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608091504211&code=900307

축구의 ‘16’이라는 숫자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썩거린 지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사람들은 ‘1천만’이라는 숫자를 놓고 다시 떠들썩댄다. 군사문화와 산업화의 시대를 거치며 ‘한국 최고’나 ‘동양 최대’나 ‘세계 제일’ 따위의 첫째를 한창 숭배하던 국민이 이제는 큰 숫자에 도취되어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함성지르기를 좋아한다.

한국영화가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는 숫자적 성취는 얼마전부터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기준으로 당당하게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영화가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우리 영상문화의 이상적이고 질적인 발전을 과연 논리적으로 증빙하는가? ‘16강’에도 오르지 못한 축구를 위해 소모한 국민총체적 정력이 과연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의구심과 더불어 큰 숫자에 환호하는 군중심리 또한 우리의 문화적 건강성에 대한 의구심을 은근히 자극한다.

관객동원 1천만시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문화의 획일화와 편식 성향을 걱정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한국 사회의 쏠림현상은 사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가시화했다는 생각이다. 이념전쟁과 패거리짓기 정치가 국민을 계속해서 가축처럼 여러 울타리로 가두어놓는 과정에서 군사정권이 우민정책을 위해 체육을 진흥했다는 견해도 한때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는 국민 전체가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축구와 야구뿐 아니라 권투에 이르기까지 체육에 대해서 관심이 퍽 많았던 필자(한때 신문사에서 문화체육부장도 지냈음)가 거의 병적이라고 여겨질 지경의 사회적인 쏠림현상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몇 달씩이나 모든 텔레비전 방송이 올림픽 얘기만 반복하는 집단고문과 세뇌작업은 견디기 힘들었고, 과다한 국가 홍보에 질려 결국 체육행사 전반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게 된 소수파 한국인은 필자 이외에도 또 있었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런 쏠림현상이 이제는 영상문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많은 극장을 소수의 영화가 독점하는 공격적이고 폭군적인 배급 전략은 건강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병적인 문화비만증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영화에서는 예술성보다 대중문화로서의 기호(嗜好 및 記號)가 훨씬 더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본질은 상식이라고 하겠지만, 흥행에서의 성공을 크기와 규모와 숫자만으로 측정하려는 인식은 좀처럼 문화예술의 성장을 가늠하는 올바른 시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FTA의 식민통치 방식과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제패는 석권과 정복으로 점철된 서양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이며, 소수에 의한 다수의 종속화 또한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소수에 의한 시장의 독점은 사회주의 혁명을 간접적으로 촉발시키기도 했고, 지금도 사람들은 재벌의 횡포와 공평한 분배, 사회정의를 열심히 얘기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제 숫자를 놓고 떠들썩하게 좋아하지만 말고, 열광하는 함성과 환호의 휘저음에 익사하기 전에, 집단 백치화를 일으키는 문화비만증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큰 숫자로 성공한 소수가 힘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예술적 다양성을 고사시키는 풍토이다.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한다면서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단순화 작업은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를 우민화하여 사회를 전체적으로 퇴화시키는 현상이다. 군중심리와 집단사고의 계수를 놓고 발전의 척도로 삼는 행위란 그래서 위험한 짓이다. 생각하는 소수가 귀족화하는 한편 다수가 우민이 되기 때문이다.

1천만이 l년에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사회보다는 10만씩 골고루 분포한 관객이 저마다 100편의 영화를 보는 사회가 훨씬 예술적이다. 이런 문화선진화는 관객이 기여해야 하는 몫이다.

그리고 영화예술인들에게도 해야 할 일의 몫이 따로 있다고 여겨진다. 흥미진진한 할리우드적 대규모 구경거리도 좋지만, 한국적 기호가 담긴 예술의 언어가 다양한 표현으로 이루어져야 읽기의 깊이와 맛이 생겨난다. 전투적이고 우렁찬 함성은 과거의 산물이다. 큰 목소리로 진폭을 높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소리만 질러대면 발언자의 목청이 상하고 듣는이의 귀청도 상한다. 크고 작은 속삭임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화법이 아쉽다. 특수효과와 기술은 예술을 창조하는 수단이어야 하며, 희한한 구경거리만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기술은 마음과 머리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영화가 기술과 자금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국제경쟁력을 갖추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어떻게 얘기하느냐 하는 기술적인 차원은 어느 정도 자만해도 될 만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영화가 상영일수와 극장확보를 걱정하는 이유란 따지고 보면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설득할 한국적 영상화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안정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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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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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8-1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같아요

울보 2006-08-1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많이 이상해졌어요,,

하늘바람 2006-08-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이 이상해요

비연 2006-08-11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상해요. 연예가 중계던가, 이 영화 찍는다고 나왔는데..
정말 못 보겠더라구요. 완존 할머니.....
 

http://newsbbs.hanafos.com/view.do?list_id=159344&page=1&bid=cnt_best

 

밥맛 잃어버리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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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치만 씬씨티 보고서 전 더 밥맛이 없었어요.ㅡㅡ;;;;;
 

838383

 

 

숫자에 대한 집착...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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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6-08-10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38386

이매지 2006-08-1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38388
 

의사, 검사, 기업가, 준재벌 2세….

아나운서와 결혼하는 남자의 직업 목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7년의 연애 끝에 직업시인과 결혼한 고민정 아나운서가 특별해 보인다. 남들의 시선에 찌들어버리지 않은 부부의 생생한 사랑이 느껴지는 인터뷰.

“꿈을 이뤄준 시인 남편, 이젠 내가 그의 꿈이 되겠어요”

고민정(28세) 아나운서처럼 첫인상과 얘기를 나눠본 후의 느낌이 전혀 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라디오 녹음을 끝내고 나오는 그녀를 KBS 로비에서 만났을 때의 느낌은 ‘귀여운 다람쥐’ 같았다. 큰 눈과 조그만 입술 때문인지 20대 후반의 아나운서라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인처럼 느껴진 게 사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의 음성은 부드러우면서 낮고 침착했다.












한밤중에 라디오에서 듣고 싶은 약간은 허스키하면서도 사색적인 목소리, 방송을 들으면 들을수록 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비염 때문에 아나운서 그만둘 뻔하기도

목소리가 좋아서 라디오가 어울릴 것 같다고 하니 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나운서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입사한 후 교육과정에 들어갔는데 제 3분 스피치를 들어본 선배가 비음기가 많으니 병원에 꼭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나운서를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어떻게 입사했는데 여기서 끝내야 하나 두려웠죠.”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KBS 신입 아나운서들의 교육과정이 <인간극장> ‘마이크의 전사’편을 통해 방영되면서 그녀의 수술 얘기가 알려지기도 했다. 방송을 본 몇몇 이비인후과에서 전화를 걸어 다시 수술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여전히 목소리가 맑고 낭랑하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반응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묵묵히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갔다. 울퉁불퉁하다는 지적을 받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한 하이톤보다 침착하고 안정적이고 때로는 서정적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때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가장 큰 결점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목소리가 실은 가장 큰 선물임을. 이제 그녀는 독특한 목소리보다 ‘귀여운 외모’에 대한 아쉬움이 많다. 동안인데다 도회적이고 새침한 외모가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한정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사실 귀여운 외모에 애교도 많고 끼도 넘친다면 걱정을 왜 하겠어요.(웃음) 20년 넘게 안 해봐서 그런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편과 결혼한 후에도 애교를 부리질 못해요. <청춘! 신고합니다>라는 국군 장병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미안하기까지 했어요. 동생 같은 장병들에게 애교도 없이 너무 딱딱하게 진행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차라리 지적인 외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아쉬워요.”

고민정이 아나운서로서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바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지금도 <지구촌 뉴스>를 진행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은 게 아직은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녀의 ‘야망’이다. 롤 모델로 삼는 선배도 <시사투데이>를 멋지게 소화하는 오유경 아나운서와 카메라 앞에서 숨김이 없고 카메라 뒤에서 가식이 없이 한결같은 정용실 아나운서다. 귀여운 외모만 보고 노현정강수정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고민정이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2002년 가을. 3학년 2학기였는데 언론고시 준비를 시작하기엔 빠듯한 시기였다. 그때도 남편 조기영(39세)씨는 늦게 시작한 그녀의 공부를 차근차근 도와주곤 했다.

“그때까지 공부라는 걸 따로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님 너무 늦게 시작해서인지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말에 선뜻 ‘그래’ 하고 응원해준 사람이 없어요. 유일하게 저희 남편만 ‘너는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었어요. 종로에서 데이트하던 날 남편은 일민미술관 위 광고 전광판을 보며 ‘우리가 결혼할 때도, 저기에 뜨겠다. 아나운서 고민정과 시인 조기영이 결혼한다고 말야’라는 농담을 했죠. 그때는 정말 꿈도 꾸기 힘든 굉장한 일이었는데, 지금 현실이 되었다는 게 신기해요.”

그녀와 남편은 경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선후배 사이. 11살의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함께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졸업 후에도 이어지는 동아리 활동으로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고민정이 자신에게 ‘지식의 그릇’을 빚어주었다고 말하는 동아리는 소위 ‘노래패’로 불리는 운동권 집단.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이 좋아서 들어간 그곳에서 그녀는 사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남편 조씨는 같은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학교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대선배였다. 고민정이 반한 건 그가 방명록에 남긴 글씨였다. 조씨는 학교를 찾을 때면 과방에 있는 방명록에 후배들을 향해 인상적인 글귀를 적어놓고 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남편을 그저 존경하는 선배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감히’ 남자로 바라보지 못한 남편이 성큼 다가온 것은, 그녀가 동아리 회장을 맡고 힘들어할 때였다. 학생운동을 지지하지만 앞에 나서기엔 자신이 없는 여러 상황에서 조씨는 그녀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많은 조언을 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둘은 사귀자는 말 한 마디 없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00일도 200일도 챙기지 않고 지나가다 어느 날 문득 남편이 “우리 1년은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로 그들의 사이를 규정지었다고.

그때 고민정은 대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였지만 조기영씨는 이미 삼십대 중반이었다. 남편의 나이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한번 사귄다면 평생 같이할 진지한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귀자는 은근한 제안에 대한 대답을 일단 보류하고 열흘간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 그녀는 조씨를 평생 곁에 두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남편에게 제 마음을 따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귀기로 결정할 때만큼 진지한 고민을 이미 다 해놓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흔들려본 적이 없어요. 늘 결혼하자고 조르는 저에게 대학은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며 미루는 식이었죠. ‘대학 졸업하면 하자’는 말만 믿고 졸업했더니 이번에는 ‘네 꿈인 아나운서 되면 하자’며 또 미루는 거예요.(웃음) 남들은 제가 자꾸 결혼을 미룬 줄 안다니까요.”

그는 ‘꿈을 이룬 후에 결혼을 해도 된다’는 말로 그녀를 북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도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 빼고 한 게 없는 터라 막막했지만, 의외로 동아리 활동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 역사의식을 갖게 해준 터라 논술과 역사, 상식 시험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한 케이블 방송국에 쉽게 입사할 수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자마자 ‘늙은 연인’에게 달려가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남편의 대답은 달랐다. ‘이게 정말 너의 꿈을 이룬 것이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KBS 아나운서 시험에 총력을 기울였다. 시험을 준비한 지 6개월 후 KBS 30기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실린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해주겠다는 말에 졸업했고, 꿈을 이룬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말에 언론고시에 총력을 기울였어요. KBS에 합격하고 나자 이제 기다릴 게 없다는 생각에 오빠와 함께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죠.”

네 번의 시험 겪으며 변함 없이 지켜온 사랑

그녀가 KBS 아나운서가 된 이후 갑작스럽게 맞선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더 좋은 조건의 혼처가 많은데 나이도 많고 경제적 능력도 없는 시인에게 딸을 맡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이니까 신중해야 한다며 1년의 시간을 줄 테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죠. 그때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저를 믿고 결혼을 허락하겠다고요.”

그녀의 아버지가 조기영씨에게 점수를 준 건 고민정이 편도선 수술 때문에 입원했을 때였다. KBS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배들의 충고로 편도선 수술을 받게 된 그녀를 24시간 정성들여 간호한 것. 한시도 입원실을 떠나지 않는 그의 간호는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극진해서 장인, 장모의 점수를 듬뿍 따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1년을 더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대학 때부터 입사 준비할 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창원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게 되었죠.”

하지만 그 시간은 둘을 더 강하게 맺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별다른 연고가 없는 창원에서 일하는 그녀를 보기 위해 주말마다 남편 조씨가 내려와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1년이 지나서 더 굳은 마음으로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을 때, 부모님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정작 반대를 한 건 바로 조기영씨. 지방에서 혼자 외롭게 사는 것과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싱글을 즐기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 좀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2005년 가을이 돼서야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워낙 오랫동안 기다려온 결혼이다 보니 남편이 또 한 번 연기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제가 솔로 생활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고 일찍 결혼하는 데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려는 행동이었지만 내심 엄청 서운했어요. 서운함이 남아서인지 청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결혼 안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죠.”

어느 날 남편은 그녀에게 시 한 편을 내밀었다. 비로소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남편이 1년 전부터 써온 편지였고, 그녀를 향한 시였다. 원래는 바닷가에서 촛불을 켜고 프로포즈를 할 예정이었지만, 입사 초년병인 그녀의 스케줄이 꼬이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는 따뜻한 변명에 그녀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는 남편의 시라면 충분했다.

다작(多作)하지 않는 조기영 시인의 시집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살림터 펴냄)를 보면 시(詩)를 잃어가는 시대에 시인이라는 직업을 지키는 쓸쓸함과 진지함을 읽을 수 있다. 직업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음을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대학을 나와 취업한다는 것이 일종의 ‘생리적 현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 생리를 외면하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많은 고통을 수반해야 했다. 더욱이 그것이 시를 쓰기 위한 하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우면서 진부하기까지 한 생각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 中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무렵 조기영씨는 아내에게 취직을 하겠다는 말을 건넸다.

마침 아는 선배가 함께 일하자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다. 워낙 인맥이 넓은 남편이라서 그간 취직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직업시인으로 살겠다는 의지로 거절했는데 자신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이제껏 내가 꿈을 이룰 때까지 옆에서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주며 응원해준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의 꿈을 빼앗아선 안 되잖아요. 앞으로도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서 남편의 꿈을 빼앗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월급만으로도 두 사람이 살 수 있고 저금도 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젊은 여자들이 많이 모인 직장이다 보니 좋은 옷이나 물건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람이 물질을 소유해야지, 물질이 사람을 소유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남편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편해진다.

고민정이 바라는 것은 이제 하나, 남편의 새로운 작품을 보는 일이다. 최근 새로운 작품을 보지 못한 초조함과 이제 곧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함께한다고. 그녀가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헌신적으로 도와주느라, 창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오가느라 남편이 창작시간을 많이 빼앗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 창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단서를 많이 발견해서 흐뭇해요. 생각날 때마다 끼적인 메모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발견되거든요.(웃음)”

물질적으로 많이 누리고 사는 것보다 우리 부부가 죽은 후 한 권의 책이 남는다면 그것으로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애늙은이’ 고민정 아나운서. 조용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는 그녀의 사랑이 참 단단하게 느껴진다.

출처 : 우먼센스

박미혜 기자()/사진=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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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8-0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 길군... ㅡ..ㅡ;
이런 경우도 있구나...

마노아 2006-08-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대조적이네요. 때마침.^^

마늘빵 2006-08-1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름답다. 왜 기업가에 시집가는 연옌, 아나운서들은 진심으로 보이지 않을까.

라주미힌 2006-08-1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보다는 배경에 더 관심이 쏠리니까 그렇긴 한데... 결론도 뻔하잖아요. 대부분 이혼하고 ㅡ..ㅡ;

하늘바람 2006-08-1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정 인간극장서 보았는데 그때 노현정은 눈에 띄지도 않았어요. 참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