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구판절판


누가 능히 스스로 더러우면서 그 더러운 것들을 천천히 맑힐 수 있으랴?-23쪽

참된 사랑은,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에 묶이지 않는다.-117쪽

공자왈
"제물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게 쓰이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147쪽

공자왈
"도는 사람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밝히 드러나니 본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하기 힘든 것도 아니다. 어찌 그것이 사람들한테서 먼 것이랴? 만일 도를 행하는 자가 낮고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높고 먼 것만을 구한다면 그의 앎과 행함이 모두 그릇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어찌 도라고 하겠는가?"-233쪽

사람의 말은 언제나 남음이 있고(쓸데없이 군말을 덧붙임) 행실은 언제나 모자람이 있어서, 말이 행실을 돌아보면 곧 군말을 스스로 덜게 되고 행실이 말을 돌아보면 곧 행실의 모자람을 스스로 채우려 애를 쓰게 된다.(삼산진씨)-242쪽

소인의 길은 분명한 듯하지만 날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반대로 군자의 길은 어둑해 보이지만 날이 갈수록 밝아진다. 소인은 눈에 잘 띄는 현상을 보며 살지만 군자는 현상을 통해 언제나 진상을 보기 때문이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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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9-28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참된 사랑은,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에 묶이지 않는다.

근사한 말입니다.^^


라주미힌 2006-09-2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세를 몰아 '이아무개의 장자읽기'로 들어가려다가 '급' 마음이 변해서 '언니네방' 읽고 있답니다. (너무 솔직해서 놀랬음... 누가 볼까 노심초사.. )

고전도 가끔 읽어주니 좋네요..

가랑비 2006-10-1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누가"가 혹시 저예요? ㅎㅎ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중용…
옛날 선비들이 밥벌이는 아내에게 맡기고 골방에서 ‘열독’하던 책?
하지만, 쾌쾌한 냄새가 날 것은 이 책은 왠지 묘한 궁금증을 준다.
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재테크와 자기계발을 강요 당하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도 궁금했지만, 저자가 이현주 ‘목사’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서양 종교가가 동양의 유학자들이 수 백년 전에 읽던 책을 21세기 요즘에 출판하다니, 동서고금을 크로스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오직 진리인 ‘기독교’적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이 책을 썼을까… 혹시 대학, 중용으로 포교하려는 ‘흑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으로 책을 집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아는 사람에게서 불교 유적에서 발췌한 ‘예수’ 비슷한 한자로 이 땅에서의 기독교의 역사성을 발견해내는 ‘놀라운 노력’을 본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학문과 종교, 동서양을 아우르는 통섭적 지혜가 엿보이는 책이다. 진정한 구도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는 종교적 영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선인들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한 자세는 성숙한 인간의 표본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현재에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근원의 근원을 탐구하여 얻은 진리가 자본주의적 가치와 비교될 수 있을까? 절대로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으며,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인문학의 위기라고 걱정하는 학자들이 사회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사회의 요구는 점점 집요하게 화폐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조화 시킬 수 있는가에만 역점을 두려고 한다 .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 것만을 대접하는 이 시대에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자본주의의 잣대는 세상을 막무가내로 저울질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그러한 요구에 맞춰 대학이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훈련소로 스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의 완성이 ‘대학진학률’이라면 대학의 완성은 ‘취업률’이다. 어떤이가 주장하길, 민주-자본주의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도기적 단계이고,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이라고 했는데, 인문학의 경쟁력이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경제성장의 기여도’가 우승열패의 운명을 가르고 마는 것인가.
 
집중과 선택의 결과로써 쓸모 없는 것들은 넘쳐나게 되었다. 단기성 효과와 ‘쓸모’라는 명제 앞에 무시되어 온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 같다. 한자어가 많이 나온 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내용-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체화하고 삶에 흡수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화두인 시대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책.
저자의 성숙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고, 그의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 또한 참되다.
대학, 중용을 읽고서도 ‘대학’ 갈 수 있다면, 취업할 수 있다면 해방된 인간, 확장하는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 나무를 관찰했다.
유난히 잎이 없었던 나무. 
그래도 여름인데, 초록으로 물들겠지 하는 바람으로 이번 여름을 기대했건만...
여전히 잎사귀는 희한하게도 일부에서만 자라나고 있었다.

문제는 뿌리다.

세상의 문제라면  그 근본은 개인에게 있다.
대학 중용은 그런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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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9-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거 맨날 햇갈려요... ㅠㅠ;

저 나무.. 제가 좀 이상하게 찍어서 잘 안나왔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지가 쫙 펼쳐진 것이 너무 예뻐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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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9-2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정이 예술이네요. ^^;

마노아 2006-09-2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안쓰럽네요.
 

부장...

꼭 사람들이 없을 때 다가와서 말을 건다...

"내가 검은 색을 좋아하거던, 집에 검은 옷이 몇 벌 있어.
같이 검은 옷을 입고 다니니깐 교복같네"

(내가 좀 스프라이트 검은 바지에 검은 와이셔츠를 며칠 입고 다녔더니 ㅡ..ㅡ;)

"부장님 그런 것도 신경 쓰세요? 하하.."

"검은 색이 유행이라고 다들 검은 색만 입고 다니네...
요일을 정하는게 어때?"

" ㅡ..ㅡ;;;;;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장'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니...

1년 전 나였다면... 앞으로 검은 옷만 입고 다녔을텐데..

이젠 '공존'을 추구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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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9-27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 '코디제안'도 하더만요... 흰 와이셔츠가 세련되고 좋다나ㅡ..ㅡ;
지가 입지~!!!

마노아 2006-09-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이하신 분이네요^^
 
 전출처 : 바람구두 > 근대적 노동에 대한 혐오와 조롱

   
 
근대적 노동에 대한 혐오와 조롱
  <마빡이>, 열심히 할 뿐 이유는 없다 [안효원] 2006-09-27 오후 1:54:36 
 
<마빡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 <마빡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마빡이>가 떴다.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로 등장한지 3주 만에 언론의 조명을 한 몸에 받게 된 거다. 방영된 횟수가 고작 세 번인데 놀라운 인기몰이다. 굳이 인기비결을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의 관심은 <마빡이>의 열광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원인에 있다.

<마빡이>에 대한 찬사는 어렵지 않게 여러 매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시사주간지까지 이에 대한 긍정적 분석을 게재할 정도다. 일부에서 이 프로그램을 일러 ‘슬랩스틱’이라고 하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마빡이>는 과장된 폭력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과장법적 코미디가 아니다. 보기에 어설프고 덤벙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슬랩스틱은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과 계획에 맞춰 진행되는 코미디다. 그래야 손발을 척척 맞춰 극을 진행할 수가 있다. 이런 슬랩스틱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르가 홍콩의 배우이자 감독인 성룡의 영화들이다. 코미디 장르는 아니지만 프로레슬링도 엄밀히 말하면 슬랩스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각본 없이 진행되는 <마빡이>를 슬랩스틱으로 보는 건 여러모로 무리다.

그렇다면 과연 <마빡이>는 기존의 장르 규칙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코미디인가? 슬랩스틱도 아니고 이른바 ‘개그’라고 불리는 여타의 만담과 구분되는 그 무엇이 <마빡이>에게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이 코미디는 지금까지 개그콘서트를 지탱해온 요소들을 전혀 포기하지 않는다. 이 핵심적 요소들은 대개 특정인의 외모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다. ‘정종철’이라는 특정한 개인이 없다면 이 코미디는 불가능하다.

흥미로운 건 이 코미디가 코미디 자체에 대한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코미디에 대해 말하는 코미디라는 뜻이다. 출연자들은 “개그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마빡이>는 희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개그가 없는 개그라는 말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거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빡이>는 “분석”도 피해 달아난다. 이들은 “이 개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한다는 건데 이건 진지함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진지함을 조롱하는 것도 엄연히 말해서 일종의 의미다.

열심히 손으로 이마를 치는 마빡이는 웃는 관객들을 향해 “이게 재미있어 보이냐”고 호통을 친다. 출연자에게 힘든 일이 관객에게는 웃음거리가 된다. 이건 웃음을 만들어내는 기본 구도다. 일부에서 이걸 두고 자학적이라고 말하지만, 웃음은 어느 정도 자기 파괴에서 출발한다. 강고한 자아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그 지점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웃음이 진리를 드러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마빡이>가 드러내는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하다.
<마빡이>에서 중요한 건 이런 인기를 구가하게 된 코미디의 형식적 비밀이 아니다. 이 코미디의 형식은 과거의 것을 적절하게 재포장한 것뿐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재브랜드화 쯤 되겠다. 따라서 이 코미디의 형식 자체를 분석하는 건 출연자의 주장대로 무의미하다. <마빡이>는 형식 내적 논리보다 그 외적 구조에서 슬그머니 현실을 드러낸다. 관객의 웃음이 그 현실의 실마리다. 관객은 왜 <마빡이>를 보고 웃는가? 이 문제가 이 코미디에 대한 진짜 물음이다.

이마를 손으로 치는 출연자들을 보고 관객들은 웃는다. 극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맨 처음 출연한 마빡이는 거의 탈진상태다. 다른 출연자들은 은근히 시간을 끌며 마빡이를 괴롭힌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등장한 출연자는 이른바 형님뻘로 지쳐 넘어진 후배 출연자들에게 진정한 개그맨에 대한 훈계를 늘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힘든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출연자들의 곤혹감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누구는 이걸 진정성이라고 하지만 나는 진리라고 부르고 싶다. 이게 무슨 진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평가는 <마빡이>라는 코미디에 대한 가치평가가 아니다. 좋은 코미디냐 아니냐 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빡이>가 드러내는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하다. 후기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세속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신화를 먹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 신화가 설파하는 건 무한 경쟁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경쟁에 대한 용인이다. <마빡이>는 불평등한 경쟁의 구조를 드러낸다. 마지막 훈계를 하는 출연자와 처음 이마치기를 시작한 출연자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경쟁의 구조에서 개그라는 엔터테인먼트 행위는 더 높은 시청률을 위한 반복적 강박으로 물화된다. 이 지점에서 개그는 더 이상 개그이기를 멈추고 개그맨의 의지를 배반하는 독립적 생명체로 거듭난다. 이래서 <마빡이>에 개그는 있되 개그맨이 없다. 개그맨은 개그를 위해 고통스럽게 이마를 칠뿐이다. 개그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개그맨, 이건 개그 자체에 대한 상대화이자 동시에 노동의 압박에 대한 비판이다.

<마빡이>에서 개그는 노동의 구조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우리를 웃기는 건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구조에 대처하지 못하는 출연자의 무기력이다. 우리는 왜 이런 무기력에 분노하지 않고 웃는가? 그 이유는 이게 조롱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조롱일까? 바로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다. 근면성실이라는 근대적 노동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이 코미디는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빡이>는 <무한도전>과 같은 논리를 갖고 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할 뿐 그 이유는 없다.

근대적 노동과 대별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창조성이다. 문화산업을 창조산업이라고 부르게 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애플이나 구글의 선례들이 보여주듯, 이제 창조적 인재니 창조적 아이디어니 하는 말들은 수사적 치장만은 아니다. 후기자본주의의 생존이 달린 핵심적 현안이기도 한 거다. 창조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시장의 순환구조는 대중에게 항상 변화에 대한 강박을 강제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강박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한 대중의 무의식적 노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렇게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축적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이 시대에 적응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이 <마빡이>의 인기로 이어진다.

 


*이택광 문화평론가는 1968년 생으로 문화이론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2002),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가 있으며 광운대학교 영어영문과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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