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숨은아이 >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 전인가, 아는 사람한테서 “정신대 할머니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것도 문제 있는 거 아냐? 어쨌든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서 배상을 받아버렸으니 한국정부한테 가서 시위를 해야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 옳지 않은지 명쾌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국가가 언제나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국정부가 1960년대에 일본정부와 조약을 맺고 배상금을 받아냈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징용 노동자들은 피해에 배상받을 권리를 국가에 위임한 바 없다. 당시 한국정부 역시 이들의 존재 자체도 의식하지 않았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돈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일본정부가 창설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기금의 돈을 받은 할머니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선택이니,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시위를 하시는 할머니들은 이 정체가 모호한 돈을 받기를 거부한다.) 이분들은 국가권력과 군대가 ‘감시’하며 ‘강제노동’을 시켜, 한 여성의 인생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점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국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일시하고,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며, 자신을 가리켜 ‘국민’이라고 표현한다. 60년 전의 '국민'은 일본 군대에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았다. 식민지 백성도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인정을 받으려면 국민으로서 기여를 해야 한다. 이로써 일본의 근대 페미니스트들이(심지어 조선의 여성 지식인들까지) 왜 제국주의 전쟁에 앞장서 찬동했는지가 설명된다.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국가의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여성도 ‘국민’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랐다. 곧 ‘여성의 국민화’가 운동의 목표였다. 여성뿐 아니라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이 전쟁 참여를 격려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일제의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식민지 백성은 2류 국민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민화’가 이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순결한 조선 여성을 일제가 유린했다’는 인식은 어떠한가? 첫째, 순결하지 않으면 성 폭력을 당해도 괜찮은가? 둘째, 전쟁기에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은 감시하에 강제 성노동을 해도 괜찮은가? 셋째, 일본군 위안부 중에 소수 포함되었던 필리핀이나 일본, 서양 여성의 경우는 조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해도 좋은가?

가부장제 패러다임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인권 침해를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간에 벌어지는 재산권 싸움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해 온 ‘이중 범죄’의 원인이다. (중략) 여기서는 여성의 ‘정조’란 남성 재산의 하나로서, 그 재산권 침해에 대해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이해가 계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자기 민족 여자는 자기 것이며 그 여자가 다른 민족에게 능욕당하는 것은 ‘남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전제가 만약 한국과 일본의 남성들에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 폭력 피해자에게 그 몸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 고발을 막는 것은 그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성 폭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에바라는 논한다. (103-105쪽)

지나간 과거라며, 역사적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묻어버리려는 이들에게, 이 책의 지은이는 분명히 말한다. 역사는 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는가, 그리고 피해자들은 왜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권력 관계가 불균형인 곳에서는 강자의 ‘현실’이 지배적인 현실이 되어 소수자에게 ‘상황의 정의’를 강제한다. 그것을 거역해 지배적인 현실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현실’을 낳는 것은 약자에게는 그 자체가 투쟁이며 지배적인 현실에 의해 부인된 자신을 되찾는 실천인 것이다.(179쪽)

그러므로, 제도 교육과 사회적인 통념에 의해 '국가'에 점령당한 나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소수자의 현실'에 귀 기울이려 한다. 그리고 외치려 한다.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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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나혜석과 김일엽의 ‘정조 부정론’에 영향 준 일본 잡지 <세이토>의 발행인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였으나 국가주의적 ‘페니스 파시즘’에 협조하기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서 ‘왜색’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제의 잔재인 체벌이나 두발 제한 등에는 그 기원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왜색이라는 것이 이해되지만 간혹은 ‘그녀’와 같은 단어처럼 일본어를 모방했다는 식민지 시대의 신조어들까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왜색이 짙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성이 제국주의의 폭력을 바탕으로 삼아 성립됐기에 이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어두움이 있으므로 빛을 볼 수 있다는 변증법인가. 일본은 억압자로 기능한 동시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해준 매개체이기도 했다.

나혜석 “혼외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

신채호가 “친일파가 이토 히로부미를 섬겼듯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공산 운동의 이론가인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나 가타야마 센(片山潛)을 섬긴다”고 비판했으며, 조선 초기 공산 운동의 “소아병적 번역주의” 경향이 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읽기 쉬운 일본어 저서가 없었다면 과연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겠는가. 1980년대 혁명시인 김남주는 옥중 서신에서 일본어를 배워서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산’ 내지 ‘일본발(發)’은 꼭 없애야 할 왜색으로만 봐야 할까?


△ 김일엽(네모 안)과 나혜석의 새로운 정조론은 당시 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나혜석은 혼외 정사를 남편에게 들켜 이혼당한다. 파리에서의 나혜석과 김우영 부부.

해방적 의미의 한국의 근대에서 의미 있는 요소는 1920년대부터 나혜석(1896∼1948)과 김일엽(1896∼1971) 같은 급진파 신여성들이 주장했던 ‘새로운 정조론’이다. 여성을 가문의 부속물로 여겼던 유교 사회든, ‘현모양처’라는 이름으로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게 만든 억압적 근대든, 모두 ‘정조’를 전가의 보도로 여겼다. 남성의 유곽 나들이는 ‘낭만’이지만 여성 정조의 여부는 ‘숙녀’와 ‘요부’를 나누는 잣대였다. 그러한 사회에서 나혜석과 김일엽 같은 이들이 “정조는 자유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먹듯이 정조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다”라고 외친 것은 혁명선언과 같았다. 선언만 한 게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도 그랬다. 유럽 여행 때 파리에서 최린(1878∼1958)과 사랑에 빠졌다가 남편에게 들켜 이혼을 당한 나혜석은 죄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 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도전장을 전남편과 조선 사회에 던졌던 것이다!

나혜석을 완전한 외톨이로 만들게 된 이 “사랑의 자유” 선언은 그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개적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실제로 남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 추구를 제대로 억제한 적이 없다. 남성에게 이름뿐인 일부일처제는 절대적인 가치도 아니고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얼마 전 스와핑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볼 때 아직은 일부일처제와 정면 충돌해 그 범위를 공개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혜석과 같은 억압적인 정조에의 도전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가 ‘도덕적 파시즘’에서 한 발짝 자유로워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목사의 딸이었던 김일엽과, 보수적 기독교의 영향을 짙게 받은 나혜석이 과연 어떻게 20대 중반에 순결주의를 과감하게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일차적으로 그들의 저항은 남성들의 지배에 대한 현실적 대응의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정조 부정론’과 같은 담론은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서 차용된 것이었다.

혁신적 의제와 도전장 그 자체인 사생활

나혜석과 김일엽은 일본 유학 때 <세이토>(靑踏)라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처음으로 눈뜨게 됐다. 나혜석이 평생 가장 사랑했던 문학 작품은 그가 1921년에 한국어로 번역·연재까지 한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그는 자유를 향해 남편과 자녀를 두고 간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의 운명을 자신이 닮아간다고 느꼈다. 그런데 번역 텍스트는 1912년에 나왔던 일본어 번역이었으며, 그의 ‘노라’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인형의 집>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노라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다”라고 선언한 <세이토> 제3호이었다. 유학 초기 시절을 회고했을 때 나혜석이 “나에게 천재적인 이상을 심은 것은 <세이토>의 발행인 라이초(雷鳥) 여사였다”고 이야기했다. ‘정조와의 투쟁’의 선봉에 선 한국 여성에게 이렇게 영감을 준 이 일본 여성은 누구인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1886∼1971). 그 성장 과정으로 봐서는 그녀가 여성 해방 투사가 되리라 애당초에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의 감찰 기관인 검사원(檢査院)의 장까지 역임한 엄격한 아버지의 딸로 당시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고학력자였다. 그는 얼마든지 지체 좋은 신랑을 얻어 상류 계급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가 일본 사회의 표면에 최초로 나타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의 취미는 ‘불온 사상’이 아닌 암자에서의 조용한 참선이었다. 그런데 백척간두에 서서 얻어지는 궁극의 진실에 대한 애착이 강해 일요일마다 아이들에게 일왕의 조칙을 낭독하고 충효를 설교하는 아버지에게 역겨움을 느꼈고 대학을 졸업한 그의 생활은 탈선의 연속이었다.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다가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해준 유부남 교사와 사랑에 빠져 신문의 가십거리가 되는 등 파란을 겪었던 라이초는 1911년에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잡지 <세이토>를 만들어 여성 해방의 담론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펴냈다.

이 잡지 창간호에서 라이초의 사설은 “원시에 여성은 태양이었지만 (…) 지금 달이 됐다”는 문장으로 시작됐는데, 이 말은 그 이후로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반영하듯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도 타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현실을 라이초와 그 동지들은 격파하고자 했다.


△ 라이초는 다섯 살 연하의 남자와 공개적으로 동거했다(왼쪽). 라이초는 노년에 반전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히라쓰카 라이초의 생애>의 한 장면.

1916년까지 나왔다가 폐간되고 만 동인지 <세이토>는 여성의 성에 대한 결정권, 여성의 가사 전담의 부당성, 아동 양육의 사회적 책임, 여성의 경제적 독립 필요성 등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의제를 설정해 2천∼3천 부 팔리는 부수에 비해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매일 막강한 현실과 부딪혀야 했던 동인들은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간통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정간과 부수 압수, 잡지를 애독하는 학교 교사들의 파면과 학생 애독자의 학교 제명 조치, “여성을 타락시키는” 라이초에 대한 “죽이겠다”는 협박장과 돌팔매질 등이 이어졌다. 라이초의 과감한 발언들도 당시로서는 스캔들이었지만 다섯 살 적은 남자와의 공개적인 동거 생활과 형식적 결혼을 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그의 사생활은 도전장 그 자체였다. 1920년대에도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일본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라이초는 존경스러운 선배요 본보기였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극복, 페미니즘의 숙제

그런데 라이초와 조선 신여성들 사이의 공통점이 단순히 ‘정조’에 대한 회의론과 여성의 인격적·경제적 독립의 제창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라이초나 조선 신여성들이 남성의 지배를 개탄했지만 현실적으로 유산·유식 계급에 속하는 그들은 남성 지배의 제도적 보루인 국가를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라이초는 “국가가 결혼을 통제하여 유전자가 나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에 섰고, 1930년대에 “여성들은 국가와 민족에의 봉사를 통해서만 인권 신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여 파시즘 체제에 협조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또한 나혜석이나 김일엽 등 일부의 양심파를 제외한 조선의 많은 부르주아적 신여성들도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 침략전쟁의 선전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라이초가 1945년 이후에 반전 평화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 파시즘과의 협력에 어느 정도의 ‘속죄’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남성의 지배를 부정하면서도 계급지배와 국가를 부정하지 못한 한계는 남아 있다.

여성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페니스 파시즘’은 과연 정조나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식으로만 나타나는가? 군인이 무표정하게 들고 있는 총에서도, 보행자를 압도하는 어마하게 높은 재벌의 빌딩에서도, 칼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서 있는 ‘민족 영웅’의 동상에서도 여성성을 부정하고 짓밟는 파괴적 페니스의 그림자는 보인다. 가부장제의 극복, 국가·자본에서의 해방을 어떻게 함께 쟁취할 수 있는가는 한국, 일본 할 것 없이 인류 전체 페미니즘의 숙제가 아닌가?

참고 문헌

1.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나무, 2000.
2. 노영희 ‘나혜석의 동경 유학 체험과 신여성관’, <동아시아 비교 문학의 전망>, 동국대학교출판부, 2003.
3. Hiroko Tomida , Brill, 2004.
4. 요네다 사요코(米田佐代子) 이케다 에미코(池田惠美子), <‘세이토’를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교토, 세계사상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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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자랑스런 꿈 깨고 싶지 않아요." 황교수를 계속 지지하는 이유

재미있는 기사다.

황우석에 대한, 언뜻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지속적인 지지의 배경에는

대중의 인정 욕구, 언론으로 대변되는 권력/지식인들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것을

이 기사는 잘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우익 민족주의, 반미주의, 반페미니즘

등도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우석 스캔들 또는 황우석 게이트는

단순히 과학적 진실이나 윤리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고,

노무현 정권의 한탕주의 과학 정책의 한계로

귀착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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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랑스런 꿈 깨고 싶지 않아요”

황교수 지지 촛불집회 3천명 몰려
“몰아붙이는 언론이 더 미워”
40~50대 ‘팬’들 유독 많아

 

처음으로 제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든 분입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 ㅂ(51)씨는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이유를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는 인터넷 카페 ‘아이러브황우석’과 ‘황우석 난자기증모임’에 모두 회원으로 가입했다. “선생님은 데모 같은 걸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쉰이 넘도록 데모 한번 해보지 않았”던 그가 요즘 이 신념을 깨고 요즘 부산역 앞 등에서 열리는 황 교수 지지 집회에 단골로 참가하고 있다. 만나는 이들에게는 “황 교수에게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설득부터 한다. 그의 변화에 오히려 주변사람들이 놀랄 지경이라고 한다.

“새튼 교수가 서울대 수의대에 오고, 세계 줄기세포 허브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ㅂ씨는 그가 황 교수를 지지하는 이유를 힘주어 거듭 강조했다. “선진국에 가 보면 처량했어요. 우리나라와 너무 다르니까. ‘우리는 언제 저렇게 잘 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황 교수는 그런 희망을 줬습니다.” 그는 설사 줄기세포가 지금 없다고 하더라도, 황 교수가 말한대로 배양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황 교수가 가진 것은 명예욕밖에 없었다. 특허도 서울대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한 기업이 이 사태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심에 그 기업이 만든 냉장고도 버릴 생각이라고 했다.

ㅂ씨 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줄기세포는 없었고, 논문은 조작됐다고 밝히며 황우석 교수에게 ‘학문적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황 교수를 향한 지지자들의 애정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들은 왜 황 교수에게 한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낼까?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7000/2006/01/002007000200601152030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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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방울에 색을 입히다 - 옷에는 안묻는 특수 염료
옷에는 안묻는 특수 염료
2006년 01월 14일 | 글 | 이호진/과학통신원, 미국 센주드 어린이병원 박사후 연구원ㆍhjinlab@hanmail.net |
 
아이들과 놀이터에 갔다. 비누 방울을 크게 만들 수 있다는 슈퍼 비누 방울액과 함께. 2살짜리 딸아이는 뭐가 그리도 재미있고 신나는지 비누 방울 잡느라 야단이다. ‘팡~’ ‘팡~’. 무지개 빛 비누 방울을 터트리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비누 방울을 보면서 어릴 적 세제를 물에 섞어 비누 방울을 만들며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통 비누 방울은 투명하고 색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색을 띤 비누 방울을 만들며 놀 수 있다. 팀 케호에(Tim Kehoe) 발명한 색깔을 띤 주블(Zubble)이라는 비누 방울 때문. 놀라운 것은 이 색을 입힌 비누 방울을 만드는데 11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다. 올해 35살인 그는 장난감 발명가. 주블은 파플라 사이언스(popular science)지의 2005년 올해 히트 상품으로도 선정됐다.


색을 입히는데 11년이나 걸렸다고?

비누 방울에 색소를 넣어 색을 입히는 건 쉽다. 하지만 색을 띤 비누 방울이 옷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다면 여기저기서 엄마들의 비명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색은 띠지만 옷에 염색 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뿐 아니라 인체에 해가 없는 염료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주블이 11년이나 걸린 이유다. 주블에 사용된 염료는 람 삽니스(Ram Sabnis)라는 염료 화학자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주블에 사용한 염료는 락톤(lactone) 고리를 가진 화합물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이 락톤 고리는 공기, 압력, 물에 매우 민감하다. 락톤 고리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는 주블이 나타내는 색깔을 제외하고 다른 색깔의 빛은 흡수한다. 하지만 공기, 물, 압력이 가해지면 락톤 고리가 닫히면서 염료는 모든 빛을 흡수하게 된다. 즉 색깔이 없어지는 것이다.

케호에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사라지는 염료를 이용해 다양한 제품을 개발할 예정이다. 어린이 치약에 염료를 넣어서 아이들이 이를 제대로 닦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 입을 물들인 색은 30초 후에 없어진다. 건물 벽에 칠할 페인트 색을 결정할 때도 이 염료를 이용하면 된다. 좋아하는 색을 벽에 칠해보고 결정하면 되니까. 물론 조금 있으면 벽에 칠했던 색은 마술처럼 사라진다.

'비누 방울에 색을 입히면 어떨까'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11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생했을 케호에.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색을 입은 비누 방울과 추억 쌓기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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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여행의 시작
             02. 서쪽하늘에... (드라마 ‘아일랜드’ 메인테마)
             03. 바람구두
             04. Eclipse of The Red Moon
             05. 바다를 꿈꾸다
             06. The Boy From Wonderland
             07. Anti-Rain Dance
             08. 고양이 효과
             09. 얼음연못
             10. Communication
             11. 무지개
             12. 개나리이끼 숲 위로 소나기가 지나가고..
             13. 꽃개구리들은 왜 물기로 젖은 개나리이끼 숲 위로 몰려나올까?
             14. 꽃개구리 喪輿歌(상여가)
             15. Ag Damhsa leis an Ghaoth
             16. Falling stars
             17. 서쪽하늘에... (발치뇨) 
 
 
:+:+:+:+:+:+:+:+:+:+:+:+:+:+:+:+:+:+:+:+:+:+:
             MEMBER.
             
김현보 - 기타, 만돌린
             박진우 - 베이스
             박혜리 - 키보드, 아이리시휘슬
             최진경 - 키보드, 멜로디언
             백선열 - 드럼, 퍼키션
             린다 컬린 - 보컬
             조윤정 -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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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1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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