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대통령. 시나브로 퍼져가는 여론이다. 어느새 장삼이사도 그렇게 믿는다. 압권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다. 노무현 대통령을 일러 “거의 송장, 시체가 다 돼 있는데 비판해서 뭐 하느냐”고 꼬집었다. 청와대가 발끈했다. “대통령을 폄훼해서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는 행태”라고 날을 세웠다. 아직도 정치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대통령이 가엾다는 연민도 제법 퍼졌다.

하지만 울뚝밸을 삭일 때다. 연민론은 기실 송장론과 차이가 없다. 가령 대통령이 힘이 없어 뜻을 펼치지 못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심지어 청와대 참모들까지 눈을 홉뜬다. 제왕적 대통령 시대가 아니란다.

그렇다. ‘무력한 대통령’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송장론에 꼭 부르르 몸 떨 일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작 대한민국의 고위 공무원, 법조인, 기업인, 금융인들은 달리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물었을 때다. 63.2%가 노무현을 꼽았다. 2위인 이건희는 24.2%다.

왜 그럴까. 괜스레 예우 차원에서 그랬을까. 아니다. 노무현이 실제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음을 알아서다. 찬찬히 톺아볼 일이다. 올해만 한정해도 그의 권력은 뉘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연초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선뜻 합의했다. 스크린쿼터, 과감하게 줄였다. 광우병 의심이 남은 미국산 쇠고기, 전격 수입했다. 북한 핵실험 바로 다음날에는 기자들을 불러놓고 언죽번죽 말했다.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주장하기에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나. 그리고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나.”

다행히 거센 비판 여론으로 남북 화해정책은 아직 파탄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지금도 권력을 살천스레 휘두르고 있다. 보라.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겠다는 저 독선을. 반대 여론이 들끓어도, 네 차례 협상과정에서 이미 불균형이 곰비임비 드러났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다. 자신의 ‘감’을 확신해서란다.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줄곧 부산 출마를 고수해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의 정치 감각은 실체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그 점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그를 정계로 이끈 김영삼과 어금지금하다. 감을 중시한다. 옳은 비판을 해도 막무가내인 까닭이다.

하지만 딱히 김영삼의 말로가 아니더라도 성찰해 볼 일이다. 노 대통령의 감이 얼마나 숱한 실정을 불렀던가. 한나라당에 대연정 제의는 결코 좋은 감이 아니었다. 부동산 정책의 감은 또 어떤가. 북 핵실험 뒤 미국의 책임을 비판한 김대중과 견주어도 그의 감각은 실망스럽다. 수구언론이 뭐라 해도 ‘뚜벅뚜벅’ 걸어야 할 때, 뒷걸음질 쳤다.

그래서다. 새삼 명토박아 둔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무력하다며 연민을 느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고집스런 권력의 어설픈 감에 치료법은 오직 하나다. 국민의 힘이다. 부익부 빈익빈에 분단 고착화를 불러올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평택 미군기지의 독단적 추진을 막으려면, 민주 시민들이 침묵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이 대통령에 연민을 갖는 것은 사치다.

민의나 비판을 모르쇠하는 대통령의 감을 바꿀 것은 청원도 설득도 아니다. 민중의 결집된 힘이다. 11월22일 집회가 소중한 까닭이다. 노 정권은 기득권 세력에겐 무력한 ‘송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빈민에겐,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에겐, 결코 무력한 대통령이 아니다. 무자비한 독재정권이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신자유주의 독재’의 본질이다.


손석춘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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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11-1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
 

경애하는 윤평중 교수님,

지난 9일치 <중앙일보>는 리영희 선생의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를 시장맹·북한맹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면서 교수님의 글 내용을 이례적으로 크게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문은 우선 두 가지 이유로 나의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먼저, 이 보도는 교수님이 리영희 선생을 “시장맹, 북한맹”이라고 공격했다는 겁니다. 교수님이 인신공격을 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보도는 교수님이 리영희 선생의 사상을 놓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시장맹, 북한맹을 “초래”했다고 전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리영희 선생의 “인본적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는 시장과 북한을 바로 알지도 못할 정도로 맹(盲)한 “인본적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글을 직접 보니 이 보도가 오보는 아니었고, 또 정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리영희의 사회주의적 정향은 직관적이며 그만큼 파편적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정합성을 갖춘 논의 자체가 부재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우상을 부순 자리에 리영희가 세운 것은 바로 사회주의의 우상이었다.”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와 유가적 도덕주의는 근대적 시장의 입체성과 역동성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시장맹(市場盲)으로 귀결됨으로써 자유인의 존재 근거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조야(粗野)하고 도식적인 그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시장맹과 북한맹(北韓盲)을 배태(胚胎)하면서 우리 시대를 계몽함과 동시에 미몽에 빠뜨렸다. 리영희는 결국 냉전 반공주의가 압살한 불행한 시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위의 인용은 모두, 리영희 선생의 책 <우상과 이성>을 비틀어 ‘이성과 우상’이라고 제목 붙인 글에서 교수님이 손수 굵게 부각시킨 리영희 비판의 핵심들입니다.

만약 교수님이 리영희 선생을 “이성적”으로 “비판”했다고 믿는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어느 글에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서 ‘사상적’ 입장이나마 세웠던가요? 그리고 선생이 어느 자리에서 어느 정도나 시장체제의 ‘이론적’ 비판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열중하였는가요? 선생은 사회주의의 도덕적이고도 인간주의적인 기본 가치를 선택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우상화시키겠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도나 목표와 연결된 일이었습니까? 시장체제가 생활에 안겨주는 각종 고통을 리영희 선생은 집요하게 ‘비판’하고 ‘고발’하기는 했지만 과연 시장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대안’의 탐구를 자신의 ‘학문적 주제’로 삼았던 적이 있던가요?

교수님은 ‘반시장주의자, 북한 숭배자인 사회주의 사상가 리영희’, 그러면서 우리 사회를 그런 것에 눈멀게 만든 ‘괴력의 리영희’를 비판합니다. 아, 교수님! 교수님이 비판하는 리영희씨는 우리가 아는 리영희 선생과 동명이인인 것 같습니다. 그런 헛다리 비판을 우리 철학 교수들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지요, 아마.

그리고 교수님이 “근대적 시장의 입체성과 역동성”을 “자유인의 존재 근거”와 연결한 발상은 너무 멋졌습니다. 그런데 “이윤을 매개로 작동하는 시장은 생산력의 확대와 함께 바람직한 사회의 기초를 구성한다”고 언명한 것은 아무래도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그토록 균형을 강조하는 분이 시장의 이윤기제가 “바람직한” 사회의 기초를 구성한다고 속편하게 말하시는데, ‘시장의 실패’라는 또 다른 측면은 어떠한가요? 나도 시장에 대해 맹(盲)한가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아무래도 철학을 업으로 하는 교수들의 얼치기 사회과학부터 깨져야 할 듯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리영희 지성의 진면모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할 듯합니다.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은 우리의 현대가 전적으로 결여한 채 출발하였던, 비판적 계몽의 선도자입니다. 그 분의 역할은 볼테르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볼테르더러 마르크스가 못됐다고 비판하면 공정한 비판이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우리 윤 교수님은 기준 혼동의 오류까지 범한 듯합니다.

경애하는 윤평중 교수님,

이렇게 한없이 오류로 가득찬 A4 11쪽짜리의 조야한 잡문을 학교 연구비까지 지원받아가며 쓸 일이 아니라 차라리 리영희 선생을 속편하게 인신공격 하시지요. 그것이 철학교수의 비판이라는 것이 얼치기라는 직업상의 기밀을 은폐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동류의식이 발동하는군요. 교수님과 교수님에 훨씬 못미치는 나 자신에 대한 학문적 연민의 심정으로 간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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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1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평중,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리영희 선생을 때려서 스타라도 되려나 보죠..

라주미힌 2006-11-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평중, 누군지 모르겠어용.. 흐.
 

지난날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이제 이분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자기 수정을 해야 한다. 단시일에 바꾸려는 것, 비타협적인 것, 독선, 과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2005년 봄에 나온 리영희의 발언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리영희는 ‘사상의 은사’라기보다는 ‘성찰의 대부’다. 1991년 1월26일 그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라는 강연을 한 이래로 그의 ‘사상의 제자’들에게 위와 같이 끊임없는 ‘평생교육’을 실시해 왔다. 언젠가 <월간조선>은 “노무현은 리영희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고 주장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노무현 정권이 지금처럼 큰 어려움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중앙일보>는 리영희가 남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를 ‘시장 맹(盲)’‘북한 맹(盲)’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 주장을 편 글을 소개했을 뿐이며 공과를 공정하게 소개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편집 효과상 두드러지는 건 그 메시지다. 여기에 리영희의 정신적 제자였음을 자처한 내부 논객의 비슷한 비판까지 가세했다.

나름대론 진지한 비판이었겠지만 다소 우스꽝스러운 ‘리영희 숭배’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영희는 그렇게까지 위대하진 않다. ‘인물 결정론’도 정도 문제지, 너무 심했다.

신문은 ‘분위기 상품’이다. 편집은 사회 분위기에 민감한 편집국 분위기의 산물이다. 보수신문들은 노 정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를 이념·색깔 전쟁으로 몰아가는 데에 여념이 없다. 삼성과의 관계라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안고 있는 <중앙일보>는 그래도 그간 나름의 ‘자본의 합리성’이라는 미덕을 보여왔다. 그랬던 <중앙일보>가 분위기에 휩쓸려 리영희마저 그 전쟁의 한복판에 세우는 건가?

2005년 3월15일 리영희가 회고록 <대화> 출간 기념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중앙일보> 기사는 리영희를 ‘원로 중의 원로’라고 부르며 이를 소제목으로 뽑았다. 76살이라는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영희에 대한 존경이 묻어난 기사였다. 기자마다 색깔이 다르다곤 하지만, 어떤 게 <중앙일보>의 진심인지 궁금하다.

그래도 <중앙일보>는 말이 통할 것 같아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리영희 탐구를 제대로 하기 바란다. 전 사원이 <대화>를 읽고 독서 토론회를 해보길 권한다. 바로 이 책에 국난 극복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80년대 후반 운동권을 풍미했던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을 분열주의적 공쟁(空爭)으로 비판했다. 그는 한국사회의 분열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달갑지 않은 요소가 ‘민족적 유전자’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비극의 원인을 외세 탓으로 돌리는 ‘민족적 면책론’도 거부했다. 그는 뼈아픈 자기비판과 민족적 각성을 요구했다. 나라를 망친 것은 지도층이나 지배계층이고 나라를 염려하고 지킨 것은 대중이나 민중이라는 관점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교조주의적 도그마에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이런 문제들을 공부하면서 고민하는 <중앙일보>의 모습을 보고 싶다. 노 정권을 때려서 나라가 잘 될 것 같으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게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노 정권을 넘어선 애국적 우파의 모습을 보여달라. 한국 저널리즘의 그 지독한 ‘이념 과잉, 정치 과잉’ 풍토와 결별하고, 보수의 성찰과 건강성을 실현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매진해 달라. 그럴 때에 비로소 노 정권의 낮은 지지도는 보수신문들 탓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우매함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반감과 증오의 악순환 체제 아래에선 그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성공할 수 없다. 이게 바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성찰의 씨가 말라 극단적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리영희가 던진 메시지이기도 하다. 리영희는 좌우(左右)를 뛰어넘는 우리의 소중한 지적 자산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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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 때 제보자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황우석 사태 1년’ 시리즈 취재를 위해 만난 대학원생들은 대개 몸을 사렸다. 지난해 황교수팀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사건을 터뜨린 제보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실직한 마당에 가볍게 입을 놀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제보자 ㄹ씨는 문화방송(MBC)과 황교수팀이 줄기세포 DNA 검증을 둘러싸고 줄다리기하던 지난해 12월 신원이 밝혀져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ㄹ씨는 “당시 회사측에서 사표를 쓰지 않으면 강제로 해고하겠다고 압박해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던 ㄹ씨는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생명공학과 관련한 임상 연구를 하고 싶지만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황우석 사태의 또다른 제보자이자 ㄹ씨의 부인도 일하고 있던 연구실에서 나왔다. 제보자 2명이 모두 실직 상태다.

정부가 지난 6월 만든 ‘연구윤리 진실성 확보를 위한 가이드라인’에는 제보자에 대한 보호 규정이 담겨 있다. ‘(제보자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신원이 노출될 경우 제보자의 소속 기관과 함께 제보의 접수와 검증에 관계된 연구기관 및 연구지원기관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제9조 4항이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가이드라인은 다음달쯤에나 발효될 예정이다. ㄹ씨처럼 제보에 의한 피해자에게 소급 적용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사자가 기관에 소송할 경우 참고 자료로 사용될 수는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기범 박사는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ㄹ씨의 소속 기관인 원자력병원, 줄기세포를 검증한 서울대, 연구를 지원한 과기부와 교육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행정학과 박흥식 교수는 “내부 제보자가 없었다면 국가 연구예산이 계속 낭비됐을 것이므로 제보로 인한 사회적 이익은 상당히 크다”며 “가이드라인을 만든 취지에 맞게 정부와 사회가 제보자에게 보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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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11-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보자는 백수되고, 사기꾼들은 복직되고...
나라가 뭐 이래.

로드무비 2006-11-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판!

라주미힌 2006-11-1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진난다.

다소 2006-11-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나라꼴이 말이 아니군요.-_-;
이렇게 불신이 쌓이면 언젠가는 폭발할텐데...;;;
 

http://www.jinbonuri.com/bbs/view.php?id=fight_board2&no=91096

 

이름  
   이어폰  (2006-11-13 22:45:34, Hit : 254, 추천 : 11)
제목  
   한학수 pd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합니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인데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셜록 홈즈의 추리 소설처럼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져서 사자마자 그 날 바로 다 읽었습니다. 다른 것은 그렇다고 치고, 저는 이 책을 덮고 나서 아직도 제보자인 k(이미 실명이 보도가 다 됐지만 저도 그냥 책대로 표기합니다)가 취업을 못하고 있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강준만 교수가 최근에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내부 고발자가 오히려 줄었다는 기고를 했던 게 생각이 나더군요.

소위 말하는 황우석 사태는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가 공범이고 아니면 최소한 방조는 했습니다. 때문에 누가 누구를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는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진실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했던 제보자 k는 여전히 취업도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요? 황우석 교수는 파면을 당해 응당 짐을 졌지만 다른 교수는 정직 몇 개월로 끝났고 소위 말하는 황금박쥐의 금박쥐, 김병준씨는 지금 무슨 고위 관료로 복귀했고 박기영 보좌관은 대학 교수로 복직했고 진대제 장관은 경기지사 후보로까지 나왔습니다.

한학수 피디도 책에서 말을 합니다만, 유일하게 반성하지 않은 집단이 3곳 있는데 황우석씨, 노무현대통령 그리고 조선일보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그 어떤 사죄 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기이한 현실입니다. 양심에 어긋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세계를 상대로 싸운 제보자 k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의사 자격도 있는데 취업도 못하고 있고 한학수 피디는 온갖 풍파에 휘말렸지만, 정작 이 진실을 덮으려고 했던 자들은 그 흔한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강준만의 주장대로 내부 고발자가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오히려 줄어들어다는 사실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습니다.

분명하게 우리 사회는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정책으로 민란 직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곧 몇 명의 관료를 사퇴시키고 잊을 지 모릅니다. 여전히 한가하게 '노무현대통령님 민중의 피끓는 삶을 보십시오'라는 읍소형 비판이 주류이지 피빛어린 성토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부 고발자 k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사라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직업이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떠돌고 있는데 하물며 이름 없는 시민들은 어쩌겠습니까? 정말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이제 대중은 분노만 하지 거리로 나서지는 않습니다. 온갖 부조리와 모순 앞에서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87년 이전의 사회로 돌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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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11-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누르러 다시 왔더니 쩝.

라주미힌 2006-11-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