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 프랭크 무어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leeks@jinbo.net


돈가방을 챙겨 달아나는 흰 가운의 생명공학자, 그를 따르는 거대한 흰쥐들, 잘려나간 손, 이름 모를 수많은 약품 더미와 무덤들, 그 위를 나뒹구는 실험용 장비들, 누런 돈더미 아래 깔린 희생자들의 피, 생체 실험에 희생당한 환자들과 해골... 이 무시무시한 생명공학의 미래상의 제목은 이름하여 <위저드>(1994)다. 1500년경 히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정원>에 비견할 만하다. 현대 의학의 묵시론을 이렇듯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름은 프랭크 무어다.

그는 근 20여년간 현대인간의 생물학적 부산물인 에이즈의 고통 속에서 살다 얼마 전에 작고했다. 에이즈에 걸려 48살의 나이에 스러질 때까지, 그는 몸소 현대 생명과학과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단체 ‘엑트업’ 산하 ‘비주얼 액트’의 초창기 맴버이기도 했다.

예술분야에서 생명공학은 그리 간단치도, 구미가 별로 당기지도 않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한때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기술적 세례와 더불어 디지털 혹은 넷 아트의 붐이 일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현실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무어와 비슷한 초현실주의 계열의 최근 주목할 성과라 하면, 알렉시스 로크만의 <농장>(2000)이나 에바 서튼의 <하이브리즈>(2000), 토마스 그런펠드의 <오誤결합>(1994)과 같은 작품들을 꼽을 수 있겠으나, 생명공학과 예술은 여전히 뭔가 낯선 관계임이 현실이다.

무어는 현대 질병의 고통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스스로의 비관적 모습에 갇히기보다 그 고통을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을 통해 현대의학과 공학의 살벌함을 얘기하듯 화폭에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마도 이는 그의 유년시절 공상과학SF 소설을 즐기고 생명공학에 관심을 갖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데뷔작이자 생명공학의 문제를 담은 <유전자변형식품(GMO)>을 내놓자마자 그만 에이즈에 걸린다. 우연치곤 너무나 기구한 삶의 여정이다.

그는 이윽고 유전자 구조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제레미 리프킨 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그만의 비판적 사회공학 접근을 키운다. 이 시기에 확고하게 자본과 생명공학/환경파괴의 불가분의 공생 관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그가 생산한 미술 작품들은 뭐뭐 ‘-연구’란 제목과 함께 그가 고민하는 자본과 생명공학, 환경, 인간의 관계들이 무슨 도식처럼 표현돼 있다. 특히, 그가 지닌 의료약품의 다국적자본에 대한 분노는 후반기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저드>나 <오즈>(2000)를 보면 항상 누런 황금색 돈더미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피의 대가 위에 올라선다. 특히 <오즈>에선 자본의 돈더미 위로 유전자 변형의 거대한 식물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2여년 간의 그림들은 90년대 초엽의 활동 작품에 비해 사회 인식의 통찰력을 보다 잘 반영한다. 당시 어느 작품 활동 시기보다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는데,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다가올 생명공학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담고 있다. 이는 소위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표현하는 미래상의 표현 방식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의 진지함을 보여준다. 소위 ‘매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장르는 예술 기법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어도, 보여주는 의미의 맥락은 관람자로 하여금 너무나도 현실주의적인 진지함을 공감하게 만드는데 그 성과가 있다.

2002년 4월 그가 작고하기 전 대담에서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쁜 환경에서 인간이 건강할 수 없듯, 탐욕과 착취의 나쁜 인간들이 판치는 곳에서 좋은 환경은 없다.” 이렇듯 그의 가치는 자본-생명과학의 불순한 동맹을 붓의 힘으로 강렬하게 전달할 줄 아는 힘에 있다. 작가는 이미 저 세상에 있지만, 작품들이 가질 의미의 생명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질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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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1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다음달제게 너무 필요한 자료네요. 정말 감사해요 담아갑니다

라주미힌 2006-05-15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하늘바람님 주제는 되게 다양해요~!!!
 

희망을 그리는 삽화가들 셋, 하퍼, 드루커, 그리고 사트라피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leeks@jinbo.net

이번 호 지면에는 현재 활동도 그렇지만, 앞으로 주목받을만한 아나키(anarchy) 계열의 두 인물과, 이 둘과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일상 속에서 정치를 그려내는 한 여성을 한 묶음으로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아나키’라 하면 흔히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뜻하는 말로 오해하는데, 여기선 의미의 긍정성을 따져 권위와 집중을 헤치는 힘으로 이해한다. 물론 아나키즘을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목표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인간 관계가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코뮨)의 구상에 있다.

아나키의 목표의 근사치에 서 있던 인물은 영국의 아나키스트 삽화가, 크리포드 하퍼(Clifford Harper)다.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13살 때 북부 런던의 학교로부터 쫓겨난 뒤로, 60년대 빈민운동에 앞장서 도시 빈집점거(squatting)와 코뮨 운동으로 실천 활동을 넓히고, 70년대 제도교육 없이 삽화가의 계열에 오른 독특한 인물이다. 『계급전쟁 코믹스』(1978), 『급진기술』(1974) 등으로 자신의 아나키즘에 대한 초기 의식을 그림으로 옮기다가, 『아나키』(1987)에선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와 삽화를 통해 그의 시각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가 지닌 펜의 질감에선 목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함과 날카로움, 부드러움이 동시에 감지된다. 코뮨의 이상을 그릴 경우 부드러움이, 억압과 비참에 대한 저항에선 강렬함이 온전히 살아 있다. 50대 중년을 넘긴 그는 아나키스트 책박람회를 조직하고, 소규모 독립출판업 운동을 주도하고, 영국의 진보일간지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그림을 싣는 등 아직도 예술과 실천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긴 하나, 도시 빈민, 빈집점거 등 현실 실천운동에 개입하며 삽화 창작을 해온 뉴욕의 젊은 작가가 하나 있다. 에릭 드루커(Eric Drooker)가 그인데, 「홍수!」, 「피의 노래」가 그의 대표작이고 현재 ‘더 프로그래시브’ 등에 삽화를 연재한다. 드루커의 주무대는 권력, 비인간성과 소외로 점철된 맨하턴 도시 한복판이다. 넝마꾼, 동냥꾼, 거지, 노숙자, 굶주린 아이,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흑인, 방독면 쓴 전경들과 곤봉 든 경찰,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경찰견,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끝없이 내리는 비, X-레이에 비춰진 뼈들로 표현되는 소외된 인간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자본주의의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두운 현실로 표현된다.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날아오르는 비둘기,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인간 태초의 전경과 원주민, 여성과 자연, 앙상한 인간들의 뼈 속에 감춰진 심장, 그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로 겹쳐진다.

흥미롭게도 드루커는 전미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을 매년 정기적으로 갖는다. 필자도 한번 구경했던 그의 공연에서, 드루커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입으로는 연사처럼 한 쪽에서 이야기를 풀고,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한마디로 온천지 동네를 돌며 구전을 전하는 입담꾼의 역할을 자처한다. 구경꾼들은 그의 슬라이드 시연에서 소외와 억압에서 인간이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확인한다.

드루커와 하퍼의 정치적이고 아나키적 만화와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이란 태생의 사트라피(Marjane Satrapi)라는 여성을 주목하고 싶다. 그녀는 프랑스에 살면서 그 곳에서 4권의 『페르세폴리스』란 책을 연재하고, 이를 영어판 2권으로 묶어 일약 스타가 된 여성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삽화가로 활동하던 그녀가 정치 만화가인 쉬피겔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성장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영어판 1권은 어린 유년시절 겪은 이란 혁명과 이란과 이라크 전쟁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유럽의 유학 생활과 고국에서의 결혼과 이혼 생활을 그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년 시절의 눈과 마음으로 권력을 바라보고, 역사와 혁명을 보고, 이란의 남성주의를 대한다는 점이다.

전혀 실천가라고 할 수 없는 사트라피의 유년 성장기에서, 독자는 수없이 많은 뉘앙스와 모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란의 검열사회 속에서 웃지 못할 행태들, 남성의 위선들, 거리에 즐비한 혁명전위대들의 검열들(화장, 머리에 쓴 검은 천과 옷모양새), 파티의 검열, 밤늦은 군인들의 습격과 고문, 총살, 가두시위, 그리고, 종교 사회 속의 미국 소비문화 등이 일상 속에서 흥미롭게 진술된다. 사트라피의 책은 이론을 얘기하고 실천의 대의를 주장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살면서 겪었던 한 소녀의 느낌 그대로다. 앞의 드루커와 하퍼의 강한 남성적 그림에 비교하면, 그녀의 만화에는 겉보기에 단조로운 일기식의 여성적 문체 외에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그저 일상의 서술로만 읽히지 않는데 그 매력이 있다. 독자들은 그녀의 글에서 아랍의 얼룩진 정치 문화, 인간의 허울과 욕망, 뿌리깊은 남성성 등을 뼈저리게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들 독자들에게 삽화가라 하면 작가 다음의 서열로 인식되는 느낌이 많다. 이들 셋처럼 자기의 독자적 글을 내 성공하기 전에는 전혀 인지도가 없기 마련이다. 이들은 삽화의 지위를 글 이상의 반열에 올렸고, 게다 만화를 통한 정치 학습에 크나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비록 이들 셋은 언어 코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틀리지만, 당대 사회의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잡지를 보다 발견하는 그들의 그림들은 대안이 불투명한 우리네 현실을 비추는 조명처럼 환하다.
 
 
 
   페르세폴리스
 
 
 
 


관련 페이지

Clifford Harper : http://www.agraphia.uk.com/home.html
Eric Drooker : http://www.drooker.com/
Marjane Satrapi : http://www.randomhouse.com/pantheon/graphicnovels/satrap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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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집단 지능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하여

<네트워커> 2005년 12월호에는 집단 지능에 관한 글 ‘공유와 협업의 플랫폼 그리고 집단 지능(collective intelligence)’이 실렸다. 구글, 지식검색, 태그(Tag, 정보의 분류 방식, 주제어를 정해 꼬리표를 만들면 그 주제에 해당하는 자료가 동적으로 분류된다.) 등을 집단 지능의 모델로 거론하고 있다. 여러 매체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단 지능에 관해 이야기한다. 웹2.0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른바 협업 시스템에 기반한 집단 지능형 웹서비스에 관한 관심도 아울러 증폭하고 있다. 그러면 집단 지능형 웹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실체는 무엇이며, 지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실체는 없는데 모두들 그것에 기대려고 한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내의 인터넷 환경, 대중의 사고방식과 성향에 적합한 개념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 http://hochan.net

집단 지능은 ‘대화형 서비스’처럼 중독성이 강한 말이다. 집단 지능의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해 집단 지능의 한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경계는 확장될 수 있다. 이것은 양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한계란 경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넘어설 수 없거나 아주 어려운 것을 가리킨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보다는 경계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일반명사가 된 인터넷 카페를 집단 지능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떠한가. 대부분의 인터넷 동호회가 1년도 못가서 폐쇄되거나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보와 지식이 운영진(소수)에게만 집중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동호회는 집단 지능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도구의 한계를 파악해야 경계를 확장할 수 있다
댓글 토론 같은 것은 어떠한가. 토론은 대립하는 두 의견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장치(운영자)가 필요한데 댓글 토론은 그러하지 못하다. 댓글 토론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부정하고 장밋빛 가능성에만 매몰돼 있으면, 그저 끝도 없이 넘치는 쓰레기 더미에 방향제를 뿌리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 쓰레기장은 가령 포털 사이트 뉴스면의 댓글 게시판 같은 곳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개인 웹사이트나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게시판에서는 토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적은 이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토론이 가능한 까닭은 중재자(웹사이트 운영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댓글은 집단 지능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우선 오남용하지 않으면 된다. 내용과 관련이 없는 댓글은 뜬금 없으며, 원문을 보완하거나 교정하는 기능을 할 때에만 그것에 기여할 수 있다. 개인 웹사이트나 토론 게시판은 전문화할 때, 세분화할 때 오히려 거대한 집단 지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지능의 한계는 우선 검증 시스템의 부재다. 그러면 우리는 한계를 정확히 알고 헛된 망상 - 가령 완결된 형태의 지식을 기대하는 것 - 을 접는 편이 낫다. 이러한 부정을 넘어서기 위해 그것을 오히려 활용해야 한다. 그것을 발판으로 다른 가능성에 대한 경계를 확장하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절판되거나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의 내용이 온라인으로 제공된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을 위해 소요되는 비용과 노력을 감안한다면 오프라인에서 재출간하는 것이 공공의 차원에서는 더 유익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고된 노동이며, 이것을 인쇄하여 읽으려면 또 다른 비용이 소모된다. 완결된 지식을 갖추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기 보다는 완결된 지식으로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메타적 기능에 충실한 것, 즉 기존 지식의 스캐닝 기능에 충실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책 한권을 통째로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올리는 것보다는 책 백권의 요약 자료가 훨씬 유익하며 집단 지능을 구현하기 위한 인터넷의 활용도 면에서도 부합하다는 말이다.

집단 지능의 두 과제, 지식의 스캐닝과 경험적 지식의 축적
최근에 이사를 준비하며 무수한 부동산 관련 웹사이트를 많은 시간 동안 이용한 다음, 오프라인에서 실제로 매물을 확인하여 대조해본 결과, 내가 보았던 인터넷의 부동산 정보들은 거의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신 지식 검색에 실린 관련 답변들에는 유용한 것이 꽤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집단 지능의 가능성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개인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경험적 지식이 쌓이는 블로그 같은 도구의 내용들이 유사한 경험 주제를 지니며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는 태그는 경험적 지식이 집단 지능으로 변모하는 초기 단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로써, 집단 지능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이끌어냈다. 기존 정보의 메타 검색, 즉 스캐닝 기능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경험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모으는 것.

지식의 피라미드는 네 단계로 구성된다. 무수한 데이터들이 사막의 모래라면 그 중에서 선별된 데이터들은 정보 이전 단계인 유용한 데이터로서 하나의 벽돌이 되어 피라미드의 최하단에 놓인다. 그 위에 정보가 쌓이고, 그 위에 지식이 놓인다.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곳에는 지혜가 자리잡는다. 집단 지능형 서비스의 하나인 지식 검색도 넓게 조망하면 이러한 지식 피라미드의 형태를 띨 것이다. 집단 지능으로서의 웹이 단순한 지식 스캐닝에 그치지 않고 지혜의 공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들의 경험적 지식 때문일 것이다.

집단 지능의 지향점은 지혜
화이트헤드는《관념의 모험》에서, 사회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본능, 지성, 지혜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본능이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원초적인 경험적 습관이라면 지성은 그것들에서 유래하는 관념들을 논리적인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는 지적 활동이다. 본능과 지성 사이의 판단자, 즉 조정자가 지혜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전체에서 일부분만을 채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혜는 ‘지적인 체계와 그 체계로부터 생략된 것들의 중요성을 항상 대결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깊은 이해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본능-지성-지혜가 서로 융합하고, 그렇게 되면 전체가 그 부분에서 출현하며, 부분들은 전체 속에서 출현한다. 집단 지능의 궁극적 지향점은 지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의 본질이 무엇인지 -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 항상 묻고 대화하고 돌이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집단 지능, 또는 집단 지성의 최면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월간 <네트워커> 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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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5-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읽어보시라.. ㅎㅎㅎ

가을산 2006-05-1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궁금했던 주제인데... 저도 잘 읽을게요.
 

찾으시는 책은 어떤 종류인가요?

 

1. 고서 및 역사 (17.6%, 698명)

 2. 인문사회/자연과학 (24.2%, 958명)
 3. 예술/종교 (14.9%, 589명)
 4. 문학 (15.7%, 620명)
 5. 동화책 (27.7%, 1096명)

 

역시 절판이 빨리되는 인문 분야가 중고책 분야에서는 빛을 발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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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15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분야 절판 안될 방법 없을 까요

라주미힌 2006-05-1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재고 부담이 크다고 들었거든요... 힘들겠죠. 흡

마늘빵 2006-05-1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인문분야 책 많이 사는데도 그러네. (니가 산다고 절판 안되냐 퍽)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는 은근히 기대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의 치열함,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드라마틱한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소재의 특별함은 어찌됐던 영화로서의 매력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부분에 있어서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준다.



마야, 맥스, 쇼티, 섀도우, 벅, 듀이, 트루먼, 올드 잭
이 8마리의 썰매견들...
느무느무 똑똑하고, 사랑스럽다.
감독의 상상이 지나쳐서 '연기'를 하게 되어버렸지만,
'척척'해내고야 마는 동물들의 '연기'는 마냥 귀엽다.

남극에서의 탐험, 위기, 그리고 해소..
원인과 결과는 실제이고, 그 과정은 모두 허구여서 그런지
그 서사성이 평범하고 엉성해 미치겠지만,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묘한 교감은 흡입력이 있다.
혹한의 남극, 폭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먹을 것이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는
영화와 관객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교감이 된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인간들 사이의 우정 이상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영화는 가상의 화면에서 실제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펼친다.




[옥의 티]
남극인데, 입김이 나오지 않는다.
중간에 개와 싸우는 물개는 완전히 로봇이다..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었어야지..어설프다.
(화면 밖의 조련사를 바라보는) 개들의 시선처리가 미흡하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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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1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강아지 발 만져보고 싶어요

2006-05-24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