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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진중권의 상상] <2>상상력과 시멘트

2007. 6. 5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6/h2007060417364786330.htm


선거철 공약, 거꾸로 '향수'대신 앞으로 '비전' 보고 싶다

[진중권의 상상] <2>상상력과 시멘트

기술을 넘어 예술로 가야 할 정보화 시대에 정치권은 표를 얻으려 대중의 향수 자극
토건 마인드엔 능하나 안보이는 상상력 약해…청계천과 선유도공원 인공-자연미 대비돼


청계천

선유도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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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돼지 수난극

정치권에서는 ‘경부운하’를 둘러싸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선거와 맞물리면서, 그것은 이미 냉철한 경제학적 논제가 아니라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되어버렸다. ‘침로상실’이라는 말이 있다.

폭풍우 속에서 배는 설사 항로가 틀렸더라도 계속 직진을 해야 침몰을 면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경부운하를 가장 큰 정책으로 내세운 후보는, 설사 그게 타당성이 없음을 스스로 안다 할지라도 제 정치적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끝까지 그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미덕 중의 하나는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드는 것. 어차피 선거란 대중 앞에 허황된 약속을 늘어놓는 세리머니다. 당선된 후 그 허위과장 광고를 모조리 실현하려 들면 어떻게 될까? 나라 절단 난다.

그리하여 이명박씨 역시 7% 성장, 4만 달러, 7대 강국의 약속을 공약(空約)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하 판다는 약속만은 꼭 지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왜? 그 분야만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선거철을 맞아 정치권에서는 미래의 비전을 내놓기 바쁘다. 그렇게 제출된 기획들은 하나 같이 복고풍. ‘카리스마 가진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전 국민이 삽질하면 선진국 된다’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한 마디로 국가발주의 건설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여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하겠다는 얘기다. 덧붙여지는 게 있다면, 기껏해야 법인세 깎아주겠다는 정도. 상상력의 부족으로 인해 미래의 비전을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고도성장기에 대한 향수로 때우는 셈이다.

●탈(脫)물질화와 재(再)물질화

한국은 이미 산업이후(post-industrial)의 정보사회로 진입했다. 과거의 산업사회는 물질의 육중함을 갖고 있었다. 가령 정유, 화학의 파이프라인은 산업사회의 혈관계통이며 불도저, 크레인, 공작기계 등은 산업사회의 근골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사회에 들어오면 세계는 무게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정보사회의 혈관계통은 사이버 공간의 네트워크이며, 그것의 근골계통은 키보드, 마우스, 스캐너와 같은 입력기다.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에는 물질성이 거의 없다.

빌 게이츠가 생산하는 상품은 원칙적으로 무게가 없다. 전자의 배열은 무한히 복제해도 닳지를 않고, 그 복제가 원본보다 질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음악, 게임, 사진, 만화, 동영상, 아이템, 소프트웨어 등 ‘정보’라는 허깨비를 다운로드 하느라 사람들은 현실의 돈을 지불한다. 10년 쓸 핸드폰을 2년만 쓰고 버릴 때, 소비자들은 상품의 물질적 속성보다 상품의 기호적 가치에 더 많은 돈을 쓴다. 그 무게 없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디자인과 브랜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육중한 유조선은 필요하다. 그리하여 최근엔 다시 재(再)물질화를 얘기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물질은 산업사회 시절의 육중한 물질이 아니라 IT, BT, NT와 결합한 새로운 물질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선박의 몸체를 만드는 중공업이 아니다. 가치는 새로운 콘셉트, 세련된 디자인, 첨단 IT의 결합에서 창출된다. 과거에 선진국은 기계를 만들어 후진국에 팔았으나, 이제는 기계를 디자인만 하고 생산은 다른 나라로 넘기고 있다.

●기능과 기술과 예술

소비의 기호화, 생산의 정신화, 상품의 탈(脫)물질화. 정보사회의 생산력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블루오션’이니 ‘레드오션’이니 하는 말도 이와 관련이 있다. 레드오션은 이미 있는 욕구를 누가 싼 값에 만족시키느냐의 경쟁이다. 반면 블루오션은 아직 없는 욕구를 누가 먼저 상상해내느냐의 경쟁이다. 예를 들어 ‘워크맨’을 만들자 대중은 비로소 집이 아닌 거리에서 음악이 듣고 싶어졌고, 핸드폰에 카메라를 달자 대중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됐다.

몇몇 분야만 제외하고 한국의 기술은 아직 이미 존재하는 기술에 몇 가지 기능을 첨가한 게 대부분.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됐다”는 얘기는, 한국이 아직 일본의 전략을 배우지 못한 사이, 중국은 한국의 전략을 넘겨받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이 넘지 못하는 문턱은 바로 선진국의 창의적 기술이다. 기능에서 기술로, 거기서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 아티스트의 상상력, 엔지니어의 기술력, 인문학자의 콘텐츠로 이루어진 삼각 컨소시엄. 이것이 미래의 생산 형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을 넘어 예술로 가야 할 시대에 아직 기능에 집착하는 게 한국의 분위기다. 가령 황우석 박사의 젓가락 기술에 보냈던 거국적 환호를 생각해 보라. 기술이란 모름지기 재연 가능해야 한다.

즉 언제, 어디서, 누가 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어야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쇠젓가락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능이다. 과거에 한국은 기능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기술이 세계 최고였던가?

●주체에서 기획으로

과거에는 인간을 ‘주체’라 불렀다. 주체란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미래에 인간은 ‘기획’이 될 것이다. 기획으로서 인간은 ‘아직 없는 세계’를 앞으로(pro) 던지는(ject) 이를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대전환을 위한 준비다. 하지만 미래로 나가는 문턱에서 정치권은 눈을 뒤로(retro) 던진다(ject). 대중의 향수를 자극해 표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거로 던지는 시선은 전망(prospect)이 아니라 회고(retrospect)일 뿐이다. ‘747’(7% 성장, 4만 달러, 7대 강국)은 40년 묵은 노후기종이다.

‘불도저’가 너무 낡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측근 중의 하나는 그를 ‘컴도저’라 고쳐 불렀다. ‘컴퓨터 세탁’이라 써 붙인다고 세탁업이 IT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낙후성은 물론 이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을 짜는 브레인의 한계일 터. 아무리 생각해도 운하 판다고 국토를 뜯어 고치기 전에 그 브레인부터 손보는 게 조국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겠다. 뇌의 이식에는 발달한 대한민국 BT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게다. 모자라는 상상력을 시멘트로 때울 수는 없다.

●청계천과 선유도

‘문화’라고 하면 삽 들고 건물부터 지으려 한다. 전국 지자체에 그렇게 지은 문화관들, 대부분 1년 내내 텅 비어 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을 짓는 데에는 능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기획력은 없다는 얘기다. 이 모두가 산업화시절의 토건 마인드가 낳은 비효율이다.

이를 닮아서 그런가? 대한민국의 인터넷 역시 망은 거미줄처럼 깔려 있으되,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콘텐츠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 IT의 강국이라 하나, 소비의 강국일 뿐 아직 생산의 강국은 아니다.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가 있다.

먼저 청계천 복원사업. 이 사업은 낡은 패러다임의 연장에 불과하다. 온통 시멘트로 바른 인공하천은 역사복원, 생태복원과는 관계가 없는 거대한 유원지를 이룬다. (이 시장의 업적은 소프트웨어적인 것, 가령 교통체계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외국에서 복원사업을 이렇게 한다면 두고두고 비난을 받을 것이나, 유적을 훼손하고 물줄기를 역류시켜도 한국에서는 외려 ‘업적’으로 칭송받는다.

왜 그럴까? 시민들까지도 토건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다가, 서울에 워낙 숨 돌릴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게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선유도 공원. 별 기대 없이 우연히 들렀던 그곳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원래 그곳은 정수장이 있던 곳. 불도저로 밀지 않고도 그 인공의 구조물을 아기자기한 자연으로 바꿔놓았다.

청계천이 자연을 밀어버리고 거기에 인공을 갖다 놓았다면, 선유도 공원은 인공마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것을 자연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선유도 공원에 가면 구석구석에서 설계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들과 마주치는 즐거움을 갖게 된다.

토건과 기획은 서로 다른 미감으로 실현되는 법. 청계천과 선유도를 둘러보면, 토건 마인드와 기획 마인드의 확연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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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진중권의 상상] <1>돼지 수난극

2007. 5. 29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2817245284320.htm

한국사회, 엽기성으로 현대예술을 능가하다

[진중권의 상상] <1>돼지 수난극

시민들이 '퍼포먼스'라 부른 아기돼지 능지처참
미술관의 돼지 사체보다 황당한 '감각의 테러'
비난하는 사람들도 사형제 잔혹성은 의식 못해
우리사회 폭력성·전근대성 보여준 '문화 아이콘'


다미엔 허스트의 <돼지>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형>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

트럭 한 대가 시청 앞을 지난다. 짐칸에 두 명의 노인이 알몸으로 서 있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뻘건 색으로 ‘멸공통일’이라 적혀 있다.

생방송 중에 바지를 내린 젊은 아이들의 치기도 아니고, 대책 없이 보수적인 머리 위에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입은 노인들이 반공의 이념을 위해 성스런 십자가를 들고 국부를 드러낸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이 사건이 한국의 행위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준 모양이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44라는 작가의 푸념이다. 사회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라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는 그 황당함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고전예술과 달리, 현대예술은 새로움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 한다. 그런데 한국은 현실 자체가 워낙 그로테스크해서, 예술가들이 연출하는 인위적 충격으로는 도대체 사람들을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 반공과 누드와 할렐루야를 합쳐 하나의 별자리를 그린단 말인가?

얼마 전 누드-반공-할렐루야를 능가하는 수준 높은(?) 사건이 있었다. 군부대 이전에 항의하는 이천 시민들이 서울 한 복판에서 새끼 돼지의 사지를 찢었단다.

흔히 이를 ‘능지처참’이라고들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거열형’(車裂刑)이라 불러야 한단다. 물론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시장과 의원이 참석한 공식적 자리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손으로 이런 엽기를 ‘퍼포먼스’라고 버젓이 저지르는 나라가 또 있을까?

●동물 사체의 오브제

유감스럽게도 돼지를 작품(?)의 소재로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에 영국의 작가 다미엔 허스트는 죽은 돼지를 두 쪽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들어 있는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는 이렇게 죽은 동물들을 통째로, 혹은 슬라이스로 쳐서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곤 한다. 그 첫 시도가 <살아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인데, 이 심오한 형이상학적 제목의 실체는 오스트리아에서 잡은 타이거 상어를 포름알데히드로 채운 유리 용기에 담아 놓은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1917년에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은 이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자격을 얻게 되었다. 옷걸이, 자전거 바퀴, 세제 박스, 통조림 깡통 등 이런 식으로 졸지에 작품이 된 사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허스트의 오브제는 특별히 도발적이다. 왜? 온갖 것을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에서도 동물의 사체를 재료로 쓰는 것은 꺼려왔으나, 그는 ‘생명의 경외’라는 전통적 가치로 인해 터부시되어온 그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더 잔혹한 것도 있다. <엄마와 아기>(1993)라는 작품에서 그는 어미 소와 송아지를 각각 절반으로 절단해 포름알데히드에 담가 놓았다. 뭘 말하려는 걸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삶과 죽음과 성을 담고 있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센세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철학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동물을 학대하는 병적(morbid) 취향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20세기 후반 예술의 ‘아이콘’으로서 생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감각의 테러

가련한 아기 돼지는 분노한 시민들의 손에 사지가 찢긴 채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된 채로 네트 위를 떠돌았다. 하지만 붉은 색을 머금은 분홍색 고기 덩어리는 흐릿한 모자이크 상자 뒤에 숨어서도 이미 충분히 참혹해 보인다. 이 역시 예술사에서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형>(1944). 짐승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기 덩어리가 매질당해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몸처럼 축 늘어져 있다.

‘현대예술’이라 하면 피카소나 칸딘스키를 떠올리던 당시 관객들에게 베이컨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시각적 테러였을 것이다. 왜 그는 고기 덩어리를 난자하는 잔혹극을 연출했을까? 관객의 “신경세포 위에 직접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인들은 자신을 ‘정신’으로 착각해 왔다. 하지만 감각의 폭력을 당하면 자신을 신과 같은 정신적 존재로 생각하던 인간들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한 마리의 짐승임을 깨닫게 된다.

두뇌로 올라가지 않고 신체로 내려와 감각을 자극할 때, 이미지는 시각적 구조물이 아니라 촉각적 자극이 된다. 베이컨은 신경세포에 가하는 이 자극을 ‘회화의 폭력’이라 불렀다. 그의 그림처럼, 사지가 떨어져 나간 채 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새끼 돼지의 몸뚱이는 시각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촉각적 폭력의 주체가 된다. 그것은 시민들의 신경세포를 난타했다. 그들의 분노는 양식을 파괴하는 이 잔혹극이 자신들의 감각을 폭행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죽은 동물의 퍼포먼스

이천 시민들은 새끼 돼지 잔혹극을 ‘퍼포먼스’라 불렀다. 동물을 퍼포먼스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3년에 백남준은 독일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전시한 바 있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1965)라는 퍼포먼스에서 요셉 보이스는 회칠을 한 얼굴로 죽은 토끼를 가슴에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짐승의 언어로 몇 시간에 걸쳐 토끼에게 회화론을 강의했다.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회복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하지만 허스트와 베이컨과 보이스를 다 합쳐도 이천 시민들의 퍼포먼스를 따라가지 못한다. 죽은 돼지를 사용한 허스트와 달리 그들은 산 돼지를 사용했고, 화폭 위에서 폭력을 행사한 베이컨과 달리 현실의 공간에서 돼지를 난자했으며, 소통을 회복하려 한 보이스와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연민마저 파괴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리가 한국에서는 차라리 일상의 질서에 속한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이천 시민들의 전위정신이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작가들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대로에서 산 동물을 도살하는 습속의 ‘전근대성’. 군부대의 이전으로 입을 이해의 손실을 타산하는 삭막한 ‘근대성’,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탈근대성.’ 이 세 요소로 짜여진 별자리는 그 동안 퍼포먼스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던 ‘누드-반공-할렐루야’의 엽기를 가볍게 능가한다. 이 사건은 아마도 21세기 복잡한 한국 사회의 단층을 보여주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명화 과정

양식(良識) 있는 시민들은 이 몰취미를 “야만적”이라 불렀다. 문명화 과정은 공개처형이든, 공개도살이든 잔혹성의 연출을 공공의 영역에서 감추어 버린다. 잔혹극을 포기한 인성은 이른바 ‘취미’(taste)의 섬세함을 갖게 된다. 그런데 현대예술은 어떤가? 문명화를 거슬러 취미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한다. 왜 그럴까? 이미 확립된 질서 너머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취미가 없었던 문명화 ‘이전’과 취미를 포기하는 문명화 ‘이후’가 언뜻 비슷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둘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돼지 도살 퍼포먼스의 잔인성을 비난한다. 그들의 말대로 이 퍼포먼스는 문명화에 대한 야만적 테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정작 사형제도 자체의 잔혹성은 의식하지 못할 게다. 잔혹한 범죄의 범인이 잡힐 때마다, 인터넷 공간은 17세기의 공개처형장이 되어 온갖 끔찍한 봉건적 처형방법을 제안하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다. 돼지도살 퍼포먼스가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할까? 혹시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널리 깔려있는 이 잠재적 폭력성의 단편적 드러남이 아닐까?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돼지는 희생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기 덩어리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내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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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가 독자에게 /

우리는 압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일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준 겨레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너무도 게을렀다. 우리는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다만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우리 머리 속에는 참으로 새로운 우리들 자신의 세계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도 설계도도 없이 자기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 집을 지어야 했으나,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유의 빈곤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김상봉 교수가 새 책 <서로주체성의 이념>(길)에서 진단한 최근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이다. 그의 처방은 비장하면서도 명쾌하다. 매판사대주의, 식민사관의 늪에서 헤어나 자신의 머리로 자기 집을 짓되 지배 엘리트가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저항하고 싸우라, 정신의 노동을 멈추지 말라, “오직 근면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매판적 현실에서, 무슨 짓을 하든 돈벌고 출세하는 “성공이라는 강요된 신화”를 거부하는 8명의 ‘미친 놈’들을 만난 김택환의 <스무살, 너희가 별이야>(삼인)도 그와 상통한다. “운동은 말이야, 거리에 나가서 돌 던지고 데모하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삶으로 하는 거지. 운동성, 난 ‘운동’이라기보다 ‘운동성’이라고 말해. 운동성을 몸에 지녀야 한다고. 현실의 물결은 생각보다 거세고 나이가 들다보면 세상과 타협하고 안주하게 돼. 진짜 운동은 그때부터 시작인 거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문제제기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 만약 너도 운동을 하고 싶다면 진짜 운동을 해. 네 나이가 서른, 마흔이 돼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저항과 용기를 몸으로 실천해.”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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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의 한장면
책속의 한장면 / 사진산책-일상 속에서 건져낸 사진 이야기
한정식 지음. 눈빛 펴냄. 1만원

시인의 뇌리를 스치는 한 줄기 영감이 한 편의 시를 이루듯, 사진가의 망막을 가로지르는 한 순간의 빛이 한 장의 영상으로 태어난다. 순간적 영감을 얻기 위해 시인이 명포수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듯, 한순간의 빛을 잡기 위해 사진가가 일등 사수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사진가가 추구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찰나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물리적 순간이 아니라 그 사물의 의미가 작가의 내면과 만나는 심리적 순간이다. 전남 광양.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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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4 1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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