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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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언어란 원래 불완전한 것이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바로 전달할 수 없다고 얘기되어오곤 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도 언어 때문이었으며, 라깡은 need를 언어로 전달(demand)하는 과정에서 desire가 잔여로 남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언어가 실존하는 사물을 단지 지시하기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의미화 작용 속에서/을 통하여 주체도 탄생하고 (버틀러에 따르면) 몸의 물질화과정마저 일어난다는 논의가 요즘 추세이며, 언어의 불확정성과 의미생성력은 번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굳이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른나라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의미의 미끄러짐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근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직업임에는 분명하다. 특히나 이 책은 버틀러의 수많은 저작 중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는 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책의 자잘한 번역미스는 버틀러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거나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먼저 제목을 보자. 원저의 제목은 Bodies That Matter이다. 한국번역본 제목은 이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해놓았다.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왜 Bodies That Matter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했는가? 일 것이다. 나도 역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원본 32p (한역본 73p)를 보면, ‘matter'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to matter" means at once "to materialize" and "to mean".

즉 matter가 ‘물질화시키다’와 ‘의미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므로, 이 두 뜻을 한꺼번에 담으려는 노력으로 한역본 제목이 나왔으리라 추정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체현하다”는 보통 embody를 가리키는 번역어로 사용된다. 버틀러의 다른 책 「Gender Trouble」 1장 각주 15를 보면, embodiment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이 나온다.

 

“Note the extent to which phenomenological theories such as Sartre's, Merleau Ponty's, and Beauvoir's tend to use the term embodiment. Drawn as it is from theological contexts, the term tends to figure "the" body as a mode of incarnation and, hence, to preserve the external and dualistic relationship between a signifying immateriality and the materiality of the body itself."

 

즉 현상학에서 주로 쓰이는 개념인 embodiment는 신학적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몸을 현현[화신, incarnation]의 모드로 형상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의미화하는 비물질성과 몸 그 자체의 물질성 간의 외적이고 이원적인 관계를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embodiment 개념이 물질/정신의 위계질서를 동요시키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버틀러의 이 구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embodiment란 물질과 의미가 서로 배타적이고, 정신이 몸보다 우위에 있다는 기존의 사고관을 전복하면서 물질과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화작용은 몸에 ‘체현’되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즉 몸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얘기인 것으로, 즉 몸에 더 강조점을 찍은 개념이라고 나는 이해해왔었다. 그러나 버틀러의 말대로, 이 도식은 몸/정신이라는 이분법 틀 자체를 와해시키지는 않는다. 즉 몸과 정신, 물질과 의미의 위계관계는 문제시할 수 있을지라도 저 bar(/)는 그대로 남아있으며(어쨌든 개념상으로는), 어찌 보면 의미화 작용 내지 정신이 몸에 덧씌워져서 비로소 작동하는 빙의나 화신, 현현 같은 모드로 몸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몸은 여전히 ‘장소’-비록 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어쨌든 정신에게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탈것과 같은 장소-로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embodiment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이 틀리건 맞건 간에, Bodies That Matter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하는 것은 버틀러가 Gender Trouble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도 계속해서 문제제기하는 몸과 담론의 이분법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인 버틀러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체현하다’가 반드시 embody만의 번역어는 아니며, 모든 언어를 한 가지 뜻으로 번역하란 말이냐 하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역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번역어, 단 하나의 지시체와 연결되지 않는 만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가급적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에 그만큼 신중을 기울여야되며, 자신이 왜 이러한 뜻으로 번역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번역은, 단지 단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원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주장하려고 했던 내용과 부합하는 번역을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교양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학술서적에서, 단어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오죽하면 논문 쓸 때 **개념을 필자가 어떤 식으로 정의했고, 왜 그렇게 정의했는지를 밝히는 데 한 두 시간을 잡아먹으며 교수님들 앞에서 진땀 흘리지 않는가.

 

세미나 준비해야하므로 지금은 제목에 대한 질문만 던지겠지만, 이 다음에는 서문과 그 각주를 중심으로 번역과 관련된 질문들, 번역미스들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도록 하겠다. 간단히 하나만 얘기하자면, 한역본 23p(원본 2p)의 두번째 단락 중간에 "오히려 성 자체는 그것의 물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란 번역에서, 물질성으로 번역된 곳 원문엔 normativity가 적혀 있다. 즉 성은 규범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부분인데 단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이런 미스가 하나만 있었다면 좋았으련만...다음에 계속될 문제제기에서 다른 지점들을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겠다)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번역에서의 이견 차이는 고명하신 학자들 간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며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몇년 전에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번역을 두고 두 쟁쟁하신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으며 그것이 책으로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토론 속에서 후학들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고 학계는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문제제기하는 사람에게 메일로 전화로 괴롭히지 말아달라. 부탁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여기서 공개적으로 하면, 어느 곳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다 적겠다. 번역이 완전히 잘못된 부분들도 있어서 그런 부분들은 지적하고자 하고, 또한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 왜 이 개념을 굳이 이 단어로 번역했는지, 그에 어떠한 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지 역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그런 것들의 토론을 통해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게 되고, 독자와 역자가 함께 책을 수정하는 작업이 이 공간에서 일어난다면 학계에도 출판계에도 더욱 생산적인 발전이 도모되지 않을까.

 

 

 


+ 아참, 나는 저 위의 설명에서 몸과 물질, 정신과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했지만, 사실 그 개념들은 엄밀히 말하면 좀더 사유되어야할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버틀러 또한 개념의 엄밀성을 주장하면서도 몸과 물질을 동일선상에 놓고 논의를 개진하기도 하고, 물질과 몸이 연관성만 있을 뿐 물질은 의미화경제와의 관계를 두고 구성적 외부 개념으로 논의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버틀러의 원저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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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02-20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난 한글도 이해못하겠따 ㅠㅠ;;;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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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 딱 한 권 있는 영어본을, 어느 교수님이 빌려갔는지 6개월 동안이나

빌려간 채 반납하지 않는 바람에, Bodies That Matter를 꼭 읽어야했던 나는 우선

이 한글본을 보고 공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글본을 다 읽고 정리까지 끝낸 시점에서 드디어 도서관에 반납된 그 책을 빌려서

영어원본과 대조해보던 날밤, 나는 혈압 올라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이 한역본은, 한마디로, 성의없음과 불성실과 건망증의 극치인 번역으로 이루어진 책이었음이

영원본과의 대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 책은 안 좋은 번역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점들을 다 가지고 있다:

1. 번역을 빠뜨린 문장들이 너무 많다

        - 아무리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말을 다른 말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성실한 역자라면 원본에 써있는 문장들을 모두 옮기려는 노력은

         해야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번역은, 번역하다가 너무너무 귀찮다 싶으면 마지막 문장 하나

        휙 빼먹어버리는 식으로, 번역 안 된 문장들이 너무 많다.

2. 번역이 잘못된 문장들, 단어들이 너무 많다.

      - 원래 버틀러가 글을 난해하게 쓰기로 유명하며, 특히 쉼표 따위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한문장이

       너무 긴데다 쓸데없이 의문문을 남발하는 건 기본이요 끝까지 다 읽지 않으면 갈피를 잡기 힘들게

       자신의 사유과정을 그대로 적어내려가는 학자로 악명 높긴 하다. 버틀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그 불친절한 영어문장들에 진저리를 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유일한 한글번역본으로 나왔다면, 기본적인 문법들까지 틀려가면서, 문장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번역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한역본으로 읽으면서 파악했던 버틀러의 주장이, 영역본을 봤을 때 반대로 되어있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정신분석 이론과 데리다 및 구조주의언어학 이론들,

      퀴어 이론들을   종횡무진하며, 그 자신이 철학전공인만큼, 전문적인 철학지식들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을 보면 페미니즘의 최신이론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번역했구나...

      하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계속 걸린다.

      게다가 정신분석용어들의 번역을 보면, 하나같이 다 문제가 많다. articulation을 단순히 '정교화'로

      번역해버린다던가, trauma를 '외상'이라는 널리 쓰는 번역은 왜 놔두고 '징후'로 번역해놓으면서

     '징후'로 번역되는 다른 단어들과 혼동되도록 만들어버린다던가, foreclosure를 '권리박탈'로 번역한

     다던가, 치환 전치 대체 등등의 용어들을 마구 섞는다든가 등등등, 한글본만 봐서는 정확히 이 말이

     뭘 얘기하려는 문장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한글본과 영역본을

     나란히 놓고서 읽으면서 파란펜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글본이 거의 한줄 건너 한줄로,

    심하면 한 단락 몽땅   파란펜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 정도면 거의, 버틀러가 뭔말을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게 된다고 결론짓는 편이 낫다)

    그러면서 정작 번역이 어려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문장은, 한글본을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비문으로 되어있다-번역자도 문장의 주어를 모르게 되고마니까 그냥, 주어를 빼버린 것이다.

    it으로 받아낸 단어들을 엉뚱한 단어로 번역해놓는 경우도 당연히 있다.

3. 편집도 실수가 잦다

    - 버틀러는 자신의 글에서 강조해야할 부분이 있으면 이텔릭체로 표기해놓았다.

      한글책에서는 그 강조부분을 굵은 글씨로 표시해놓았다...문제는, 엉뚱한 곳에 표시되어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버틀러의 원문에서는 이 문장의 of가 이텔릭체로 강조되어있는데, 번역본에서는

     엉뚱하게 그다음 문장에 있는 of에 강조가 되어있는 식이다. 이런 실수가 한 쳅터당 열댓 개씩은

     있으니, 읽다가 그 한심함에 혈압이 오를 정도이다.

4. 각 쳅터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인지, 이 장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었던 단어가 다른 장에서는 다른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

     - 단어의 뜻이 많아서 이럴 땐 이 뜻으로, 저럴 땐 저 뜻으로 번역하기 위해서 그런 수고를 들인 거라면

       몰라도, 이 장에서도 저 장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앞장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단어임

      에도 번역이 틀린 것이다. 이쯤 되면 한 사람이 쭉 번역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유명한 역자의 이름 하에 다른 사람들이 번역해서 올린 것인지 의심갈 정도이다.

 

이외에도 문제점은 수없이 많으나 사실 저 4개 안에 모두 포함되므로, 그저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버틀러의 이 책은 구성과 본질론을 넘어서 물질과 물질성을 사유하게 해주는 매우 도발적이고

지적으로 흥분시키는 명저이다. 다만 버틀러를 공부하고 싶은 분은 절대 이 한글본 사서 읽지 마시길.

영어로 읽는 편이 훨씬 이해가 빠르다....영어 잘 못해서 한 장 번역에 한 시간 걸리는 나도, 영어로 보는게

내용 이해가 훨씬 빨랐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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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섭 - 세월이 가면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허탈한 표정 감출순 없어

힘없이 뒤돌아선 그대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서로가 원한다해도 영원할순 없어요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잊지말고 기억해줘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잊지말고 기억해줘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잊지말고 기억해줘요

 

 

낯익은 이 노래의 가사의 의미를 이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미련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마음이 남긴 기억만이라도 잡고 싶어하는...

역시나 감정은 이기적이다.
상실마저도 존재하려드는구나...


영화는 썩... 잘만든 거 같지는 않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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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의 환율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일본의 단기 정책 금리는 0.25%다. 일본은 이렇게 금리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경기가 잘 살아나지 않고 있다. 지금 일본은 낮은 금리 그리고 낮은 환율 덕분으로 대외거래에서 흑자를 보고 있다. 이 힘으로 그 마나 일본 경제를 꾸려가고 있다.

일본 엔의 환율이 자꾸만 낮아지자 이를 두고 다른 나라에서 말이 많다. 특히 강세 통화인 유럽연합은 일본이 엔의 환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은 유럽연합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미국 재무부 장관인 폴슨은 자신은 지금 일본 엔의 환율을 아주 많이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일본 엔의 환율은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이지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즉 정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과연 어느 나라의 환율이 어디까지 정부의 영향을 받고 어디부터는 정부의 영향에서 독립되어 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지 않는 것은 과연 정치적인 개입과 얼마나 다를까? 이는 별도로 두더라도 미국이 일본 엔의 약세를 두둔하고 나서는 것은 미국이 중국에게 위안을 강세로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지금 미국의 달러는 길게 보아 낮은 수준에 있다. 그리고 시장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과연 언제 미국 달러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이는 시장이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시장이 겁을 내는 일이다. 그래서 달러가 약세로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시장은 마음을 놓는다.

미국 달러가 약세의 압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히 미국의 높은 대외무역적자 때문이다. 즉 미국의 지나친 달러의 발행 때문이다. 미국의 무역적자로 해외로 나가는 달러는 흑자국들의 대외준비통화로 운용되고 있다. 미국은 무역적자를 줄이고 정부적자도 줄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미국 달러를 그들의 대외준비통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 미국은 쌍둥이 적자를 급하게 줄이지 않아도 된다. 이론적으로 보면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준비통화로 받아들이는 한 쌍둥이 적자를 무한하게 키울 수 있다. 달러에 대한 수요가 무한하기 때문에 달러 공급 또한 무한하게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준비통화로 달러의 양을 지나치게 많이 가질 필요는 없다. 준비통화의 양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서서히 준비통화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이는 달러 가치의 약세를 낳게 된다. 이때쯤이면 미국은 무역적자를 줄이고, 정부적자도 줄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고통이 따르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달러는 많이 찍어내고 싶어한다. 지나친 욕심일까? 어떻게 하면 종이 돈을 막 찍어내어 다른 나라들이 힘들게 만든 물건을 이 종이쪽지와 바꾸면서도 이 종이 쪽지의 가격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이 문제를 풀수 있다면 노벨 경제학 상은 저리가라다. 지상천국의 왕이 되어 온갖 호강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 통화의 가치 하락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다른 나라 통화의 가치가 달러보다 더 많이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달러는 강세가 된다. 즉 달러를 강세로 유지하는 한가지 방법은 굳이 달러에 주는 이자율을 올리지 않고, 엔을 약세로 유지하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 엔화의 약세는 달러를 강세로 받쳐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폴슨이 엔의 약세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이런 현상은 이미 과거 역사에서 나타난 일이다. 1900년대 초 영국은 생산성의 하락과 전쟁 때문에 그 당시 준비자산이었던 금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그 금은 새로 떠오르는 경제 신생국인 미국으로 모여들었다. 준비자산의 부족으로 통화 가치를 잃어가던 영국은 영국 파운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 파운드 강세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영국 파운드의 강세 유지를 도와준 것은 다름아닌 미국 달러의 약세였다. 어린 나라 미국은 스스로 달러가 세계 통화의 중심국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영국 파운드가 다시 힘을 얻고 이를 기초로 유럽 경제가 회복되면, 이것이 미국 경제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은 의도적으로 달러를 약세로 유지해서 파운드를 약세를 막아주었다. 1920년대에 이렇게 흘러 넘쳤던 달러는 결국 1929년의 주식시장 폭락으로 막을 내리고 세계의 중심통화는 결국 파운드에서 달러로 넘어갔다.
 
그럼 지금 일본은 왜 미국의 달러 약세를 막아주고 있을까? 여기에는 분명히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일본 엔을 약세로 유지해야 일본이 수출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뿐일까? 만약 달러가 약세로 간다고 하자. 그래서 미국이 달러 약세를 막기 위해서 금리를 올린다고 하자. 그러면 미국은 재정적자를 더 늘리기가 어렵다. 세계 힘의 균형에서 미국이 자기 자리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어렵다. 세금을 더 거두어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군사적으로 미국 주도의 국면이 지속되고 이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보호받고 있다. 일본이 홀로 서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 시간을 벌기까지는 미국의 보호가 필요하고, 일본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댓가로 달러의 약세를 막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그대로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중심통화가 달러에서 엔으로 바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달러는 경제의 힘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달러는 정치적인 통화가 되어 버렸다. 달러를 강세로 유지하기 위해서 엔이 많이 풀리고 있다. 이 엔 자금은 달러로 바뀌어 세계 곳곳으로 흘러 다니고 있다. 엔 자금이 다시 자기 고향을 찾아가는 날 힘이 약하고 규모가 작은 세계 어느 곳, 어느 자산은 쉽게 가격이 떨어질 것이다. 당연히 엔이 약세로 가고 있는 한 지금의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장이 바라는 일이다.
 
때로는 시장이 바라는 일과 경제의 법칙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이 일을 어떤 심정으로 다시 뒤 돌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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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 에니메이션이 살아있다.
섬세한 표정과 세밀한 동작이 마치 실사 같았다.

했더니.. 실사에 그림을 덧칠한 로토스코핑 기법이라 하네...
(그런게 있군..)


이 영화의 원작은 필립 k 딕의 동명작품이라하는데,
마약에 관한 영화라서 그런지 사실과 환상이 범벅이 되어
서서히 파괴되어 간 사람의 혼란과 고뇌를
상당히 몽환적으로 그려내었다.

'스크램블 수트'를 입고 희미한 형체가 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까
파괴된 자아만 남기고 거의 모든 것을 과거로 보내버린 키아누 리브스의 삶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과연 그에게 미래의 꽃은 피어날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환상의 꽃'을 담아두는 그의 마지막 씬은 찌릿하다.
저지른 일보다 더 큰 희생을 치뤄야만 했던 이들을 스캔하듯 펼친 이 영화는
죄악의 본질을 가리킨다.

인간을 심판하려는 자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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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요. 영화같아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