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상상력의 발원지는 지식과 기술 그리고 감성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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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2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예전에 읽으시더니 이제와 뜬금없이 40자평 ㅎㅎㅎ

아하, 그래서 라주미힌님이 기발하시구나 ㅋㄷㅋㄷ

무해한모리군 2009-11-26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hrub.egloos.com/2086648

주말에 인천인권영화제는 어때요?

라주미힌 2009-11-26 11:30   좋아요 0 | URL
네.. 보러 가요 ㅋㅋ

머큐리 2009-11-2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천까지 오시는데... 주안으로 오는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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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강지키는행동,4대강저지국민소송단22일(일)까지모집

http://www.nocanal.org/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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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대학생이 텔레비전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며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해서 큰 소란이 났다. 나는 포털의 메인화면에 뜬 기사를 보고 그 일을 알았는데 내가 본 기사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는 예의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낱말까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스펙이 좋다면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두 번째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단지 내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서가 아니라 매우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첫번째 이야기는 인터넷 마녀사냥 시비가 날 만큼 일파만파 퍼져나갔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마치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양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라진 이야기에 공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이야기도 그 절반, 즉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부분은 사라져버렸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역시 공감한 것이다. 결국 남은 건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뿐인데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루저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그 반발엔 꽤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이제까지 대놓고 외모를 상대 성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말하거나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상대 성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표시하는 건 남자만의 권리였다. 이를테면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여자에 대한 경멸은 오늘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지존이라는 <개그콘서트>엔 아예 그런 캐릭터만 전담하여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 코미디언이 있으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웃는다.
‘180센치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그 여대생은 우리가 사람을 됨됨이가 아니라 스펙으로 평가하며,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들지 않을 만큼 닳고 닳은 사람들임을 알게 해주었다. 양식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오늘 이명박 반대를 외치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은 내가 왜 ‘우리’에 포함되는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명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말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가?
글이나 말, 혹은 기사나 성명서 따위 말고 실제 삶에서 말이다. 하긴 다른 구석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이명박을 지지하는 부모들은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지만 이명박을 반대하는 부모들은 매우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교육목적이 인간이 아니라 스펙이라는 점은 같지만 표정만은 정말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이명박을 반대한다면 그래서 이놈의 세상을 눈곱만큼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우리가 이명박과 다른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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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네요.

라주미힌 2009-11-19 00:13   좋아요 0 | URL
저분은 맨날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데... 들을때마다 환기가 되요 -_-;;
아.. 환기하라고 같은 말이 반복되는건가;;;

로드무비 2009-11-1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집에서도 못생긴 여자가 더 서비스를 잘한다, 그런 요지의 발언도 했었죠.
대통령 되기 전이었던가?
아무튼......

이놈의 세상이 눈곱만큼이라도 바뀌긴 할까요?
나부텀도 이렇게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

따지고 보면 김규항 씨의 저 말이 억울할 것 하나 없습니다.


라주미힌 2009-11-19 14:33   좋아요 0 | URL
달라지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정말 보면 다른 것 하나 없구만... 감정의 털끝만 예민해져서리 ㅋ

무해한모리군 2009-11-23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ttb 목록이 마음에 들어요. 왠지 개성이 느껴지네요 ^^

라주미힌 2009-11-23 09:45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들이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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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00쇄 기념 영인본'에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필자가 진행하는 방송에 조정래 선생을 모셨을 때, 제일먼저 이렇게 물었었다. “새로 내신 책 제목이 왜 ‘황홀한 글 감옥’ 입니까. 감옥이란 자고로 고통스러운 곳인데, 그곳이 황홀하다니요?”.

 

이에 대한 선생의 답변은 “‘태백산맥’, ‘오 한강’, ‘아리랑’, 이렇게 세 편의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20년간 하루에 원고지 30장씩을 매일매일 메워나갔다. 알다시피 작가의 창작의 고통이란 뼈를 깎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20년간을 뼈를 깎아온 셈이다. 반대로 하루하루 쌓이는 원고지를 볼 때마다 다른 한편 황홀함이 생겼다. 글이 써나감에 따라 그 황홀도 점점 더해졌다. 그러니 어찌 그곳이 ‘황홀한 글 감옥’이 아니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런 질문과 답들이 담겨있다. 대학생들이 선생의 문학에 대해 질문을 하고, 선생이 그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자전적 에세이가 되고 어찌보면 대 소설가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는 문답집이 될 수도 있다.

 

책에는 다양한 질문이 들어있다. 선생의 문학관, 인생관, 역사관, 심지어 연애와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망라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학에만 정진을 해온’ 작가 조정래의 깊은 내면세계를 구경, 혹은 염탐하는데 있다. 대개 작가들은 작품속의 주인공들과 달리 자신의 세계에 타인이 틈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작가로서의 작품세계와 자신의 세계관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정래의 ‘활홀한 글감옥’은 그의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유년시절, 법명을 받고 조계사에 승적에 입적햇던 청년기, 시인 김초혜와의 사랑, 그리고 광주 민중혁명을 거치며 절망과 좌절과 절망을 맛보아야 했던 지식인으로서의 고통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물론 그 여정에는 전후 한국문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 ‘태백산맥’의 저자로서 사상적 검열에 얽힌 얘기도 피해 갈 수 없다. 책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일, 우익과의 충돌과 위협,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작가가 되기위해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까지 가감없이 들려주고 있다.

 

조정래는 문학에 정신이 있고,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작가다. 그리고 문학에는 개인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문학에 개인의 체험이 들어가면 세계관이 좁아지고, 문학이 유희와 오락으로 전락하면 존재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믿는 작가다. 대신 스스로도 그만큼 엄격하다. 그는 문학이란 최소한 시대정신과 당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수행을 연상시킨다, 그 스스로 이 책에서 농담처럼 자신은 20년 참선을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엄격한 작가로서의 자기관리의 바탕이 없엇다면 태백산맥은 아마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문학에 대해 말하는 대목들은 빨간줄을 두 번 세 번 그어가며 읽을만 하다.

 

그는 자신의 ‘진보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을 말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 밖에 없다. 또 기득권을 향하는 보수세력과는 갈등하고 맞설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소설의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의 실현이다. 그러니까 진보작가의 길은 조금은 성직자의 길이기도하고, 조금은 철학자의 길이기도 하고, 조금은 개혁가의 길이기도 하다”. 즉 ‘진실을 말하는 한 작가는 진보적 일 수밖에 없으며, 만약 그 반대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규정을 지어버리는 셈이다.

 

이어 그는 “종교는 말해서 안되는 것을 말하려하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 할 수 있는 것만 말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이며 그 반대는 역시 문학이 아닌 것이다.

 

조정래다운, 조정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선생은 일전에 ‘이문열 작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가 가는길과 내가 가는 길은 다르다’고 말한바 있다. ‘옳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길이 다르다는 의미다. 그는 책에서 ‘빅톨 위고’처럼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회 역사의식을 문학성과 가장 조화롭게 형상화한 모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빅톨 위고’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며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옹호하는 작가’였고, 그보다 빛나는 작가의 삶은 없었다.

 

그의 이런 자세를 ‘엄숙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에대해 그는 “말초적인 이야기, 지엽말단적인 이야기를 1인칭으로 중언부언해가며 자칭 예술의 극치에 취해있는 것도 나쁠것 없다, 예술은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혼자일수 없고 서로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힘과 섥힘이 사회이고, 그 속에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이다. 이 의식을 굳건하게 세우고 있으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길이 보인다”라고 일갈한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 조정래, 작가 조정래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말하는 책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태백산맥을 밤새워 읽은 기억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 한권으로 인해 그야말로 황홀한 독서체험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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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영화감독인 남편은 불황기의 영화계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 하고자 고군분투하나 작업환경은 나아지는 게 없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려운 가정을 꾸려가는 아내가 밤새 노래방 도우미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시아버지는 유서 한통 남기고 목을 메고 자살을 하였다. 아내의 시동생은 은둔형 외톨이로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내의 소식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시나리오 수정 작업만 계속 할 뿐이다. 이내 밤이 되자 아내는 노래방 일터로 나서고, 남편은 탈고 한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 대표를 만나러 가고, 시동생은 축 늘어진 아버지의 시신 아래에서 찬밥을 차려 먹는다.
가족들은 아버지 곁에서 똑같은 일상생활을 계속하는데...




당구장 주인이 죽었는데, 왜 나의 아내가 소복을 입고 슬퍼하며, 나에게 맞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비는 자살함으로써 풀 수 없는 문제로 남겨두었다. 자신의 시신을 화장실에 걸어둔 체 영혼은 울부짖는다.
둘째야~ 나 좀 내려줘. 목이 아프다. 첫째야~ 나 좀 내려줘. 며느라기야 나 좀 내려줘~

삶의 목을 죄는 것은 관계의 끈이기도 했다. 나의 아내였고, 내 아들이었고, 며느리였다. 그 끈은 화장실에 영혼을 붙잡아 맨다. 차라리 툭하고 끊어지는 것이 편하다 아니면 누군가 끊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은 인연은 단두대에 잘린 머리보다도 못하다. 왜 이렇게도 질긴 것인지. 어미가 남긴 기억의 맛살만 먹으며 나오지도 않는 똥만 싸려는 둘째에게는 똥냄새가 더 반가울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송장냄새조차도 저 고장 난 환풍기만 고쳐지기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첫째의 아내이자 둘째의 아이를 가진 며느리는 오직 손님을 받을 뿐이다. 집에서건 노래방에서건 그녀는 떠내 보내는 자가 아닌 받아내는 자다. 송장은 남편이 치울 것이고, 남편은 영화를 찍어야 한다. 둘째가 아내의 침실에 들락거려도 자신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환풍기를 고치는 일 따위는 안 하는 감독이다.

“내 일에 충실한 것뿐인데, 왜 남들은 나를 무관심하다고 할까”

썩은내가 가득한 집은 기능만 남은 인간들의 역할만을 보여줌으로써 부조리한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제거한 체 하던 것을 계속 하는 인간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를 맡게 해준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송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환기가 되지 않은 공간은 흡사 순장을 당한 사람들의 무덤과 같다.

그 집에는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았다.
지구상에 어딘가에서 이들을 알아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집의 화장실에 가보라. 송장의 목에 감긴 끈이 아직도 성한지…

역하고 음울하지만 해학을 놓지 않는 연기와 연출이 인상적인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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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6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나는 내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2009-11-16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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