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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작업하는 책이 번역서이다보니 우리(라 함은 당연히 동료들)끼리도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얼마전 점심시간에 나눈 주제는 '다른 나라 말을 어느 정도 선까지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가'였다.

작업하고 있는 원고를 보다가 꺼낸 내 얘기가 시작이었다. 작가가 만들어낸 고유명사들을 발음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발언이었다. '사쿠라야(櫻屋)'라는 가게 이름이 있다. 우리말로 치자면 '벚나무집' 정도? 많은 번역본에서 당연하게도 "고유명사이니까"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현존하는 지명이나 가게 이름이라면 모를까,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이름들은 그게 적절한 우리말을 골라 대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느 책의 서평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니와, 작가의 의도가 담긴 작명이나 고유의 의미를 지닌 경우, 또는 가장 기본적인 가독성을 위해서라도 '벚나무집'(또는 다른 적절한 이름으로)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박 군이 말한다. 만약 가게 이름들을 그렇게 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장황해지거나 엉뚱한 이름들이 생길 거라고. 웃기는 이름들이 생기지 않겠냐고.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표기한다는 말을 했지만 이런 이유도 상당하다. '종달새 클럽'은 웃기고 '라크 클럽'은 괜찮다. '사쿠라야'보다 '벚나무집'은 어쩐지 이상하다. 합당한가?


질문해 보자. 원어민 독자들이 느끼는 어감을 근거로 들자면 어떤 말에 더 가까울까. '라크 클럽'이나 '사쿠라야'라는 말에서 그들은 '종달새 클럽'이나 '벚나무집'이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세련되다"고 느낄까? 고유명사니까 그대로 표기한다는 말은 내게는 좀 안이하게 들린다. 그런 이유라면 우리는 "Every dog has his day"라는 속담을 평생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로 옮기지 못할 것이다. (근데 나는 '벚나무집'이 더 운치 있게 느끼져는데...;; '사쿠라야'는 아무런 느낌도 없잖아.)


많은 편집자와 번역자 들은 본디 말이 가진 의미를 온전하게 그대로 옮기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분야에서는, 이야기의 맥락과 그 맥락의 전체적인 의미를 해치지 않는 한 최대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는지. 소설 교정의 첫 번째 목적은 독자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읽기 쉽도록 다듬는 게 아닌가. 아무리 원래의 의미를 정확히 살렸다고 해도 읽히지 않는 소설은 소설로서의 가치를 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가 각주를 싫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각주는 의미를 더할지언정 읽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각주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만 없앨 수는 없는 필요악이다. 어떤 경우, 세심하게도 원래의 문장을 곧이곧대로 쓰고는 일일히 각주를 붙여 뜻을 설명하고 심지어 문장에 함축된 의미까지 해설을 하기도 한다.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소설은 참고서가 아니다. 문장을 해설하기 전에 독자들이 그냥 읽고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정도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냥 영어나 일본어를 배워 원서를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우리말로 옮겨지는 순간 우리말 소설로서의 자리를 먼저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김상훈 선생은 존경할 만한데, 비록 한자어를 남용하시긴 하지만(하하) 외국어를 외국어대로 두는 법이 별로 없다. 아마 다른 번역자가 <퍼언 연대기>를 맡았더라면 '퍼언의 용기사가 어깨에 불도마뱀을 얹고 청색 드래곤에 올라타 <사포(絲胞)>를 막기 위해 용굴을 떠난' 것이 아니라 '퍼언의 드래곤라이더가 어깨에 파이어리저드를 얹고 블루 드래곤에 올라타 <쓰레드>를 막기 위해 위어를 떠난'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뒤 문장이 더 멋있게 느껴진다고? 그렇다면 이 아래 글은 읽을 필요 없다.


영어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익숙해져,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문제인지도 모른다. '건물'보다는 '빌딩'이, '탁자'보다는 '테이블'이 더 익숙하게 들린다. 이제는 일본어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결국 흐름은 영어가 자국어 안에 흡수되어 혼용하는 쪽으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어가 제2모국어가 된다면 아예 문제가 안 될는지도.


나는 사실 작가들이 지어낸 이런 '가공의' 이름이 아니라도 문맥을 어그러뜨리지 않는 한, 꼭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말로 옮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문학의 경우에 말이다. 인문학은 또 다를 것이다) 현재의 번역서에는 너무나 많은 외국어(문장)들이 난무한다. 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너무나 많은 주석이 달려 있다.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우리는 문학으로 공부를 하자는 게 아니잖는가. 그 말이 어떤 의미를 어떻게 담고 있고, 원문에서 어떤 중의적인 표현으로 쓰였는지 해설을 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영어를, 일본어를, 미국 문화를, 일본 문화를 공부하려는 게 아닌데 말이다(간접적으로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말에 너무 소극적이고, 원문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말이지만, 아무리 원문에 가깝게 직역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원문의 그것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는데도.


이런 현상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 같다. 십수 년 전의 번역서를 들춰 보면 지금의 번역서들과는 많이 분위기가 다르다. 나는 요즘,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한국 이름으로 바꾼 번역서가 가끔 그립다(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하).


금 다른 누굴(번역자든 편집자든)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럴 만큼 훌륭하게 편집자 노릇을 하고 있지도 않고,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우리말만 쓰자는 주장도 아니다. 나는 언어와 언어나 만나는 지점에서 언어가 좀 더 풍족해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그저 게으름을 자아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고민해서 번역자와 상의했으면 아주아주 조금이라도 더 잘 읽히는 책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한 번만 더 찾아봤더라면, 한 번만 더 상의했더라면. 아직 고칠 수 있을 때 오바, 아니 '수선'을 떨어 추스려 나가자고. '어라, 어느새 우리말이 이 정도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미 이런 고민 따위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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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3-2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분의 홈페이지에 가서 종종 글을 읽곤 하는데요. 여기서 보니 반갑군요. 이 분은 시사인에도 가끔 글을 쓰곤 하시죠.

라주미힌 2008-03-2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잘 안올라와서 안가다가 간만에 들렀더니.. 올라왔더군요. ㅋ
 

오늘밤 꿈도 기가 막히게 훌륭하였다. ㅎㅎㅎ


수십명의 일행과 어떤 산에 가기로 했다.
아주 낯선, 그 산은 미답의 길을 더듬더듬 거리며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바위, 나무, 물이 많은 그 산의 정상에 오르는 순간 하늘이 움직인다.
머리 위를 보니 작은 점만한 회오리가 여러개 생긴다.
빛이다.
그 순간 번개가 내리친다. 마치 사람을 노리듯이 내리 꽂는다.
놀란 사람들은 바위를 피하여 낮은 곳을 찾지만, 수 많은 번개가 여기저기에 내리 꽂는다.
엄청난 혼란이 사람들을 엄습한다. 넘어지고 구르고...
번개를 피해 다른 장소로 도망치듯 이동한다. 
길을 잃어버렸다. 산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사고를 당하여 죽는다.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우리 주변을 에워싼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그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저주는 일행 내부의 몇명 때문이라고... 
몇몇의 사람들이 벼랑 끝에 몰리고(진짜 벼랑 ㅎㅎ), 아주 높은 폭포에서 뛰어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은 무사하게 된다.
우리를 바라 보는 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절망과 동경이 담겨있다.
우리는 뒷모습만을 남기며, 유유히 산 아래로 간다.
이제 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산의 입구에 다다른 순간, 다른 일행이 나타난다.
그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맞냐고 묻는다. 
맞다고 짧게 답하고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한다.

 

인간을 시험하는 산이라...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산을 찾는 사람들... 

내 꿈의 완성도가 많이 높아졌네 ㅡ..ㅡ;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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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3-2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꿈을 보니 '미스트'가 생각나요 ㅎㅎ 근데 꿈 기억을 잘하시나봐요~ 전 대개 일어나면 잊어버리고 마는데 ㅋㅋ

라주미힌 2008-03-24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꿈은 기억할려고 노력하죠. 아까우니까. 눈 뜨자마자 외워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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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3-2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춰! 정말 깜찍 그 자체군요. 별찜했어요..;;;

라주미힌 2008-03-2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런 강아지 한마리 있었으면....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여행객들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어진 비좁은 길 위에서 아찔한 모험을 즐기고 있는데, 이 절벽 길의 이름은 '카미니토 델 레이'로 스페인 말로 왕의 오솔길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말라가에 위치한 이 절벽 길은 지난 1901년 4년여에 걸쳐 식량 등의 물자 수송을 이유로 건설되었는데,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난간이 떨어져 나가는 등 파손된 부위가 많다는 것이 해외여행 관련 인터넷 사이트 등의 설명.

100여 년 전, 700m 높이의 절벽에 약 1m 폭으로 건설된 이 절벽 길은 지난 1999년과 2000년 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통행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하지만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부 간 큰 여행객들이 여전히 몰래 절벽 길을 오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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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조선사 - 역사의 새로운 재미를 열어주는 조선의 재구성
최형국 지음 / 미루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인간과 사회구조, 체제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사다. 큰 흐름을 기술하는 거시사를 주로 접하다 보니 고목 껍질의 결을 매만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을 보완하기엔 미시사가 제격이다. ‘변방의 역사’, ‘개인의 역사’를 현미경으로 관찰함으로써 더 큰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았던 개인과 문화, 사료 속에서 역사의 우연성과 변혁의 ‘끼’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만으로도 미시사는 매력적이다. 지엽적인 것에 치우칠 수도 있겠지만, 체제와 사회구조 속 주체를 이해하는 것이 커다란 역사를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필수 요소임은 분명하다. 

다른 시대보다 사료가 풍부해서 그런지 조선사 관련 책들이 많다. 요즘 부쩍 늘었는데, 예전에 대단히 인기를 끌었던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같은 책과 다르게 왕과 관련된 책들이 많이 출간된 듯 하다. TV사극 열풍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듯 싶다. 이 책은 그와 또 다르게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라는 느낌을 줄 만큼 색다른 소재를 다룬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것이 더 많다.) 소제목도 잘 지어서 스포츠 신문 타이틀마냥 호기심을 자극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서 그런지 내용도 쉬워서 술술 읽힌다. 하지만 각 꼭지를 읽고 나면 허전하다. 그게 다야? 사실을 기술함에 있어서 분석이 빈약해 보인다. ‘있었다’라는 것만 있지 ‘왜’ ‘어떻게’라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게다가 본문과 다르게 인용하는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날 것’에 가깝다. 요즘 말로 쉽게 풀어서 해석해주는 것이 저자의 몫 아닌가? 제목은 친절한 조선사인데, 결코 친절하다고 볼 수 없다. 가령 먹거리를 다루는 ‘소젖 많이 짜지 마라 백성이 운다.’에 이어 나오는 ‘임금의 수라에 올라갔던 음식의 양과 비용은?’은 아무런 가공도 없이 데이터만 나열해 놓았다. 그 당시 서민이나 양반의 음식 소비량과 비교라도 했으면 의미라도 있지 않았을까. 서빙고에 저장된 얼음의 양도 그렇고 단순 인용은 지면만 채우는 역할만 담당할 뿐이다. 사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의 노고가 엿보이는 책이지만, 최소한 소제목에 부합하는 결론은 도출해야 하지않을까. ‘바다귀신 흑인용병은 임진왜란에 참전하다’의 결론은 심하게 허무했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왜 그랬을까로 마무리하다니 낚인것인가.
3세대 아날학파 페르낭 브로델은 미시사를 '사건의 역사', 이야기만 나열하는 역사라고 혹평했다.
이 책이 이러한 혹평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치즈와 구더기', '고양이 대학살' 같은 깊이 있고 흥미로운 미시사를 기대해 본다.

"문화적 대상은 역사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들은 의미를 내뿜는다. 그들을 세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 로버트 단턴의 말에서 미시사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 독자는 사실의 나열이 아닌 읽을 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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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3-2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리뷰가 점점 물이 올라요. 따끔하게 할 말을 꼭 집어주는 센스! 영화리뷰도 늘 재밌게 보고 있거든요^^

라주미힌 2008-03-21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감솨합니다.. :-)
마노아님도 이 책 읽어보셨죠? 제가 너무 않좋게 썼나.. 저자에게 쬐끔 미안하네요. 솔직하게 쓰는게 최고의 미덕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ㅎㅎㅎ

마노아 2008-03-21 23:54   좋아요 0 | URL
아뇨, 못 봤어요. 승주나무님 리뷰만 보았답니다. 거긴 별점 다섯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하늘바람 2008-03-2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정말 빨리 읽으시나봐요

라주미힌 2008-03-2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 달에 두권 읽어요 ㅋㅋㅋ

승주나무 2008-03-2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제가 너무 좋게 이 책을 해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주미힌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거시사에서 미시사로 가는 흐름의 부표"라는 관점에서 프리미엄을 많이 주었습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미시사'라기보다는 'anti 거시사' 정도 될 것 같군요. 거시사의 거대한 뿌리와 전통은 워낙 깊잖아요. 자료도 많고.. 미시사는 별로 귀기울이지 않는 영역이라 많은 개발과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라주미힌의 솔직한 리뷰에 필받아서 적습니다.

마노아 2008-03-22 12:06   좋아요 0 | URL
두분 리뷰 모두 즐겁게 보았어요. 여전히 책에 대한 관심은 유지중이구요. 조선사 들어갈 때쯤 읽어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