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동북단의 시아파 성지 마슈하드를 이륙한 항공기는 야음을 타고 서남 방향으로 황막한 카비르 사막과 이란 고원을 넘었다. 1시간 반 만인 밤 9시10분 고도 시라즈에 착륙했다. 시라즈는 자그로스 산맥 기슭의 해발 1468m의 높은 곳에 자리잡아 제법 시원한 느낌이다. 이튿날 아침 도심에서 이스파한행 간선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5리는 실히 될 먼 곳부터 높다란 석주가 우람한 공장 굴뚝처럼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차장, 매표소, 매점, 앞뜰은 명소답게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25년 전 찾았을 때 구질구질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으로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69~331)의 왕도였다. 이란인들은 ‘타크테 잠시드’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로 ‘타크테’는 ‘옥좌’란 뜻이고, ‘잠시드’는 이란 전설 속 왕의 이름이니 ‘잠시드왕의 옥좌’란 의미가 된다. 건국 초부터 ‘왕중왕’(샤한샤)으로 자처한 통치자들은 행정 중심지인 수도와 종교·외교 행사지로서의 왕도를 따로 두었다. 3대인 다리우스 1세도 수도는 수사로 정했으나 왕도는 페르세폴리스로 잡았다.

B.C. 518년부터 60년간 지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왕도
알렉산더군이 불질러 잿더미로

▲ ‘만국의 문’ 부근에 있는 돌로 만든 목우상. 구슬띠 장식을 두른 말 조각상은 오늘날 이란에서 페르시아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도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에 짓기 시작했다. 5대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기원전 469년께) 거의 완성되었으니, 약 60년 동안 지은 셈이다. 나지막한 라흐마트(‘자비’란 뜻)산을 등지고, 대지를 돋우어 만든 높이 12m의 인공 테라스 위에 터를 잡았다. 총면적은 약 12만 8천㎡(460×280m)에 달한다. 정면에 수림 우거진 마르브 다슈 평야가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닦아 계단식 건물을 짓는 것은 바빌로니아식 건축법이다. 일세를 풍미한 이 거대하고 화려한 왕도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동정군이 불을 질러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존(永存)을 꿈꾸던 철옹성은 18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유적은 무상한 역사 속에 2260년 동안 숨죽이고 파묻혔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대 동방연구소팀이 6년간 발굴하면서 비로소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다. 비록 일그러지고 빛바랜 재현이지만, 세인을 그 영화의 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 양쪽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牧牛像)과 사람 얼굴에 날개 돋친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 인면수신상이 나타난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이다. 짐승의 한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곧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그 길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이악스레 노려보고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아파다나 궁전이나 백주지(百柱址)에 이른다.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었다.

수많은 궁전 터와 독수리상
벽에 돋을새김한 조공행렬도…
화려한 문화 되살아나는듯

▲ 페르시아 제왕들의 암굴묘 유적인 ‘낙쉐로스탐’. 낭떠러지에 굴을 뚫어 제왕 4명의 무덤자리를 놓은 특이한 얼개다.

동물투쟁도는 동서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미술사가들은 그 원형을 이 궁전의 것에서 찾는다. 뱀이 거북을 감은 우리네 현무도의 발상원(發想源)도 관련지을 수 있을 성싶다. 아파다나 궁전에 나타난 목우와 사자, 투쟁도의 상징성에 관해서는 학계 견해가 엇갈린다. 목우는 겨울을, 사자는 여름을 대표하는 동물로 그들의 투쟁은 계절의 이동을 표현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은 우리 사신도에 등장하는 동쪽의 청룡을 봄, 서쪽의 백호를 가을, 남쪽의 주작을 여름, 북쪽의 현무를 겨울로 배정하는 동양사상과 상통한다. 그밖에 사자는 왕을, 목우는 적을 상징하므로 사자가 목우를 덮치는 것은 왕의 절대적 통치를 시사한다는 일설도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스키타이족 조공자들이 쓴 고깔형 모자다.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절풍모(折風帽)와 신통하게도 닮은꼴이다.

유지에서 가장 큰 공간은 사방 70m의 터에 100개 기둥 흔적이 남은 백주지(‘백주의 방’)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착공해 아들 대에 완성한 공간으로 알현장이나 회의장으로 추정된다.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지 한가운데의 중앙궁전은 회의실로서 동남북 세 방향에 문이 하나씩 나 있어 일명 삼문궁(트리필론)이라고도 한다. 북쪽 계단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회의 모습을 새긴 생생한 부조가 남아 있다. 동문 들머리에는 속주 신민들이 다리우스 1세의 옥좌를 받든 상들이 보이며 유지의 중앙 지점 바닥에는 사방 1m쯤 되는 검은 돌이 박혀 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3시간 동안 둘러보고 서북쪽 6㎞ 떨어진 낙쉐 로스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 ‘라비 타부스’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향긋한 꽃과 싱싱한 나무가 우거지고 물고기 노니는 연못까지 갖춰 운치가 있었다. 이란어로 ‘낙쉐’는 ‘조각’이나 ‘회화’란 뜻이고 ‘로스탐’은 전설 속 영웅의 이름이다. 한마디로 암굴묘군(岩窟墓群) 유지인데, 낭떠러지 암굴에 4명의 왕이 묻혀 있다. 암벽을 향하고 왼쪽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2세의 순이다. 다리우스 1세 외의 3기 묘주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 4기의 묘형은 기본상 동일하다. 묘실 표면은 십자형이고, 상부에 피장자의 상이나 묘비, 옥좌를 멘 이른바 ‘옥좌메기’상, 아후라 마즈다의 신상 등이 그려졌고, 하부에는 기마전투도가 부조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1세 사이의 높이 7m에 이르는 대형 ‘기마전승도’에는 260년 에데사에서 사로잡힌 동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말 위의 사산조 페르시아왕 샤푸르 1세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근에도 사산조 시대 왕들의 위풍을 보여주는 낙쉐 라잡 암각유적이 있는데, 대관식 장면과 성직자의 활동상 등이 그려져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유라시아 중심부에 우뚝 선 첫 세계적 통일 제국이다. 문화적 절충주의와 포용성을 표방하면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명 요소들을 섭취하고 조화시켜 소중한 인류 공동유산을 낳았다. 이 제국의 왕도 페르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문명의 모임터’로서 그 여진은 실크로드 동방의 한반도까지 미쳤던 것이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건축사 박물관 페르세폴리스
후대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

▲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촘촘히 이어진 옛 거석 기둥들의 풍경이 인상적인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서방 건축을 아우른 고대 건축사의 박물관이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기단부에 새겨진 23개 속국의 공물 봉헌 장면 부조는 유적의 주인인 페르시아가 이집트, 그리스, 인도 문명을 융합시킨 복합적 문명국이었음을 웅변한다.

건축사적으로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산물인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가 되었다. 페르시아 건축은 대제국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거대 열주들이 연속되는 양식의 구조물을 즐겨 사용했는데,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세운 뒤 그리스인들도 이를 받아들여 통치의 권위성을 과시하는 기념비적 양식을 만들게 된다. 아기자기한 신전 양식이 권위적인 대칭형 동물조각을 달고, 거대한 덩치를 키우게 되었고, 대형 기둥들로 채워진 홀 얼개의 시장 건축물 ‘스토아’가 유행한 것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종모양 기둥과 동물들을 그 기둥머리(주두) 위쪽에 결합시킨 페르시아 건축의 유풍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왕의 사자 석주 등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건축사가들은 페르세폴리스 건축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 그리스 양식과 애초부터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4세기께 소아시아 해안지역의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꾸준히 조공을 바치면서 유명한 이오니아식 기둥양식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1세가 세운 페르세폴리스 아케메네스 궁의 기둥 양식은 주두 윗부분의 소머리 장식을 제외하면 이오니아 식과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 이란 문화유산의 주요 상징이 된 주두의 동물머리 장식은 후대 헬레니즘의 장식조각에 차용되기도 했다. 시차를 두고 정치적 문화적 필요성에 따라 서로의 양식을 수용하는 그리스-페르시아의 실리적 건축교류를 증언하는 유적이 바로 페르세폴리스다.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군주와 문인들에게 영감과 향수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근세 유럽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영원한 왕도로서 동경의 도시가 되었듯이 중근동, 중앙아시아 지배자들은 페르세폴리스의 장대한 유적을 그리며 호연지기의 꿈을 키웠다. 16세기 영국 극작가 말로는 희곡 〈템벌레인 대왕〉에서 정복군주 티무르가 페르세폴리스 언덕을 말 타고 내달리는 야망을 안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고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들끓는 베트남 “이 치욕을 어떻게…”

<조선일보>의 베트남 결혼 중개업 르포가 보여준 우리 안의 인종주의
불법성 지적 없는 신데렐라 판타지에 주한 베트남인들 항의 기자회견

한국은 인종주의의 새 가해자가 되어가는가. 결국 문제가 터졌다. 지난 4월21일 <조선일보> 사회면 머리기사. ‘희망의 땅, 코리아로’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를 보고 한국의 베트남 유학생들은 격앙했다. 기사의 내용은, 기자가 베트남 호찌민시의 한 중개업체를 방문해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고르고’, 베트남 여성들은 ‘골라지기를 염원하는’ 맞선 과정을 생생하게 소개한 것이었다. 사실관계는 하나도 틀린 게 없었지만, 비판적 시각의 결여가 이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 이튿날 베트남 유학생 10여 명은 서울 대학로에 있는 시민단체 ‘나와우리’ 회의실에 모였다. 기사를 보고 수치심이 들었다는 학생들은 각자 한마디씩 쏟아냈다.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주오?

“베트남 여성이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국 남성과 결혼한다는 시각으로만 접근하고 있어요. 기분이 나빠요. 한국 남성도 부자가 아닌데. 한국에서도 가난한 생활을 견뎌야 하잖아요. 그런데 기사엔 그런 말 한마디도 없고….”

“텔레비전에서도 베트남 국제결혼을 재밌게만 다루고 있어요. 한국 남성 입장에서 좋은 면만 보여주는 거지요.”

“한국 남성들은 물건 사러 오는 것처럼 베트남에 와요. 사실 기사만 문제가 아니지요. 베트남 국제결혼 방식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에요. 한국 남성은 왕자고 베트남 여성은 신데렐라인가요?”

베트남 국제결혼은 다분히 ‘매매혼’적인 성격을 띤다. 대부분의 중개업체가 주관하는 결혼여행의 일정은 이렇다. 첫날 밤 베트남 도착, 둘째날 4시간 맞선과 신부 선택 그리고 부모와의 상견례, 셋째날 에이즈 및 정신과 검사, 넷째날 결혼식과 합방. 수속비는 800만~1천만원. 신부는 수십 명의 후보 가운데 남성이 직접 고른다. 베트남 여성에게는 후차적인 거부권이 있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한국 남성들이 불과 사나흘 만에 신부를 고른 뒤 백년서약을 맺는 ‘속성 결혼식’인 셈이다.

<조선일보> 기사는 이러한 매매혼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기사 위에 딸린 사진은 신부를 ‘고르고 있는’ 한국 남성 앞에 다소곳이 앉은 신부 10여 명의 얼굴을 모자이크 없이 비쳤다.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주오”가 사진 제목으로 박혔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이러한 결혼중개업 자체가 불법이자 성매매로 간주되고, 이로 인해 추방당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은 빠져 있었다. 한국인에게는 그저 신기한 결혼 과정일 수도 있지만, 베트남인에게는 모욕적인 신부 매매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균형 감각은 중요했다. 생각해보라. 1950~70년대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을 두고 미국 신문이 ‘희망의 땅, 아메리카로!’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 한국인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이날 유학생들은 시민단체 ‘나와우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자회견은 4월25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 앞에서 열렸다. 학생들이 손수 만든 피켓에는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기자회견에는 인터넷에 뜬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도저히 화가 나 참을 수 없어서” 찾아온 베트남 여성도 보였다.

베트남 국제결혼은 2000년대 들어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01년 134건에 불과하던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은 지난해 5822건까지 늘어났다. 5년 만에 43배가 증가한 것이다. 국제결혼 가운데 18.7%로 중국(조선족) 여성과의 국제결혼에 이어 두 번째 비중이다. 농촌에 가면 베트남 며느리를 보기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됐다. 2005년 한 해 동안 농림어업 종사 남성의 국제결혼 비중은 이미 35.9%에 이르고, 이 가운데 베트남 신부가 가장 많다.

<한겨레> 등에 이미 범람한 광고들

▲ 베트남 결혼 광고는 동네 어귀까지 치고 들어왔다. 광고에서 베트남 여성은 인격체이기보다는 교환가능한 상품으로 취급된다. 류우종 기자

“현실적으로 사나흘 만에 어떻게 상대방을 알고 결혼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신랑 신부가 모두 결혼을 원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니 통역이 필요하고, 떨어져선 통역이 안 되니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에 갈 수밖에요. 그렇다고 오랫동안 베트남에서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그런 방식이 나오는 거죠.”

베트남 전문 국제결혼 중개업체의 한 관계자는 현실적 여건을 들어 매매혼적인 맞선 과정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당국이 국제결혼중개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봄·가을에 일제 단속을 벌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선 외화의 유입 통로이기 때문에 묵인하는 측면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맞선을 감수하고도 결혼하려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수요는 넘쳐난다. 최근에는 베트남 결혼을 알선하는 개인이나 영세업체까지 난립하기 시작했다. 중개업체 관계자는 “현지 베트남 여성 모집업체와 관계만 트면 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거리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현수막 광고의 상당수는 이들이 설치한 것이다.

특히 신문이나 인터넷, 현수막에 실리는 광고에서 베트남 여성은 종종 상품화된다. 지난 2월 <한겨레>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베트남 신부의 장점- 혈통이 우리와 비슷하다(몽고반점이 있음), 일부종사를 철칙으로 하고 헌신적으로 남편을 섬긴다, 중국·필리핀 여성과 다르게 체취가 아주 좋다….’ 인권 침해 요소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수정됐지만, 이같은 광고는 거리와 인터넷 도처에 흩어져 있다.

유학생들의 문제제기로 촉발된 논란은 베트남으로 확산됐다. 베트남 관영 유력 신문 <뚜오이쩨>가 4월25일 한국인 구수정(<한겨레21> 전문위원)씨를 통해 관련 사실을 크게 보도하자, 잇달아 다른 신문들도 이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뚜오이쩨>는 4월27일 편집위원회 명의로 <조선일보>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뚜오이쩨>는 “스스로를 부자 나라의 부자 신문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나라의 가난한 여성들의 인격을 무시한 것 아니냐”며 베트남 여성과 베트남인들에게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베트남 결혼은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티키엣 베트남여성연합회 주석(공산당 중앙위원)은 4월26일 <뚜오이쩨>와의 인터뷰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베트남 여성을 상품처럼 대한 것을 보고 모욕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날 베트남여성연합회는 공안기관에 베트남 여성을 해외에 보내는 불법 결혼중개업체와 중개자들을 일망타진할 것을 요청했다.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언론에 해명하는 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안태성 대사관 공보관은 4월27일 전화 인터뷰에서 “4월26일 오후 베트남 외교부를 찾아가 이 문제를 두고 협의했다”며 “베트남에선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은데, 이 일로 그르칠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조선일보> 기자의 입장은 4월27일 전화 통화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긴 기사 속에서 굳이 왜 베트남 현지에서 불법으로 규정되고 있는 점 등을 언급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베트남 국제결혼은 불법이냐 아니냐는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면이 더 있었다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현지언론 보도, 외교문제 비화 조짐

▲ 4월22일 모인 베트남 유학생들은 기사로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이들은 항의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했다. 남종영 기자

베트남 국제결혼이 아무리 ‘매매혼’ 형태를 띨지언정 한국의 농촌 총각과 베트남의 메콩강 처녀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난다. 아이로니컬한 점은, 베트남 여성 대부분이 농촌을 떠나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한국행을 결심하고, 한국 남성은 농촌에서 빠져나간 여성 때문에 베트남 맞선여행을 결심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사회적 약자들이 공통적으로 국제결혼을 탈출구로 삼고 있는 것이다.

김정우 나와우리 사무국장은 “맞선 과정의 매매혼적 요소는 그 과정에서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직 법적·제도적으로 이들을 평등하게 맞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고, 더욱 큰 문제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남성-베트남/여성’으로 위계화된 시선은 국제결혼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예의’를 땅바닥 속으로 처박는다. 민족적 쇼비니즘과 남성주의가 결합한 시선은 결혼중개업체의 광고와 언론 보도에까지 스며들었다. 저개발국의 여성이 선진국의 남성을 만나 행복해진다는 현대판 신데렐라 신화. 이런 신화 속에서 만난 결혼은 평등할 수 없다. 새 인생을 출발하려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을 불행에 빠뜨릴 뿐이다. <한겨레21>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양국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부주이흥 베트남통신사 서울지국장이 말하는 국제결혼 문제 해법

▲ 부주이흥 베트남통신사 서울지국장
4월21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한국인과 베트남 유학생 모임의 시위는 베트남 현지 여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트남의 대다수 대형 언론매체는 이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주로 한국에서의 반응을 다루었고, 베트남 현지인들의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이것이 아마, 한국과는 다른 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베트남의 여론은 기사에서 다룬 한국 남편을 둔 베트남 여성의 이미지가 국제결혼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좋은 이미지의 나라에 가보기 위해서 한국 남편을 얻는 베트남 농촌 여성도 일부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일부일 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베트남 여성이 한국 남편을 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 남성들은 무엇을 위해 베트남 아내를 맞이하는 것일까? 가난한 아가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은 (한국 남편과 베트남 아내 모두) 따뜻한 가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를 찾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의 농촌 남성들은 국내에서 아내를 맞이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베트남에는 두 가지 여론의 흐름이 존재한다. 첫째는 베트남 농촌 여성의 이미지를 나쁘게 묘사한 기사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인의 자존심은 매우 강하다. 내 생각에는 이는 한국인도 쉽게 동감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둘째, 일부에서는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 문제에 베트남 정부가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한국이든 혹은 어느 곳에서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가 베트남 전체에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사실이다. 나는 양국 정부가 국제결혼 문제에서 불합리한 점들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 더 많은 베트남-한국 부부가 행복한 삶을 누렸으면 한다. 또 이 조처가 베트남과 한국의 우호 발전과 상호 이해에 기여하길 바란다. 이는 나와 같은 언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다. 해당 기사를 변호하기 위해 내놓았던 많은 이유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조선일보> 기자가 기꺼이 시위대와 대화를 하고 사과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부주이흥 베트남통신사 서울지국장 thangton221@yahoo.com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6-05-0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적으로 꼴통짓을 하는구만..
그게 또 한국의 모습일테고..
 


“빼지 마요, 혀 너무 좋아요.”

저예산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의 달콤한 흥행 비결…
혈액형과 우울증에 매달리는 캐릭터들, 촌철살인 대사 뱉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달콤, 살벌한 연인>의 흥행 돌풍이 무섭다. 9억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HD 영화가 2주 넘게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며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개봉 11일 만에 관객 120만 명을 돌파했고, 200만 명도 넘어설 기세다. 일부에서는 장기 흥행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예상을 깨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달콤, 살벌한 연인>의 흥행 비결은 무엇일까. 촌철살인의 대사발로 달콤한 웃음을 끊임없이 선사하면서도 살벌한 상황을 살벌하지 않게 만드는 특별함이 <달콤, 살벌한 연인>에는 있다.

죄의식에 무감하네, 살벌한 미나의 매력

<달콤, 살벌한 연인>은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30대 대학강사인 대우(박용우)가 수상한 이웃집 여인 미나(최강희)를 만나 마침내 연애에 골인하면서 벌이는 로맨스를 줄거리로 한다. 대우의 달콤한 로맨스를 방해하는 미나의 살벌한 비밀이 겹치면서 영화는 로맨스에 스릴러를 더한다.


△ 대우의 달콤한 로멘스와 미나의 살벌한 스릴러가 충돌하면서 <달콤, 살벌한 연인>의 재미는 만들어진다. 대우 역의 박용우(왼쪽)와 미나 역의 최강희.

<달콤, 살벌한 연인>은 스릴러의 골격을 빌려오지만 코미디의 재미에 끝까지 충실하다. 그래서 미나의 비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결정적이지 않다. 스릴러의 치밀함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살벌한 사연에 대처하는 연인의 자세가 중요하다. 미나는 엄청난 일을 수차례 저지르고도 마치 귀찮은 일을 끝낸 사람처럼, 좀처럼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앞으로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다짐을 할 뿐이다. 자신의 비밀에 대한 미나의 살벌하게 쿨한 태도는 관객에게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고 은근한 웃음까지 머금게 한다. 그리하여 스토리는 살벌하지만 이미지는 달콤한 영화가 탄생한다. 일상에는 어리숙하면서도 죄의식에는 무감한 미나의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상이다. 칼을 휘두르는 미나의 무표정한 연기에는 영화의 태도가 녹아 있다. 황진미 평론가는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섹스나 폭력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18세 관람 등급을 받은 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는 여성 킬러가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처벌도 받지 않는 이 영화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생각해보면 자명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연인들은 사실상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사람들이다. 대우는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연애를 해보지 못했고, 미나는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지만 남성성의 폭력에 막혀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의 연애는 사실상 첫사랑이다. 영화는 한없이 쿨하지만 첫사랑의 느낌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들에게 슬쩍 애절함까지 느끼게 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은 대중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가지고 논다. 혈액형, 별자리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대개 혈액형의 과학성을 믿지 않지만, 혈액형의 현실성에 굴복하게 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먹물’ 대우는 이런 상반된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미나가 혈액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식을 동원해가며 비웃던 대우는 결국 자신의 소심함을 “A형이라서”라고 말하게 된다. ‘우울증’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트렌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모든 일상의 위기를 우울증으로 몰아가는 정신과 진단에 대한 불신도 정확하게 포착한다. 투덜거리면서 정신과 진단서를 찢는 대우의 행동을 통해 우울증 만능처방을 조롱한다. 이처럼 지식인에 대한 조롱은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드다. 영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모르는 미나의 편에 서서, 먹물들의 세상을 은근히 조롱한다. 조롱하되, 대놓고 야멸차게 조롱하지 않는다. 언제나 코미디의 형식으로 포장해 은근하게 조롱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 관객에게 지나친 긴장을 요구하지 않고, 거부감을 주지 않는 비결이다.

발랄한 상상력, 먹물들을 은근히 조롱한다

무엇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을 보는 내내 재미를 선사하는 것은 ‘대사발’이다. 조금 지루해질 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의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고 영화에 흥미를 더한다. 대우는 자신에게 유치하다고 하는 미나에게 “그래, 나 유치해서 유치원 다녔고 유치하다고 유치장 갈 뻔했고 시인 유치환이랑 극작가 유치진 좋아한다”고 쏘아붙인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대사를 구원해 웃음의 코드로 바꾸어놓는다. 대사는 ‘시추에이션’과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키스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대우가 미나와 키스를 하면서 “이게 뭐에요?”라고 물으면 미나는 “혀요. 싫어요? 빼요?”라고 대답한다. 대우의 솔직담백하고 포복절도할 반응이 이어진다. “빼지 마요, 빼지 마. 혀 너무 좋아요.” 키스를 하면서 대사를 웅얼거리는 대우를 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감독은 대사를 통해 은근한 복선도 깔아놓는다. 대우가 미나와 첫날밤을 보내던 날, 미나가 “과거는 상관없는 거죠?”라고 묻자 대우는 “괜찮아, 사람만 안 죽였으면 되지”라고 대답한다. 연인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영화의 맥락 속에 들어가 서글프면서 우스운 ‘시추에이션’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감독의 재능은 영화 곳곳에서 빛난다.

최강희와 박용우의 캐스팅도 절묘하다. 상당수 장면에서 티셔츠 ‘바람’으로 밀어붙이는 박용우의 숙맥 연기는 자칫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최강희는 자신의 기묘하게 비현실적이면서 은근하게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극대화한다. 조연 캐릭터도 웃음을 더한다. 미나의 기묘한 동거인인 장미(조은지)는 단순한 감초 역을 넘어 영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한다. 대우가 미나의 비밀을 알아차리는데도, 미나가 비밀을 쌓아가는데도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게 반응하는 장미의 캐릭터는 <달콤, 살벌한 연인>에 의외성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대우의 보랏빛 꿈은 미나의 감춰진 비밀 탓에 실현되지 못한다. 그래도 영화는 비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쿨하다.

조은지의 독특한 캐릭터와 능숙한 연기는 장미의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장미와 미나가 땅을 파면서 나누는 대사는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달콤, 살벌한 연인들>의 제작사인 싸이더스 FNH 유화영 마케팅 팀장도 “예상을 깨는 반전, 캐릭터의 독특함, 캐릭터를 살리는 대사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흥행 비결로 꼽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저예산 영화가 가진 발랄한 상상력을 십분 살리고 있다. 장르도, 캐릭터도 적절하게 비틀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틀기는 새로움을 원하는 대중의 감수성과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다만, <달콤, 살벌한 연인>은 ‘적절한’ 선에서 비틀기를 멈춘다. 그래서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정말 엽기발랄한 그 무엇은 보이지 않는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6-05-0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기대기대.

마늘빵 2006-05-02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봤어요. 대박 재미 재미

아영엄마 2006-05-0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어요!! 남는 영화표 있음 던져주세용~ ^^

어릿광대 2006-05-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왠지 보구 싶어지내요. 이것이 바로 광고의 힘??

라주미힌 2006-05-0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소문이 너무 좋더라구용...
 


조선시대 섹시녀의 기준은?

날씬한 몸매가 이상형으로 뜬 건 일제시대에 연애가 강조되면서부터

규방에선 풍만한 여인을 선호했지만 기녀들에겐 ‘개미허리’ 기대하기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바로 ‘통념’이 아닌가 싶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지배자들이 갈망해온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통념이 되어 ‘당연하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그런 이념을 통념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들은 부지기수다. 지나가는 미국인을 아무나 붙잡고 미국이 민주국가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이 ‘그렇다’고 말하거나 당연한 이야기를 왜 물어보냐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상박하후’(위는 박하고 아래는 후한)의 여성을 보여준다. 풍만한 하체는 조선 후기 양반 여성의 자랑이었다.

미국을 민주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 왕국을 ‘인자한 성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인국(仁國)’으로 부르는 것처럼 지배집단의 명분과 현실이 헷갈린 것인데 이 사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다수의 미국인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지나가는 한국인들에게 국제 경기에서 우리 팀이 이길 때 가슴이 뿌듯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지”와는 다른 대답을 할 사람이 나타나려면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태극마크를 단 이들이 마크 색깔이 다른 상대방보다 골을 하나 더 넣는다고 1년에 국내에서 생계 곤란과 비관, 빚쟁이 독촉 등으로 자살하는 이의 수가 줄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왠지 가슴 뿌듯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 ‘왠지 절로’의 무서운 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면 모순에 찬 계급사회의 지속의 비결을 알게 될 것 같다.

유방은 산아능력의 상징이었을 뿐

‘미국은 민주국가다’와 같은 통념들이 세계관을 만드는가 하면 기존의 지배 관계를 은근히 정당화하는 수많은 통념들은 행동 양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 통념들을 정치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는 가장 정치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살 빠졌다”는 어느새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예뻐졌다”와 동의어가 됐다. 2001년에 코미디언 이아무개씨가 “운동해서 36kg을 뺐다”는 선언을 했을 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 빼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뿐이었으며 나머지에게는 ‘인간의 승리’로만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가 선전했던 다이어트 방법이나 뒤에 밝혀진 지방흡입 수술까지 대산업을 이루었다. 국내 다이어트 시장의 규모는 약 1조원, 즉 국가 총예산의 1% 가까이 된다. ‘뚱보’를 조롱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물론, 유아를 위한 동화책에서도 긍정적인 주인공은 보통 날씬한 반면 지능이 둔하거나 마음씨가 나쁜 인물과 동물들은 자주 뚱뚱하게 묘사된다. 젊은 남성이 살이 쪄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성은 어떤가. 남성의 관능적인 시선을 끄는 날씬한 여성이 바로 이상적 여성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남성들뿐 아니라 다수의 여성에게도 상식이 된 것은 비극이다. 자기 타자화의 함정에 빠진 자가 불평등한 지배 관계의 전복을 꿈꿀 수 있을까?

‘날씬한 여성의 매력’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봉요’(蜂腰·개미허리)를 섹시함의 절대적 조건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키가 큰 편이고 운동·다이어트 등으로 날씬해 보이는 여성의 몸이 이상형이 된 것은 일제시대 이후인데, 그전에는 어떤 것이 ‘아름다운 몸’이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섹시해 보이는 몸매가 과거에도 섹시한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구한말에는 여성들의 유방을 아이를 가진 서민층의 어머니들이 자랑하듯 노출하고 다녔으며 가슴은 남성을 흥분시키는 섹시함의 상징이 아닌 산아·육아 능력의 상징이었다. 한국·중국의 고전 한시 중에서 유방의 섹시함을 찬미하는 시가 한 수라도 있는가? 중동에서 연애시의 주된 소재가 여성의 가슴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섹시함을 보는 눈이 달랐다.

일제시대의 매체를 보면 여성의 풍만을 보는 시각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신문마다 “몸이 뚱뚱한 사람, 이렇게 고쳐라”(<중외일보>, 1930년 10월4일)와 같은 다이어트 이야기를 실어 ‘몸 마르는 방법’을 알리고, ‘뚱뚱보 조롱’(<별건곤>, 1933년 11월) 등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근대적 신체와 다른, 약간의 자연스러운 풍만을 보이는 신체를 조선 재래의 미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미녀 그림, 한-중-일의 차이

식민지 시대 화가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여인은 대개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각선미나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컨대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화가가 본 조선 여자의 미’라는 글을 연재했던 화가 이상범(1897~1972)은 “조선의 얌전한 처녀”의 이상형으로 “꽃동 저고리와 주름 곱게 접힌 치마”를 입은 풍만한 체형의 여성을 제시했다. 오지호(1905~82)와 같은 인상주의적 화가의 <나부>(1928)나 <아내의 상>(1936)을 봐도 마른 근대적 여체의 미와 다른 여성의 외형에 대한 관점을 보여준다. 특히 ‘동양 전통’이 좀더 강조되기 시작한 1930년대 말기에는 조선 화가들이 여체의 풍만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예컨대 서달진(1908~47)의 <나부>(1937)를 보면 ‘우리 재래’의 풍만한 여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것 같은데 오늘날의 미관(美觀)으로 봐서는 그 모델은 가혹한 다이어트를 해야만 할 것이다. 1945년 이후의 남한에서는 날씬함을 거의 절대시하다시피 한 19세기 말 이후의 구미 여성미의 기준이 무소불위의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된다.


△ 서달진의 <나부>(1937, 맨 왼쪽)에서는 풍만한 상반신이 인상적이다. 월북 화가 이쾌대의 식민지 시절의 <부녀도>(가운데)나 <부인도>(맨 오른쪽)는 하체가 풍만한 ‘전통 조선의 미’를 크게 강조했다

적당히 풍만한 여체는 전통 시대 기혼녀의 미 기준이었다. 매우 짧은(15~20cm) 저고리와 엉덩이를 한껏 부풀리는 아주 길고 폭 넓은 치마를 입는 것은 18~19세기 조선의 유행이었다. 더군다나 겉치마 밑에 너른바지와 다리속곳 등 7~8겹으로 속옷을 입었기에 하체는 더욱 풍성하게 보였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말 그대로 ‘위가 박해도 아래가 후한’(상박하후·上薄下厚) 인상을 준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풍만한 여체를 더 선호했지만,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은 조금 야윈 체형을 미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 절세미인 양귀비(719~756)가 풍성한 몸매를 자랑하고 헤이안시대 귀족들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일본 최초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1세기경)에서 가는 허리 이야기는 안 나오고 ‘보동보동 풍만한 여인’들이 주로 미녀로 묘사되지만, 10세기 이후의 중국이나 13~14세기 이후의 일본에서는 점차 ‘미인’의 키가 커지고 체형이 초췌해진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미의식만큼은 차이가 명확했다.

전통 시대는 여성이 신체 관리에 덜 신경써도 되는 시대였다고 해서 과연 ‘적당히 풍만한 여체의 미’는 여성의 자율적인 미관이었을까?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가정이 성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연애 이데올로기를 가진 근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각은 섹시미에 맞춰져 있지만, 규방이 대를 잇기 위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시대에는 산아·육아 능력이 있을 법한 풍만한 여인이 남성의 눈에 긍정적으로 비쳤다. 즉, 여성에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외형은 달라도 남성이 자신의 욕구를 여성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리고 전근대의 남성들도 성적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기녀, 유녀들에게는 “버들가지 같은 개미허리” “질끈 묶은 가는 허리”(이옥, 1760~1813: ‘일곱 가지 끊어야 할 일’)를 기대하기도 했다. 중국의 귀족 시인 사령운(385~433)이 ‘소요미골’(小腰微骨·가는 허리와 자그마한 뼈)을 미녀의 특징으로 주목한 뒤에는 동아시아 남성들에게 ‘가는 허리’는 하나의 성적 판타지가 됐다. 일본 유녀를 그린 에도시대 미인도들을 보면 이 부분이 눈에 띈다.

더 자연스럽게 살기 위하여

여성이 남성에게 사회경제적으로 억눌려 있는데다 남성의 이념이나 성적 욕구에 따르는 미의 기준까지도 내면화해 자기 신체를 알아서 뜯어맞춰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언뜻 보면 하찮은 일이지만 남성 본위의 획일적인 미 기준으로부터의 해방도 여성 해방의 일부분이다. 살 빼기는 ‘외모’가 아닌 건강의 문제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개개인의 주관적 관점이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아름답다는 생각이 사회의 ‘통념’이 되어 여성이 남성적 시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장징 지음, 이목 옮김, <미녀란 무엇인가>, 뿌리와 이파리, 2004.

2. 이배용 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9.

3. 임찬수, <겐지모노가타리>, 살림, 2005.

4. 강명관,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온다>, 푸른역사, 2001.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느 시대라도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는 이가 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이가 있을 뿐..."

 


망령같은 과거.
야수같은 미래.

안일한 집착도 무모한 도전도
선택 못하고 주저하는 순간이
하루 하루를 좀 먹는구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