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
권혁웅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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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와 이름이 같은데, 주제도 약간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잠재된 힘의 근원을 욕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고백하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시인이 신화 속의 사랑의 이미지를 색출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새롭다.


 


신화와 꿈과 시의 테마는 언제나 사랑이다. 12p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고,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라는 그가 내세운 주제의식은 사뭇 진지하다. 신화를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려는 억지가 아니라, 코드 훔치기에 가까운 그의 해석에서 인간의 심연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을 놓을 수 없는 재미를 던져준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14p)


 


신화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 사랑, 모험, 전쟁, 저주 같이 테마별로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신화의 변형과 유산이 현대에 남긴 것들을 역추적하는 책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에 편중된, 어찌 보면 반쪽짜리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동서고금을 마구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일본, 중국, 한국, 인도, 그리스-로마 신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까지 그 범위는 지구 전체이다. 세계 곳곳의 보편적인 사랑의 논리를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 보인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그 믿음은 주어진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합리적 사유의 결과였다. 9p


 


저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지만, 신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과 이상, 억압과 자유의 모호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분출구, 그곳에서 펼쳐진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에 대한 탐구, 그 중에서 사랑(몸의 논리, 감각의 논리)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토록 흥미롭게 펼쳐 놓다니 만물의 생명력, 오디세우스적 회귀, 영겁의 시간, 진리의 수레바퀴에 대한 저자의 자유로운 시각은 16개의 각 단락 모두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성애를 주제로 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에서


에로티시즘은 영육과 성속의 경계 역시 무화시킨다. 에로티시즘은 육체로 정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문법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다. 키냐르는 사랑이 젖가슴에서 나온 말임을 지적했다. 사랑(amor)은 젖꼭지(amma), 유방(mamma), 유두(mamailla)에서 유래된 단어다. 아무르(amour)는 말을 하는 입이라기보다는, 배가 고파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본능적으로 젖을 빠는 입 모양에 가까운 단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사랑의 지고한 가치를 믿지만, 그걸 달성하는 방법이 육체 바깥에는 없다. 81p


 


창조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신의 죽음이 세상의 탄생을 말하는 부분에서 태초의 살해는, 우리의 삶이 어떤 희생 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다른 몸을 먹고 입고 디디고 산다. 우리는 삶을 가능하게 한 다른 생명에 대한 경외를 다른 신들의 죽음으로 표현한다. 251p


 


근친상간은 또 어떠한가.
신화에서 근친상간은 여신의 지위 하락과 관계가 있다. 가이아, 헤라, 아프로디테, 티아마트와 같은 대지모신이 제우스, 마르둑과 같은 남신에게 복속되면서, 여신들의 자리가 어머니에서 아내나 누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머니를 범하는 것은, 자식인 자기 자신을 낳는 행위이다. 이로써 제우스와 호루스는 영원한 탄생의 재귀적 사이틀에 들어가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어머니 품에 대한 생래적인 그리움이 모든 여성에 적용될 때 생기는 신화적 비약이다. 어머니에 다른 여성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 어머니를 적용한 것이다.


 


첫날밤도 자극적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는 신데렐라의 신발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출입구라 해석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얼굴이 아니라 신발로 주인을 찾는다는 것, 이야기의 핵심은 속궁합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흡혈귀 얘기에서는 밤에만 돌아다니며 초야를 탐욕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묘사한다.


 


신화와 관련된 풍부한 도판이 이 책의 곳곳을 장식하고, 다양한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몸의 논리, 사랑의 이미지를 캐낸 시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보여지고 있는 것보다 감추어진 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의 목소리를 담은 신화. 그것을 가까이 하는 우리는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만나게 될 것이기에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신화는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신의 가면> 조셉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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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2-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읽으셨겠는데요? 음...!

라주미힌 2006-02-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인용이 너무나 많아질 것 같아 자제 좀 했어요 흐.. ㅎㅎ

2006-02-20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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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자들을 처형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자들의 구호 중 하나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은 권력과 ‘자신들만의 역사’로 늘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자신과 선조들의 업적들을 나열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현재와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한반도의 종속성을 내세운 지배의식을 구조화 시켜왔듯이 조작과 은폐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늘 발견할 수 있는 흔한 현상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식민사관의 잔재는 그 중 하나이며, 우리의 역사를 황폐화 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역사의 의미는 현재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인식의 재발견이며, 미래를 향한 준비된 과정일 것이다. 한반도(이 책에서 말하는 ‘한민족’) 문명교류의 역사를 되짚어 본 이 책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서양에 의해 규정된 오류를 수정하고, 한국 속에서 발견한 세계성이 가진 힘과 문명의 융합과 변이, 창발 과정, 그것의 영향과 결과를 담았다.



저자에 의하면 선사시대 때부터 조선까지 우리의 조상은 이슬람, 로마, 동남아, 아메리카 모든 대륙의 문명과 문화를 진취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사회였다고 한다. 벼, 청동기, 금속활자, 고인돌, 무역, 작물, 조각상에서 나타나는 이국적인 인물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책의 모양새를 언뜻 보면 연대순과 풍부한 도판이 국사 교과서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쉬운 설명과 내용들이 신문에 실렸던 글답게 대중적이다. 게다가 저자의 ‘입담’이 적잖은 즐거움을 준다.

‘수나라는 건국 초부터 분별없이 고구려를 적대시했지만, 600여 년의 경륜을 쌓은 고구려 앞에서는 한낱 애송이의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중국에 귀속 될 수 밖에 없다는 단세포적인 논리다.’, ‘우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이다.’

동북공정이 한참 사회적 이슈였을 때 정수일 교수의 격앙된 논조가 느껴진다.



신문에 실리는 글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시사성이 개입된 고구려, 발해사를 다루는 부분은 이 책 전체의 흐름에 적당하지 않다. 민족주의로 범벅이 된 텍스트와 고구려사 왜곡, 영토상의 제약조건에 의한 불안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논리가 심하게 거슬린다.

이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민족주의는 이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세계성’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계성이란 무엇일까?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인가? 고선지, 장보고 같이 국제적으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세계인인가? 동서양, 국가간의 문물 교류? 물론 이 책에서 밝히는 세계성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의 공유, 타국-타인-타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는데, 그것의 밑바탕은 얼마나 열린 사회인가, 대중의 인식과 자세는 얼마나 열려있는가에 있다.



민족주의 역사관은 영토와 국가의 위상에 대한 집착이자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독 행위이다. 저자는 ’어디서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254p 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세계 최초’, ‘우리의 세계 최고’, ‘우리의 가장 우수한’처럼 우리의 위상을 강조한다. 또한 ’순결성과 정조관념이 유달리 강한 고려여인들에게 원나라에 끌려가는 공녀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순제의 정비가 된 기황후처럼 일세를 풍미한 여걸도 있었다.’ 130p

원나라에 끌려가 순결성, 민족의 혈통성을 잃는 여인들에 대한 치욕은 그곳의 지배계층이 되면서부터 겨레의 위상을 날리는 ‘여걸’이 된다. 20세기 민족주의로 바라본 저자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복잡한 계산 방식이다. 불리한 것, 가령 사대주의에 의한 문물의 수용은 국제정치에 현명하게 따르는 것이고, 우리의 것들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뛰어남에 있다는 공식.



이 책의 내용 중에는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될 정도로 우리는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 하지만, 일본의 기술의 후진성에 대한 멸시가 깔려 있다. 우리의 우월함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타’의 열등함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서 느끼는 ‘우월감’은 그들 국가의 ‘열등함’에 있듯이 말이다. 민족의 우월성과 독자성을 늘 강조하고, 영웅-지배계층의 신화적 해석을 통하여 ‘겨레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요소로 이용하고 있으면서 과연 ‘세계’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을 다르게 생각해본다.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민족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 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에서는 동질성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자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58p

이 글을 한 단어로 함축하면 ‘획일화’이다. 의식 구조, 가치관, 소양과 행동 양식들을 철저하게 뜯어 고쳐서 그 문화에 ‘용해’되지 않으면 들어 올 수 없는 ‘철저하게 닫힌 사회’라고 해석을 하면 비약일까?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갖기 무척이나 어려운 것을 보면, 이것도 ‘전통’일 수도 있겠다. 한마디로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면 이미 ‘한국인’이다.



국가와 영토에 닫혀있으면 세계를 말할 수 없고,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묶여 있는 개인은 세계인이 될 수 없다.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만을 그것이 세계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우승열패의 신화’의 연장선일 뿐이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보여주었던 겨레의 위상과 긍지의 회복’이 아닌 ‘미래를 위한 과거의 문명교류를 통하여 성찰할 수 있는 세계성’이었다. 반은 발견했고, 반은 버렸다. 그리고 교류란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주체’가 핵심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주체성과 정체성을 계속 강조함으로써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다시 쓰여진다면 ‘관계’가 중심이 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한국 속의 세계란, 겨레의 위상을 되찾는 일대의 역사다.’ 247p

그래서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학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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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6-02-0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뭐라 그러셨더라.... 어휘력의 부족이요? 흥!
얼른 추천하고 갑니다.

승주나무 2006-02-0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저도 어제 그 말 들었어요.. 흥흥!
밤잠을 괴롭히던 님의 고뇌에 찬사를 보냅니다^^

마늘빵 2006-02-05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엄살은 고수들이 부리는거에요.

라주미힌 2006-02-05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시간동안 쓴거에요.ㅠㅠ 남들은 휙휙 잘 쓰던데...
(공짜로 받은 책.. 악평 써서 쬐끔 미안하네요 ㅎㅎㅎ)

ps. 개인적인 느낌이므로 평가가 공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ㅎㅎ
 
한국 속의 세계 -하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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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동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속어인 '양아치'에서 어미 격인 '치'는 '다루가치'나, '조리치'(청소부), '화니치'(거지), '시파치'(매사냥꾼) 등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 취한 것이다. 매나 말과 관련된 '보라매', '아질게말'(망아지), '가라말'(검은 말) 등도몽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131쪽

흔히 우리나라 3대 토주의 하나로 꼽는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알고 있는데, 다시 그 연원을 캐 올라가면 그 원조는 아랍에 가닿는다. 세 번 고아 내린 증류주라고 하여 이렇게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뒤 증류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아랍 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줄곧 전승되어오고 있다. 그런 '아라끄'를 몽골군이1258년에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때 아랍 무슬림들로부터 그 양조법을 배워와서는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 주둔지에서 처음으로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소주다. 고려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증류'란 뜻에 어원을 둔 이 소주는 몽골어로 '아라킬', 만주어로 '알키', 중국어로 '아랄길주', 힌두어로 '알락'이라고 한다. 지금도 서아시아 일원에서는 '아락'이라는 우윳빛 소주가 유행하고 있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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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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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서,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기쁘고, 다행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독자라서,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쁘고, 다행이라니
기쁘고 다행입니다.

번역,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배운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잿빛 도시의 풍경에 낯빛도 변해가는 세상을 그려내는 것은 쉽고도 어렵다. 선과 면, 형과 색이 불분명한 것들을 뚫어지게 봐야만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불쾌함을 건져내는 작업이기도 하니까.


기억의 그늘 속에 자리잡은 아슬아슬한 쓰라림과 웃을 수 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들. 아비의 초상, 개인의 고독한 자아 찾기는 단편 곳곳에서 비춰진다. 군중, 다세대 주택, 북적거리는 지하철, 편의점 등에서 일상은 필연처럼 찾아오는 늘 그것들이지만, 우연처럼 부대끼는 사소함에 현대인은 늘 소심한 움츠림으로 바짝 긴장한다.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보여지는 은밀한 공포감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삶을 직면했을 때 '누구세요?'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익명성에 있다. 묻혀버린 삶, 자와 타의 흐릿한 경계를 두고 너무나 닮아져 버린 삶에 대한 불신, A를 A라 말하지 못하는 나에게 뻗어져 나온 뿌리인 셈이다. 


유난히 나는을 말하는 이야기들은 나는을 밝히지 않는다.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듯이 스쳐가는 시베리아의 찬 공기처럼 감각적인 잔상만을 남길 뿐이다. 편의점의 푸른 조끼를 입은 청년이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라는 답변처럼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간만에 만난 동창생의 뒷모습에서 낯선 이별을 경험하듯, 수족관의 물고기가 인간을 바라보듯 하지만, 수 많은 인연과 번민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 일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차라리 요약되지 않는 것이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붙잡고 터럭 같은 모든 것들을 주절거리고, 털어내고, 살을 부비고 싶은 이야기들...

한 개인의 깊은 호흡 같은 일기를 들쳐본 느낌,

야광 반바지를 입고 세계를 뛰어 다니는 시시하고 초라한 아비에게 썬글라스 씌워줄 수 있는 김애란식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편안함과 상큼함을 한 입 베어 물게 한다.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안녕하시고, 


이 책은 제가 당신에게 매우 딱딱한 얼굴로 보내는 첫 미소입니다.
언제고, 곧 다시 봅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언제고,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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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2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들 많이 보네요. 저도 보고 싶은데. 험.

라주미힌 2006-01-2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어요... ㅎㅎㅎ

stella.K 2006-01-3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군요. 책선물 받았으면 빨리 빨리 읽어서 일케 리뷰도 올리고 해야하는데 저는 게을러서 클났습니다.ㅜ.ㅜ

라주미힌 2006-01-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숙제 밀린 거 얼렁 끝내야하는뎅 ㅎㅎㅎ... yes24에서 받은것 rg에서 받은것..
욕심만 내고 흐흐...
억지로 읽으면 노동이에용 ^^; 즐기세용.. (제가 못하는거 남들한테는 권장 ㅎㅎ)
 
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김연수.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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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넣었더니 터질려고 합니다. 닫히지도 않고...

저 가방 속에 있던 녀석은 루돌프 아우크슈타인를 소개하는 '권력과 언론'
요즘 읽으면서 두껍다고 느꼈었는데
'아기'가 됐어요 ㅡ..ㅡ;

표지가 장난 아니게 멋 있습니다.
빛에 반사되는 황금빛..!!!

껍데기를 벗기면 황금빛 표지가 튀어 나옵니다.
정말 멋있음...

저 화려한 자태....
책의 제왕 같은 위용...

인쇄상태는 좋음... 종이질도 좋고..

저 갈라진 부분부터 용어해설, 각주, 인명사전 그런 것임..
800페이지 부터 시작.. 1100짜리 책이니까.. 대략 웬만한 책 한 권 만함

통섭도 '아기'가 됐어요..
책장에 꽂아두기도 좋고, 읽어도 재미있을 만한 내용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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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6-01-17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육아사이트여요. 우리 아기가 일케 커요. 이번에 새 아기들 입양했답니다. ㅎㅎㅎ 불쌍한 제 아기들은 이제 땅바닥에 누워있네요. 세워줘야지... 토닥토닥

라주미힌 2006-01-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기에 낙서는 하지 마세용.. 가끔 보면 접는 사람도 있더라구용... ㅡ..ㅡ;

라주미힌 2006-01-1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자주 갑니다!! 바람구두님 ㅎㅎ.

stella.K 2006-01-1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책장에 꽂으면 빛이 나겠군요!! 저는 평생을 가도 못 읽을 것 같은 책입당. 흐흑~

urblue 2006-01-1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줄만 그어줘요. 최대한 예쁘게. ^^;

moonnight 2006-01-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_+;; 겁나게 멋있네요. 입양하고 싶어욧 ^^;

라주미힌 2006-01-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외쳐봅니다.. '지르세요' ㅎㅎ

파란하늘처럼 2007-01-0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앤 한테 선물로 주문했는데.....일시 품절이래요....예스24도 글쿠...울 애인 책 넘 좋아해서...지금까지 선물한 책값만 해도 지난 1년간 20만원이상이래요...