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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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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고가는데 심심하시긴요


라주미힌 2006-05-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일 거의 다 손 떼니깐 할게 없어요 ㅎㅎㅎ

가랑비 2006-05-2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부러워라. 나도 좀 심심해 봤으면.
 

온 국민의 필수 상식이 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의 역사… 벼슬길 거부하고 책만 읽던 혜강 최한기도 조선 남성으로 대접받았다

 

필자는 가끔 오슬로대학교를 찾은 한국 손님들과 대학교 부설유치원을 방문하는데, 그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재학생들의 자녀라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한국 손님들은 충격을 받는다. “학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렇다. 평균 결혼 연령은 노르웨이와 한국이 27~28살로 비슷하지만, 20대부터 이성과 동거생활을 하는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학생으로서 동거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장래 보장도 없는데 뭘 믿고?

국내의 일상적인 가치관으로서는 남자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동생활은 ‘모험’으로 인식되는 것은 물론 무일푼의 남성을 지속적인 파트너로 택하는 여성의 결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사진 안)은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이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재산 계급에서 ‘성공’이 보편적 철학이 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취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장래 보장도 없는 사람인데 뭘 믿고 운명을 맡기나?” 물론 국내에도 캠퍼스 커플이 많지만 대학 시절 연애에서는 상대인 남학생을 완전한 성인인 ‘어른’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남성은 군대에 갔다 와서 남성 사회의 조직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무엇보다 가족 부양 능력자다.

물론 자본주의로 막 이행하는 동유럽 사회에서 남성의 경제력을 따지는 분위기는 한국보다 더 강할 수 있다. 한국 여성에게 결혼 상대자로 무난하게 꼽히는 직업 중 하나는 안정성과 가르치는 이로서의 ‘품위’를 두루 갖춘 교사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단체에서 적은 활동비로 자신의 꿈을 키우는 남성 같으면 한국 사회에서 괴로울 때가 많다. 이것은 복지 결여나 경제동물 되기를 강권하는 경쟁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어렵게 만들어 부양자로서 남성의 위상을 높인 성차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부르주아 사회에서 굳어져버린 ‘진짜 남자’에 대한 인식의 연장이다. 베스트셀러 처세서들은 물론,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기리고 성공과 경제력을 연결시키는 매체는 ‘실력가’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여기쯤에서 필자에게 질문이 날아올 것이다. 계급사회치고 남자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그렇다. 보수주의자들이 ‘선비 정신’을 들먹여 조선시대 지배계급을 도덕군자로 그리지만, 이것은 ‘날조된 전통’의 표본이다. 퇴계 이황 등 성리학 대가들을 다 사귀어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선비 미암 유희춘(1513~77)의 생활 기록인 <미암일기>를 봐주시기를. 임금에게서 받는 녹봉, 동료 벼슬아치와 교환하는 선물, “군사 몇십 명을 보내 농장의 관개시설을 만들어달라”는 식의 지방관들에게의 부탁이 기록돼 있다. 안빈낙도도 하나의 이상이었지만, ‘제가’(齊家)라는 당위적 이념부터 어느 정도의 경제성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재(理財)에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도 남성이 취할 수 있는 도리였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혜강 최한기(1803~77)는 벼슬길에 나서라는 영의정의 권고도 거절하고, 재산을 도서 구입에 다 쏟아부어 노년에는 자신의 책을 저당 잡혀 먹고살았다. 그렇다고 책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동류 사회에서는 실패한 남성으로 보지 않았다.

역시 초기 개화파의 길라잡이이자 매천 황현의 스승 격인 추금 강위(1820~84)는 가난한 무인의 집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지냈지만 자신을 시와 문장의 귀재로 인정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벼슬 청탁을 하지 않았다. 혜강·추금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고, 최신의 중국 저서를 모으는 벽에 빠진 ‘미치광이’들도 조선 사회에서는 진정한 남성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남자 노릇하는 방법이 다양했다고나 할까.

1870년대 일본에서 절실했던 <자조론>

물론 근대가 밀고 들어왔다고 해서 조선 말기 무일푼의 시인, 사상가의 부류가 멸종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1880~1939)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1901~89)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돈과 관계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패턴들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근대적인 유산계급의 지배적인 남성상은 전근대 호남자(好男子)들의 불기(不羈·옭매이지 않음)와는 달랐다. 최근 새롭게 번역돼 한국 서점가에서 인기를 끈 근대 처세서의 원조 격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금세의 성서(聖書)’로 일컬었던 새뮤얼 스마일스(1812~1905)의 <자조론>의 초기 번역인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이었다. 1871년 처음 나와 출판 직후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이 책은 그 뒤에 수십만 권이 팔린 것은 물론, 문부성(교육부)에 의해 윤리 교과서로 지정돼 전국 학교에 배분됐다. 근대 국민국가 역사상 외국 처세서에 그 정도의 국가적인 예우를 해주었던 경우가 또 있는가?

그런데 문부성이 스마일스의 ‘모범적 인간’ 이야기를 중세의 효행도(孝行圖) 모양으로 아예 판화로 찍어 소학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스마일스에 의하면, 사업가·관료·학자가 아닌 근면하고 성실한 장인도 성공할 수 있고, 이 일은 가치 있는 인간이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재운과 재간이 좋아 돈 많이 번 부자나 고관대작도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지만 제한된 월급으로 사는 근면·성실·근검한 모범생형 노동자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안정된 소득 획득이라는 형태로 편입되고, 개인 성공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집단 저항이나 직업윤리를 위반하는 게으름 등 체제 부정 행위만 하지 않으면 스마일스가 인정하는 진짜 인간, 즉 ‘진짜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로 첫발을 내딛고 자유민권운동부터 농민반란까지 온갖 집단행동의 화염에 둘러싸인 1870년대의 일본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책인 것이다!


△ 신채호(사진)는 근대 민족주의의 창시자이고 함석헌은 근대적 종교 민중주의의 대가였지만, 이들은 돈과 출세에 무관심했다. 그들의 생활 패턴은 혜강·추금이 대표하는 조선의 기인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망한 저항에 신경끄고 돈이나 벌라는 훈계는 일제와의 편안한 유착을 꿈꾸는 일제시대 조선의 재산 계급에도 필요했기에 <자조론>은 이미 개화기부터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1918년에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완역해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해방 뒤 경무부장으로서 친일 경찰 출신의 부하를 옹호했던 조병옥(1894~1960)이 “일제시대 먹고살기 위해 친일을 한 프로잡(pro-job)은 처벌하기 곤란하다. 다만 그 이상의 친일을 한 프로잽(pro-Japanese)이 문제다”라고 했을 때, 그는 본인도 모르게 그가 속하는 계급의 상식이 된 스마일스의 논리에 입각해 있었다. 제국이 조선민족을 말살하든 뭘 하든 나만이 성실하게 일해 월급을 받으면 문제가 없다라는 이야기다.

일제시대 ‘성공한 조선인’ 중에서도 <자조론>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 중 하나는 고급 친일파로서 강원도·함경도의 장관(도지사)을 역임했던 이규완(1862~1946)이었다. 그는 일찍이 박영효(1861~1939)의 식객이 되어 갑신정변(1884)때 민씨 대신들을 살육했던 행동대 출신이었다. 그 뒤 그는 장기간 일본·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소신 친일파 이규완은 그 ‘본성’을 개량하자는 의미에서 도 장관이 되어서도 작업복 차림으로 짚신을 만드는 등 ‘노동의 신성’을 실천했고, 부하의 자녀에게 양잠·견직을 가르치고, 퇴직 이후에 땅 매입·개간을 해서 4만 평이 넘는 농장의 주인이 됐다.

우리는 이규완의 인생관을 극복했을까

돈 모으는 비결을 물은 한 노동자에게 그는 “나무에 올라보라”라고 한 뒤 “이제 손을 놓아봐”라고 명했다. “손 놓으면 떨어지는데요”라는 대답에 이규완은 명언을 했다. “손을 못 놓지? 돈도 마찬가지야. 일단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비록 한 푼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마라. 모으고 또 모으고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한다!” 물론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말고 집에 오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훈계했던 이규완이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돈을 벌지 못하는 남자를 “천대받아야 할 노예나 거지”라고 불렀던 그의 기본적인 인생관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극복했는가?

일제시대 때 재산 계급 사이에서 보편화되고 6·25로 온 나라가 폐허가 돼 ‘성공’이 생존 문제가 된 뒤 온 국민의 필수 상식으로 발전된 경제력 보유자로서의 남성상은, 요즘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제2의 생명을 살고 있다. 과연 한국의 진보 진영이 ‘성공’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쿨하고 멋진 일인지 설득해 한국적인 ‘반문화’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참고문헌:

1.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사계절, 2003

2. <자조론>,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비즈니스북스, 2006

3. <이규완옹 백년사>, 비판신문사출판국, 1959

4. , Earl Kinmont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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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자 30명 1인당 330채씩 보유
[통계로 본 부동산 빈부격차②]정부정책, 암에 소화제 처방

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주택의 양적 지표를 정리해보면 집이 필요한 가구수가 100이라 할 때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집은 105채. 한 가구가 집 한 채씩만 갖는다면 다섯 채가 남아야 한다. 그런데 내집을 장만해 자기 집에서 사는 국민은 절반 밖에 안 되고 나머지 절반은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빈곤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도 기껏 두세 채 정도여서 서민들의 집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와 견줘도 ‘집 안심율’이 극히 낮고 ‘집 걱정율’이 매우 높다. 집은 넘치는 데 왜 이러는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 도대체 그 많은 집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주택소유율’ 통계라 할 수 있는 행자부의 세대별 주택소유현황(2003년과 2005년 두 차례 발표)에서 찾을 수 있다.

1,083 … 819 … 577 … 521 … 476 … 471 … 412 … 405 … 403 … 341
로또복권 당첨번호도 아니고 은행계좌 번호도 아니다. 우리나라 집부자 10명이 각각 소유하고 있는 집 수이다. 물론 집장사를 하는 임대사업자도 있지만 521채, 471채, 403채를 갖고 있는 4위, 6위, 9위 세 사람은 임대사업자도 아닌 개인으로 알려졌다.

이들 집부자 10명이 소유한 집은 모두 5,508채로 한 사람 평균 550채씩이다. 이들을 포함해 대한민국 최고 집부자 30명이 갖고 있는 집은 9,923채, 1인당 평균 330채씩 소유하고 있다. 1만 가구, 3만 명이 살 수 있는 집을 서른 명이 차지한 셈이다.

   
 

어쨌든 40여 년간 지은 집 1,300만 채 가운데 1만 채는 이들 최고 집부자 서른 명에게 간 것인 데, 이를 포함해 총 50만5천여 채를 집을 6채 이상 소유한 우리나라 국민(세대)의 0.2%인 4만세대가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0.07%인 1만 2천 세대는 한 세대 당 다섯 채씩 총 6만여 채를 나눠 갖고 있다.

10만여 채는 2만 5천세대가 네 채씩 나눠 소유하고 있는 데 이들은 우리나라 국민의 0.14%에 해당한다. 국민(세대)의 0.5%인 8만6천 세대는 한 세대 당 세 채씩 총 26만 채를 소유하고 있는 데, 이는 전체 주택의 2.3% 규모이다. 전체 주택의 12.9% 규모인 140만여 채는 국민의 4%인 72만 세대가 두 채씩 나눠 갖고 있다.

이들 5% 국민(세대)이 소유한 주택은 모두 237만 채로 전체 주택의 21.2%에 해당하며, 남은 집 78.8%, 880만 채는 국민의 절반 정도가 각각 한 채씩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국민 즉 전체 세대의 45.4%인 800만 세대는 집이 없어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이상은 2005년 8월 행자부가 건출물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주거용건물 중 개인명의에 대해 주민등록 전산망과 연계하여 분석해 발표한 <세대별 주택보유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요약하면 전체 주택이 100채라면 79채는 1가구 1주택자에게, 나머지 21채는 1가구 다주택자에게 돌아갔으며, 국민 절반을 차지하는 무주택자에게는 한 채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택 59.4%를 집부자 16.5%가 소유

그런데 행자부가 2003년 11월에 재산세 과세자료(2002.6.1 현재)를 주민등록전산망과 연계해 분석해 발표한 <세대별 주택소유 현황>을 보면, 전체 주택 중 1가구 다주택자들에게 돌아간 집이 훨씬 많게 나타나고 있다.

국민 절반은 집이 없고 나머지 50%의 국민이 집을 갖고 있기는 2005년 통계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재산세 과세자료에 나타난 바로는 전체 주택 중 1가구 1주택자에게 돌아간 것은 40% 정도이고, 나머지 60% 가까운 주택을 전체국민(세대)의 16.5%인 1가구 다주택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집부자들이 소유한 주택의 비중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 주택의 10.6%인 146만 채가 국민의 0.7%인 집부자 12만 세대에게세대 당 6~20채씩 돌아갔다. 전체 주택의 4.2%인 58만채가 국민의 1%인 17만 세대에게 세대당 다섯 채씩, 8%인 109만채가 국민의 1.6%인 27만 세대에게 세대 당 네 채씩 돌아갔다.

전체 주택의 13.5%인 185만 채가 세대 당 세채씩 국민의 3.7%인 62만 세대에, 23.1%인 316만채가 세대당 두 채씩 국민의 9.5%인 158만 세대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16.5%의 집부자들이 한 세대 당 적게는 두 채 많게는 스무 채 씩 전체 주택의 59.4%, 814만 채를 독식하였고, 나머지 주택 40.6%, 556만 채는 세대 당 한 채씩 국민 33.2%, 556만 세대에게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집이 한 채도 남지 않아 전체 국민의 50.3%인 841만 세대는 내집을 갖지 못하고 셋방에서 살고 있다.

결국 40여 년간 무주택 서민의 주거안정과 중산층 서민의 내집마련을 위해 공급한 1300만 채의 집은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게 아니라 집부자들에게 돌아갔다. 집부자들이 집을 두 채 세 채, 수십 수백 채, 심지어 천 채가 넘게 소유하는 가운데, 국민 절반이 내 집이 없이 셋방살이를 전전하고 있는 것이다.

집 없는 사람 많지만 집 많은 사람도 많은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지 않고는 집을 아무리 지어도 서민들 집 걱정을 덜기는 어렵다.

   
 

국민 40% 땅 한 평도 없는 데 20% 땅부자 국토의 85% 소유

부자들이 독차지 하기는 집만이 아니라 땅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국민(세대)의 40.5%는 땅이 단 한 평도 없고, 땅을 한 평이라도 가진 사람(세대)은 59.5%이다.

부자들이 독차지 하기는 집만이 아니라 땅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국민(세대)의 40.5%는 땅이 단 한 평도 없고, 땅을 한 평이라도 가진 사람(세대)은 59.5%이다.

집 통계에서는 전체 국민(세대)의 16.5% 집부자가 전체 주택의 59.4%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땅은 더 심해서 5% 땅부자가 63%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유지 기준 전체 국토의 3분의 1이 넘는 땅은 극소수 땅부자인 전체 국민(세대)의 1%, 18만 세대가 소유하고 있다. 국토 절반을 3%가, 국토의 4분의 3을 10%가 각각 차지하고 있으며 상위 20%가 85%의 국토를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15%의 국토만을 40%의 개미군단이 조금씩 나눠 갖고 있고, 그 보다도 못한 전체의 40% 700만 세대는 땅 한 평 없이 공중에 붕붕 뜬 채 철새처럼 뜬 구름처럼 떠돌며 살고 있는 것이다.

   
 

   
 

   
 

땅은 집보다도 훨씬 극소수 땅부자들에게 편중돼 있다. 행자부가 2005년 7월에 발표한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을 보면 최고 땅부자 100명이 소유한 면적은 1억1천530만평에 실제가격 보다 훨씬 못 미치는 공시지가로만 따져도 510억 어치에 이른다고 하니, 한 사람이 115만3천평씩 소유하고 있다.

세대별 소유 분포로 살펴봐도 얼마나 편중돼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땅을 한 평이라도 갖고 있는 세대가 대략 천만이 조금 넘는 데, 땅을 많이 갖고 있는 상위 100만 세대는 한 집 당 1만1,161평씩 갖고 있고 이들이 소유한 땅이 전체 국토(사유지)의 78.1%에 달한다.

중위권 400만 세대는 세대 당 909평씩 국토(사유지)의 21.2%를 소유하고 있다. 반면 하위 500만 세대는 한 세대 당 평균 23평을 소유하고 있고 이들의 땅은 국토(사유지)의 0.7%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자기 집 한 채 갖고 있어 갖게 된 주택 부지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집 당 평균 1만 1,161평을 갖고 있는 상위 100명을 뜯어보면 그 안에서도 격차가 심하다. 최고 땅부자 100명(상위 1~100구간)은 평균 122만 3천평을, 상위 101~1,000구간의 900세대는 세대당 40만 3,218평을, 상위1001~10,000구간 9,000세대는 평균 11만6,800평을 각각 소유하고 있다. 또 상위 10,001~100,00구간 90,000세대는 평균 3만 3천357평을, 상위 100,001~1,000,000구간 900,000만명은 평균 7천359평씩을 소유하고 있다.

   
 

땅부자 집부자는 서울과 경기도에 많이 산다. 특히 서울 사람은 서울 땅의 14배에 달하는 땅을 전국에 소유하고 있다. 경기․서울․부산 사람이 소유한 건물이 전체 건물의 57%에 달하고, 서울․경기․경북사람이 소유한 땅은 전체 국토의 44%에 달하고 있다.

집부자들은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에 몰려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에 11채 이상 많은 집을 갖고 있는 집부자 1만 4천여 세대의 3분의 1이 서울, 경기, 부산, 인천 등 수도권과 부산에 살고 있다. 전체 주택의 경우 11채 이상 집부자 중 서울과 경기에 사는 세대는 28%이지만, 11채 이상 아파트 소유 세대는 서울과 경기를 합쳐 54%에 달했다.

서울에서 11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한 2,450세대의 절반(45%)은 ‘강남-송파-서초구’ 등 강남 ‘부자구’에 살고 있었으며, 강남 부자구에 이어 용인과 분당이 11채 이상 집부자가 가장 많이 사는 동네로 나타났다.

   
 

부동산 소유 빈부격차 놔두고선 부동산 정책 공염불

물론 절반 가까운 국민이 땅도 없이 집도 없이 살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심지어 돌도 지나지 않은 영유아가 막대한 땅과 집을 갖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절반 가까운 국민이 땅도 없이 집도 없이 살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심지어 돌도 지나지 않은 영유아가 막대한 땅과 집을 갖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2004년 말 현재 스무 살이 안 된 미성년자가 소유하고 있는 땅은 모두 5,400만평으로 여의도 면적 21배에 달한다. 이 중 10대가 가진 땅은 4,200만평으로 여의도의 16배에 이르며, 열 살이 안 된 어린애가 가진 땅도 1,300만평으로 여의도 254만평의 5배에 달한다.

또 미성년자 소유의 건물도 전국에 3,500동 144만평이 넘으며, 특히 돌도 안 된 영유아가 가진 땅과 집도 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소유한 땅도 계속 늘고 있다. 2001년 외국인 소유 땅은 4,100만평이었으나 4년 만에 1,000만평이 늘어 2005년 현재 5,100만평으로 늘었고, 땅값도 17조에서 25조로 8조원이나 늘었다.

   
 

앞에서 엿본 몇 가지 통계에서 셋방살이 하는 국민이 43~50% 사이인 점을 감안하면 국민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만 자기 집과 땅이 있고 나머지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땅 한 평 집 한 채 없이 살고 있다는 점은 통계마다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 땅이나 집을 갖고 있는 국민 절반의 사람 대다수도 극히 좁은 땅과 집 한 채를 갖고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땅과 집은 극소수 땅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도 통계마다 일치하고 있다.

   
 

극소수 집부자 땅부자가 집과 땅을 대부분 독차지하고 있는 ‘부동산 소유의 빈부격차’야 말로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의 본질이며, 이것을 외면하고 세우는 부동산 정책은 공염불이다. 집이 넘치는 주택보급률 100%시대가 된 지 5년이 지나도록 점 점 더 꼬여가는 주택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극심한 부동산 소유의 빈부격차부터 개선해야 한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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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이에요 330채라니. 정말 너무하군요.

쿠자누스 2006-05-26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름끼치는군요. 외국에선 스위스 교수 하나가 150 채 굴리는 거 보았습니다. 다른 자본주의 나라 사정도 궁금하네요.
 
달콤한 죄악 - 뱀파이어 헌터 애니타 블레이크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6
로렐 K. 해밀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흔한 소재 중의 하나가 뱀파이어이다.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 대중문화의 영역 곳곳에서 등장하는 뱀파이어가 매력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힘, 그 힘은 근육에서 솟구치는 근력 뿐만 아니라, 성적인 매력 또한 주요한 요소이다. 인간을 언제든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마력’은 어떻게 보면 신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동경하는 힘이며 공포인 것이다. 지배하느냐 지배를 당하느냐, 인간의 두려움은 이중적이고 이기적이다.  

이 소설에도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좀비도 나오고 구울, 늑대인간, 쥐 인간 등 ‘포스트 인류’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곳은 인간들이 사는 도시.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은 비현실적이지만, 우리의 현실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 과연 모두들 인간적일까?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할까? ‘인간’을 위한 법은 비인간에게는 법이 아니다. 이 소설에는 뱀파이어가 인간 세계에 편입되기 위한 조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벗어났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제거’ 대상에 오른다.

인간들 중에 ‘제거’를 담당하는 자가 있으니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애니타 블레이크’, 그는 처형 집행자로 불리우는 뱀파이어 헌터이다. 제거와 제거 대상, 그 관계는 전복적이다. 두려움은 상호적이며, 죽음은 무작위적이다. 선빵을 날리는 자가 유리하고, 심장의 박동이 목까지 차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애니타 블레이크는 뱀파이어를 두려워하는 뱀파이어 헌터이다. 인간다움은 불완전함에 있기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는 에드워드는 터미네이터 같은 살인기계에 가깝고, 뱀파이어 보다 더 괴물답다.

애니타의 이러한 성향은 뱀파이어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매력을 애써 거부하는 ‘여인’의 모습처럼 비춰진다. 마초적 남성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아 남으려는 여성 말이다. XY염색체에 다가서는 순간 그녀는 무장해제 되어 버리니까. 헌터가 아니라, 헌팅이 되니까.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도는 바로 이것 때문에 적절한 긴장감이 있다. 공포와 동경, 사냥과 사냥감,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흡사 전쟁하듯, 연애하듯, 사냥하듯 팽팽하게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는 구도 속에서 소설의 매력이 발산된다.

이 소설은 딱 영화나 TV 드라마용이다. 한마디로 비쥬얼이 강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액션은 선명하다. 부담 없이 보고 즐기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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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2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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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씨날코 - 1959년 이기붕家의 선물 꾸러미
김진송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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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빨간 모자 아저씨가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들고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선물을 나누어 준다. 아름답게 보이는 이 연례행사를 약간 변형하고 싶어진다. 만약 1년 내내 빨간 모자 아저씨의 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바친다면,

그것은 선물일까?

어느 신문사에서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름과 물품 목록이 적혀있었다. 이기붕의 집에서 나온 것으로 매일 같이 많게는 하루에도 수백여명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면서 장부의 성격이 담긴 꾸러미였다. 그 물품 목록을 살펴 보면 백화점 진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갈비, 생선, 과일, 코카콜라 한 상자, 씨날코, 휘발유 세 드럼, 포플린 세 필, 아이스크림 세 통, 병아리 세 마리, 이불, 새우젓, 소금, 장미, 십자매, 진돗개, 빈대떡, 만둣국, 게장, 간장, 뎀뿌라, 꿩, 노루, 우장춘 박사가 보낸 '씨 없는 수박 세 통 등' 80p

사과박스, 차떼기, 트럭정도는 되어야 하는 요즘의 상황과 비교되게 당대 최고의 세도가의 집에 들어오는 물품 목록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이승만은 군림하고 있었으며 이기붕은 통치하고 있었다. 군림하는 대통령과 통치하는 이기붕은 자식마저 주고받는 근친교배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 자웅동체였다.” 268p

그렇다면 선물일까?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선물 경제는 시장 경제와 나란히 존속했으며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선물은 세계시장이 발달했어도 비 시장관계가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 관계는 역시 권력과 자본의 사적 소유를 위한 목적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와 횡령과 사기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의 주변에 있던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짓은 적어도 돈과 물자 있는 곳 근처에 얼쩡거릴 수 있는 특권이 있어야 저지를 수 있는 범죄들이었다.
권력의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으면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9p

그래서 뇌물일까?

황당하게도 저자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책의 의도가 아마도 그것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기대했던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회적 정황으로 봐서는 선물로 보기 어렵고, 뇌물로 보자면 너무 보잘 것이 없다라는 것, 심적으로는 의심이 가는데 증거로는 불충분한 종이뭉치 일뿐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제목처럼 선물로서의 ‘장미’와 뇌물로서의 ‘씨날코’의 경계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가 밝히길, “이 문서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식 장소의 출입자와 물품의 출납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라는 것이며,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방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붕의 집은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적인 장소였던 셈이다. " 40p

물품 자체의 의미는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그 물건들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공적 영역의 정치가 끊임없이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을 발견해 낸 것이 커다란 수확인 셈이다. 사유화 된 권력이 재생산되고 있었던 당대의 풍경은 말한다. 1959년 이기붕의 집은 한국의 무능과 부패를 일삼던 정치 부라퀴들의 이합과 집산이 곰비임비 이루어지고 있었던 허브(Hub)였고, 그것은 역사의 순간에 머물지 않는 연속성과 지속성을 갖춘 권력의 단면임을 일깨워 준다.

“모든 것은 권력으로 집중되어버렸다.” 315p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고 누구는 '있다'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뭐든게 궁핍했다던 그 때에도 물자의 배분 문제 여전했다.” 142p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는 권력과 물자의 집중화에 그 원인이 있다.
배분의 불평등, 권력의 집중화, 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든 일상의 폭력, 정치의 부패와 정부의 무능이 불러온 사회적 현상들은 신기하게도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꼬여버린 것일까. 어떻게 과거와 현실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로부터 응징을 받는다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과거의 야만은 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실이 되면 거부하는 단순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토론과 논쟁과 조정의 절차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이로우면 밀어붙이고 해가 되면 저지하는 야만적 절차에 수십 년 동안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정치란 매우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야만이 오늘 똑같이 보여주는 논리이다. 현재의 그들에게서 50년 전 과거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292p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행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이 보았고, 우리가 보고 있고, 누군가가 보게 될 익숙한 역사는 여전히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어이없이 ‘침목’이 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우리가 ‘침묵’하는 사람들, 현대사는 그렇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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