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조선인 > 엄마, 뭐하고 있었어?

지난해 11월부터 마로는 슬슬 '혼자 할거야'를 외치기 시작하더니, 요새는 좀 정도가 심하다.
덕분에 편해진 것도 있는데,
어린이집 갔다 오면 혼자서 옷을 벗어 빨래통에 넣는 것과
가방에서 도시락통을 꺼내 싱크대에 넣는 것을 마로가 혼자 할 일로 정했다.
(하지만 집에 오면 일단 노느라 바빠 막상 혼자 할 일은 빼먹는 날이 반이다. ^^;;)

마로가 혼자 할거야를 특히 고집하는 건 옷입고 벗기.
문제는 이게 일손을 더는 게 아니라, 엄마 속을 바글바글 끓이기 일쑤라는 것.
기껏 목욕대야에 온도 맞춰 물받아놨는데 20분쯤 혼자 옷벗는다 씨름하다 보면 물이 식어버리기 태반이요,
바쁜 아침시간에 혼자 옷입는다고 거들지 못하게 하니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하다 애에게 버럭거리게 된다.

오늘.
아침 준비를 하는데 마로가 갑자기 발딱 일어나더니 부랴부랴 화장실에 간다.
혹시나 해서 이불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렸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옷이 차가워졌다고 갈아입는단다.
저 혼자 하겠지 싶어 이불 빨래를 돌리고 두부를 지지다 뒤돌아보니
아랫도리를 홀딱 벗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팬티만이라도 입으라고 한 마디 건넸지만, 그림 그리느라 엄마 얘기는 뒷전.
할 수 없이 팬티를 들고 가 입히려 들었더니
마루에 딱 소리나게 색연필을 내려놓으며 딸이 하는 말.

"엄마, 지금 뭐하고 있었어?"
"마로 팬티 입혀주려고 하지."
"아니, 그전에 뭐하고 있었어?"
"두부 굽고 있었지."
"그럼, 엄마는 두부나 계속 구우셔."

내 손에서 확 팬티를 잡아채고 혼자 입는다.
이걸 그냥. 으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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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1월 24일 -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2003)

 

주연
로베르토 베니니 Roberto Benigni
케이트 블랑쉐 Cate Blanchett
신쿼 리 Cinque Lee
조이 리 Joie Lee
테일러 미드 Taylor Mead
알프리드 몰리나 Alfred Molina
빌 머레이 Bill Murray
이지 팝 Iggy Pop
윌리암 라이스 William Rice
RZA RZA
톰 웨이츠 Tom Waits
잭 화이트 Jack White
멕 화이트 Meg White
스티븐 라이트 Steven Wright
스티브 부세미 Steve Buscemi
스티브 쿠건 Steve Coogan
이삭 드 번콜 Isaach De Bankole
연출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감독
각본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각본
촬영 부문
톰 디칠로 Tom DiCillo 촬영
프레더릭 엘머스 Frederick Elmes 촬영
엘렌 쿠라스 Ellen Kuras 촬영
로비 물러 Robby Muller 촬영
제작 부문
그레첸 맥고원 Gretchen McGowan 제작부
스테이시 E. 스미스 Stacey E. Smith 제작부
제이슨 클라오트 Jason Kliot 제작
조안나 비센트 Joana Vicente 제작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마크 프리드버그 Mark Friedberg 미술
편집 부문
제이 라비노위츠 Jay Rabinowitz 편집

 

커피와 담배가 만나듯, 사람은 무한히 만난다

짐 자무쉬의 능글거리며 고요한 유머를 또 한 번 경험합니다. 뭐랄까, 침묵을 사랑하는 악동 같기도 하고 여전히 뼛속부터 원래 언더였다는 듯한 이미지의 사내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입니다. 동양의 참선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탕자가 돌아오는 길에서 느끼는 회개와 참회와 반성이 담긴 화면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짐 자무쉬의 오마쥬입니다. 그가 커피와 담배를 통해 들려주는 깊이 있는 유머를 경험해보세요. 저는,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흡연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아쉽기는 합니다. 담배를 배워볼까 하는 망상도 생기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커피와 담배의 마력과 매력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이 영화는 분명, 커피 매니아와 흡연자들에게는 잠언처럼 달콤하고 알싸하고 깊이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엊나가는 대화와 말들의 파편들에 대해서, 커피와 담배를 마주하고 나누는 두 사람의 균형이 미묘하게 기울어지고 어떻게 다시 역전이 되는가에 대해서,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유성의 아름다운 빛처럼 그의 유머는, 드러납니다. 웃기기는 하는데, 저는 여기에서 미국의 위선과 가식,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짐 자무쉬의 풍자도 보았습니다. 저만의 생각일런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나면 카페인과 니코틴에 잘 절여진 영혼이 되어 몽롱하고 황홀해집니다.

 자네 여기 웬일인가/ 쌍둥이/ 캘리포니아 어디엔가/ 담배는 해로워/ 사촌/ 별일 없어/잭이 메기에게 테스라 코일을 선보이다/ 사촌 맞아?/ 사랑의 블랙홀/ 흥분/ 샴페인 의 열한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통해 짐 자무쉬의 뛰어난 각본 연출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들려주는 하나하나의 대사들의 깊이는 대단합니다. 커피도 모르면서, 담배도 모르면서, <커피와 담배>는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담배와 커피> (Cigarettes & Coffee, 1993)라는 작품으로 패러디하기도 했군요. 보고 싶네요. 유쾌하고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물론 단편마다 쪼개어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 하러 갑니다. 커피를 마시고 잠들면, 꿈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간다고 하는군요.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점심이, 커피와 담배였던 적은 없습니까?

 

<짐 자무시의 모든 것> - 씨네21에서 옮깁니다.

짐 자무시는 우리에게 이름에 비해 영화의 실체가 덜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그것은 아마 <브로큰 플라워> 이전까지 만든 8편의 장편영화 중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영화가 <천국보다 낯선> <데드맨> <고스트 독> 세편뿐이라는 단순하고도 안타까운 사실 때문일 거다. 그러니 그동안 간과되어왔던 그의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나서야, 간명하면서도 유쾌하고, 유쾌하면서도 탄식어린 자무시의 세계가 좀더 친절히 열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무시에게서 <브로큰 플라워>라는 영화편지 한통을 받았다. 자무시의 전작(과거)을 되돌아보기를 독촉받는 이상한 영화의 아홉 번째 편지를. 그걸 계기로 ‘짐 자무시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니콜라스 레이에게는 그를 따르는 많은 후대 감독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두명의 후배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화 <물 위의 번개>(1980)를 만들었던 빔 벤더스가 그 한명이고, 니콜라스 레이가 뉴욕대에서 강의할 무렵 그의 조교였으며, 그 인연으로 <물 위의 번개>의 스탭으로까지 참여한 짐 자무시가 나머지 한명이다. 자무시와 벤더스가 서로 알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사실,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 <영원한 휴가>(1980)도 니콜라스 레이 덕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어떤 이들은 <천국보다 낯선>을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천국보다 낯선>은 자무시의 ‘첫 번째 35mm 장편영화’다. 대학 시절 학기 제출용으로 작심하고 만든 77분짜리 16mm 작품 <영원한 휴가>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자무시가 파리 시네마테크에 묻혀 일년 내내 영화를 본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학비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있는 그에게 학교는 니콜라스 레이의 조교로 일하라고 추천했고, 그 대가로 졸업 단편을 만들 수 있도록 학비 장학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자무시는 냉큼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학교는 그가 학비를 내기로 약속하고 받은 장학금을 장편영화를 만드는 데에 유용(?)한 죄로, 게다가 “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죄”로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의 졸업장은 몇년 뒤에야 우송됐다.

벤더스가 졸업 작품으로 단편 대신 127분짜리 장편 <도시의 여름>을 만든 것처럼, 자무시도 10년 뒤 그런 사고를 똑같이 친 것이다. 여하간 그 이후 자무시는 수없이 많은 인터뷰에서 벤더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질문받았고, 그때마다 그는 “그와 나는 친구이고, 그의 초창기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크게 없다”고 잘라 말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벤더스가 영화적 정점을 구가하고 있던 시절, <사물의 상태>를 만들고 나서 남은 40분 정도의 필름을 짐 자무시에게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천국보다 낯선>(1984)의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계보를 규정하는 증거로 작용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거나, 그뒤 짐 자무시는 보란 듯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중요한 건 결코 ‘로드무비’라는 틀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는 거다.

2005년 자무시와 벤더스는 <브로큰 플라워>와 <돈 컴 노킹>이라는 로드무비를 들고 똑같이 칸영화제를 찾았다. 그러나 여기서 자무시는 벤더스와 거의 반대의 결론에 도달해 있다. <돈 컴 노킹>에서 벤더스의 길은 자아를 찾는 길이고, 복구의 길이고, 의미의 길이다. 거기에 비해 자무시의 길은 방기의 길이고, 대상만이 있는 길이고, 해답이 없는 길이다.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의 영화적 길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지판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무의미성과 미결(未決)을 넉넉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순서대로 가보자.

자무시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행자이거나, 유랑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이민자이거나, 실제 외국인이다. 짐을 꾸려 여행하는 사람들이고, 정서의 처소를 찾지 못해서 이질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고, 중심 문화로 들어서기를 거부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고, 내 땅이 아닌 남의 땅에서 남의 언어로 사는 사람들이고, 그래서인지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했거나 지금 막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초창기 두편의 작품 <영원한 휴가>와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황량함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랑자예요.” 자무시는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를 그렇게 소개한다. 영화의 내용은 별 게 없다. 찰리 파커를 좋아하는 뉴욕 청년 앨리 파커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별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하며 다니는 게 전부다. 고다르식 구성을 염두에 두거나, 오즈를 경외하거나,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을 대놓고 인용하거나 하면서, 아직 시네필의 혈기를 매끈하게 내성화하지 못한 티가 역력하지만, 결국에는 떠돌던 앨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무작정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세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는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더 황량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에바와 이미 그전에 도착하여 반(半)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촌 윌리의 며칠간의 동거가 이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의 내용 전부다. 원래 단편은 에바가 클리블랜드로 떠나면서 끝난다. 그런데 자무시는 두편의 에피소드 ‘일년 후’와 ‘천국’을 덧붙여 장편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윌리와 그의 친구 에디가 에바를 찾아 클리블랜드로 향하고, 거기서 다시 셋이 플로리다로 충동적인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무위도식하는 삶의 내용을 무미건조한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적으로 본다면 다소 과대평가받은 면이 있고, 벤더스의 영향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미 자무시의 표지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 뉴욕에 도착한 에바는 황량한 비행장에 홀로 서 있다. <지상의 밤>에서도 영화는 비행장에서 시작하고, <미스테리 트레인> <데드 맨>에서는 기차가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로큰 플라워>에 이르러서 에피소드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로 이륙하는 하늘의 비행기를 연신 보여주는 것은 이런 일관성의 연장이다. 자무시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끊임없이 오고가는 임시성의 장면들을 거쳐야만 한다.

“내 집은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외국인이고, 또한 미국인이에요”, “내 자리는 언제나 주변이에요. 만약 내가 어쩌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될지도 몰라요”라고 자무시는 말한다(실제로 그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브로큰 플라워>에 쏟아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에 적잖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주인공들의 입지는 자무시의 개인적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집은 하나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정착이 고착이 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 사이-공간을 맴돈다.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는 파리행 배를 타기 직전 항구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지금 막 파리에서 뉴욕으로 온 젊은이다. 꼭 파리에서 뉴욕의 앨리처럼 살았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명이 그 자리를 떠나는 ‘그 시각’, 다른 한명이 그 자리로 들어온다. <천국보다 낯선>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바가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를 탔다고 착각한 윌리가 표를 끊고 출국장 너머로 그녀를 찾으러 들어간다. ‘그 시각’, 에바는 부다페스트는 고사하고 그냥 플로리다 해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모텔로 돌아온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뒤로 그들이 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서도 중심은 ‘그 시각’이다. 그들이 같은 시각에 그 행위를 우연히도 교차했다는 사실뿐이다. 자무시의 영화에 도시의 지명이 곧잘 지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로드무비의 요소인 탓도 있지만, 이런 우연의 행동이 시간적 필연성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시각, 여러 곳에서 그들은 뭔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제각각이다.’ 그게 바로 동시적인 삶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이 표명되는 방식이다. 특히나 그 관심사를 풀어냄에 있어 자무시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에피소드의 선택이다. <다운 바이 로>(1986), <미스테리 트레인>(1989), <지상의 밤>(1991)에서 바로 그 방식이 두드러져 드러난다.

자무시 스스로 “네오-비트-누아르-코미디”, 또는 “동화 같은 상상의 이야기”라고 말한 <다운 바이 로>에서는 이름이 비슷한 두 주인공 잭(Jack)과 잭(Zack)의 각각 따로 흘러가던 동시간대 에피소드가 그들이 함정에 빠져 죄를 뒤집어쓰고 루이지애나 감옥 같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여기에 로베르토가 등장하면서 다시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것이 유연하게 에피소드를 합친 예라면,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피소드 형식이다. <미스테리 트레인>은 멤피스의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혼 아래 접혀진 동시간대 세개의 이야기다. 엘비스를 찾아서 일본에서 건너온 남녀 한쌍, 비행기 사고로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어가야 하는 이탈리아 여자, 술김에 사고를 치고 모텔로 숨어든 세명의 남자가 그들이다. 영화는 같은 모텔을 빌려 이 세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게다가 자무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재치있는 몇 가지 요소, 특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 문>으로 이것이 같은 시각에 겹쳐 일어난 사건임을 알려준다.

다음 영화 <지상의 밤>에서 그 시각, 그 장소의 그 행위는 다섯개로 나뉜다.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에서 같은 시각 각각 승객들이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와 벌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LA에서는 나이든 연예인 매니저와 나이 어린 소녀 기사가 만나고, 뉴욕에서는 운전에 미숙한 이민자 기사를 대신해 흑인 손님이 대신 운전하고, 파리에서는 맹인 여자와 흑인 기사의 짧은 교감이 오가고, 로마에서는 신부가 떠버리 기사의 차 안에서 숨지고, 헬싱키에서는 직장에서 쫓겨난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며 함께 술을 퍼마신 승객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슬픈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기사가 들려준다.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을 만들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한때 문학도였던 그 기질을 발휘해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종려나무>와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등에서 이런 형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건 질문을 위한 대답이다. 사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자로서, 동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이고, 그들이 서로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이기 위해서라도 각각의 에피소드는 적절해 보인다. 이쯤에서 자무시는 극중 인물이 한명이라면, 어떻게 그 에피소드 방식을 인물의 삶의 방향에 어울리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을 내놓는다.

 

2005-12-07 | 정한석 mapping@cine21.com | 씨네21

‘그 시각’이라는 횡적인 분산을 ‘그 시대’라는 시간의 종적 연속성 안에 끼워넣고 ‘문명 속의 고독’을 생각하는 것이 <데드 맨>(1995)과 <고스트 독>(1999)이다. “완전히 문화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후회없이 자신이 꿈꾸는 생활을 고집스레 끌어나가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 돈키호테처럼 고스트 독은 자신의 행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자무시는 말한다. 그건 <데드 맨>의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시대의 돈키호테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은 형제처럼 닮은 영화다. 일단 이 둘은 웨스턴 무비와 갱스터 무비라는 장르를 기점으로 우회한다. 하지만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볼 때 이 두 영화의 닮은꼴은 더 잘 보인다. 영화는 한명의 주인공을 따라 흘러간다. 그들이 만나는 인물들, 사건들은 에피소드처럼 다시금 새로운 국면의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거기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와 고스트 독은 이질적인 존재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처음에는 문명인이지만 뒤에는 원주민에 동화되어간다. 야만스러운 것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곳을 차지한 문명인이라는 것을 블레이크는 느낀다. 야만적 문명의 개척시대에서 시인의 영혼으로 명명되어 환생한 블레이크(그의 친구 인디언 노바디는 그렇게 믿는다)는 본의 아니게 킬러가 되어 서부를 맴돈다. 그런가 하면 고스트 독은 유령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현대의 규율보다 고대의 규율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영혼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담은 책 <사무라이의 길>이다. 어떤 계기로 그가 사무라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은 (일부러 영화 속에서) 엇갈리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문명 속의 고대인이다. 그리고 서구인의 육체를 가진 정신적 일본인이다. 흑인 래퍼 차림의 그는 일본식 무사도의 방식으로 삶을 꾸린다. “스즈키 세이준과 장 피에르 멜빌을 참고했지만, 오마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자무시의 말은 진짜 참고 정도만 했다는 말로 들으면 된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에서 주인공들은 문화와 역사를 지시하는 이질적 탐구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어쩔 수 없는 건 그들이 모두 고독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친구는 있다.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거나 완전히 반대의 자리에 있을 때에만 진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블레이크의 친구는 오직 인디언 노바디이고, 고스트 독의 친구는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 이민자 아이스크림 주인청년이다. 하지만 죽음을 옆에 매달고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결국 혼자가 아닌가. 절대의 고독,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이 고독의 실체는 역사와 문화를 휘도는 형이상학적 영화로만 물을 수 있는 몫인가? 자무시는 형이상학의 신화적 세계에서 일상의 미니멀리즘적 세계로 돌아간다.

<커피와 담배>(2003)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쇼>의 청탁으로 1986년에 단편을 만든 게 계기가 됐다. 자무시는 세편까지 뜸하게 만들더니 내처 작정한 듯 연달아 나머지를 만들어 장편으로 늘렸다. 말이 장편이지, 각기 다른 장소의 카페에서 둘셋씩 모여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며 한담하다가 끝나는 10분 내외 11개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사랑스러운 소품이었지만 좀 의심스러웠다. 이거 일상으로 돌아가도 너무 돌아간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 의심이 들 때쯤 들고 나타난 것이 <브로큰 플라워>(2005)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빌 머레이는 <커피와 담배>의 에피소드 중 ‘Delirium’에서 우탕클랜의 RZA, GZA와 한담을 나누는 주방장으로 등장해 자무시 세계의 입문식을 거친 바 있다. 하지만 자무시와 빌 머레이가 <브로큰 플라워>에 합의한 건 그보다 더 오래전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전에 빌 머레이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다른 가상의 영화 <하늘에 뜬 세개의 달>(Three Moons in the Sky)의 각본이 먼저 있었다. 한 남자가 각각 세명의 부인과 가정을 따로 갖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각본으로 제작비가 거의 모였을 때쯤 자무시는 생각을 바꿔 2주 반 만에 다른 내용으로 고쳤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의 내용이다.

자무시와 머레이는 4년 전 토크쇼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서로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의 느낌을 빌 머레이는 재치있게 표현한다. 얼마나 죽이 잘 맞았는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눴는데 꼭 그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사촌형제를 만난 것처럼 잘 통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건 자무시도 마찬가지였다. 자무시는 실제 배우를 상정하고 나서야 각본을 쓰는 스타일이다. “내 영화에서 배우들은 항상 출발점을 제시한다. 빈칸이나 채우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느 영화, 어떤 인터뷰를 봐도 그렇게 말한다. <영원한 휴가>는 크리스 파커를, <천국보다 낯선>은 존 루리를, <다운 바이 로>는 톰 웨이츠를, <데드 맨>은 조니 뎁을, <고스트 독>은 포레스트 휘태커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는 “배우로서 고정되어 있는 빌 머레이의 이면을 보여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영미권의 평단들이 <브로큰 플라워>를 계기로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짐 자무시가 첫 번째 메인스트림 영화를 만들었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는 이유도 배우들 때문이다. 빌 머레이를 위시하여, 제프리 라이트, 샤론 스톤, 제시카 랭, 프랜시스 콘로이, 틸다 스윈튼, 줄리 델피 등의 화려한 간판급 배역진이 그 증거로 손꼽힌다. 아니 그럼, 조니 뎁, 가브리엘 번, 빌리 밥 손튼, 존 허트, 로버트 미첨, 이기 팝이 나온 <데드 맨>은 간판이 덜 화려했던가. “도대체 왜 메인스트림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자무시의 반응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비교를 하자면 자무시는 커트 코베인이 음악을 생각하듯 영화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몰표를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두 번째 이유를 찾자면 영화가 쉽고 재미있으며 곳곳에 유머가 넘치는 로맨틱코미디스럽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형이상학적 내러티브를 견지한 <데드 맨>과 <고스트 독>, 이 쌍둥이 같은 영화 이후에 나온 것이고, <커피와 담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인 내러티브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자무시식 로맨틱코미디 정도로 치부되는 건 모함이다. “<데드 맨>에서는 웨스턴 장르를 일종의 틀로 썼다. <고스트 독>에서도 영화의 다른 장르들을 비유하는 인용이었을 뿐이다. 그 점에서 <브로큰 플라워>는 로맨틱코미디도 아니고, 침울하고 비극적인 영화도 아니다. 범주 그 사이의 무언가다.”

<브로큰 플라워>는 9편 장편을 통틀어 백인 중산층이 주인공인 첫 번째 자무시 영화다. 미국사회의 가장자리에서 그 중심부에 사는 인물로 넘어온 것이다. 메인스트림이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굳이 <브로큰 플라워>의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면, 실마리는 그 이전까지 반복되던 영화들의 요소가 어떻게 흡수, 변주되었는가이다. 자무시는 여전히 인생은 난감하고, 고독은 운명이라는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한다면 이 대목은 영화를 본 뒤 읽으시길)

주인공은 돈(빌 머레이)이다. 그는 그 이름의 의미를 텔레비전 속에서 흘러나오는 흑백영화 <돈 주앙의 모험>을 망연자실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도 한때는 돈 주앙처럼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동거녀 쉐리(줄리 델피)조차 가정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는 그를 탓하며 기어이 짐을 싸서 나가는 중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분홍색(분홍색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편지 한통을 주워 돈에게 건네주고는 떠나버린다. 20년 전 헤어진 누구인지도 알 길 없는 애인이 보낸 그 편지에는 돈 몰래 낳아서 기른 19살짜리 아들이 지금 그를 찾아 여행을 떠난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옆집에 사는 절친한 흑인 친구 윈스턴(제프리 라이트)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강권에 못 이겨 돈은 그녀들을 찾아 나선다. 로리타라는 딸과 홀로 사는 로라(샤론 스톤), 잡초 같은 히피 처녀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의 화초 같은 아내가 된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잘 나가는 변호사에서 동물의사 소통사로 변해 있는 카르멘(제시카 랭), 험상궂은 남정네들과 같이 사는 페니(틸다 스윈튼), 그리고 죽어 땅에 묻힌 미셸 페페의 무덤까지 돌아다닌 뒤 돈은 성과없이 집에 온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아들 같은 녀석이 그의 동네를 초조한 눈빛으로 어슬렁거린다. 돈은 그 소년에게 말을 건다. 분명 그 분홍색 편지에는 “그 애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게 확실하단 느낌이 들어”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영화의 분위기만을 놓고 설명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완만하고 편안하지만, 궁금증이 동력이 되어 굴러가는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극을 자무시는 두개의 미니멀리즘 동선으로 그린다. 그 하나는 얼굴 자체가 미니멀리즘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이고, 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을 영화의 무표정한 미니멀리즘 형식이 감싸안고 있다. 여기에 자무시의 키워드들이 변형된 형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돈은 말 그대로 여행자다. 그리고 그 시각, 그 시대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은 현재라는 시제로 바뀌어 이 영화의 화두로 자리잡는다.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돈은 한번 만난 사람을 두 번째 만나는 일이 없다. 이미 이 여행길 자체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여행길에서 만난 옛 애인들은 말 그대로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현현이다. 그래서 돈은 또다시 고독한 현재로 돌아온다. 아들같이 생긴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아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아들 같은 녀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마지막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말 미소년이 돈의 아들일까요? 그렇다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돈과 눈이 맞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멍청하게 생긴 저 아이는 돈의 아들이 아니고 누구인가요, 라고. 또다시 판단은 유보되고, 그 순간 카메라는 현기증을 일으키듯 하늘을 한 바퀴 돈다.

<브로큰 플라워>가 독특한 건 모든 정황이 다 펼쳐지는데 그중에서 진실을 밝히는 정황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자무시는 <브로큰 플라워>를 ‘기표의 드라마’라는 구조로 만든다. 그 기표란 분홍색이고, 타자기이고, 복장이고, 개중에는 윈스턴이고, 농구대이다. 로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은 번갈아가며 분홍색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다. 도라를 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는 분홍색 명함을 건넨다. 동물의사 소통사 카르멘의 집 앞에는 농구대(열아홉살의 미국 소년이 즐기는 스포츠가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그녀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사랑하는 개 윈스턴(이 여행을 강권한 돈의 흑인 친구 이름)이었고, 그녀는 분홍색 바지를 입고 있다. 네 번째 여자 페니의 집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정황들이 있다. 농구대가 있고, 분홍색 커버가 있는 오토바이(열아홉살의 소년이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심지어 분홍색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페니와 돈 사이의 아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돈은 분홍색 꽃을 한 다발 사들고 죽은 미셸 페페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도 기표의 드라마는 끝날 줄을 모른다. 윈스턴은 아마 첫 장면에 등장했던 쉐리가 편지를 조작한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떠날 때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돈에게 영화 말미에 분홍색 편지를 보낸다. 점점 더 알 길이 없다. 이젠 더 심해진다. 아들처럼 생긴 미소년의 가방에는 분홍색 꼬리표가 달려 있다. 엄마가 부적처럼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 녀석이 내 아들 아닌가? 게다가 돈과 그 소년은 생각도 비슷하고, 복장까지 똑같다. 하지만 그 순간 돈과 그 아들로 보이는 소년과 똑같은 복장을 입은 또 다른 소년이 눈앞을 지나간다.

<브로큰 플라워>의 기표들은 기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맥거핀들이다. 자무시는 기표를 모아 뭔가 해보려 하지 않고, 그냥 기표 자체의 너저분한 널림으로 놓아둬버림으로써 만 가지 가능성을 갖게 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돈의 여행은 끝없이 이 몇 가지 기표들을 따라 옮겨다니는 의식의 여행이다. 애타게 기표를 쫓아다닐 뿐이다.

짐 자무시의 로드무비가 해답이 없는 길이라는 것은 기표의 드라마로만 구축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휴가>의 파리가 그것이고, <천국보다 낯선>의 플로리다가 그것이고, <다운 바이 로>의 두 갈래 길이 그것이고, <미스테리 트레인>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것이고, <지상의 밤>의 시계가 그것이고, <데드 맨>의 담배가 그것이고,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의 길>이라는 책이 그것이고, <커피와 담배>의 커피와 담배가 그것이다. “플롯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보다는 과정 안에 뭔가 있다는 것이 나를 더 흥분시키죠. 내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찾기보다 디테일을 첨가하고 모아서 퍼즐이나 그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기표의 드라마는 이런 창작의 습성과도 관계가 있는 셈이다.

짐 자무시의 영화에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 때문에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는 아예 정해져 있지 않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소개하자면 그건 명상이다. 자무시는 ‘명상의 영화’를 만든다. 명상의 영화를 만들지, 성찰이나 통찰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성찰의 영화를 만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반성해야 하는 책임

아닌 책임이 주어진다. 그러나 자무시의 영화는 잘 모르겠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깊이 그냥 거기에 생각을 적시면 된다. 옳고 그르고, 공감하고 아니고는 그 다음이다. 보고나서 아주아주 맑은 명상에 깊이 잠기면 되는 것이다. 그게 <브로큰 플라워>의 여행길이 인도하는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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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1-09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고객님은 플래티넘회원이며,구매하실 때 3%의 추가 마일리지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기간 : 2006년 1월 24일 화요일 ~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ㅡ..ㅡ;

난 돈을 무지 싫어하는데, 요즘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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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1-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난 도저히 넘 볼 수도 없는 경지이옵니다.^^

stella.K 2006-01-2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15555
좋은 숫자군요! 안 쏘실려나? ㅋㅋ.

라주미힌 2006-01-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헴 (먼 산 바라본다.) ㅎㅎ

stella.K 2006-01-2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마늘빵 2006-01-24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플래티넘이란 넘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부러워요. 마일리지는 좀 떼주셔도 되는데.

깍두기 2006-01-2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돈 좋아하는데. 마일리지 저 줘요!
(근데 왜 내 서재 와서는 10원만 달라고 하셨수?^^)

비로그인 2006-01-2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시길.. 저처럼 됩니다.(최악의 협박--;)

라주미힌 2006-01-2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플래티넘회원 저도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거에요 ㅎㅎㅎ..
깍/땡쓰투 누를테니 대기하세요 ㅎㅎㅎㅎ
평/ㅎㅎㅎ 한달에 40만원은 좀 심하네요 ㅋㅋㅋ
 

글/최준영 yiyagy@naver.com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산 와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문외한인 제게도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리겠습니까. 혹자는 이를 두고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얘기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와인이 대중화 되고 있다니 그닥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프랑스산 와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반해 같은 프랑스산이면서도 아직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가 그것입니다.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는, 숙성 기간이 11년이나 된 데다 비싼 가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지식인들로부터 동시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뭡니까?

지난 연말부터, 거세게 휘몰아쳤던 황우석 광풍과 정치권의 이전투구를 목도하면서 저는 뜬금없이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파종된 지 어느덧 11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새삼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종래 갈증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물 대신 와인을 마신다지요. 그들에게 똘레랑스는 숱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와 같은 의미라지요. 돌이켜보면,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현대사의 한 대목만 떠올려 봐도 우리 역시 프랑스 못지않은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줄 ‘와인’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를 통해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파한 게 어느덧 11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설파했던 ‘똘레랑스’는 그닥 어렵거나 복잡한 논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실천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차분하게 그 의미를 음미해보라고 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종래 그 속삭임이 작은 물결이 되어 우리사회의 무식성과 배타성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es respecter).”

이 말은 프랑스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를 밟지 말라’는 뜻의 푯말이라고 합니다. 홍세화가 설명하는 똘레랑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존중함으로써 비로소 존중받는 것’ 말입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쉽게 이해됩니다.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세화의 잔잔한 외침이 우리의 막힌 귀를 뚫어주고, 감긴 눈을 뜨게 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억압된 체제 속에 박제되어버린 양심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책세상)의 저자 하승우는 홍세화표 똘레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의 규칙을 지키자’는 홍세화식 똘레랑스는 의도의 순수성만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천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순진한 똘레랑스’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홍세화식 ‘똘레랑스’(순진한 똘레랑스)가 아닌 ‘차별하는 똘레랑스’라고 주장합니다. 즉,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선전할 수단을 갖지 못한 채 기성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쯤 되면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똘레랑스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식의 발견』(그린비)의 저자 고명섭은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전제한 뒤 “똘레랑스는 라틴어 ‘tolerare’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참다’ ‘견디다’를 뜻하는 것으로 ‘관용’이라는 다소 권위적인 뉘앙스가 깃든 말보다는 ‘견딤’이나 ‘용인’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덧붙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통해 하승우의 설명을 들으면 그 의미가 비로소 가깝게 다가옵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intolerance)’와 짝을 이루고 있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극단주의나 이기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질타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성적으로 논쟁할 것을 요구하는 똘레랑스가 논쟁을 얼버무리거나 대립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변했다. 나를 다스리는 기준이어야 할 똘레랑스가 남을 비방하는 기준으로 변질되었다.”

한편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철학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철학자 김용석의 ‘사랑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는 철학적 차원, 용서(어떤 의미에선 똘레랑스로 해석될 수도 있는)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두 글자의 철학』중에서)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똘레랑스는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의 산물이며,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이자 교훈이기도 합니다. 명예혁명을 경험했던 존 로크, 억울한 죽음을 변호(칼라스의 억울한 죽음)했던 볼테르(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산업 혁명기를 살았던 존 스튜어트 밀(여론의 억압을 비판하고 소수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주장), 혼란스러운 1960년대(68혁명)를 살았던 카를 포퍼(비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똘레랑스의 의미를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 역시 ‘고타강령 비판’에서 “양심의 자유가 종교 영역을 넘어서 사회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라는 도깨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똘레랑스를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똘레랑스를 실천적 과제로 부각시킨 사람은 그람시였습니다.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진지전’(반대 ‘기동전’)을 주장했던 그람시는 “진지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길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에서 출발해 그 상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파했으며 또한 “진보적인 사람은 논쟁 상대의 견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상대의 입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광신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봤습니다.

서양 철학사를 수놓은 숱한 사상가들의 ‘똘레랑스’론(論)을 되짚던 하승우는 다시 홍세화에게로 넘어와 그의 ‘순진한 똘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합니다. 일정부분 홍세화의 차분한 주장에 수긍하면서, 요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치’의 기치 하에 뭉친 다양한 시민사회의 대안공간들입니다. 얼핏 아나키즘을 연상케 하는 자치공간의 전범은 우연찮게도 프랑스에서 발견됩니다. 프랑스의 살아있는 성인 피에르 신부의 ‘에마우스Emmaus운동’이 그 예인 것이지요.

“자치는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권력과 맞서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운동은 대중을 지도하고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대중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운동을 창시한 피에르 신부는 절망에 빠진 한 살인자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고, 그 살인자는 신부에게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낸 것이다.”(시어도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재인용)

프랑스 사람이면 누구나 즐긴다는 와인, 그 와인의 달콤쌉싸름한 맛을 뒤로 물리고 대신 손에 망치와 삽을 든 빈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빈집과 공터를 찾아다니는 피에르 신부의 표정은 종래 해맑은 웃음입니다. 그 ‘웃음’이야 말로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쓴 하승우가 천착하는 실천적 똘레랑스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올해에는 제발 헛된 희망에 넋을 놓지 말고 소박하나마 현재의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며 서로의 어깨를 겯고 틀며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바로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을 즐기는 법이려니 싶으니 말입니다.

라인
저자소개
'시라노'(블로그 보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지만 아직 작가라는 이름을 갖기엔 부족한 게 많다고 판단, 현재 책읽기와 습작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경기방송(FM99.9Mhz)에서 책소개 코너를 진행하는가 하면, 각종 월간지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작문강좌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책(冊)과 술(酒)을 좋아하는, 그러니까 ‘고즈넉함’과 ‘질펀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시라노의 인생이야기’라는 뜻입니다.

 

http://www.yes24.com/home/chyes/07_ReaderColumn_Review.asp?class=yiya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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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5분 정도 보니 원작이

뭔지를 알겠다..

 

앨저넌에게 꽃을...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
앨저넌의 영혼을 위한 꽃다발..

 

드라마로도 재미있을 소재이긴 허다...

여주인공 눈이 상당히 이쁘네...

여고괴담에 나온 그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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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습니까? 난 그 남자 주인공 마스크가 참 마음에 듭디다. 특히 눈매가...한간엔 제2의 원빈이라고 하던데 원빈 보다 더 잘 생기지 않았나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