘게 하니 오늘 할머니 덕에 웃을 수 있던 시간을 단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TV 대신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불안해!” “나더러 칼 들고 강도질을 하라 하지.”
 
 고작 천원 더 받는 일에 할머니들은 공히 겁을 먹고 있었다. 천 원을 더 받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했었다. 천 원이면 아이들 먹는 과자 한 봉이요 버스 한번 타면 다 써버릴 적은 돈이건만...
 
 불현듯 웃던 얼굴이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나는 우스개소설인 「돈키호테」의 이 글귀 하나를 가슴에다 밑줄 긋고 살아왔었다. 인용하면,
 
 ‘하느님은 신중한 자의 악한 의도는 두둔하지 않으시지만, 단순 무식한 자의 선한 의도에는 늘 도움의 손을 내미신다.’
 
세르반테스나 돈키호테의 희망이지만 나의 소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망은 언제나 허망했다.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믿어보려는 것은 소망이 팽개쳐지는 순간 방금 전 내가 손가락질을 해대던 자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신념도 아니요 의지도 아니요 할머니들처럼 그저 겁을 집어먹는 소심에 불과할 뿐이다. 이래서 잠시지만 할머니로 나는 웃을 수 있었던가. 
 
▲뻔뻔함이 당당함으로 치장되고 처벌은커녕 정당한 대접으로 치환되는 비틀어진 세상, 정말 "내가 더 불안" 세상이 됐다.     © 오동명


  이 세상에서 영원히 비호 받는 ‘신중한 자들의 악한 의도’는 이젠 과거처럼 극소수 가진 자만의 전유향유물이 아니다. 이들의 뻔뻔함이 당당함으로 치장되고 처벌은커녕 정당한 대접으로 치환이 되어지는 비틀어진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아이들까지)은 ‘악한 의도를 가진 잠재적 신중한 자들’로, 이들은 이러면서 하시라도 ‘악한 의도의 신중한 자’에 편입, 또는 편승할 준비를 하고 산다.
 
 ‘털어 먼지 안 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 해.’ 
 
 아마 할머니들은 이게 겁이 나고 두려웠지 않았을까? 이래서 천원에도 지레 겁을 먹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덧붙여 내가 듣는 소린 또 있다. 너 혼자 잘난 척 하지마라며 하는 진심어린 충고,
 
 ‘물이 너무 깨끗해도 물고기가 안 사는 법’
 
 고개를 저으면 진심어린 충고는 진중한 협박으로 옮겨온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나?
 
 언제부터 이런 속담들이 우리네 가슴을 옥죄여 왔을까? 누구의 의도에 의해 ‘단순 무식한 자’를 더욱 죄의식 속에 빠져들게 하고 말았나? 이런 류의 속담은 ‘신중한 자의 악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또 하나의 악한 의도인 줄 알면서도 나 자신 타협을 한다.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 이러자고.
 
 이래서 침묵을 하게 되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린다. 허나 이럴수록 더 공허해지면 그저 다시 꺼내드는 「돈키호테」. 그 두꺼운 책을 지루하게 읽다보면 문득 오늘 만난 돈키호테가 떠올려진다. 할머니였다.
 
  “내가 불안해!” “나더러 칼 들고 강도질을 하라 하지.”
 
 돈키호테를 보진 못했지만 할머니의 행색도 글에서처럼 그와 비슷하다. 다시 깔깔깔 절로 웃게 된다. 돈키호테가 그랬을 것 같은 웃음으로. 이렇게 웃을 때 마음은 전혀 공허하지가 않다. 「돈키호테」를 굳이 꺼내 읽을 이유가 없다. 길에서 돈키호테를 자주 만나고 싶다.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돈키호테를 만나면 가슴으로 화들짝 웃을 수 있으니까! 잔망스럽다 해도 좋다. 
 

 

2006/04/26 [08:01]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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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2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