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인권영화제, 6월5일 저녁7시, 촛불광장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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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의 지지자는 물론 그에 어지간히 비판적이던 사람들도 결국 그의 장례식 날엔 굵은 눈물을 함께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알기에 아직 우리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우리가 함부로 생략해선 안 될 또 다른 슬픈 죽음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죽어간 사람들, 23명의 노동자민중 열사들이다.
그 23명이 모두 애당초부터 노무현을 반대하거나 적대한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신들의 편일 거라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기대했던 ‘고졸 출신 서민 대통령’에 의해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으며 배신감과 절망감에 몸을 떨며 죽어갔다.
오늘 추모의 열기 속에서 끝없이 나열되는 대통령 노무현의 업적들은 대개 그르지 않다. 정치 개혁, 권위주의 탈피와 소통 강화, 지역갈등 해소 등등. 그는 정말 정치적 민주주의 발전에 그 어느 대통령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서민 대중의 실제 삶과 관련한 부분, 즉 사회 경제적인 민주주의에서 대통령노무현은 모자람이 많았다. 특히 지난 30여년 동안 지구상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만큼’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든 마지막 노무현은 더 이상 고집스런 신자유주의자 대통령이 아니라 “삶과 죽음도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무상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잘못과 한계를 들춰내며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조차 냉소하는 일도, 감상에 젖어 혹은 그를 죽게 한 미안함과 자책감에 젖어 그가 아무런 잘못이나 한계도 없었던 양 무작정 그를 찬미하는 일도 정중히 삼가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제 삶의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정화하고 떠난 사람 앞에서, 감상이나 냉소가 아니라 그의 삶의 공과를 분명히 기억하되 그가 품었던 뜻을 정갈하게 되새기고 그가 남긴 꿈을 우리 삶에 잇는 게 옳겠다. 그의 꿈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고집스러운 신자유주의자 대통령 노무현을 잇는 게 아니라 그의 본디 꿈, 그가 아직 순수한 이상주의자이던 시절의, ‘바보 노무현’의 꿈을 잇는 것이다.
그 꿈은 누가 이을 수 있을까? 오늘 노무현의 후계자라 지목되는 사람들, 그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파병을 하고 FTA를 밀어붙이고 ‘삼성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반민중적인 정치를 펼쳐 23명의 한 맺힌 죽음을 낳도록 내내 보좌한 사람들일까? 그들이 노무현의 꿈을 이을 수 있을까? 천만에. 여전히 자신들이 ‘이명박보다는 백번 나으니’ 아무런 반성할 것도 성찰할 것도 없다는 얼굴을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무현의 꿈이 아니라 노무현의 잘못과 한계를 다시 되살리는 일뿐이다.
노무현의 꿈은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배신했음을 지적한 사람들, 끊임없이 노무현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그가 잃어버린 제 본디 꿈을 회복하길 소망했던 사람들, 23명의 열사의 편에 섰으며 오늘 여전히 그들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이어질 것이다. 바로 그들이 소년 노무현이 봉화산의 호미 든 관음상 앞에서 맹세한 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이을 것이다. (한겨레)


2003  이해남 이용석 이경해 김주익 송석창 박상준 곽재규 이현중
2004  김춘봉 정상국 박일수
2005  오추옥 정용품 김동윤 류기혁 전용철 홍덕표 김태환
2006  하중근
2007  정해진 이근재 허세욱 전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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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촛불 1주년 기념 문화제.

명동에서 이루어진 집회 진압과 해산 과정에서 집회와 무관한 시민들이 연행되는가 하면
외국 관광객들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폭행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요시이리씨는 한국문화와 음식을 좋아해 7번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5월 초에는 황금연휴를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관광을 왔다.

명동에 있는 단골 고깃집을 찾아가다가 길 한복판에서 봉변을 당한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밀리오레 부근을 지날때 7~8명의 경찰이 달려와 그를 때리고 발로 밟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구타한 경찰과 책임자를 찾아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소송이나 배상을 원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타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듯한 한국경찰의 태도에 분노했다.



PD수첩이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 대해 문의하자 경찰은 수사가 진행중이라고만 답했다.
이번 사고와 관련해 경찰이 내놓은 대책은 앞으로 집회해산명령을 일본어로도 하겠다는것이 전부다.










데이트 약속이 있어 야근을 마치고 명동에 도착하자마자 연행된 이계용씨.










이 날, 연행자 가운데는 지적장애인도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를 본 이승택씨는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인시위에 나섰다.











올해 36살인 지승환씨는 지적장애인이다.
지적장애 2급의 수준은 10살 아동보다 지적 사회적인 능력이 떨어진다.

5월 2일 명동에서 연행된 지승환씨는 현재 구속 수감상태다.

그의 구속사유는 집시법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
연행되기 전날 시위에서 박카스병을 투척했고,
하이 서울 페스티발에서 카퍼레이드 차량의 풍선을 터뜨렸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촬영된 화면을 보면 카퍼레이드 차량의 풍선을 터뜨린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담당 경찰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5월 2일 명동 연행자 가운데는 미성년자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올해 고1인 유현주 학생도 명동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현주양은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잡힌것이 아니었다.
선배 연행에 항의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항의 모습을 경찰이 카메라로 채증하면서 시비가 붙었다.
현주가 카메라를 치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난 5월 1일 여의도에서 노동절 행사가 열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내 중심에서 개최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도심집회 신청이 모두 불허됐다.

행사 후 참가자들은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지하철은 시청역을 무정차 통과했고, 시청역 입구는 모두 봉쇄됐다.
역사 안에 갇힌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10분정도 갇혀있던 시민들이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간신히 지상으로 올라왔다.


종로3가 지하철역 주변도 경찰이 에워싸고 있었다.
경찰은 지하철 역사 안까지 진입해 일부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섰다.

시민들이 호소해도 경찰은 꼼짝하지 않았다.
성난 시민들이 밀고 올라가려 하자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저지했다.




 




간부로 보이는 경찰 한명은 긴 장봉을 휘두르며 시민들을 쫓았다.
장봉을 휘두른 경찰은 조 모 경감이었다.
조 모 경감에게는 '사무라이 조' 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그날 김철수 기자는 조경감이 휘두른 장봉에 맞았다.
그는 며칠동안 심한 멍과 붓기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조경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동은 시민들을 몰아내기 위한 방어차원의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김지환씨는 경찰의 곤봉에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고 7바늘을 꿰맸다.
김씨는 역사를 빠져나가려던 상황에서 곤봉에 맞아 그 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일,
덕수궁 앞 시민분향소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다섯살짜리 아이가 켠 촛불이 말썽이었다.














부모님과 경찰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아이는 스스로 촛불을 껐다.



경찰의 과민한 대응은 촛불 1주년 기념 집회에서도 나타났다.
하이서울 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렸지만, 경찰은 행사보호 보다는 촛불집회 참가자 차단에 집중했다.

저녁 7시 이후, 경찰은 광화문 사거리를 막고 집회 참가자들을 몰았다. 남대문 앞으로 경찰이 봉쇄했다.
결국 시위대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렬과 섞인 채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당시 시청광장에서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개막식 리허설이 진행중이었다.
불어난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리허설 무대를 점거했다.

경찰은 곧 무대를 점거한 참가자들을 진압하고 연행에 돌입했다.

5월 1일, 시청 연행자 가운데는 시민악대 단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무대를 점거한 적도 없고 단지 시청역 주변에서 공연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민악대가 시청광장에 도착한 때는 경찰도 연행을 막 끝마치고 소강상태였을때였다.


시청역 5번출구 부근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민악대는 그들과 어울려 연주를 하고 율동도 선보이며 흥을 돋웠다고 한다.
경찰의 특별한 제지는 없었다.




 









이날 연행된 시민악대는 모두 5명.
집시법 위반과 축제방해 혐의였다.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민들이 시청 근처 대한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날 경찰은 92개중대 8,2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시민분향소 주변을 겹겹이 에워쌌다.














시청역 1번출구에는 시민분향소로 들어가지 못한 추모객들이 점점 불어났다.
대한문 시민분향소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근처에 임시분향소를 만들었다.
초라한 이곳에도 시민들의 추도가 이어졌다.

 

서울 경찰청장은 경찰버스가 분향소를 막아줘 아늑하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기간동안 서울시내에서 집회가 가능한 공간에는 어디든지 경찰이 먼저 들어서있었다.
경찰은 추모시민들을 잠재적인 시위꾼으로 바라보았다.

 


영결식 다음날 새벽, 경찰은 대한문 시민분향소를 철거했다.
시민들의 항의에도 경찰은 철거를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이 연행됐고 분향소가 심하게 훼손됐다.













그리고 서울시청광장은 다시 봉쇄됐다.

 


5월 20일 경찰청 앞.
신고가 필요없는 기자회견이지만, 경찰은 임시 폴리스라인을 쳐놓고 기자회견 관련자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경찰이 병풍처럼 에워싸 기자회견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조차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경찰의 지침에는 기자회견과 촛불문화제를 빙자한 집회에 법을 엄격히 적용하라고 나와있다.

 




 








5월 4일, 경찰의 무차별적 연행에 항의하고 이를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 숫자보다 훨씬 많은 경찰이 기자회견을 하려는 사람들을 에워쌌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참가자들이 해산하려는 순간 경찰이 행동을 시작했다.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경찰은 이 기자회견을 불법집회로 간주했다.

이 날, 발언을 한 시민단체 관련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48시간동안 유치장에 갇혀있었다.


 


올해 초, 경찰청에서 작성한 불법폭력시위 관련단체 현황 문건이다.

경찰이 불법폭력단체로 규정한 곳은 작년 촛불시위와 관련된 1,840개 단체다.
여기에는 시민단체, 국회의원, 문화관련 단체까지 망라되어 있다.




 




불법으로 규정된 단체의 집회는 원천봉쇄하거나 강경하게 진압한다.
경찰은 해산을 유도하기 보다는 시위자 검거에 더 열성적이다.



5월 1일, 2일 집회 상황을 종합한 경찰 내부 문건.












경찰은 노동절 집회를 도심 외곽으로 유도했다.
도심권 4개의 집회는 신고를 해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경찰의 목표는 집회에 참가한 좌파세력발본색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현장검거 위주의 무관용 원칙을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5월 2일 시청 앞.
엄마와 딸이 경찰버스로 찾아왔다.

엄마와 어린 딸의 애원에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경찰은 끝까지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 6월 2일 피디수첩 '봉쇄된 광장, 연행되는 인권' 편.
  캡쳐와 멘트는 베스티즈 펌. 올리신 분이 적극적 재배포 권하셨습니다. 마음대로 퍼가셔도 됩니다.
  홀로 외로이 피묻은 깃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PD수첩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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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tpstp919.egloos.com/236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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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6-0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봐야겠군요. "일본말로 하시지 않았어요?" "듣질 않았어요"

라주미힌 2009-06-04 10:46   좋아요 0 | URL
pd 수첩.. 대표적인 반정부 프로그램ㅋㅋ

글샘 2009-06-04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과 아프님과 광화문에서 만난 것이 1년 되었네요. ^^
1년만에 나라는 완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구요.
이번 여름도 꽤나 뜨거울 것 같습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라주미힌 2009-06-04 10:45   좋아요 0 | URL
1년 밖에 안지났나용;;; 으흐.
1년 전에 생각했던 상태보다 좀 심하죠?

마늘빵 2009-06-05 00:11   좋아요 0 | URL
올 여름에도 뵐 수 있으려나요? 이게 좋아할 일인지 에혀...

가시장미 2009-06-04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못 봤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한민국 경찰= 개경찰
대한민국 검찰= 개검찰
정말 개판 이네요.

라주미힌 2009-06-04 10:46   좋아요 0 | URL
복날이여 오라...

가넷 2009-06-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꼴이 잘 돌아가는 군요....-_-;;;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었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http://bsnodong.tistory.com/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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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6-0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앞이 어질하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06-0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지고 갈게요
글 잘쓰는 사람 참 많지만 김진숙 동지의 글은 늘 마음을 움직입니다.

비연 2009-06-03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클한 글입니다..저도 가져갈께요...

라주미힌 2009-06-03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죠.... 아주 오래 가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여러 번 읽게되네용

나무처럼 2009-06-0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 모임하는 카페로 퍼가겠습니다. 감사

토토랑 2009-06-04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라할수가없네요..
저두 결국은 누가 죽어도 크레인에 올라가고 목이말라도
그냥 그 기사 보고 X 표 클릭해서 창을 닫고 마는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림올빼미 2009-06-0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 님 처음 뵙겠습니다. 글이 가슴을 울려서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퍼갑니다. 감사드립니다.

라주미힌 2009-06-0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

머큐리 2009-06-0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글 모임하는 카페로 퍼가야겠어요...
 


이명박의 손님접대 방법
 

출처 - DC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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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6-03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크 너무 웃기잖아요!

qualia 2009-06-03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습기는 하지만...
하지만...
여사님은 무죄잖아요^^
여성은 무조건 무죄!

무해한모리군 2009-06-0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허허..
하여간에 상상초월한 냥반이라니까 ㅎㅎ

마노아 2009-06-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잖아요..ㅋㅋㅋ

pjy 2009-06-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임금님의 수라는 이보다 훨씬 더 훌륭했던건 사실인데..드시고 남은 상 고대로 아랫사람들이 밥을 먹었다고 하네요,,윗대가리가 본인 몸이 대한민국이라 쳐드시면 아래사람은 다 굶는거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