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때, 여성운동계 일각에서 박근혜 지지론을 주장했다. 남성 대통령으로는 여권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여성으로서는 우리 헌정 사상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박근혜를 지지하자는 것. 그 주장은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으며, 여성운동계 내부에서도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박근혜는 치마만 둘렀을 뿐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나 역시 박근혜 지지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박근혜는 연설할 때마다 “아버지”를 수십 번씩 외치며 금배지를 단 이후 줄곧 아버지의 후광으로만 살아온 ‘유신공주’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그 시기에 중요한 것은 ‘여성’이 아니라 개혁의 지속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여당 후보는 그간의 삶이 말해주듯 그 중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난 내가 틀렸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여전히 유력한 대선 후보 중 하나인 박근혜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중이다. 그가 나름대로 괜찮은 후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몇 개만 말해본다.

첫째, 박근혜는 여자다. 설령 그가 ‘치마만 두른 남성’이라 할지라도 그의 염색체는 엑스와이(XY)가 아닌 엑스엑스(XX)다. 이게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여성 대통령이 한 명도 없었다. 권력기구에 여성들이 참여한 비율인 여성권한 척도는 70개국 중 63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그간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가 이 시대의 과제라면 대통령 자리에 여성을 당선시키는 것만큼 시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둘째, 박근혜는 여자다. 현 대통령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개혁성’만큼 믿지 못할 건 세상에 없다는 거다. 난 더는 개혁적이라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보수 정치인끼리 정권을 주고받는 한 우리 사회는 바뀌지 않으며, 우리네 삶은 계속 비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진보세력이 아직 집권할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래서 이번에도 보수 정치인 중에서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면, 여성에게 표를 던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개혁성은 얼마든 변할 수 있지만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건 불변의 사실이니 말이다.

셋째, 박근혜는 여자다. 오랜 세월 여성들은 남자보다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지금 국회로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을 보건대,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능력이 아닌 기회였다. 소꿉놀이를 할 때 의사가 늘 남성들 차지였던 관례가 깨진 게 여성 의사의 비율이 늘어난 덕분이듯,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여성에 대한 온갖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이리라. 그래도 여성 하면 불안한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분들께 말씀드린다. 지금까지 대통령을 해먹은 남성들이 특별히 잘한 게 없다는 걸 인정하신다면, 이젠 여성에게 기회를 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의 저자 조선희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운동도 결국 권력을 나누자는 운동이다. 우리도 권력 좀 가져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여성운동은 여자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11년이나 집권한 대처 총리가 보수당 출신 매파고, 여성 같은 소외집단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해도, 그가 총리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국인들에게 여성 해방에 관한 교과서 10권씩을 읽는 효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이번주 월요일,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 박근혜가 특강을 왔다. 여러 가지를 고려 중인 후보를 눈앞에서 볼 기회였지만 가진 않았다. 솔직히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게는 그저, 박근혜가 여자란 사실이 중요하니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707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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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11-1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이에 따라서 글의 내용이 확 달라지는군요. 한겨레라서 그런지 댓글들이 '풍자'로만 보네요... 난 아닌데... :-) (그런 요소가 있긴 하지만)

stella.K 2006-11-1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근혜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마태님과 비슷한 맥락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총재직을 성실히 수행해 낸 것이 플러스 요인이 아니었나 싶네요.

2006-11-10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11-1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이시군요... 저 많은 팬들을 뒤로하고... :-)

Koni 2006-11-1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사상, 정책, 살아온 역사 등등 여러모로 맘에 안 들고,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타령하는 것도 싫고, 그러나 그가 대선에 출마한다면 반드시 한 표 찍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에 여자로 태어나서 일생에 한번은 여자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던져봐야 하지 않겠니'라는 심정으로요. 그런 기회는, 정말 쉽지 않으니까요.^^;

라주미힌 2006-11-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상정 어때요? :-)

가랑비 2006-11-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여성이 총리나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가 여성 해방에 관한 교과서 10권씩을 읽는 효과를 가져올까요? 그럼 파키스탄은 대체 왜 그럴까요?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권엔 여성 총리가 많아요. 어쩌면 대처는 스스로의 정치력으로 총리가 되었고, 부토는 아버지 덕에 총리가 되었기 때문 아닐까요? 바로 박근혜처럼.

라주미힌 2006-11-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는 '정치'가 '비정치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보구요. 여성의 정치참여가 부족해서라고는 보지 않습니당. 여성의 정치참여의 확대 필요성은 느끼지만, 그것이 박근혜(글의 의도와 상관없이..)가 되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여자 정치인이 그녀 하나뿐인가. :-)
그리고 진보정치의 미성숙함을 논하기 전에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부터 논해야 한다고 봐요.


ps. 근래에 이렇게 많은 댓글이 달린 적이 없었는데.. 역시 마태우스 효과 :-)

프레이야 2006-11-10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여성옹호론자다운 면이 엿보이는 역설적 글이네요. 마태우스효과도 대단하구요^^

마태우스 2006-11-1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효과^^ 라주미힌님, 전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노무현과 박근혜가 차이가 없다는 건 님도 인정하시잖아요? 근데 왜 박근혜는 죽어도 안되는 건지요. 이명박은 괜찮은가요? 단지 아버지 때문인가요? 하여간 이해해 주십시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입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정치에 대한 열정을 다 잠재워 버렸으니깐요.

라주미힌 2006-11-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준비가 덜 된 노무현도 대통령을 했는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이 노무현만 권력을 쥐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박근혜가 권력을 잡으면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 또한 권력을 잡게됩니다. 박근혜 지지세력이란 누굴까요? 보수 지지층을 말하는게 아니라, 박정희를 추종했던 '정치 세력'일 것이에요. 결국 마태우스님은 여성을 찍었지만, 박정희를 찍게된 결과와 유사할 것입니다.
게다가
박근혜는 '얼굴마담' 성격이 강하잖아요. 여자, 박정희 딸이라는 '후광' 빼고는 알맹이가 없다 느낌이 강하구요.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행보나 비전(들어 본 적도 없는 ㅡ..ㅡ;)도 부실하고요. 노무현이 여러 사람 베렸다는 것을 알지만, 이럴수록 정신차려야 한다고 봐요
심상정 어때요? :-)

Koni 2006-11-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상정이 누구에요?

라주미힌 2006-11-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노당 국회의원입니당....
 






운 좋게 책선물도 받고,
태어나서 첨으로 연상의 여인한테서 카드도 받고...  :-)

살 떨리는 가을입니다.

내일부터 열독모드로...



컴터 책상 궁금해 하실 분이 계시나 해서 ㅋㅋㅋㅋ... 정말 대책이 안서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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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11-10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상 상태가 거의 지금 제 컴퓨터 책상 상태와 비슷. ^^
그래도 전 지금부터 청소할거예요. 흥!! 믿거나 말거나....ㅎㅎㅎ
저 책 사진을 보니 맘이 많이 아픈 책이 될 것 같네요.

stella.K 2006-11-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내가 카드 안 보내 드렸었나요? 나 연상의 여인네 맞는데...다음에 기회있으면 보내드리겠사와요.^^
 

졸업을 앞둔 강모(24) 씨는 요즘 채용 전형에서 번번이 물을 먹고 있다. 2002년 문학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강씨는 나름대로 소질을 특화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은 강씨의 생각과 달랐다. 강씨는 “수업을 따라잡기가 솔직히 힘에 겨웠다”며 “장기인 글쓰기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금 강씨에게 남은 것은 초라한 성적표와 이젠 반갑지도 않은 ‘특기자 입학생’이라는 딱지뿐이다.

‘특기자 전형 졸업자’들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특기자 전형은 이해찬 전 총리가 교육부 장관 시절이었던 99년부터 소위 ‘한가지만 잘해도 대학갈 수 있다’며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2002년 대학 입학생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컴퓨터, 문학, 바둑 등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이들의 올해 취업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이 특기자전형을 없애거나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있어 ‘사실상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9일 본지가 입수한 교육인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연세대 등 전국 주요 9개 사립대 특기자전형 입학생 243명의 정규직 취업률(표)이 일반 전형 입학생들보다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희대 특기자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은 23.1%로 일반 졸업생 60.4%의 3분의 1 수준이었으며 연세대 서강대 경북대 부산대 건국대 등도 많게는 20% 이상씩 취업률이 낮았다.

30대 대기업의 경우 취업률 격차가 더욱 심했다. 경희대 7.7%, 경북대 11.1%, 부산대 18.2% 등으로 각각 일반 졸업생들보다 50% 이상씩 대기업 취업률이 낮았다. 심지어 이화여대와 명지대의 특기자 졸업생은 대기업에 한 명도 취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는 교육부가 국정감사를 위해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실에게 제출한 것이다.

한국대학교육연구소 박거용 소장(상명대 교수)은 “인재 다양화라는 취지는 일면 수긍이 가지만 대학마다 이들의 성적과 출석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특기로 대학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특기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각 대학 측도 특기자전형이 본래의 도입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고 판단, 폐지 또는 단계적 축소에 들어갔다.

서강대의 경우 이미 작년에 이 제도를 폐지했다. 서강대 관계자는 “특정 분야에 재능을 찾기 어려웠고 우월성도 전혀 부각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제도라고 판단했다”며 폐지 이유를 밝혔다. 연세대 관계자는 “당장 폐지할 수는 없겠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한 대학 입학처장은 “결국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폐지 쪽으로 가지 않겠냐”며 “당초 너무 이상만 갖고 접근했던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임진택 기자(tae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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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11-0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은 이거네...
"대학은 무능하다."

가랑비 2006-11-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갸우뚱, 특기자들의 성취도를 일반 기업, 특히 대기업 취업률로 판단하는 건 무리 아닌가요? 다양한 인재를 선발해서 (하나도 안 다양하게) 똑같이 취업시키려고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다양한 인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야 하는데, 그 다양한 분야가 현재 한국에서는 대개 통계에도 안 잡히는 비정규 분야라는... 말씀.

라주미힌 2006-11-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의도가 좀 불순해 보여요..

2006-11-09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11-0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일도 있군요...
인생은 끝나봐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봐요.. 아직 님은 가야할 길이 멀었어요.
:-)
 

한겨레

인문학은 정말 위기일까? 아니면 인문학 바깥에서 비꼬듯 ‘인문학자들의 위기’인 것일까? 적어도 출판 저술의 측면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 증거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콘텐츠 시대를 맞아 인문학적 콘텐츠의 쓰임새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고, 인문학 콘텐츠에 대한 사회경제적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정반대로 최고의 기회를 맞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정민 교수는 이처럼 인문학이 호기를 맞고 있음을 책으로 입증해내는 저술가다.

정 교수가 처음으로 독서대중들과 만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이었다. 한시와 미학이라는 요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법한 두 가지를, 그것도 500쪽에 그림 하나 없는 책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는 보여줬다. 곧 고전이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도전해보고자하는 분야이므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면 고전이 얼마든지 읽히는 장르로 부활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당시 나이 불과 서른 여섯. 이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껏 이 책은 한시 입문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정 교수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책을 쏟아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 같은 잠언 소품집부터 <비슷한 것은 가짜다>같은 묵직한 에세이, 교과서속 암기대상이었던 위인들이 생생한 우리 이웃처럼 살아서 등장하는 <미쳐야 미친다>, 고전 속 문장을 곱씹어 들려주는 <죽비소리> 등 내는 책마다 한결같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고전길잡이책도 썼다. 이처럼 모든 연령대를 위한 책, 다양한 버전의 책을 펼쳐보이는 저술가는 실로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한자와 한문과 멀어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정민 교수를 통해 고전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다는 점이다.

정 교수가 사람을 놀래키는 점은 저술 작업량도 많지만 항상 책의 수준을 유지하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가 다루는 주제의 폭이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장 고리타분할 것 같은 전공을 가진 고전학자가 가장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인문학자들과 달리 정 교수가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아니 그 이전에 그는 왜 이렇게 저술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정 교수에게 묻자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거보다 더 즐거운 게 없으니까.”

정 교수는 지금껏 골프를 쳐본 적도, 스키를 타본 적도 없다. 지식을 탐구하고 글쓰는게 재미있어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한 창조의 욕구는 묘한 쾌감을 동반해요.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있는 대목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럴 때는 소름이 쫙 끼쳐요.”

정 교수는 궁금한 것, 재미난 것이 생기면 거의 자동적으로 뇌가 작동을 시작한다. 요즘 구상중인 ‘조선의 여행문화’란 주제도 그렇다. 어느날 우연히 근대 일본의 여행문화를 다룬 <에도의 여행자들>이란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우리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그러면 곧바로 메모가 시작된다. 제목을 정하고, 논문이되건 책이되건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야 할 지 목록을 짠다. 여행의 준비물은? 경비와 규모는? 놀러갔을 때 놀이의 규칙은?…. 다시 며칠 뒤 2차 메모에 들어가 전체 목차의 얼개를 마련한다. 관련된 스크랩이나 복사물도 덧끼운다. 이렇게 매일매일 정리한 파일을 연구실 곳곳에 비치한다.

정 교수의 한양대 연구실은 한마디로 거대한 파일의 성채다. 이 곳에는 다른 교수 연구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수백개의 의료차트를 둥그렇게 꽂아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만든 차트 보관대다. 자료 정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우연히 보고는 ‘저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그자리에서 산 것으로, 정교수 일생에서 가장 성공한 쇼핑이 됐다. ‘조선의 여행문화’처럼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정 교수는 이 물건을 ‘씨앗창고’라고 부르는데,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차서 더이상 끼울 칸이 없는 상태다.

정교수가 이렇게 뽑아낸 아이디어를 글로 쓰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소통’이다. “<한시미학산책>을 펴낸 다음에 시인들이 잘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왔는데 예상 이상이어서 놀랐어요. 그 다음부터 ‘소통을 염두에 둔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논문을 쓰면 우리 분야 여남은명 정도가 읽어보는데,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쓰면 수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무엇이 더 가치있냐가 아니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정 교수는 내용과 문체에서 모두 ‘전달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대중들은 정교수의 문체가 유려하다고 평하지만, 정작 정교수는 글쓰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접속사를 피해 문장을 나눈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글의 리듬,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다. 아무리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퇴고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도려낸다. 그럴수록 전달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면 3번 소리 내서 읽어요. 제가 읽고 고치고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아내가 읽어가다 멈추는 곳이 있으면 그건 문장이 잘못된 거에요. 그런 곳들을 한번 더 고칩니다.”

더 큰 차원에서는 문체의 힘이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의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주제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는 곧 문학을 통해 문화를 지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사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런 철학을 심어준 사람은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스승 연암 박지원이다. 정 교수는 “연암을 만나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습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콘텐츠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고 말한다. 연암에 이은 요즘 스승은 다산 정약용. 그가 보기에 다산은 “진정한 지식과 정보의 기획편집자”이며,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새 스승이다. 새 스승에게 배운 바는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 제목은 <다산의 지식경영>. 다산이 어떻게 당대의 지식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기획, 편집했는지 살펴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작업’의 고갱이를 탐구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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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산사춘 > KTX승무원과 함께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 (금, 6:30)

 

KTX 승무원과 함께 하는 다섯 번째 촛불 문화제


- 11월 10일(금) 늦은 6시 30분 세종로 사거리 -




추운 겨울 시작된 KTX 여승무원의 투쟁이 250일을 넘어 또다시, 또다른 겨울의 문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KTX 여승무원 문제에 관하여 사회 각계에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철도공사가 성차별을 해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권고하였습니다. 국정감사에서는 많은 국회의원들이 승무원 도급이 ‘불법 요소 있지만 종합적으로 합법’이라는 노동부 결정이 명백하게 잘못된 판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철도공사 이철 사장에게 이 문제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많은 시민단체와 학생모임, 교수모임 등에서는 성차별 해소와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집회, 문화제 등을 연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KTX 여승무원들은 겨울의 칼바람과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를 이겨내며 진실을 밝혀내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철도공사와 노동부는 더 이상 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해서는 안 되며, 이 문제에 관한 국민적 관심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촛불문화제에 함께 하셔서 철도공사와 노동부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에 의지와 소망을 모아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 일시: 2006년 11월 10일(금) 늦은 6시 30분~

◎ 장소: 세종로사거리 (동아일보사 맞은편, 동화면세점 앞)


◎ 프로그램


  ♠ 문화제 알리기

  ♠ KTX 승무원 투쟁 영상 

  ♠ 완전 아마추어 여성주의 밴드 ‘빨간목도리’ 공연

  ♠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지지 발언

  ♠ 촛불 행진

  ♠ 시청 광장에서 우리의 의지를 모아 ‘직접고용’ 만들어내기


(문의: 여성노동네트워크 joylabo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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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