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PB 서팀장의 천만원부터 시작하기
서기수 지음 / 한솔아카데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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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증식, 부의 축적이 세간의 커다란 관심거리이다. 용산과 주상복합, 재개발 아파트 등의 분양권에 몰리는 천문학적인 자본과 강남의 땅값이 뉴욕, 도쿄를 추월하는 등의 투기 과열에 대응하는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억제책이 연일 언론을 장식한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재테크 열풍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 불공정,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IMF 직격탄은 이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빚에 쪼들린 서민은 죽어도 정작 커다란 책임이 있는 정치계와 경제계 인사, 부유층의 재산은 늘어만 갔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비와 세금에 등이 휘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간의 괴리는 갈등과 불안을 낳고 있다. 일반 대중은 그들의 부패성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가진 것, 누리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의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은 잔인하게도 신분상승의 기회조차도 박탈하고 있다. ‘자본적 부’는 ‘교육의 부’로 이어지고,’ 교육의 부’는 ‘직업과 권력의 부’로 전승된다. 다시 이것들이 ‘자본적 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들이다. ‘로또대박’이라는 단어에는 이러한 정체된 ‘자본적 신분’ 사회에서의 희망으로 인식된다. 복지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 나라에서 가족 동반자살의 행렬은 더더욱 국민 개개인의 자발적 생존 전략을 강구하게 만드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본을 다스릴 것인가,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인가. 언제나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

‘Riches serve a wise man but command a fool.’ 274p

‘재테크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의 욕망을 잘 아는 그들도 살아 남아야 하니깐.

무엇이 그들을 가난하게 하고, 무엇이 그들을 부유하게 하는가. 확실한 해답을 알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은 정보와 실천력을 강조한다. 저금리 시대에서 현명한 자금운영을 위해서 1% 더 수익률이 높은 것을 찾으라는 것. 그리고 금융상품, 금융상식, 투자방법 등을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금융, 법, 경제 관련 용어들이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느끼지만,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들이다. 돈을 잘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명하고 가치 있게 쓰는 지혜 또한 중요한데 우리 사회는 균형을 상실한 듯 하다. 우선 모으고 볼 것인가? 늘 쓰는 것이 돈이고 모으는 것은 평생인 것을… 우리 사회는 잘 쓰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사회에 환원하고, 기부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문화와 의식이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길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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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 - 사라진 바미얀 대불을 위한 헌사
이주형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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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 구경하기 힘든 황량한 고원에서 무엇을 향해, 어디를 향해 쏘는지도 모를 곳으로 포격을 하는 장면,
역사상 정복 된 적이 없다는 전사들과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라고 호들갑 떠는 대중매체의 ‘전쟁 광고’.
이어지는 최신 무기에 대한 동경어린 시선으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전담하는 TV뉴스.
반추동물도 아닌데 먹을 것이 없어 풀을 찾아 이곳 저곳을 맴도는 아이들이 그나마 그것이라도 구해서  펄펄 끓여 독을 제거해서 먹는 장면들.

그런 곳에 수백만 달러 짜리 미사일을 퍼붓는 미국을 풍자하는 만화에서 비애를 느꼈던 일이 2001년 9월 미국이 빈 라덴을 잡는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그 날의 기억의 단편들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미지는 끊임없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난과 전쟁의 공포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총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는 이슬람원리주의자 탈레반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축구장에서는 식전 행사로 공개 처형이 이뤄지고, 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인권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문화에서 느껴지는 야만적 광신성은 국제 사회의 고립을 자초하였고, 바미얀 대불 석상의 파괴 행위에서 절정을 보여주었다. 인류의 문화 유산은 국경과 인종, 종교를 떠나서 보호되어야 할 마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한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는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듯이 그들의 목소리는 당당함 그 자체였다. 오히려 파괴되어야 할 외세의 가치이며,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순수성을 과시하였다.

이 책은 이러한 국제 상황에 맞물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역사적 의미와 문명의 탄생,파괴에 대한 학자로써의 견해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그려내었다. 또한 파괴 행위에 대한 정당성 또는 비난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고민과 의문점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문명사를 다루는 책이 아닌 현재와 과거를 잇게 하면서 잊혀진 문명에 대한 자각적인 자세로 미래를 여는 의미 있는 책이라고 본다.

책의 구성의 대부분은 찬란했던 아프가니스탄의 문명에 대한 설명이다. 시간은 기원전 4천년 전까지 올라간다. 이 곳은 라운더바우트(roundabout)로써 이집트, 헬레니즘,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문명이 교류하던 유라시아의 중심이었다. 지역성이 그러해서인지 침략자가 반드시 거치는 길목이기도 했다. 많은 문명과 사람이 흘러간 이 곳에 찬란했던 문명이 꽃피는 것은 당연하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부터 유목민 문화, 알렉산더가 남기고 간 그리스 문화, 바미얀 대불만큼이나 번성했던 불교 문화, 둘의 합작품인 간다라,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다양성과 문명의 찬란함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물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파괴의 역사이다. 또 다른 문명이 꽃 피려면 이전의 것은 사라져야 한다. 흥망성쇠는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라고 역사가 말해 주듯이 문화유산도 바람처럼 세워졌다 사라진다. 무차별적인 도굴에 의한 것과 종교적, 정치적인 행위의 결과물로써…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패턴을 담담하게 이해하면서도 버미얀의 대불상 파괴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책 전반에 깔린 분위기도 그러한 안타까움이 베어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묻혀있는 유적, 유물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이제는 문화 유산에 대한 가치를 바라 보는 인류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이전의 패턴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하며 학자들의 공명심에 일침을 가하고, 대불상 복원을 위한 막대한 예산을 다른 유적의 발굴, 보호에 쓰는 것이 훨씬 발전적이라고 글을 마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책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문명의 파괴는 탈레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서양은 더 심했고, 탈레반이 완전히 날려버린 대불도 그 전부터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다른 문명인이 되려 하지만, 그들과 다름없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은 조선 총독부 철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탈레반의 대불 파괴와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으려 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역사적 유물이 바로 조선 총독부였고 우리는 그것을 제거했다. 기독교인들은 단군상의 목을 쳤고, 유생은 불상의 목을 쳤다.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공산 지도자 상들이 파괴되었다. 문화 유산의 가치가 정치성, 종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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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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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존재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비존재성은 인간을 지상 위의 유일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착각을 유도한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배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인류는 마치 신처럼 무한한 팽창을 위한 정복과 파괴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인간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장엄하게도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으니……. 고릴라 이스마엘은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에 짱돌을 과감하게 던지면서 세상을 구할 ‘인간 제자’를 구하는 광고를 낸다. 인간이 고릴라의 제자가 되는 ‘하극상’. 이 책은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인간의 자존심부터 밟아주고 시작한다.

사실 결론은 너무나 뻔하다. 자기 기만과 오만에서 벗어나라. 너희가 사는 세상은 너희의 것이 아니니 함부로 하지 마라. 다른 생명체에 대한 경멸은 스스로의 존엄을 훼손한다. 그러니 농업혁명 이전의 공존과 환경 친화적인 삶을 모색하라. 인간 중심 문화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의 전파를 통해서 틀을 깨라.

환경주의자들이 보면 식상해서 그냥 덮어버릴 수도 있을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전개하는 산파법. 독백이 아닌 대화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가는 과정에 적극 동참한다면 쉽게 덮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논리성과 진정성으로 가득한 이들의 대화에 관객은 있을 수 없다. 읽는 이들 또한 치열한 사상 검증과 자기 성찰, 논리적 변증을 펼쳐야만 하는 게 이 책의 매력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건드린다. 그러나 수 천년 전에서만 맴돌 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다. 다만 질문 할 뿐이다. 그렇지만, 대답은 포괄적이고, 둥글둥글 하다. 인구조절, 식량, 인간을 지배하는 문화 같은 일부 소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니 결국엔 원론적이고 막연한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결과적으로 대중의 의식 전환만이라도 이룰 수는 있을지 몰라도, 머리에서 발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게 느껴진다.

책과 다른 생각을 좀 이야기를 한다면, 농업혁명은 먹이에 대한 만족을 준 정착문명의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그러하더라도 중간에 많은 변화를 거쳤다. 따지자면 산업혁명이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낸 가장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이전 시대에 대한 미련이 미래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면이 있다.

이스마엘은 도처에 먹이가 있는데 왜 정착을 하여 재배를 하느냐고 묻지만, 정착은 먹이에 대한 욕구뿐만 아니라, 불안 요소(외부의 위협, 공급과 분배)를 감소시켜 안정을 유지하는 것과 삶의 질 향상에 의미가 있다. 개인보다는 집단, 유목보다는 정착이 불안 요소를 감소시켜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약자’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니던가.

‘역할을 맡지 않은 이들’의 대표적인 예로 유목민을 들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환경에 커다란 영향(목초지의 상태)을 받기에 정착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수많은 외부의 위협과 끊임없는 투쟁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다시 말하면, 생존력이 강한 자들만 살아 남았다. 이 둘의 차이는 자연을 지배할 것이냐, 자연에 순응할 것이냐가 아닌 삶의 방식의 차이(어떻게 적응하였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불안 요소(미래를 위한)의 제거는 나약한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는 방식이고, 지극히 본성적인 욕구이다. 보험과 저축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교육으로 인생을 설계하며, 전쟁으로 테러리스트를 제거하여 국가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까지 이르는 우리의 본능은 우리 사회의 기반이다. 신(자연)을 거부하고, 지배자로 나서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운명과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적응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선사시대의 인류가 3시간 수렵, 채취의 노력으로 살았다고,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현재의 사람보다 행복했다고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땅을 파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안정적인 삶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인류는 1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살아가는 단계를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이스마엘이 인류와 다른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안정을 취함이 아니던가.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여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함이 아니던가. 만약 고릴라의 말이 맞다면(인간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 이 책 또한 신(자연)을 거역하고 개체 수(인간)의 급격한 감소를 방해하는 ‘지배자의 논리’가 되어 버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먹이가 충족한 안정적인 삶은 여유를 주고, 다른 것에도 눈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문화와 문명을 발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문명은 기술을 낳고, 기술은 문명화, 도시화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격리 시킨다. 자연과 멀어진 인간은 당연하게도 ‘자연 속의 인간’이 아닌 ‘조직 속의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의지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난 수백만년은 ‘생물적 진화’의 시기 였다면, 이젠 ‘사회적 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기술이 주는 자신감, 그리고 맹신은 자연을 도구화, 대상화 시키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인간 중심 사상의 핵심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희망적인가?

그러나 비극적이다. 관성이 붙어버렸다. 65억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 먹이는 멈추지 않아야 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 문화와 생활을 유지시키는 물질들의 불균형과 불안정한 공급과 수요로 인해 한 쪽에선 전쟁과 가난, 다른 한 쪽에서는 복지와 비만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것을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법칙으로 해석한다면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세상을 질서있게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은 환경을 더욱 더 개발이라는 야만적 문명화를 통하여 생명체들을 정복, 파괴해 나가야만 한다. 게다가 걷잡을 수 없는 인구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출산율 하락과 수명 연장으로 인한 고령화를 걱정해야 된다. 인구가 더 필요하다니…

나는 사회적 진화에 이어 다시 ‘생물적 진화’가 더 크고, 위험하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줄기 세포와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생명 연장의 꿈’이 전 세계 국가의 투자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투자는 이익을 목표로 한다. 인류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혜택은 자본가들이 독점할 것이며, 생물학적,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는 더욱 더 계급적이고, 갈등이 증폭 될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지구상의 전 생명체의 고통이 증가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는 인간을 위한 정보로 활용 될 테고, 모르모트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체들만 실험실에서 번성할 것이다. 벼와 밀이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식물이듯이……. 지금은 옛날 얘기로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인권보다 경제가 우선이고, 짐승보다 인간이 우선이고,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인 세상이다. 누가 만든 질서인지는 몰라도 이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은 국가적, 조직적 폭압에 짓눌려야 한다. 이걸 보면 생태계 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인간 사회의 희생양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문장을 해석해 보자. 처음 봤을 때부터 ‘고릴라가 사라지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가졌었다. 나도 No라고 대답한다. 이웃의 평화 없이 나만의 평화는 오지 않듯이 다른 종의 종말은 우리의 종말을 예고할 것이다. 그리고 Yes라고도 대답한다.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뭔 짓을 해서라도……. 이라크에 몰려든 하이에나들을 보라. 인간이 인간을 뜯어먹으면서도 뻔뻔하게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 아니던가. 하물며 지구상의 ‘미물’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다’ 무기 만들 돈은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 줄 돈은 없는 자들 아니던가. 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인간을 되돌아 보게 하고,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너무 염세적인가.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1회용 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무장하고, 밥벌이 전선에 임해야 한다. 이게 인간이고, 인간 사회다. 그래 여기가 감옥인 건 맞다. 하지만 감옥에 익숙해진 이상 나는 기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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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식이 불편하다 - 어느 국어선생의 쓸모 없는 책읽기
김보일 지음 / 소나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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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한 권 선물하고 읽어보니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좋다고 한다. 뭐가 좋은데? 하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읽긴 읽었는데, 잔상만 남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서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나도 그렇다. 기억과 이해의 틈은 아주 가늘면서도 길게 이어진 느낌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의 많은 생각이 담긴 책. 수 많은 책의 융합과 변이가 만들어낸 사고작용의 흔적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과 음율, 목소리가 공명의 떨림으로 문장이 되었다. 사실 난 그 소리에 집중이 잘 안되었다. 내가 읽은 책이 아닌 것을 남의 시선으로 잘 포장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낯선 집에서 주인 행세하는 것 마냥 불편하다. 바다를 보지 않고, 바다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뛰어난 상상력과 자기 기만이 만들어낸 조화이다. 감성과 이해의 틀은 결코 주입되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글에 공감은 할 수 있어도 내 몸은 불감증으로 얼어버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적지 않게 교집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이 책의 의도는 단순한 책 소개도 아니오, 독서 편력에 대한 저자의 독백도 아닐 것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전혀 에로틱하지 않으면서도 적나라한 책과의 애정 행각에 대한 진솔한 고백성사 같다. 바람둥이답게 이 책 저 책과의 불륜으로 낳은 자식들의 모습은 하나하나 제 각각이다. 생태를 닮은 아이, 인권을 닮은 소녀, 평화를 닮은 녀석, 철학, 행복, 동심,낭만의 네 자매 등. 족보를 따질 수 없는 그의 모종행위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의 글쓰기는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자기를 은근히 노출한다. 노출증까지 있는 듯 하다. 따지자면 그 표현력의 정체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하늘만 보고 있어도, 삼라만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눈매, 책 앞 표지 안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끊임없는 관심과 대화의 연속이다. 무관심과 침묵의 언어는 파경의 지름길. 그러나 집착은 권태로 가는 막차. 권태와 파경의 경계에 있는 그는, 그래서 그의 사랑은 잡을 수 없고, 잡으려 하지 않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역마살 사랑이어라. 그리하여 목마름은 끝이 없나보다. 노래로도 있지 않은가.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남의 과거를 들었으면, 자신의 과거도 들추는 것이 진실게임의 룰이렸다. 나는 책에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책에 사랑을 얼마나 주었는가를 적다 보면 이만큼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책은 서서히 스며들어 어느새 나의 영혼을 잠식해 버렸다. 기억은 나지 않아도 잔상은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잔상이 나의 피 속에 계속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고백하듯 책에 다가서는 사람의 모습에서 난 아름다움을 느낀다.
특히 지하철에서 긴 생머리를 넘기며 책장을 넘기는 숙녀를 볼 때는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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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옮김 / 운디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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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그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 그렇지만 백지에서의 시작은 언제나 나에게 묘한 흥분과 기대를 쥐어준다. 겉 표지의 감촉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손에 검은 가루가 진하게 묻어날 듯한 까칠함을 거칠게 그어진 선들이 마구 뿜어내고, 하늘을 향해 꽂은 팔은 급진적이고, 단호하고 준엄한 목소리를 낸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비장함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이 책의 첫 느낌은 이랬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 많이 있다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평범한 딸, 아내, 어머니의 모습만 떠오른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캐테 콜비츠에 대한 왜곡된 또는 편향된 시선에 대한 항변을 확실히 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마치 그것을 강요하는 듯한 테마별 묶음은 일기의 색깔마저 묻어 버렸다. 작위적이다. 일기라는 소재를 통하여 한 개인을 드러내려면 일기라는 형식에 충실해야 했다. 가공은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다시 빗겨나가게 만들고, 독자의 가치 판단과 의식의 흐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에 대한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전문가적인 해석이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을 해버리니, 한참을 읽다 보면 글이 그림을 덮어버리는 사태를 맞이한다. 내가 보는 눈은 다른데, 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그림’일지도 모르나, 타인의 시선은 감상을 하는 나에겐 잡음이다. 넉넉히 볼 자유조차 없는 구성, 그림이 글의 장식이며 엑세서리로 전락해 버리는 이 책의 초반은 ‘아니다’ 싶었다.

아무 해석이 없는 작품들의 나열, 너무나 친절한 해석으로 짜증을 불러오는 부분, 그 뒤에 나오는 캐테 콜비츠의 일기.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을 덮고 전체를 보니 편집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작품, 전문적인 해석, 그리고 그녀의 삶을 엿보고 난 뒤에 다시 앞장의 작품들을 보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각 작품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감성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묘미이고, 읽기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의 혁명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책의 서문이 밝히는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진솔한 개인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일기는 정말로 적절한 소재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 친절하게 정리’를 해 놓지 않았던가.

일기에서 나타나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번뇌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는 시점에서 어쩌면 죽음과 인간에 대한 고통은 가장 흔하면서 자연스러운 소재이며 삶 자체였을 것이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으니, 일기 보다는 죽음의 기록에 가깝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늘이었다. ‘죽은 아이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라는 작품을 보면은 아이는 편안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가 오히려 시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식을 상실한 고통은 죽음보다 더 죽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녀의 일기는 그녀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죽음에 대한 집착, 민중의 아픔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거친 죽음의 그림자는 치열한 삶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가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언제나 생의 빛줄기와 맞닿아 있지 않던가. 민중의 고통이 오히려 삶의 의지를 더욱 더 고양시키는 것처럼. 소멸과 탄생, 그림자와 빛, 추와 미, 그것의 경계에서 예술가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캐테 콜비츠가 자화상이 많은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벗어나기, 그렇게 타인을 보듯 자신을 보듯 인간을 보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는 판화 특유의 거칠고, 무거운 분위기 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관 뚜껑을 닫듯이 덮은 이 책의 검은 겉 표지에는 아직도 그녀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No War.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부시는 지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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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Green 2004-11-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군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부시는 지옥으로’에 올인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