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노무현 정권에 헛된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할 건 없지만 은근히 부아가 나는 건 그 정권이 극우파들(이른바 '수구기득권세력들')에게서 경멸당한다는 것이다. 고작 극우파들에게서. 극우파들은 처음에 그 정권을 ‘적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멸’하게 되었다. 경멸의 이유는 그 정권이 자신들보다 급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들보다 윤리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동을 했던 놈들이 군사 독재의 찌꺼기들보다 윤리적이지도 않다니, 찌꺼기들 스스로도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입이라도 다물면 더 덥지나 않으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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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시티 1 - 하드 굿바이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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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리쉬하고 비쥬얼이 강렬했던 영화 ‘씬시티’의 원작이 매우 궁금했었다.
얼마나 비슷할까, 아니면 영화에 추가된 것은 또는 영화에서 빠진 내용은 어떤 것일까. 원작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라기 보다는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컸는지도 모르겠다. 만화책을 '페르세폴리스' 이후로 처음 샀는데, 원래 이렇게 하드커버로 고급스럽게 출간되나. 아무튼 책을 펼치면 상당히 당혹스럽다.
 
흑과 백, 두 개의 명암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매우 다채로운데, 그 다채로운 화면 구성이 난해한 경우가 많았다. 마브의 얼굴은 거의 ‘짐승’에 가까워서 반창고로 구분해야 한다. 나오는 여자들도 거의 음영으로만 표현하여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영화만큼이나 상당히 자기만의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도 영화의 비쥬얼에 워낙 커다란 느낌을 받아서 원작이 밀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수집이 취미가 아니라면, 후속편 구입은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가격이 싼 것도 아니고...  
 
내용은 영화랑 똑같다. 빠진 것도 없고, 추가할 만한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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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너무 놀래서 책은 장바구니에서 바로 삭제했어요...;;;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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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과거는 다가올 미래의 서막이다.” 세익스피어, 템페스트

우리 역사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 대만민국의 공교육도 모자라서 사교육을 받고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라는 것을 느꼈을 때가 그렇다. 반만년 역사는 강조하면서도 수 십년 전 역사는 감춰버리는 이 해괴한 토양 위에서 진리의 빛을 찾을 수 있을지 정말 의문스럽다. 위의 템페스트의 구절같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써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명한 격언들은 흔하다. 그리고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책에서 더욱 절감했다. 

“모순적이고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면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면에서 실질적인 다양성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이것은 오해 받고 있기는 해도 이념을 다루는 비평가들과 역사 발전을 다루는 역사가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재능이다.” 안토니오 그람시

37년간의 인생을 압류 당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은 우리의 현대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미군정의 지배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뼛속까지 학습하여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본 현대사와 농민, 탄광 노동자, 인민위원회 위원장, 남파공작원 그리고 옥살이를 한 저자가 보고, 느끼고, 살아온 현대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의도, 권력의 정당성, 기득권의 이익에 의한 거대 지배 담론이 대중에게 기형적으로 역사를 바라 보는 시점을 각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에 맞춰진 종속된 과거일 뿐이고,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감에도 굴레 같은 과거에 미래를 묶어놓은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담론을 깨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대중과 민중에 흘렀던 역사를 끌어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담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화려하게 장식된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탄광 노동자, 동네 이웃, 인민 동지들 같은 주변의 인물들 그러나 당당하게 민중의 역사를 구성했던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이 피부로 경험했던 지식과 실천이 고스란히 스며들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남한과 미국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보았던 현대사를 북한의 시선과 대조하면서 느낄 수 있게 하는 편집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 책을 빛나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각주에 있다.

예) 9월 노동자 총파업: 1946년 9월 23일 철도 노동조합의 파업을 시작으로 일어난 전국적인 파업. 미군정청의 운수 노동자 감원과 월급 삭감에 반발하여 전국의 노동자와 좌익계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단행했다. 특히 지방에서의 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남한 전역을 두 달 동안이나 불안에 떨게 했던 10-1 대구 폭동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북) 9월 총파업: 1946년 9월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매국매족행위를 반대하고 생존의 권리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어난 남조선로동자들의 대규모적인 정치적 총파업,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만행이 강화될수록 남조선로동자들과 인민들은 투쟁을 더욱 세차게 벌렸으며 마침내 10월에는 전인민적인 반미구국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미묘한 차이,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비판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게다가 면회기록, 서신기록, 좌익 재소자 사상 동향 카드, 장푼군 사람들 목록 같은 개인의 역사를 담은 사료에서부터 현대사를 아우르는 연표, 맥아더 포고문, 차스차코프 포고문, 삼상회의 결정서, 정전 협정문, 인민위원회 전원회의 보고서까지 독자를 배려하는 세심한 구성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 221p

물론 읽기 편한 책은 아니다. ‘상식의 저항’을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다.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찾아 볼 수 없으니까.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당신이 동경하는 지금 북한을 보라. 당신들의 이상 사회가 과연 맞는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사라진 곳을 남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최소한 남한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가?’

개인의 가치를 존중 받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먹을 것은 풍족해도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하고, 1950년대 전쟁 같은 투쟁을 생활 속에서 치뤄야 한다는 점. 그것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와 물질적 빈곤감은 삶의 만족도를 최저로 떨어뜨리고, 사상의 자유가 없어서 37년간 수감시키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감옥에서 썩어야만 하는 이 사회가 과연 북한 체제보다 우월한가… 굶어죽는 숫자는 훨씬 적으니 나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북한이건 남한이건 벗어나야 할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려워도 정책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민주적인 방법으로 회의를 통해서 결정했어.  ~ 어떤 사업이든 다 그렇게 사전에 충분히 설명한 후에 실무를 집행하니까 정책을 모두 무리 없이 받아들여, 나는 그것이야말로 정책 집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봤어.” 199p

아니 오히려 저자가 살았던 시기보다 민주적 절차는 퇴보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중과의 합의는 사라진 지가 오래다.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들 얼마나 많은가. FTA, 평택, 한미군사협졍 관련, 노사 관련, 사회, 경제, 교육 모든 분야에서 정부의 횡포는 극에 달하지 않던가.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하늘이 내린 명이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게 바로 ‘혁명(革命)이에요, 여기서 혁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 피(皮)와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겁니다.” 276p

이 시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혁명’.
민중에 의해 사회 변혁을 이끌어내야 한다.

“처음부터 혁명가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이기를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이에요.” 118p

이 책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의 역량을 믿고 움직이는 것이다.
집단적인 기억, 역사, 상상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민주적 공동체, 이상사회로 이끄는 초석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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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이 책일 것 같았어요^^편집인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답니다. 좋은 책이었어요^^

라주미힌 2006-08-1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이 훌륭했어요. :-)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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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후르시쵸프가 주은래와 논쟁을 벌이면서 "부르주아 출신인 당신이 노동자 출신인 내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자 주은래가 "당신 말처럼 분명 우리에게는 계급 문제가 있다. 우리 둘 다 자신의 출신 계급을 배신하고 있다."-61쪽

"자유라는 미명을 내세워 무제한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 성원들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기 위한 경쟁을 하는 거예요." -125쪽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 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맥아더 포고문]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려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 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해야 한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원조 협력해야 한다.
제 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또는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131쪽

학교에서 배운 것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177쪽

어려워도 정책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민주적인 방법으로 회의를 통해서 결정했어. ~ 어떤 사업이든 다 그렇게 사전에 충분히 설명한 후에 실무를 집행하니까 정책을 모두 무리 없이 받아들여, 나는 그것이야말로 지역 집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봤어.-199쪽

처음부터 혁명가로 태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이기를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이에요-118쪽

민중은 자본주의 혁명에 동참했지만, 열매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권을 빼앗아서 그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66쪽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하늘이 내린 명이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게 바로 ‘혁명(革命)이에요, 여기서 혁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 피(皮)와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겁니다.-276쪽

좌익 재소자 사상 동향 카드

1981. 3. 30. 공산주의 사상은 포기할 수 없다며, 자기가 지은 죄는 올바른 판단으로 혁명 과업을 이룩해야 되었을 것을 못한 일이라며 망상에 걸려 있는 광신 분자임.
-294쪽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삶을 자각 할 때 참되게 삶의 의미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301쪽

그래도 아내는 내 원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식들에게도 그런 원망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참 고맙다. 눈물겹게 고맙다.-345쪽

모든 역사의 발전 과정에는 특수한 계기가 있다. 좀 더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과정을 만들면서 바꾸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 있다.-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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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section-021005000/2006/08/021005000200608180623047.html

그들의 억눌린 성 이슈화한 다큐 <핑크 팰리스>, RTV 방송으로 논란 재연… 여성단체들 재방 반대 요구 관철됐지만 이제는 공론의 장에 부쳐야 할 때

▣ 김민경 인턴기자 yukishiro9@naver.com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 7월14일 오후 퍼블릭 액세스 채널 ‘시민방송’(RTV) 편성국에 15일로 예정된 한 독립영화 방영에 대한 항의 공문이 도착했다. ‘핑크 팰리스 방영 및 적극적 홍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이 공문은, 다큐멘터리 영화 <핑크 팰리스>를 소개하는 RTV의 홍보 글(R레터 89호. 옆 그림 참조)이 여성 인권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이라 비판하며 <핑크 팰리스> 방영 중지와 R레터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공문에 참여한 여성단체는 여성민우회, 성매매근절을위한한소리회,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여성영상집단 ‘움’,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 ‘종이학’,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이었다.

거침없는 성 고백에 비장애인들 당황

R레터는 “숫총각으로 죽으면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라는 영화 카피를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하고, 성매매 업소를 찾는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한 글을 영화 홍보용으로 쓰고 있는데, 이 R레터가 ‘성인지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으며 성매매를 긍정하는 인상을 준다는 비판이었다. 두세 번에 걸친 합의와 토론 결과, RTV는 재방 중지와 공식 사과문 게재를 약속했고, 여성단체가 이 조치를 받아들이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장애인의 성 향유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가 나온 2005년 1월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핑크 팰리스>는 장애인의 성 향유 권리를 정면으로 의제 삼은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영화 전반부는 자신의 성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애인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고, 후반부는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최동수(49)씨의 성적 열망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에둘러 가지 않고 처음부터 ‘과격하게’ 장애인의 성을 말한다. 장애인들은 직접 출연해 자신의 성적 열망, 자위 방법, 체위, 성관계를 가질 때의 어려움 등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성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장애인 부부가 나란히 출연해 성의 즐거움을 역설한다. 남성들끼리의 ‘음담패설’에 가까워 보이는 대화도 여과 없이 담겨 있다. 양손이 부자유한 한 남성 장애인은 어떻게 자위하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잠시 쑥스러워하지만 곧 자기만의 방법을 설명한다. “샤워기 틀어놓고… 물 맞으면서.” “(제작진) 와,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되고 사정이 돼요?” “네, 그래서 제가 포경을 안 했어요(감각을 더 예민하게 하기 위해서).” 여자친구와의 성관계에 대한 고백도 이어진다. 이야기는 혼자서는 옷을 벗을 수 없는 그를 위해 여자친구가 옷을 벗겨주는 과정부터 휠체어에서의 체위까지 이어진다. 친구 사이인 세 남성 장애인은 둘러앉아 카섹스 경험을 이야기한다. “최근에 사귄 여자친구는, 차가 있었기 때문에… (성행위가 가능했어요)” “그 차가 좀 되지. 카렌스 7인승.” 다른 친구가 덧붙인다. “티코에서 해보면 카섹스의 묘미를 알게 돼. 같이 흔들리는 게.”


△ 억압받는 남성 장애인의 성을 여과 없이 표현한 R레터. 많은 남성 장애인이 공감했지만 여성단체는 성인지적 관점이 결여된 장애인 성 이슈에 난색을 표했다.

최동수씨의 사연은 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쉰을 바라보는 최씨는 평생을 집안에서 보낸 중증장애인이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최씨는 카메라 앞에서 울부짖는다. “한 번도 못해봤어! 아이, 진짜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다!” ‘평생 섹스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최씨는 어느 날 30만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 청량리 성매매 업소 집결지로 찾아갔다. 그러나 업소 여성한테서 “당신 같은 사람은 돈을 아무리 줘도 싫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장애인과 함께 성매매 업소를 찾다

제작진은 그런 최씨와 함께 용산 성매매 업소를 찾는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업소를 바라보는 최씨의 모습과 “성매매특별법 이 제정됐다”는 자막이 교차 편집된다. 제작진은 최씨에게 그래도 성매매 업소에 다시 한 번 가보겠냐고 의사를 타진한다. 영화에 등장한 최씨의 지인도 “총각 딱지 떼어드려야지. 돈을 많이 모아야죠. 세상이 그렇잖아요. (여자를) 살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최씨의 성욕을 풀 유일한 방법이 성매매라고 말한다. 결국 제작진과 함께 업소를 다시 찾은 최씨는 전동 스쿠터를 타고 업소 안으로 들어간다.

거침없는 성 고백, 절규에 가까운 직접적인 언어, 가감 없는 편집에 비장애인 관객은 당황하지만, 무성적 존재로만 알고 있었던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 자신의 편견을 돌아보게 된다.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며 불편함을 느끼다가도, 수십 년간 성적 생명력을 부정당해온 이들의 진정성을 외면할 수 없다. 성매매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남성의 성욕은 해소되어야 한다는 남성중심적 신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핑크 팰리스>는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장애인의 억눌린 성을 이슈화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장애인 성 향유권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선 아직 생소하지만, 외국에선 이미 이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일본의 여성 저널리스트 가와이 가오리가 쓴 <섹스 자원봉사>라는 책은 신체적 한계로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는 장애인을 위해 유료 또는 무료로 도움을 주는 이들을 소개한다. 인터넷에서 만난 자원봉사자가 공중화장실에서 손으로 자위를 도와주거나, 성적인 신체 접촉을 제공한다. 성매매 업소에 데려다주고 침대에 눕혀주는 등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주부도, 여자친구가 있는 남성도 있다. 이들이 이 낯선 활동에 발을 들인 것은 장애인에게도 성적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섹스 자원봉사’는 삽입섹스뿐 아니라 자위 보조, 성적 대화, 장애인 부부의 성관계 보조 등 넓은 범위의 도움을 뜻한다.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섹스 자원봉사’라는 용어 대신 ‘성 활동 보조 서비스’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이 책은 섹스 자원봉사라는 논쟁적인 화두를 던지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섹스 자원봉사로 삶의 활력을 찾은 장애인의 이야기와 함께 자원봉사자와 장애인들이 느끼는 한계점까지 담담히 기술된다. 자원봉사자들은 주위의 이해를 끝내 얻지 못해 곧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 자원봉사자에게 미묘한 감정이 생겨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섹스 자원봉사를 하겠다거나 받겠다고 의사를 밝힌 이들이 대부분 남성이어서 활동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도 남녀 간 성 인식의 비대칭성을 반영한다.


△ <핑크 팰리스>의 주인공 격인 최동수씨. 관객은 성적 좌절을 호소하며 몸부림치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핑크 팰리스>는 논쟁을 일으키고 관객의 토론을 유도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네덜란드의 ‘선택적 인간관계 재단’(SAR)은 유료로 성매매 여성을 파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장애인의 성욕을 긍정하고 인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설립된 기구다. 장애인의 요청에 따라 섹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옆에서 함께 잠을 자며 신체적 접촉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물론 네덜란드 역시 섹스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감정 문제 등의 마찰이 존재한다. SAR의 여성들이 나이가 많고 자신이 고를 수 없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이 SAR 서비스를 외면하는 문제도 있다. 저자는 네덜란드 특유의 휴머니즘과 성에 대한 관대함을 이 서비스의 사회적 배경으로 꼽지만, 제도적 섹스 서비스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한다.

‘장애인 푸른 아우성’, 후원 취소의 딜레마

한국은 어떨까. 영화 <핑크 팰리스>가 당시 장애인의 성이라는 주제를 환기하고 소수자 운동 진영에 논쟁을 지피긴 했지만, 서동일 감독 본인도 “그 후로도 사회적 인식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장애인 성 향유권을 꾸준히 제창해온 장애운동 단체들도 사회적 무관심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장애인 푸른아우성’ 조윤경(33) 대표는 성을 다루는 단체라는 이유만으로 후원 계획이 취소된 예를 들며 “아직 사회적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한다”고 말했다.

‘장애인 푸른아우성’은 2003년 ‘장애인의 아름다운 성’이라는 동호회로 출발한 장애인 단체다. 장애인이 스스로를 성적 존재로 느끼고 이성과 제대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걸 목표로 한다. 성행위를 가르치거나 보조하는 단체가 아니냐는 오해도 종종 받지만, 이 단체는 현재 장애인들이 이성과 만날 기회를 갖고 소통하며 관계 맺는 법을 익히게 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조 대표는 “단순히 성욕을 해소하게 하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해답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 장애인이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성생활을 하는 게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팅 정기모임을 통해 게임과 대화를 하며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성을 기를 수 있게 돕는다. 말다툼을 하는 것도 자기표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권장한다.


△ <핑크 팰리스> 서동일 감독

“당장의 본능적인 욕구 해소가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성매매라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조 대표는 “기계적 자극을 주는 등의 방법을 강구하는 게 낫다”면서 “성매매는 해결책이 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장애인의 성을 고민해온 단체들과 함께 ‘한국장애인성문화네트워크’(가칭)를 준비하고 있다. 일회적 논의를 넘어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성의식과 시선을 극복하는 지속적인 운동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핑크 팰리스>에 출연한 한 여성 장애인은 “(성관계를 가진 뒤) 전혀 느낌이 없었지만, 상대방이 나를 다치기 전과 똑같이 한 여자로 봐줬다는 사실이 기뻤다”고 말한다. 다른 남성 장애인들이 강렬한 성욕을 발산하고 욕구가 채워질 때의 만족감을 표출하는 반면 여성 장애인들의 발언은 섹슈얼리티를 부정당한 경험이 주가 된다. 여성 장애인이 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여성 장애인이 섹슈얼리티를 부정당하는 동시에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또 하나의 무성적 존재였던 노인의 성을 공론화해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구실을 했다.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아니 상상하기 싫었던 장면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장애인의 섹스 장면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섹스할 때 인공 항문 처리를 고민하거나, 요실금을 경험하거나, 옷을 벗고 체위를 바꾸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비장애인들은 상상하기 어렵다. 비장애인은 섹스 파트너를 찾는 데까지 힘든 일이 많지만, 장애인은 섹스 파트너가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중의 굴레, 여성 장애인의 성

한 일본인 중증장애인은 두 개의 커다란 산소통을 24시간 달고 산다. 그런데 그가 생명보존 장치인 산소통을 떼어놓을 때가 있다. 섹스할 때다. 왜 목숨을 걸듯이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물론 숨쉬는 건 어렵지만 어린아이처럼 여자 가슴에 파묻히는 게 좋아요.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때고, 성은 삶의 근원, 그만둘 수 없어요.”


“그게 무시할 수 없는 현실”

수갑 찰 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면서도 성매매 업소를 넣은 이유

[인터뷰_ <핑크팰리스> 서동일 감독]

영화에 대한 공감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장애여성운동 하는 분들한테서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여성 장애인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동수 아저씨의 사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고, 장애인의 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차원에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장애인·비장애인 공히 공감도 많았다.

성매매 업소에 가는 장면이나 <핑크 팰리스>라는 제목 등이 영화가 성매매를 옹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 업소 장면을 찍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다. 자칫하면 수갑을 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그 장면을 넣은 건, 그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수 아저씨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돼 있다. 욕구는 다 똑같은데, 일단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래서 돈을 주고서라고 성욕을 해결하려는 건데, 올바른 건 아니지만 그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나도 장애인을 위한 성매매 서비스가 궁극의 대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근본적인 조치란 무엇인가.

= 장애인의 자아실현 권리를 인정하고 사회가 그걸 도와주는 것이다. 누구나 교육을 받고 그를 통해 자아실현할 권리가 있듯이, 장애인도 이동권을 갖고 사람을 만나면서 관계를 맺고 자아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 비장애인들은 누리는 그 권리가 장애인에겐 공평하게 허락되어 있지 않는 현실이다. 그 현실적 조건을 바꿔야 스스로 짝을 찾고 결혼을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게 궁극적인 접근이다. 그럼에도 ‘핑크 팰리스’를 제목으로 한 건, 성에 대한 욕구를 일단 인정하자는 뜻이었다. 업소를 찾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인 거고, 나는 동수 아저씨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좀 안타까웠다.

후속편을 만들고 있는데 어떤 작품인가. 전작에 대한 반론도 의식하고 있는지.

= <다섯 개의 유혹>(가제)이라는 옴니버스 극영화다. 처음엔 대안을 모색하는 작품을 하려고 했지만, 하다 보니 내가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부담에 짓눌리고 있더라. 그래서 재미있게 가자는 생각으로 유쾌한 에피소드를 준비 중이다. 시나리오 작업에 여성 장애인 두 분도 참여하고 있으니 그분들의 시각이 반영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의무감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남성·여성의 비중을 고르게 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이야기를 고를 수 있는 게 감독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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